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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19: 김대건 기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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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1-09 ㅣ No.2035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19) 김대건 기억되다


당당히 천주교인임을 밝혔던 성인… 영원히 신앙인 가슴에

 

 

- 수원교구 미리내성지에 있는 경당. 성 김대건 신부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러나 그의 시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대건의 삶과 신앙을 기억하는 모든 이들이 여전히 그가 걸어온 시간, 바로 하느님을 증거하며 걸어온 시간을 따라 걷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건은 어떻게 기억돼 왔을까.

 

 

교회, 김대건을 묻다(埋)

 

신앙과 문화를 떠나 죽은 이를 땅에 묻는 것은 그 죽은 이를 기억하고자 하는 일로 이어진다. 신앙선조들도 김대건을 땅에 묻고 그 무덤을 지키며 김대건을 기억해왔다.

 

일반적으로 국사범으로 처형된 이의 유해는 사흘 후 연고자가 찾아가 장례를 치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김대건의 유해는 순교 후에도 땅에 묻힐 수 없었다. 포졸들은 김대건의 유해를 새남터 인근에 모래사장에 덮어놓고 유해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 상황에서 김대건의 유해를 모셔간다는 것은 “나도 천주교인이오”라고 말하는 셈이었고, 김대건과 마찬가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선 이가 있었다. 당시 나이 17세에 불과한 소년 이민식(빈첸시오·1828~1921)이다. 포졸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대로 김대건의 유해를 지키고 있었지만, 이민식은 끈질기게 기회를 노리다 마침내 10월 26일 감시가 느슨해진 밤을 틈타 김대건의 유해를 찾아올 수 있었다.

 

유해를 찾고 5일 후 이민식은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의 미리내 교우촌에 김대건의 유해를 묻었다. 그러나 그 과정도 쉽지만은 않았다. 김대건의 유해는 머리가 잘린 채 40일 이상 방치됐었다. 부패가 시작된 시신을 주위에 들키지 않고 70㎞가량 떨어진 거리를 이동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민식은 5일에 걸쳐 험한 산길을 밤에만 숨어 다니며 미리내까지 이동했다.

 

이민식을 비롯한 미리내 교우촌 신자들은 김대건이 묻힌 이 땅을 박해자들의 손에서 지켜냈다. 덕분에 1886년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조사 중 시복 재판 판사를 맡은 푸아넬 신부가 이 무덤을 확인했다. 1901년 5월에는 무덤을 발굴해 김대건의 유해를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제대 밑에 안치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헌장은 “전통에 따라 성교회는 성인들을 공경하고 그들의 확실한 유해와 성상도 존중한다”(111항)고 밝히고 있다. 김대건을 땅에 묻는 일이 ‘천주교인’임을 드러내는 일이었던 것처럼, 교회는 김대건의 유해를 교회에 묻음, 즉 안치함으로써 그의 삶과 신앙을 기억하며 김대건처럼 ‘천주교인’으로서 살아가고자 노력해왔다.

 

1925년 김대건이 시복되면서 김대건을 기억하고자 하는 신자들의 열망이 더욱 커졌다. 교회는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신자들이 김대건을 만나고 그의 삶과 신앙을 기억할 수 있도록 김대건의 유해를 곳곳에 분배했다. 김대건의 유해 중 두개골(전두골, 협골, 상악골)은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 하악골(아래턱뼈)은 미리내성지에, 치아는 절두산순교성지에 분리 안치했다. 또 뼈 등의 유해들은 작은 조각으로 분배돼 오늘날 수많은 성지와 본당에서 김대건의 유해를 만날 수 있다.

 

 

김대건, 교회에 묻다(問)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주교회의는 2021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맞으면서 김대건이 박해자들의 취조 때 받은 질문을 주제로 던졌다. 김대건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삶과 생명 전체를 바쳐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응답했기 때문이다. 김대건이 삶과 신앙, 그리고 순교를 통해 증언한 이 질문과 답은 김대건을 기억하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답이다.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는 담화를 통해 “순교를 기꺼이 받아들이신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우리도 이웃에게 ‘저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증거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하는 천주교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초대하신다”며 “우리도 김대건 신부님의 모범을 본받아 삶과 행동으로 자신 있게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자”고 질문의 의미를 전한 바 있다.

 

김대건의 시복 이후 한국교회는 김대건의 현양에 큰 관심을 기울여왔다. 각 교구는 김대건의 생애와 관련 있는 지역을 발굴해 성역화하고 성지순례를 통해 김대건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 1960년대부터 김대건의 묘소가 있는 미리내성지에서 해마다 교구 순교자현양대회를 여는 등 각 성지와 교구는 김대건 성인을 현양해 왔다. 마침내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주례로 김대건을 비롯한 103위 한국순교자가 시성되면서 한국교회뿐 아니라 세계교회, 또 한국사회 전반이 김대건을 기억해나갔다.

 

오늘날 우리가 김대건을 만나는 일, 김대건을 기억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김대건을 직·간접적으로 현양하는 성지와 성당은 전국에 18곳이고, 김대건을 주보로 둔 본당은 국내·외에 90여 곳이나 있다. 김대건이 누구인지를 다루는 자료는 굳이 교회가 아니어도 위인전 등에서 찾을 수 있고,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쉽게 그의 생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한다는 것은 정보의 습득에서 끝나지 않는다. 김대건을 기억한다는 것은 “당신은 천주교인이오”라는 질문에 응답한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수원교구 미리내성지 경당에 있는 성 김대건 신부 묘소.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성 김대건 바로알기」를 저술한 부산교구 김정수 신부는 “김대건 신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을 말한다”며 “우리도 그와 같이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사랑을 주위에 드러내야 한다”고 전했다.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서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천만 바란다. 잘 있거라.”(김대건의 마지막 편지 중 마지막 부분)

 

 

김대건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수원교구 미리내성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420에 소재한 미리내성지는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이 사목을 펼치던 곳이자, 순교 후 묻힌 곳이다. 또한 이곳은 신유·기해박해 당시 신자들이 숨어들어 형성된 교우촌이기도 하다. 성지에는 김대건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 김대건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빈첸시오)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21년 11월 7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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