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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 시대 미래의 대안교육 이야기6: 예수님의 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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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9-07 ㅣ No.147

포스트 코로나 시대 미래의 대안교육 이야기 (6) 예수님의 교육학

 

 

우리의 교육은 인성을 기르는 기초교육과 학생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공립형 대안교육을 교육부가 처음으로 공식화했던 1995년 나는 학교관리자 교육을 받았다. 그때 머릿속에 담았던 교육영상을 한 편 기억한다. 충격이었다. 한 젊은이가 법정에서 자기 나라의 교육을 고소하는 내용이다. 고소인인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늘의 교육을 고발합니다. ‘첫째, 교육이 학생들의 창의력과 개성을 무시한 혐의이고, 교육이 학생들을 점수로 줄을 세워 지적학대를 한 혐의입니다. 둘째는 수명이 다한 낡은 교육방법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진술 후에 이를 뒷받침할 증거를 보여준다. 오늘의 휴대폰과 150년 전의 전화기, 오늘의 자동차와 150년 전이 인력거, 그리고 차트를 넘기며 오늘의 교실 모습과 150년 전의 교실 모습을 보여주었다. 학생들은 여전히 한 방향으로 선생님을 주시하고 있다. 또 한 장의 그림은 자아 독립적인 존재로 인공지능 기기를 이용하여 정보를 검색하며 홀로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방청석은 술렁거리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그의 증거처럼 변화는 고사하고 교육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게 목적과 목표와 관계없이 무감각하게 주입식 지식섭취만을 답습하고 있었다. 고소인은 재판석을 향해 전통적 교육으로 학생들에게 행복하도록 협력하기는커녕 강제하고 간섭하고 설교를 강요함으로 그것이 책임인 양 착각하고 직무유기를 했다는 자책의 탄성이었다. 교육의 현장은 교육의 본질과 방법 면에서 과거나 현재도 변화는 감지되지 않고 있다. 물론 교육이 놀라운 대한민국을 이끈 것은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인데도 오늘도 교육현장은 옛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교 교육도 그랬지만 내가 몸담았던 교회의 주일학교 교육도 방법 면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일반상황을 따라 하기에 급급했다. 교육의 문제는 심각하다. 자살률 OECD 국가 중 1위, 우울증, 스트레스, 정신 붕괴, 불안증을 호소하며 점수 1점에 학생들은 목숨을 걸고 울고 웃는다.

 

“너희는 선생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10). 나는 사목자로, 교육자가 되기 위해서는 오르지 스승님이 단 한 분뿐, 예수님임을 학교에 구체적으로 몸담고 있으면서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회당에도 있었지만 군중 속에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입장을 살폈고, 바람이 무엇인가를 살폈다. 가엾은 마음에서, 당신의 자유로운 마음으로 다가가 참 생명으로 키워주셨다. 사제들은 사목자이며 교육자이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직분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보고 교육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과연 그러한가?

 

우리의 잣대를 그들에게 갖고 대했다. “그러면 좋은 대학 못 간다. 하위성적이면 꼴통이다.” 목자는 그들을 그렇게 대했다. 우리는 일선 학교의 교사들과 같이 똑같이 대할 일이 아니다. 나에게 오는 젊은이들에게 ‘함께하고 기다려 주고, 그들 수준으로 내려가기’로 인격을 가꿔주고 피어나 품격을 드높여 주어야 했다. 나는 학생들을 만나며 많은 반성을 하면서 지냈다. 예수님의 교육학을 제대로 응용하지 못하고 내 뜻에 맞지 않으면 그들을 일방적으로 몰아세운 것이 유일의 방법이라는데, 그 잘못이 직무유기이므로 나도 또한 나를 고소하고 피고가 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이제 ‘포스트’가 아니고 감기처럼 ‘위드’ 시대를 살아야 할 것 같다. 교회가 젊은이들의 행복을 목적으로 살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는데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 젊은이들이 끝없이 방황하고 있다. 교육은 내 자녀가 끝났다고 자신의 관심 밖으로 밀어내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내 자녀들이 결혼도 못하고 마땅한 직장도 없다. 중년으로 40대를 훌쩍 넘고 있다. 이 고민의 일이 왜 그들만의 일인가? 우리의 가톨릭 교회는 희망의 미래를 준비해 주며 살아가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창의력과 개성을 죽인 줄 세우기 교육, 인공지능시대를 사는 오늘날에도 선생님을 향해 한 방향으로 질서 지워진 교실과 학원의 모습은 더 이상 미래의 대안 교육이 결코 될 수 없다. 10%의 교육대상을 위해 90%에게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강요했는가? 사목자가 교회가 인생경영을 못하도록 방해하지는 않았는가?

 

[2021년 9월 5일 연중 제23주일 청주주보 5면, 윤병훈 베드로 신부(놀체인 양업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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