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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커피49: 미니멀리즘과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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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5-04 ㅣ No.658

[사유하는 커피] (49) 미니멀리즘과 커피


군더더기 걷어내야 드러나는 본질

 

 

진리에 이르는 길에서는 어떤 원리가 작동될까? 시대마다 시대를 상징하는 정신이 있고, 진실을 은유하는 예술이 있다.

 

호모 에렉투스에게 천국은 들소들이 가득한 초원, 곧 자연 그 자체였다. 신석기인들은 흙으로 빚어 구운 토우에 자연을 담고 정신을 입혔다. 인류가 보이지 않는 것에 정성을 쏟기 시작한 시점으로 보인다. 이들에게 낙원은 현재가 아니라 풍성한 수확이 이루어질 미래가 됐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의 축복을 받은 자들만이 사후에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 찬 ‘엘리시움’에 들어갈 수 있다고 봤으며, 고대 로마인들은 부활을 믿고 미라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파라다이스는 진리가 실현되는 공간이자 시간이다. 중세 유일신의 시대, 르네상스 인문의 시대, 근대 과학혁명의 시대를 거쳐 진실에 접근하는 경로는 다채로워졌다.

 

회화만을 볼 때, 낭만주의 화가들은 보이는 것보다 자신의 내부에 떠오르는 감성을 그리려 애썼다. 이상향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알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인식에 눈을 뜬 것이다. 모네와 마네는 카이로스(kairos)를 믿었다. 진실은 크로노스(chronos)처럼 언제나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순간에 있다. 찰나적인 인상에서 이들은 안식을 찾았다.

 

20세기에 들어 본성을 찾아가는 여러 방식이 혼재돼 어느 하나가 시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없을 지경이 됐다. 마티스는 색채에서 진실을 찾으려 했고, 피카소는 형태와 시간에 진리를 담으려 했다. 상반된 견해와 표현들은 변증법적 발전을 거쳐 통합되기도 하고 다시 분화되기도 했다. 이런 논의 속에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사조를 빨아들일 기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다. 이를 추구하는 작가들은 집요하게 본질을 파고든다. 대상의 본질만 남기다 보니 예술인지 일상인지 모호할 정도이다.

 

“완벽함이란, 더 보탤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이루어진다”는 생텍쥐페리의 직관은 사고의 틀을 바꿔줬다. 진리란 지식이 차고 넘쳐야 접할 수 있는 높은 경지의 무엇이라기보다는 일상에 있지만 군더더기를 거둬내야만 볼 수 있는 그것이다. “간결한 것이 더 아름답다”는 의미로 활용되는 ‘Less is more’ 역시 본성에 집중하라는 가르침을 준다.

 

노암 촘스키는 인간의 본성을 미니멀리즘으로 풀고자 했다. 인간의 ‘언어능력’이란, 타고나는 것이지 결코 진화의 결과일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촘스키 학파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무한한 문장 표현들은 단순한 공통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 방식은 재귀적 성격(recursion)으로 설명된다고 본다. 반복과 또 그 반복들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신호와 패턴이 우리 언어와 생각을 무한대 영역으로 넓혀준다는 관점이다. 그것은 끝없이 펼쳐진 우주가 시작을 따져보면 티끌보다 훨씬 작은 몇 개의 소립자에서 시작됐고, 더 아래로 내려가면 에너지만 남는다는 견해와 궤를 같이한다. 여기서 에너지는 형태를 지니지 않는 로고스(말씀)이다. 미니멀리즘은 종국에는 이렇게 로고스로 귀결될지 모른다.

 

현실에서 미니멀리즘은 무소유 또는 금욕주의 실천 또는 과소비 자제, 환경보호 운동 등으로 실현된다. 하지만 그것은 관념적이다. 본성을 묻는 문제인 까닭이다. 커피 문화에서도 치장을 빼고 본질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이 부각되고 있다. 한 잔의 커피를 받고 무엇이 들어갔느냐보다 “어디서 온 커피냐”, “본래 무슨 맛이 나는 커피냐”를 궁금해한다. 커피에서 덜어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덜어내면, 마시는 자를 사유와 진리로 이끄는 본성만이 남는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5월 2일, 박영순(바오로, 커피비평가협회장, 「커피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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