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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과 재봉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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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8-23 ㅣ No.354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과 재봉틀

 

 

대구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자료관에는 각기 다른 양식의 오래된 재봉틀 석 대가 전시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한때 재봉틀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굉장히 부자이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 「지붕위의 바이올린」에서 둘째 딸네가 재봉틀을 사자, 일가친척이 총동원되어 축하하고 동네사람들이 구경하러 오는 장면이 있다. 이 영화에서 말하던 시기가 한국사회 초기 수녀들이 활동하던 시기와 같다. 그리고 수녀원의 재봉틀도 전적으로 생활의 도구였음을 우리 교회사는 말해주고 있다.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는 설립될 때부터 고아를 돌보는 사도직을 수행했다. 1888년 4명의 수녀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에는 200여 명의 어린 고아들이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동으로 이사 올 당시 고아원에는 남아가 80명, 여아가 65명, 유아(乳兒)가 30여 명이나 되었다. 새로 정착하게 된 수녀원은 고아원과 같은 구내에 있었다. 기와집 두 채 중 윗집은 여당(女堂)이고, 아래채는 남당(男堂)인데, 그 가운데 수녀들이 사는 일자형 건물이 있었다. 말하자면 수련자까지 합치면 거의 200명 식구를 가진 큰 집이었다.

 

수녀회가 새 살림을 시작한 때는 바로 대한제국이 기울고 있던 때였다. 가난한 나라에 겨우 신앙의 자유가 온 때여서 신자들도 거의가 다 가난했다. 가난은 초기부터의 화두였다. 성영회(Saint-Enfance)에서 고아들을 위해 보내주는 돈이나 샬트르 수녀원 본원에서 도와주는 돈은 번번이 부족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는 외국에서 오는 송금이나 원조도 점점 힘들어 갔다. 일제말 수도원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이란 쑥버무리, 도토리가루, 감자 몇 개였고 멀건 우거지죽은 음식 중에 상등품에 속했다.

 

이러한 시기에 재봉틀은 수녀회의 중요한 경제도구였다. 수녀원의 재봉틀은 우선 수녀들 자신의 의복을 해결해 주었고, 또 교회관계자들을 돕는데 쓰였다. 우리는 현재까지도 수녀들의 옷이 수녀원밖 세탁소에서 수선되거나 만들어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또한 초기 수녀들의 복장은 매우 복잡했다. 그러므로 수녀원은 수녀 자신들의 옷을 만드는 일, 수선하는 일, 또 고아들 옷을 해 입히는 일만으로도 큰 일이었다.

 

그런데 수녀의 복장이나 제대보나 제의 등 교회에서 쓰는 물건들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낯선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초기 수도회 지원자들은 서양인 수녀들로부터 서양의 재봉 방법과 자수를 놓는 법을 배웠다. 이들은 서양식 바느질 방식이 너무나 거북해서 선생 수녀가 안 보는 데서는 즉시 조선식으로 했는데, 선생 수녀는 어느 사이에 보았는지 쫓아와서 “노, 노!”하며 바늘을 빼앗아 다시 쥐어주곤 했다고 한다. 또 서양식으로 빨래하는 법도 배웠다. 서양에서 가져온 다리미는 편리했지만 조선 것과 많이 달랐다.

 

이러한 서양식 학습을 통해 수녀들은 자신들 살림만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서양식 생활풍속을 가지고 정착하는 사제들을 돕는 손이 되었다. 선교사들은 전교 나올 때 수단을 가지고 왔지만, 당시 박해사정 때문에 수단은 몇 해씩이나 궤 속에서 묵었다. 1888년 봄부터 사제들은 비로소 수단을 입기 시작했는데, 오랫동안 궤짝 속에 두었던 수단은 손질하거나 새로 만들어야 했다. 이렇게 되니 신부들마다 바느질거리들을 가져왔다. 더욱이 새로 한국에 진출하는 수사들의 침대와 이불 등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도 수녀들이 유일했다. 1909년 갓 도착한 분도회 수사들은 서툴고 할 줄 모르는 일만 당하면, “바오로 수녀원에 계신 할머니 수녀께로 가자.”고 했다고 한다. 이렇게 수녀들은 파리외방전교회 성직자들과 초기의 분도회 수사들을 위해 각종 재봉일을 해주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서 수녀원의 세탁소에서는 신부, 수사와 용산신학교 학생들의 세탁물까지 손질해주었다.

 

이러한 봉사로 배운 기술은 수녀원 살림비용을 마련하는데 사용되었다. 수녀회는 서양식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로, 당시 국내에 거주하던 공사관 등 서양인들의 주문에 응해 재봉틀이나 수예품을 제작해 줌으로써 부족한 재정을 보충했다. 또한 수녀들은 재봉실을 운영하여 의류 및 침구를 외국인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고종 임금의 시의(侍醫)였던 독일인 의사 분쉬(Wunsch) 등도 이런 침구류에 신세졌다.

 

한편, 수녀회에서는 개화기 시대 한국최초의 호텔인 존타그 호텔의 세탁물을 맡아함으로써 경제적으로 도움을 얻었다. 거기서 나오는 식탁보, 손수건, 시트 등 숱한 세탁물을 존타그(Antoinette Sontag) 부인은 수녀원에 위탁했다. 존타그는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관의 대리공사 겸 총영사로 있던 웨베르(Weber, 韋見)의 처형(妻兄)이었다. 그는 1885년 경 웨베르와 함께 조선에 입국해서 궁내부(宮內部)의 연회에 관한 사무를 맡았다. 1902년부터는 정동에 존타그 호텔을 세워 개화기 외국인들의 모임을 주도했다. 수녀들은 한국진출 초기에 러시아 공사관과 담을 사이에 두고 몇 달간 임시로 머물렀던 시절 존타그 부인을 알게 되었다. 존타그 부인은 수녀원의 딱한 사정을 알고 기회가 있는 대로 남는 물건을 보내는 등 고아원 경영을 도와주려고 애썼다. 서울 정동에 있는 이 임시거처 자리에는 지금 소박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대구 수녀원은 그 설립 목적 및 배경에서 나타나듯이 서울 수녀원의 분원 형태가 아니라, 서울과는 별개의 수녀원으로 독립적인 성격을 지니고 출발했다. 1912년부터 대구에 수녀들이 파견되었지만, 1915년 10월 12일 뱅상(Vincent de Paul Soichet) 수녀와 3명의 한국인 수녀, 그리고 11월 5일 마리 테오뒬르(Marie Th  odule Maneuvrier) 수녀가 합류함으로써 정식으로 출발했다. 물론 이때도 서울과 같이 50명의 무의탁 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생활이었다. 대구 수녀원에서도 고아원 경영이 중요했다. 즉 이들도 서울 수녀원과 같은 어려움을 겪어 나왔을 것이다. 수녀원 재봉틀 수리 일을 보아주고 있는 김철수(마리오, 78세) 경일미싱 사장은 수녀원 안의 재봉틀 수가 50~60대였다고 증언한다. 송 로사 수녀는 드레싱을 잘했으며, 세바스찬 수녀는 제의를 잘 만들었다고 기억한다.

 

한국사회에서 천주교가 근대문명과 근대학문을 성립 내지는 발전시키는데 공헌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 요소로 주로 건축과 학교, 병원이나 예술 등을 생각해 낸다. 그런데 실은 일상생활 속에서 시작한 서양생활화도 한국사회를 선도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인류가 바느질을 기계화하려는 시도는 16세기 무렵부터였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여러 사람에 의해 각기 보완되는 발명단계를 거치며 재봉틀이 완성되었다. 1850년대 싱어(Isaac Singer)의 재봉틀부터 일반에 널리 보급되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내내 외국제 재봉틀을 사용하다가 1938년이 되어서야 재봉틀제작소에서 재봉틀수리를 시작하였다. 이때 최경자는 한국 최초의 양재학원을 세웠다. 최초의 국산재봉틀은 1958년 국제개발원조를 받아 자체개발에 착수하여, 1966년에야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자료관의 재봉틀은 일반 한국인들로서는 거의 만져보지 못했을 만큼 선진화된 물건이었다. 재봉틀에 스친 수녀들의 손길을 사회사적 입장에서 기억할 수 있어야 교회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리라.

 

- 자료도움 : 권 카타리나 수녀, 김철수 마리오.

 

[월간빛, 2011년 8월호, 김정숙(소화데레사, 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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