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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박사의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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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9 ㅣ No.489

대구순교자 23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12)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1791∼1839. 5. 26 일명 : 박사심, 48세로 순교)

 

 

조선후기의 천주교 박해 때에 우리의 신앙 선조들 중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孝道)와 천주께 대한 신앙(信仰) 사이에서 고뇌하신 분들이 많았다. 초기 교회의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였던 이승훈(베드로)과 이벽(세례자요한)은 그 대표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배교하라.’는 어버이의 불호령과 ‘천주를 향한 열정’사이에서 고뇌와 번민을 거듭하던 이들은 당시의 위정자들로부터 천주교가 ‘아비도 임금도 몰라보는 사악한 가르침’으로 비난당하던 근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박해시대 천주교 신앙은 한 가정에서 여러 대를 거치면서 계승되어 내려오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성 정하상(바오로) 회장은 선대부터 이어져 온 천주교 신앙의 유산을 계승하여 순교성인이 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런 경우에는 천주께 향한 신심(信心)이 부모께 순종하는 효심(孝心)과 그대로 일치하게 되므로, 순교(殉敎) 그 자체는 가장 뛰어난 신앙의 증거이자 효성(孝誠)의 표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1827년 천주 신앙으로 인하여 체포, 투옥되어 13년간이란 기나긴 옥살이를 거쳐 1839년 대구 감영의 관덕정에서 순교하신 박사의(안드레아)도 바로 이러한 대물림 신앙의 혜택을 입은 행운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을 박해하던 사람들에게 ‘천주교야말로 철저한 충효(忠孝)의 도리(道理)로 조선왕조의 유교적 사회질서에 부합된다.’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보유론(補儒論)적 선교방법을 몸소 실천한 대표적인 신앙인으로 생각된다.

 

박사의 안드레아의 부친 박보록(일명 경화) 바오로는 1792년경 자신의 고장인 충청도 홍주에서 천주교 신앙에 입문하여 1794년에는 박해로 인해 잠시 배교하였으나, 곧바로 배교를 뉘우치고 더욱 신앙에 정진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데 방해되는 고향을 떠나 산중으로 들어갔다. 그는 피난처에서 주위 사람들을 권면하는 한편, 자식들에게 신앙을 교육하는 데에도 힘을 써서 자녀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천주교의 여러 계명들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지도하였으며, 스스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천주교 수덕생활(修德生活)의 좋은 습성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박사의 안드레아는 이같은 부친의 신앙적 모범을 온전히 계승하였다. 아버지의 음식을 정성으로 대접하였고, 출타해서는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밤길을 재촉하여 귀가하는 등 당시 사회의 효자가 그의 부모에게 바치던 모든 정성을 다 바쳤다. 또한 그는 평소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떠돌이 교우들을 거두어 줄 수 있는 방을 늘렸으면 하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평소와 같이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외출할 때마다 들보나 서까래와 같은 건축 재료를 틈틈이 모아서 집을 지었고, 이 집에 모여든 신자들을 대접하는 데 정성을 다하여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어려움을 느낄 때가 많았다. 이러한 그의 선행에 감동한 신자들이 혹시라도 그에게 약간의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라도 하면, 그는 으레 더욱더 가난한 이들에게 그 돈을 애긍하였다.

 

1827년 전라도에서부터 정해박해(丁亥迫害)가 일어나자 박사의 안드레아는 부친을 모시고 9년 동안 살던 충청도 단양 산골의 가마기를 떠나 경상도 상주 고을의 멍애목으로 이사하였다. 그러나 이사한 지 불과 몇 주일 후 예수승천대축일 미사를 드리고 있던 중 밀고자를 선두로 한 박해자의 무리가 들이닥쳐 그들 일행을 체포하여 상주 진영을 거쳐 대구 감영으로 이송하였다. 여러 차례의 모진 고문 중에서도 결코 신앙을 포기하지 아니하자 마침내 감사는 박사의 안드레아 부자의 사형을 국왕에게 건의하였고, 음력으로 6월 7일과 16일에 각각 국왕의 허락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즉시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다. 당시 조선왕조의 관행상 정치적 반역행위 또는 중대한 강상범죄 등의 이른바 ‘십악(十惡)’에 속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으레 ‘사형수는 세 번씩 임금의 판결을 받아야 한다.(死囚三覆啓)’든가 농번기를 피하고 ‘가을에서 겨울 사이의 적당한 때를 기다려서 사형을 집행한다.’는 규칙에 따라 사형수의 형 집행은 최종 사형판결 후에도 대략 1∼2년이 더 지난 후에야 실시되곤 하였는데, 1815년 을해박해 때부터 천주교인들에게도 이미 이러한 전례가 있었다.

 

그리하여 박보록 바오로, 박사의 안드레아를 비롯한 6명의 사형수들은 경상 감영의 감옥에 갇혀서 사형의 집행을 기다리게 되었는데, 박사의 안드레아는 관장에게 호소하여 체포·투옥·심문 등 모든 과정에서 아버지와 함께 행동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아버지가 고문을 받고 힘겨워 하면 아들이 아버지를 부축하였고, 자신도 함께 고문받아 온몸이 지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목에 채워진 큰 칼(枷)을 들어 올려서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고통을 들어드리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박보록 바오로는 고령에다 수 차례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살이 4개월만인 9월 27일에 7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죽음에 임박한 박 바오로는 아들 박사의 안드레아를 불러놓고 이 감옥을 복락소(福樂所)로 생각하여, 밖에 있는 부모, 형제들의 분별없는 사랑에 약해지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아버지의 이 유언을 마음 깊이 새긴 박사의 안드레아는 그로부터 온전히 신앙을 위하여 순교할 각오를 더욱 굳게 다지면서, 13년이란 길고 긴 세월 동안 고난의 옥살이를 기쁘게 감내했다. 원래 조선왕조의 감옥은 오늘날의 교도소와 달리, 미결수(未決囚)가 재판을 위해 대기하거나, 이미 사형을 판결받은 이(死刑囚)가 그 집행을 기다리면서 임시로 머무는 장소에 불과하였으므로, 죄인을 수년씩 장기간 수용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흙과 나무로 대충 얽어 만든 담벽은 비바람을 막지 못하여 수감된 죄수가 동사(凍死)하는 경우도 있었고, 여름의 열기와 불결한 환경에서 파생되는 온갖 전염병으로 병사(病死)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원칙적으로 가난한 죄수들을 위하여 옷과 양식을 관가에서 지급하도록 하였지만 이러한 원칙은 사실상 지켜지지 않아서 대부분의 경우 죄수들이 스스로 마련해야만 했다.

 

감옥의 이러한 열악한 상황을 익히 알고 있던 국가에서는 거의 해마다 서울과 지방의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인정(仁政)을 베푼다는 명목으로 석방하였는데, 천주교 신자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사형 판결을 받은 이들에게는 이러한 관례가 적용되지 않았다. 이처럼 열악한 감옥 사정에도 불구하고 사형판결을 받은 후 13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버티면서 신앙을 지켜나간 천주교 신자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거의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박사의 안드레아는 같은 처지에 있던 김사건 안드레아, 이존행 안드레아 등과 함께 옥중에서 짚신을 삼아 가끔씩 옥을 방문하던 친척들을 통하여 시장에 내다 팔아서 음식을 마련했고, 신앙생활에도 더욱 정진하여 자주 성서를 봉독하고 묵상하였으며, 밤마다 등불을 밝혀놓고 공동기도를 합송하여 외로움과 두려움 때문에 오는 배교의 유혹을 뿌리쳤다.

 

또한 모범적인 수감생활로 간혹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형리와 간수들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해 주었기에 그들의 소문은 차차 감옥 주위의 비신자들에게 전파되어 나갔다.

 

한편 장기간에 걸친 옥바라지를 위해서 그들의 일가 친척이 하나 둘씩 대구 주위의 영천, 청도, 칠곡 등지에 은밀하게 모여 들게 되면서 이들 지역에는 교우촌이 건설되어, 차츰 인근의 비신자들에게도 교리를 전파하는 지역 선교의 근거지를 이루었다.

 

이처럼 모범적인 옥중 신앙생활을 하던 박사의 안드레아는 사형집행 며칠 전에 이를 예감하고 ‘우리가 죽을 시간이 임박했으니,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예비합시다.’하고 격려하면서 자신이 쓰던 옷과 물건을 동료 죄수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순교를 준비하여 갔다.

 

마침내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박사의 안드레아는 다른 두 명의 동료와 함께 13년간의 기나긴 감옥생활을 마감하고 관덕정에서 참수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그들이 죽자, 같이 있던 동료 죄수들은 물론이고 형리들까지도 탄식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며, 이례적으로 형리들이 직접 시신을 잘 거두어 후히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월간빛, 2002년 11월호, 원재연 하상 바오로(서울대학교 법학 21 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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