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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미술 이야기: 천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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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7-04 ㅣ No.41

[성미술 이야기] 천국 이야기

 

 

‘천국’,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 「쾌락의 정원」 가운데 왼쪽 날개 그림. 1480~1490년, 220x195㎝, 국립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화가 보스의 천국은 아담과 하와의 거처이기도 하지만 온갖 동식물들이 평화롭게 어울리는 곳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이국적인 동식물들은 주로 성지여행을 다녀온 순례자들이 여행 중에 보고 들었던 동방의 풍광에 관한 기록들이 조금씩 신비화되고 부풀려져서 전해졌다. 가령 이집트로 피신한 성가정의 도피행로를 추적해서 이집트를 몇 차례나 답사했던 인문학자 안코나의 키리아쿠스는 여행기를 통해서 열대의 희귀종 수목과 동물들의 생김새와 습성 따위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화가들은 「이집트로 피신하는 성가정」 같은 여행 주제를 다루면서 그들이 체험하지 못한 먼 동방의 풍경을 문헌기록에서 빌려왔다.

 

 

- ‘천국의 샘’, 수아송의 생 메다르 복음서에 실림. 9세기초, 362x267㎝, 국립도서관, 파리.

 

생명의 샘은 꼭 팔각형 분수처럼 생겼다. 교회 안뜰의 분수대나 고딕교회 첨탑에서 팔각형 구조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창조에 소요된 엿새와 7일 째 안식일에 이어서 제 8일을 영혼의 안식일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또 휴식을 찾아서 샘에 모여든 사슴과 노루, 황새와 백조 그리고 암수 염소는 모두 세례 의식을 상징하는 동물들이다.

 

 

하와에게 넋이 빠진 아담

 

천국은 어떤 곳일까? 그리스 신화를 보면 죽은 사람들이 가는 지하세계에 레테 강이 감싸고 흐르는 엘리시움이란 복된 장소가 있는데, 그곳에 착한 영혼들이 모여 산다고 했다. 프랑스 파리의 중심부에 명품 가게들이 밀집한 샹젤리제 거리도 말뜻을 풀면 「엘리시움 언덕」이 된다. 그리스어 엘립스가 「희망」이라는 뜻이니까, 고대인들이 상상했던 엘리시움은 실제 현실이라기보다 미래의 희망이 투사된 장소였을 것이다.

 

또 창세기 첫머리를 펼치면 하느님이 처음 엿새 동안 세상을 지으시고 또 에덴동산을 가꾸셨다고 적혀 있다. 우주의 큰 건축을 짓는 목수 일을 마치고 나서 에덴동산의 정원사 노릇까지 마다하지 않으셨다니, 하느님도 어지간히 부지런한 성품이신 것 같다. 아담과 하와는 이곳 최초의 천국에서 태어나서 곧바로 신접살림을 꾸민다. 조금 억지스러운 생각이긴 하지만 새내기 신랑 아담이 만약 취업 이력서를 작성했어야 했더라면 출생지를 기입하는 공란에다 「천국 마을 에덴 동산 1번지」라고 적어 넣었을 것이다. 한편, 신약 성서를 펼치면 천국의 성격이 조금 달라져서 착한 사람들이 죽은 뒤에 가는 사후세계로 바뀐다. 그 사이에 인류의 머릿수가 부쩍 불어난 탓이었나본데, 요즘 식으로 말하면 『올바른 삶을 산 당신, 천국으로 떠나라!』 쯤 될 것이다.

 

초기 기독교 미술을 보면 창세기 기록을 좇아서 천국이 동산의 형태로 나타난다. 진귀하고 이색적인 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다가 차츰 숲을 이루면서 울창하게 우거지는데, 언덕 네 귀퉁이에서 샘이나 강이 흐르는가 하면, 언덕 한 쪽에 선한 목자가 양떼를 거느리고 등장하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런 천국은 농경민족이나 해양민족의 눈으로 보면 이렇다할 구석이 없지만, 유목민들한테는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아름다운 풍경일 것이다.

 

한편 중세시대의 건축장인들은 천국의 이미지를 성서의 창세기 말고 요한의 묵시록에 기록된 천상의 예루살렘 도성을 모범으로 삼았다. 고딕 시대 교회 건축들의 평면도와 입면도를 잘 살펴보면 수학과 기하학의 이성적 능력으로 그린 설계도를 바탕 삼아 수정과 감람석처럼 투명한 초월적 이상을 실현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덩달아 중세 제단화에 등장하는 최후의 심판 그림에서도 천국은 튼튼한 성벽을 가진 도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심판자 그리스도의 발치 아래 대지의 한 복판에서 대천사 미카엘이 커다란 저울을 들고 서서 죽은 자의 영혼을 이리 저리 가르면, 선한 영혼은 천국열쇠를 든 베드로의 안내를 받으면서 천국으로 향하고, 악한 영혼들은 죽음의 강을 건너서 또는 악마의 채찍을 맞으면서 지옥으로 끌려가는 장면은 제단화에서 가장 흔한 소재이다.

 

천국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파라데이소스(Paradeisos)는 원래 페르시아어 파리데자(Parideza)에서 나왔는데, 이것은 곧 「울타리를 친 정원」을 뜻했다. 처음에는 그곳에다 들짐승 따위를 사냥감으로 놓아기르는 동물원으로 썼던 모양인데, 정원 관리자가 인간에서 하느님으로 바뀌면서 방목식 사파리는 곧 천국의 이미지를 갖추기 시작한다. 사자와 양, 뱀과 토끼가 다툼없이 평화롭게 어울리는 성서 속 이상향의 풍경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1500년경에 활동했던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오랫동안 출입금지 딱지가 붙어 있던 에덴동산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서 비밀의 정원으로 안내한다. 그림 앞쪽에는 아담이 비스듬히 누워 있다. 마침 잠에서 깨어나 하느님이 그의 갈비뼈를 떼어서 지어내신 하와를 바라본다. 넋이 빠져서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 신붓감이 마음에 쏙 든 모양이다.

 

붉은 옷을 맵시 있게 걸친 하느님은 하와의 손목을 자연스럽게 잡아 이끄시는데, 이쯤 되면 중매쟁이로 나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아담 뒤쪽에 울퉁불퉁하게 생긴 열대나무 용혈수는 영생을 뜻하고 하와 뒤쪽의 토끼 두 마리는 풍요를 의미한다. 그림 허리께로 눈길을 올리면 천국의 강, 또는 생명의 샘이 흐르고, 그 복판에는 변종 선인장처럼 생긴 괴상한 식물이 솟아나서 향긋한 수액을 뿜어낸다.

 

그런데 천국의 평화로운 일상을 수놓는 다양한 수목과 동물들이 우리 눈에는 어쩐지 낯설어 보인다. 자연도감에도 실려 있지 않은 이상한 동식물들은 모두 화가 보스가 예술가의 이마에 돋아 있는 섬세한 더듬이로 포착하고 상상의 붓으로 완성한 창작물들이다. 그런데 보스는 어디에서 이런 동식물들을 공부했을까?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더불어 쏟아져 들어온 이국적인 동식물의 종들은 유럽인들을 몹시 놀라게 했다. 그 당시 브뤼셀의 가우덴베르크 대공의 영지에 조성된 동물원에는 한 달이 멀다하고 새로운 세계로부터 들어온 동식물들이 새 보금자리를 찾았고, 살아 있는 자연의 백과사전을 눈으로 체험하기 위해서 입소문을 듣고 몰려든 구경꾼들이 연일 미어졌다. 화가 보스도 구경꾼들 틈에 끼여서 대공의 동물원을 드나들었고, 진귀한 동식물을 관찰하느라 날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보스는 하느님이 뭇 짐승들을 지어내신 창조의 솜씨를 흉내내어 예술의 모태에서 잉태되고 태어난 동식물들을 미술의 정원에다 부려 놓는다. 화가의 붓이 미술의 영토에서 자연에서는 찾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천국을 지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괴상한 동식물들이 법석대는 이 「고귀한 야만」은 예술의 탈주를 꿈꾸는 화가의 단순한 공상일까, 화가의 천국에서 찾아낸 역사의 속깊은 풍경일까?

 

[가톨릭신문, 2003년 11월 23일, 노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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