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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김윤덕 아가다 막달레나 - 배교로 배운 또 하나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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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9 ㅣ No.487

대구순교자 23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10) 배교로 배운 또 하나의 은총 - 김윤덕 아가다 막달레나(1766~1815)

 

 

의리의 사회와 은총의 사회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묻는다. “정약용은 배교했는데도 신자입니까?” “이승훈은 천당갔습니까?” 어떤 이들이 천당에 가고 지옥에 갔거나 가게 될지를 우리는 모른다. 그렇지만 만약 그 질문이 배교했던 사실 때문에 나온 것이라면 그에 대하여는 답변할 수 있다. “그들은 배교한 바 있었지만, 그 배교보다 더 큰 자기 반성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받아주셨을겝니다.”

 

한국인에게 용서한다는 일은 매우 어려운 경험이다. 우리는 의리를 중시하는 사회이다. 그래서 관계를 살피며 산다. 그런데 관계란 일순간에 쌓아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시간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온갖 감정과 추억에서 연유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과거 시간들을 위주로 판단되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에게는 과거의 즐거운 일, 잘못한 행위 등이 예민하게 기억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이해하기 힘든 단어 중에 하나가 은총이라고 할 것이다. 은총은 값없이, 대가없이 주어진 은혜, 즉 사랑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현재를 위주로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의사가 매우 중요한 결정요건이 된다. 은총은 우리가 잘못했을 때나 잘했을 때나 똑같이 내린다. 하느님은 우리가 잘못했을 때라고 은총을 거두어 가시지는 않는다. 우리가 잘못한 순간, 우리는 그 은총을 잊어버리고 있을 뿐이다.

 

남의 선생된 자로서 자라는 젊은이들인 학생과의 사이에서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하는 원칙은 바로 그 학생을 현재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과거 학생의 잘못은 잊어주어야만 한다. 우리는 입으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 그 사건이나 행위를 다시 언급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용서를 빌고 나서 두 번, 세 번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학생에게 그것이 처음인 것같이 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론적으로는 앞의 일들은 이미 용서되었기 때문에 사라진 일인데도 그 사라짐이 완벽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 우리 사회에서 내가 용서를 빌면 상대방이 그 잘못을 잊어준다고 확신하기란 더욱 어렵다. 그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용서를 빌고 관계의 회복을 청하기는 정말 어려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간혹 자신이 잘못한 줄을 뻔히 알면서도, 이를 표명하기보다는 스스로를 변호하는 이론을 찾아내기에 급급해진다.

 

그런데 박해시대 우리 순교자들은 용서를 정확히 알았다. 경상감사는 그들을 십계명 정도밖에 외지 못하는 무지렁이들이라고 조정에 보고했다. 그런데 그들은 배교를 하고도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느냐 하는 고급스런 질문들을 하지 않았다. 은총이 무엇이냐고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을 들은 대로 믿고 그렇게 생활했다. 비록 들은 바가 적었기 때문에 잘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그 자체를 신앙으로 살아냈다.

 

 

아가다 막달레나의 신앙

 

김윤덕 아가다 막달레나는 경상도 상주 고을에서 출생했다. 경주에서 옥사한 박 바울로는 그의 조카이다. 김윤덕 아가다 막달레나는 입교 후에 노래산 교우촌으로 피난하여 살았다. 당시는 세시풍속 자체가 음양오행 사상과 여러 속된 믿음에 연유하여 치루어지던 사회였다. 천주교 신자들은 오롯이 천주님 뜻으로만 살기 위해 교우촌을 형성했다. 그들은 같이 농사짓고, 수확을 나누었다. 동네 사람이 모두 함께 미사예절을 바치고, 복음을 묵상했다. 그들은 언젠가는 이 땅에도 신부님이 다시 오시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하나라도 더 깨우치기 위해 자신들끼리 협조해 나갔다. 김 아가다 막달레나는 이처럼 일하다가 밭에서 삼종기도를 바칠 수 있는 마을에서 살았다. 그의 신앙은 이 초대교회 공동체 생활 속에서 다져졌다.

 

김 아가다 막달레나는 1815년 부활대축일에 들이닥친 청송 고을 형방아전들에게 마을 사람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그는 경주를 거쳐 경상감영으로 이송될 때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모진 문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수호했다고 전해진다. 모진 고문을 감수하는 외골수 여인네를 보고 관장은 말하기도 했다.

 

“무식하기도 하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죽으려 하느냐?”

 

아가다 막달레나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비천하고 무식하다 하더라도, 조물주 천주의 은혜를 몰라보고 그 분을 배반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한 고통의 감내와 신앙 증거의 대가로 그는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신문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천주를 섬겨야 하는 사람의 도리를 알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있는 힘을 다 쏟았다. 이때 여러 사람이 배교하고, 단지 4명만이 대구로 이송되었는데, 그는 고성대, 고성운, 구성열과 함께 대구로 왔다. 다블뤼 주교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섬기는 것을 보고 위로받았다고 기록한 바 있다.

 

 

치명을 권면하는 박해시대 신앙

 

그러나 며칠 후, 관가의 신문은 아가다의 육체적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드디어 아가다 막달레나는 신체적 고통을 이기지 못해 배교를 선언했다. 그가 수족에 감긴 밧줄을 풀고 옷깃을 여미며 감영문을 나서는 중이었다. 마침 그때 안동 우련밭에서 체포되어, 온갖 신문을 겪고 대구로 이송된 김종한 안드레아가 감영문에 들어서고 있었다. 김종한은 김윤덕 아가다를 보고 직감적으로, ‘배교하고 나오는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는 호송하는 나졸들이 옆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리쳤다.

 

“여보세요, 부인이 웬일이요?”

 

“더 이상은 매를 못견디겠어서요.”

 

아까는 몸이 아팠는데, 지금은 가슴이 아픈 아가다 막달레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얼마나 모질게 맞았던가? 더 맞을 수 있을까? 아니 어차피, 이젠 죄지은 몸이 아닌가? 아가다는 스스로에게 변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김종한은 소리쳤다.

 

“여보시오, 부인!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고 무엇을 위해 더 살려고 하시오? 주를 위해 죽기 거부하고 나간들 몇 해나 더 살겠소?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 하더라도 오늘밤에 죽을는지 내일 죽을는지 어떻게 알겠소? 생명의 임자이신 천주를 배반하고 어디로 가서 누구의 힘으로 더 살기를 바란단 말이오?”

 

아가다 막달레나는 이 말에 갑자기 힘이 솟았다. 아가다가 용기를 낼 수 있게 한 것은 물론 김종한이 던진 논리적인 질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이 저지르기는 했지만, 배교로 인해 혼자 하릴없이 감영 문에서 내몰리고 있는 그였다. 이때 교우쪽에서 한마디 말을 붙여준 것, 바로 그것이 아가다로 하여금 스스로의 변명에서 깨어나게 했을 것이다. 아가다의 평소 굳세었던 신덕이 한꺼번에 되돌아 왔다.

 

김윤덕 아가다는 깜빡 잠에 취했다가 튀어 일어난 사람처럼 대답했다.

 

“예 지당한 말씀입지요. 어르신네 말씀 구구절절이 저의 양심을 찌릅니다. 잠깐 잘못 생각하고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뻔했습니다. 어르신네를 따라 저도 치명하겠습니다.”

 

그는 김종한 일행의 뒤를 따라 다시 감영으로 들어갔다. 이 두 사람은 천주님을 위해 치명하는 것을 당연지사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감영으로 다시 들어가면 살아나올 희망이 없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성의를 다하여 순교를 권면했다. 더욱이 이들은 가서 잘못했다고 빌면 천주께 기워 갚는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배교 후에 강해진 신앙

 

아가다 막달레나에게 내리는 이번 형벌은 더욱 심했다. 좀 전에 그 형벌이 무서워 나가기를 원했던 아가다는 더욱 심한 벌을 감수해야 했다. 아가다가 감영으로 들어서자, 좀 전에 매질하던 형졸은 놀라서, 그를 미친 여인으로 취급하고 밀어내었다. 이제 기회를 잃어서는 안되었다. 아가다 막달레나는 마치 어미젖에서 억지로 떨어지는 아기처럼 관장 앞으로 달려가겠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포졸의 손아귀에 떠밀려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포졸들이 새로 호송해 온 김종한 안드레아 일행을 다루고 있는 틈을 타서 아가다는 감사 앞으로 달려나갔다.

 

무슨 소란인가, 의아해 하던 감사는 조금 전에 온갖 수단을 다 써서 내보냈던 여인이 돌아온 것을 알았다. 그는 물었다.

 

“내가 너를 특별히 생각해서 내보내 주었는데 왜 또 왔느냐?”

 

아가다 막달레나는 흐느낌 속에 내뱉었다.

 

“나으리, 제가 아까는 약한 마음에 형벌이 무서워서 우리 천주님을 배반했습니다만, 배교한 죄를 백번 원통히 여겨 다시 여기 들어왔사오니 법대로 처분해 주십시오. 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신실한 신자입니다.”

 

감사는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백성을 한 명이라도 살려보고자 했던 그는 다시 그를 타일렀다.

 

“나가라. 내가 너를 특별히 생각해서 내보낸 것이니 나가서 정신을 바로 차려 잘 살아라.” 관장은 형졸에게 명했고, 형졸들은 달려들어 그를 억지로 끌어내려고 했다. 아가다 막달레나는 몸부림을 치며 소리질렀다.

 

“나으리, 제발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저는 바른 정신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성교를 절대로 배반 못합니다. 죽어도 못합니다.”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촌아낙네를 보며, 자기편의 호의가 거절되었다고 생각한 관장은 호령했다.

 

“저 계집의 수족을 단단히 묶어 사정없이 쳐라! 죽기가 원이라니 그 원이 풀리도록 사정없이 쳐라.”

 

김윤덕 아가다 막달레나는 먼젓번보다 훨씬 더 심하게 맞았다. 형졸들은 형구를 갖추고 여인의 수족을 형틀에 꽁꽁 잡아매고 사정없이 매질을 했다. 살점이 너덜너덜 떨어지고 전신이 피로 범벅이 되었다. 그리고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도 육체적 고통이 두려웠던 아가다는 배교 후 이 모든 것을 강하게 견디어 냈다.

 

다시 옥에 갇힌 아가다 막달레나는 밤이 되어 눈을 떴다. 그는 몽롱한 정신에 “예수 마리아”만 뇌었다. 잘 보속하고 있습니까를 여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 날 밤중으로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켜 드렸다. 50여세를 일기로 주님께 돌아갔다. 잠시동안의 배교와 그를 뉘우친 화해를 통해 치명을 감당할 육체적 힘까지 얻은 것이다.

 

 

옥사로 증거한 신앙

 

박해시대 순교자들은 참수치명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래서 옥에서 세월을 질질 끌면서 그렇게 자기 목숨이 끝나 버릴까봐 안타까워 하며, 순교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치명이 일순간에 완성된 순교라고 한다면 옥사는 매순간마다를 다져야 하는 지속적인 신앙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다블뤼 주교 및 한국교회사가들은 옥사를 아름다운 순교로 여겨왔다. 힘이 다하여 스러져 가기까지 신앙을 증거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대열에 김 아가다 막달레나는 참여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선포이며 체험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사랑하는 데는 지향하는 목표와 의지가 맞아서 서로 격려하면서 체험하는 힘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특수한 목적보다는 살면서 부대끼는 장면 장면을 해결하면서 타인을 인정하고 자신을 인정받으며 힘을 깨닫고 얻는 편이 더 많을 것이다. 그리하여 용서를 빌고, 또 그것이 용서됨을 믿는 일이 사랑의 전제 조건일 것이다. 자신의 체력의 한계로 저지른 배교를 더 큰 육체적 고통을 견뎌냄으로 기워 갚은 김윤덕 아가다 막달레나의 생은 사랑에 대한 내용을 드러내는 울림이리라.

 

[월간빛, 2002년 9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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