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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인물과 영성 이야기21-23: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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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5-29 ㅣ No.804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21)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상)


예술과 윤리 · 구원에 대해 쉼 없이 고민한 영화감독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아마 꽤 많은 분들이 한 어린아이가 바닷가 고목 옆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영화 ‘희생’의 포스터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1994년 이 영화가 서울의 한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상영되었을 때, 당시로서는 놀랄 만큼 많은 관객들이 전혀 상업적이지 않은 이 영화를 보러와서 언론에서도 화제가 됐었죠. 이 영화의 성공은 당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유행처럼 번진 영화공부와 예술영화 보기의 정점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운’ 예술영화를 애쓰며 이해하려는 분위기는 몇 년이 지난 후 소리 없이 사라져갔던 것을 기억합니다.

 

영화가 나오고 10년쯤 지나 지각 개봉했던 ‘희생’은,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유작입니다. 지금도 이 감독의 이름을 가끔씩 만나게 되지만, 그의 영화를 애써 보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고, 그의 비타협적인 예술성과 윤리성은 이제는 경외심과 존경심의 대상만이 아니라, 이해 못할 지루함과 난해함, 시대착오로 받아들여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들이 지닌 가치는 영화를 통해 던지는 질문들의 진지함과 깊이, 그 자신이 한편의 영화를 창작하고 제작하는 동안 들인 헌신들과 함께 바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예술과 윤리와 구원에 대해 평생 깊이 생각하고 고민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선·미를 추구하는 가운데 점점 초월을 향한 갈망과 예감이 두드러졌던 그의 영화 세계를 우리는 과장 없이 ‘인간존재의 영적 탐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과 대답의 모색은 비록 그의 영화를 잘 모른다 하더라도 참된 영성을 찾고 살아보자고 하는 이라면 한 번쯤 귀 기울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세 번에 걸쳐 그의 영화와 글에서 길어낼 수 있는 영성적 메시지를 음미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

 

 

「봉인된 시간」 속에서 만나는 윤리, 예술 그리고 삶

 

1932년 4월 4일 러시아 북동부의 자브라체에서 유명한 시인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86년 12월 29일 망명 중 아까운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반의 어린시절(1962)’,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 ‘솔라리스(1972)’, ‘거울(1975)’, ‘안내인(스토커)(1979)’, ‘향수(1983)’, ‘희생(1986)’이라는 단 일곱 편의 작품만을 남겼지만 그 모두가 그의 예술가로서의 탁월함, 사상가로서의 투철함, 한 인간으로서의 진실성을 잘 반영하며 각고의 노력과 절실함으로 인간의 영적인 차원을 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다행히도 영화만이 아니라 글을 통해서도 자신의 예술적이고 영적인 투쟁과 여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망하기 얼마 전 출간되었던 일종의 영화론 선집이라고 할 수 있는 「봉인된 시간」에서 그의 예술과 윤리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김창우 옮김, 분도출판사, 1991)

 

그는 영화가 시학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데 이는 영화예술이 진실된 삶의 윤리를 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시란 문학의 한 장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란 내겐 하나의 세계관이며 현실과 맺는 관계의 하나의 특수한 형식이다. 이렇게 볼 때 시란 인간을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동반하는 하나의 철학이 될 것이다.

 

… 이런 예술가야말로 존재의 정서적 구조의 특별성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직선적인 논리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으며, 섬세한 모습의 특수한 본질과 삶의 비밀스런 현상, 삶의 복합성과 진실을 작품 속에 담아낼 수 있다.(26, 27쪽)”

 

한편, 그의 예술관을 보면 낭만주의와 독일 관념론을 통해 완성된 이상주의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이러한 관점을 그저 하나의 사상으로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체험하고 살아온 진실된 경험과 부합하기에 각고의 숙고와 결단을 통해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세계관과 윤리적 그리고 이념적 목표인 것이다. 훌륭한 걸작 예술품은 윤리적 이상을 표현하려는 노력 속에서 탄생한다. 윤리적 이상은 예술가의 상상력과 느낌을 좌우한다. 예술가가 삶에 애정을 가진다면 그는 이 삶을 인식하고, 변화시키고, 삶을 개선시키는 일에 일익을 담당해야 할 절대적 필요성 또한 감지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만일 한 예술가가 삶을 더욱 보람차게 만드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면 현실이 묘사되는 과정에서 그 예술가의 주관적인 표상과 그의 영적인 상태를 통해 현실이 여과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항상 인간 완성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정신적 노고의 결과인 것이며, 사물에 대한 느낌과 생각의 조화로, 그 품위로 그리고 그 단순간결성으로 우리들을 사로잡는 세계관의 표현인 것이다.(33쪽)”

 

그의 영화론은 무엇보다도 예술가의 사명에 대한 깊은 인식과 문제의식에서 자라난 ‘책임의 윤리’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예술은 소비사회의 상품처럼 자기 자신을 대해서는 안되며 삶과 인간 존재를 해명하는 노력, 삶의 근본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려는 노력을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는 예술은 ‘절대진리’의 인식을 위한 추구이자 실천이어야 한다고 엄숙히 선언합니다.

 

“예술과 학문이란 그러니까 인간이 세계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형식인 것이며, 소위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는 인간의 인식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의 아름다운 것, 추한 것, 인간적인 것, 잔인한 것, 무한한 것, 제한된 것, 이 모든 것들을 예술가는 독특한 방법으로 절대적인 것을 포착하는 한 형상의 창조 속에서 재현하는 것이다.(46쪽)”

 

그는 근대 이후 예술의 상업화와 자기 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보며 다음과 같이 우리 시대에 잊혀진 진정한 예술가의 전형을 떠올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현대 예술가의 오만불손함을 한 번쯤 샤르트르(Chartres) 대성당을 지은 이름 없는 건축가의 겸손함과 비교해야만 할 것이다! 예술가는 사심없는 임무 수행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을 우리 모두는 오래전에 이미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240쪽)”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29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22)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중)

 

모순된 현실 속에서 영적 가치 찾는 ‘좋은 영화’

 

 

- 영화 ‘잠입자’의 한 장면.

 

 

영화와 영성

 

우리나라에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타르코프스키가 망명시절에 타계하기 전 감독한 마지막 두 작품 ‘희생’과 ‘향수’가 1990년대 중반에 뒤늦게 개봉되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좋은 영화를 목말라하던 이들이 탁월하게 미적이면서도 영적이며 윤리적인 깊이를 지니고 있는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발견하고 많은 감동과 배움을 얻을 수 있게 된 데에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설립한 ‘성 베네딕도 미디어’의 기여가 컸습니다. 성 베네딕도 미디어는 상업적 고려 대신에 사명감을 가지고, 당시 주된 영상물의 수용매체였던 비디오로 타르코프스키의 러시아 시절 대표작 ‘안드레이 루블료프’와 ‘잠입자(스토커)’를 출시하였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분도출판사를 통해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과 문화 사목에 귀중한 기여를 한 임인덕 신부(독일명 : 세바스티안 로틀러, 2013년 선종)의 열정과 노력이었습니다. 임인덕 신부가 판권과 번역, 기술적, 경제적 문제 등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는 난해하다 할 수 있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한국에 소개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은 그의 영화가 지닌 영적, 도덕적, 예술적 가치를 확신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임인덕 신부는 2005년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의 감사패 수상 소감에서 좋은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이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에 딱 들어맞는다 하겠습니다.

 

“묵상, 그리스도교 교육, 사목에 대한 비디오 다큐멘터리 필름을 만들고 연대감, 자유, 인권, 평화의 가치관을 정립시켜 줄 극영화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제작하는 것이 저의 소임입니다… 종교적 체험을 목적으로 제가 선정하는 비디오 영화에는 대중성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작가주의 영화’이고 탁월한 예술성과 의미심장한 내용을 지닌 작품들입니다. 종교영화가 아니더라도 좋은 영화는 인간의 품위, 삶과 죽음, 구원, 올바른 가치관, 양심, 평화, 인권 등의 메시지와 영성을 충분히 발견하게 해 준다고 저는 믿습니다. 좋은 영화는 눈에 보이는 것 뒤에 감춰진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 매력적입니다. 최상의 영화는 그저 암시만 줄 뿐 정곡을 찌르되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작가주의 영화와 예술영화는 굳이 신앙이라든지 신을 주제로 삼지 않고도 종교적 체험에 가치 있는 기여를 하는 것입니다.”(권은정, 「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 - 임인덕 신부이야기」, 분도출판사, 2012)

 

뛰어난 문화적 감식안과 복음적 열정으로 평생을 문화 복음화에 헌신했던 한 수도자가 가장 높이 평가한 영적이고 종교적인 영화들이 직접적으로 성서의 인물들이나 성인들을 다룬 것이 아니라, 매우 인내롭게 해석해야 하는 상징이나 집요한 윤리적 고뇌, 숨김없는 종교적 회의와 신앙적 위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 영화들이 진지하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현대인의 정신적 위기를 직시하고 대결하며 형상화하는 노력은 사실 우리의 영성을 매우 깊은 차원에서부터 단련시키고 정화시키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영성의 문으로서의 정신적 위기

 

사실 100년이 넘은 영화 역사에서 불과 몇 안되는 ‘영화 작가’들만이 진정한 영적이며 초월적인 영화미학의 모범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상적이고 수사학적인 방식으로 종교적인 이야기나 상징을 자신의 영화에 사용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대신, 매우 실존적이며 예술적인 방식으로 정신적 위기에 직면한 인간이 겪는 내면의 풍경을 그려내고 그러한 고뇌하는 인간상이 초월의 세계를 표징과 침묵을 통해 만나는 접점의 순간을 형상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적으로 포착된 순간은 보는 이에게 흘러가는 시간과 질적으로 다른 ‘때’, 곧 성서적 의미의 ‘카이로스’를 지각하는 드문 경험을 하게 합니다. ‘때’를 아는 것은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실현된 종말론’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는 윤리적 결단을 매개로 하여 계시와 초월의 세계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곳에서 대면하고 답하도록 스스로를 몰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정신적이고 예술적인 목표에 매우 가깝게 다가갔다고 보이는 대표적인 인물들이 덴마크의 영화감독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1889~1968), 프랑스의 영화감독 로베르 브레송(1901~1999), 스웨덴의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1918~2007)입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이름 역시 이 특별한 계보에 놓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 타르코프스키는 여러 차례 얼마나 베리만과 브레송의 영화들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는지를 밝히면서도, 자신이 보다 근본적으로는 정신적 위기가 지닌 종교적, 영적차원의 의미에 대해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통찰했던 러시아의 대작가 도스토옙스키가 확립한 ‘전통’에 속해 있음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는 ‘정신적 위기’를 외면하는 대신 오히려 이와 대결하고, 거기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용기를 지닌 예술만이 인간의 깊은 영적 차원을 드러내고, 정신적 위기에서 회복되는 길을 보여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내게 특별히 아주 의미깊었던 것은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러시아 문화 전통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 이 전통은 오늘날의 러시아에서 그렇게 찬란하게 꽃피워지지는 않았다. 아니 그보다도 이 전통은 오히려 경시당하거나 심지어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전통이 원칙적으로 유물론과 통합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높은 평가가 주춤하고 있는 또 다른 원인은 이 작가가 쓴 작품의 주인공들, 아니 이 작가의 모든 작품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후계자에게도 해당되는 특징인, ‘정신적 위기’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러시아에서 왜 사람들은 이 ‘정신적 위기’라는 상태를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인가?

 

‘정신적 위기’란 내게는 항상 건강하다는 표시일 뿐이다. 왜냐하면 나의 견해로는 ‘정신적 위기’란 자아를 발견하고 하나의 새로운 믿음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문제를 스스로에게 제기하는 사람은 누구나 정신적 위기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삶이란 부조화에 가득 차 있는 반면 인간의 영혼은 궁극적으로 조화를 갈망한다. 이러한 모순 속에 인간이 꿈틀거리게 되는 자극을 받게 되고, 또한 동시에 인간의 고통과 희망의 원천이 있는 것이다. 

 

이 모순이야말로 인간의 정신적 심오함과 영적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이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분도출판사, 244~245쪽)”

 

이제 ‘정신적 위기’를 영성의 문으로 삼는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적 이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인 ‘잠입자(스토커)’와 ‘희생’을 살펴보려 합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6월 5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23)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하)

 

‘믿음과 희망, 사랑으로 삶의 피폐함 극복’ 확신

 

 

- 영화 ‘희생’의 한 장면.

 

 

양심의 시험과 단련을 통한 영성의 길

 

1978년에 제작된 영화 ‘잠입자’(‘안내자’로도 번역되며 원제는 ‘스토커’)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러시아에서 찍었던 마지막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 타르코프스키의 메시지와 영화 미학이 당시 공산주의 정권이 요구한 공식적 지침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집니다. 이 영화 이후 그에게 가해진 압력과 공격은 그로 하여금 결국 서방으로의 고뇌 어린 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그가 망명 후 실감하게 되는 서구 자본주의 세계에 만연한 이기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생활방식에 대한 깊은 절망감을 미리 예감하게 합니다. 그가 이전에 만든 영화 ‘솔라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SF 소설을 이야기의 기본 구조로 삼으면서도 장르의 문법을 따라가는 대신, 인간 정신의 위기와 양심의 시험에 대한 지극히 진지한 성찰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탁월한 연출과 시적 영상을 통해 제시되는 묵시록적인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 ‘잠입자’는 그를 찾아온 작가, 과학자와 함께 숨은 소망이 실현된다는 ‘금지 구역’ 또는 ‘비밀 구역’을 목숨 걸고 찾아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금지 구역’ 앞에서 그들은 자신의 ‘죄’와 일체의 보호막 없이 대면하게 되고 가장 깊은 양심의 부름에 직면합니다. 이는 전율할 정신적 위기이지만, 감독은 이야말로 유일하게 현대인들이 정신적 재생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하는 듯 보입니다.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저서 「봉인된 시간」에서 “자신이 이 작품에서 다름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란 무엇인가를 시적언어로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하며 영화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도중에 많은 것을 경험하고 스스로에 대해 많이 숙고한 연후에 그들의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감행한 여행의 목적지인 그 방의 문턱을 실제로 넘을 것인가를 더 이상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그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내적, 도덕적 상태가 결국 비극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정신력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정신력은 다만 시선을 자기 자신의 내부로 던지는 데까지밖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본 자신들의 모습에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에 대한 탁월한 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인공이 여전히 절망의 순간에 사로잡혀 있고, 신념의 회의를 겪고 있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상실한 이들에 대한 봉사라는 자신의 소명을 거듭 발견하는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로써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에서 현대인들이 빠져 있는 윤리적 무력함을 냉정하게 직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무력함에서 벗어나올 수 있는 길을 간절하게 모색합니다. 그는 그 길이 어디서 시작되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구역은 인간이 헤쳐 나가야 하는 삶이며, 인간은 그 과정에서 파멸하든지 아니면 견뎌내든지 할 뿐이다. 그리고 한 인간이 이 과정을 견뎌내는가 마는가 하는 것은 오로지 그 인간이 스스로를 가치 있는 인간으로 존중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으며, 부차적인 것들로부터 본질적인 것을 구별해 낼 수 있는 그 인간의 능력에 좌우된다.”

 

그러기에 타르코프스키에게 참된 예술이란 이러한 정신적 위기를 정직하게 그려내고 그로부터 각 개인이 양심의 부름에 대해 고뇌하고 응답하여 이기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 자유로운 책임 있는 결단의 삶을 선택하도록 자극과 영감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로서는 인간의 유일하게 진실로 중요한 과제는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의식을 복구시키는 일이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영혼을 다시 찾아야만 하고, 그 영혼의 고통을 느껴야만 하며,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양심과 조화시키는 시도를 해야만 한다… 자신의 영혼에 대한 고통은 사물의 참된 모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며, 스스로의 죄의식과 책임감을 자극시킨다. 이처럼 인간이 스스로의 책임에 눈을 돌리게 되면, 세상은 어차피 남들의 타락한 의지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자신은 세상 돌아가는 것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태만과 게으름을 더 이상 정당화시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세계의 조화를 재생시키는 일은 개인적인 책임감을 복구시키는 것에 달려 있다고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인간의 윤리적 무력함 형상화 시도

 

우리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저술에서 만나는 이러한 윤리적 태도는 사실 여러 면에서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철학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잠입자’에서 인간의 선의지와 도덕률의 초월성이라는 칸트적 윤리학의 차원과는 다르게 영성적 관점에서 인간의 윤리적 무력함의 근원을 형상화하려 시도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를 우리는 「봉인된 시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진술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나는 우리 인간들 모두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특별히 인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에 관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숙고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손안에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원하고 본질적인 것을 언제나 무시하여 왔다. 인간은 영원하고 본질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기만적인 우상을 쫓아간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인간 삶의 밑바닥을 이루는 예의 매우 평범한 기본적 부분, 즉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같은 사랑과 몰아적 헌신이야말로 현대의 불신과 냉소주의 그리고 공허함에 대치될 수 있는 마지막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작품 ‘잠입자’에서 인간의 사랑이야말로 절망적인 인간 세계에 관한 모든 삭막한 이론화에 대하여 성공적인 반기를 들 수 있는 예의 기적이라는 것을 나는 명백하고도 수미일관되게 말한 바 있다. 다만 우리들은 사랑 역시 잊은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망명한 후, 암이라는 병마와 싸우면서 스웨덴에서 그의 유작이 된 그 유명한 작품 ‘희생’을 기어이 완성합니다. 그의 죽음이 확실시되자 비로소 당시 소비에트 정권 허락 하에 출국허가를 얻어 타르코프스키 부부의 품으로 올 수 있었던 어린 아들에게 바쳐진 이 영화는 타르코프스키가 인류에게 남긴 믿음과 희망에 대한 감동적인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서 인류의 정신적인 위기, 삶의 피폐함이 극복될 수 있다고 확신한 그의 예술은 참된 영성의 길을 찾는 신앙인에게도 많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6월 12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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