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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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일본 나가사키 세계유산 순례의 길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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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2-03 ㅣ No.2156

[특집] 일본 나가사키 세계유산 순례의 길을 가다 (상)


두려움과 절망 이겨낸 땅… 피와 땀으로 일군 신앙과 평화

 

 

- ‘일본 26성인 기념비’와 ‘일본 26성인 기념관’이 조성돼 있는 나가사키시 니시자카 공원 전경. 이곳에서 1597년 일본 최초로 신자들이 순교했다.

 

 

일본 열도의 남서부 규슈(九州)에서도 서쪽 끝에 위치한 나가사키(長崎)현은 16세기 후반부터 일본에서 가장 활발하게 천주교 선교가 이뤄진 곳이다. 예부터 대륙과 일본 섬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외래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덜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선교 활동이 이뤄져 견고한 신앙공동체가 완성됐다. 2세기 이상에 걸친 엄격한 금교 정책과 참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잠복 기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을 지켜온 역사가 찬란하다.

 

지난 2018년 나가사키현을 비롯해 구마모토(熊本)현 아마쿠사(天草) 지역을 아우르는 가톨릭 유산들이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고, 총 456㎞에 달하는 순례길이 ‘세계유산 순례의 길’로 조성됐다. 나가사키현 관광연맹과 국제관광진흥실이 소개하는 ‘세계유산 순례의 길’을 나가사키현 지역 중심으로 돌아봤다.

 

나가사키현 히라도 이키즈키 섬에 있는 순교자 니시겐카 묘지.

 

 

박해에도 놓지 않은 십자가, 거룩한 순교의 땅

 

이번 일정의 첫 순례지는 나가사키현 히라도(平戸)에 있는 순교자 ‘니시겐카’(西玄可·가스팔)의 묘지다. 초기 일본교회의 순교 역사를 대표하는 곳이다. 1609년 순교한 니시겐카는 히라도의 이키즈키(生月) 지역 최초의 순교자로, 나가사키 16성인 중 한 명인 성 토마스 니시리쿠자에몬(西六左衛門) 신부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1550년대 히라도의 영주를 대신해 신하가 세례를 받자 이키즈키 섬 전체 주민들이 신자가 됐고 그 규모는 8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금교령과 박해로 신자 대부분이 나가사키로 탈출했고, 이들을 지휘하던 니시겐카는 1609년 11월 4일 ‘구로세의 쓰지’(黒瀬ノ辻) 라 불리우는 묘지에 있는 십자가 옆에서 처형된다. 그는 동시에 처형된 아내와 장남과 함께 188복자로 시복됐다.

 

히라도 이키즈키 섬의 역사와 생활을 소개하는 박물관인 ‘섬의 박물관’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일본인 신자들을 칭하는 ‘기리시탄’(キリシタン)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100년 전 기리시탄들의 가옥 내부를 재현해놓은 모습 등이 흥미롭다.

 

일본 국가지정 중요문화재인 히라도의 ‘다비라 천주당’(田平天主堂) 성당 건물은 지역 신자들의 눈물과 땀으로 만들어졌다. 1915년 12월 착공해 1917년 10월 준공됐으며, 나가사키현의 유명 건축가인 데츠가와 요스케(鐵川与助)가 설계한 최후의 벽돌 외벽 성당이다. 기록에 따르면 신자들이 손수 벽돌과 기와, 시멘트, 목재 등을 배에 일일이 싣고 건너와 별다른 장비도 없이 손으로 직접 성당을 지어올렸다고 한다.

 

나가사키현 오무라시에 있는 순교지 ‘머리무덤’ 기념비(좌). 나가사키현 오무라시에 있는 순교지 ‘몸통무덤’ 기념비(우).

 

 

나가사키현 오무라(大村)시의 주택가에는 ‘머리무덤’(首冢迹, 구비즈카 터)과 ‘몸통무덤’(胴家跡, 도즈카 터) 기념비가 있다. 1657년 당시 이 지역에서 신자 603명이 잡혀와 406명이 대거 참수되는 일이 벌어졌다. 순교자 중 131명의 머리와 몸은 서로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각각 묻혔다. 머리와 몸을 함께 묻으면 ‘천주교의 요술’로 이들이 다시 되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해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순교자들의 머리는 따로 소금에 절여 문에 20일간 매달았다고 한다. 지역민들의 두려움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이었다.

 

인근의 ‘호코바루(放虎原) 순교지’에는 복자 205위 현양비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온 조선 출신 순교 복자 13위 현양비도 그 앞에 놓여있다. 1657년 참수돼 머리와 몸이 각각 따로 묻혔던 신자 131명이 처형당한 현장이기도 하다.

 

원폭 피해자들을 구호한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생활했던 뇨코도(如己堂).

 

 

평화를 향한 외침, 신앙을 지킨 피와 땀

 

전쟁과 원자폭탄의 비극으로 잘 알려진 나가사키시의 불행한 역사는 역설적으로 ‘세상의 평화’라는 주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노력을 해나가야 하는지 여실히 보여 준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의 피해를 직접 입고도, 주변의 쓰러진 사람들을 치료한 의인 나가이 다카시 박사(永井隆·바오로·1908~1951)가 기거했던 뇨코도(如己堂)이다.

 

시마네(島根)현 출신인 나가이 박사는 나가사키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방사선 분야를 연구하며 조교수로 활동하던 중 1945년 원폭 피해를 입고 백혈병 등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돌보지도 못하는 지경에서도 다른 피해자들의 구호에 힘을 쏟았고 ‘여기애인’(如己愛人, 남을 자기같이 사랑하라)이라는 말을 남기며 평화를 위한 활동에 몸을 바쳤다. 1951년 43세를 일기로 짧은 생애를 마감한 나가이 박사가 1948년부터 거처로 사용했던 ‘뇨코도’는 다다미 2장 정도 넓이의 소박한 모습이다. 평화를 위해 일생을 바친 나가이 박사는 저서를 통해 “일본이 평화헌법을 수호하고 다시는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반전주의자이기도 했다.

 

나가사키시 성모의 기사 수도원(聖母の騎士修道院)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굴레 속에서 사랑을 실천해 ‘나가사키의 성인’이라 불리우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Maximilianus Maria Kolbe, 1894~1941)의 정신을 배울 수 있다. 폴란드 출신인 콜베 신부는 1930~1936년 나가사키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불면증과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실천했던 콜베 신부는 이후 고국으로 돌아간 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해 밥을 굶는 ‘아사형’을 받고 1941년 47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971년 복자가 됐고 1982년 성인 반열에 올랐다.

 

- ‘일본 26성인 기념관’ 내부에 있는 벽화. 성인들의 순교 현장을 묘사했다.

 

 

불행한 역사에 고통받으면서도 평화와 사랑을 외친 이들의 모습은, 상상조차 힘들 정도로 잔인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려 했던 일본 초기교회 순교자들의 피와 땀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나가사키역 근처 언덕에 있는 니시자카(西坂) 공원은 1597년 일본 최초로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다. 프란치스코회와 예수회 수사, 일본인 신자 등 26명이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했고, 1862년 성인 반열에 올랐으며 시성 100주년을 맞은 1962년 ‘일본 26성인 기념비’ 및 ‘일본 26성인 기념관’이 조성됐다.

 

초기교회 순교자들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1864년 완공된 나가사키시 ‘오우라 천주당’(大浦天主堂)에서 그동안 ‘잠복 기리시탄’으로 몰래 신앙생활을 이어왔던 초기교회 신자들의 후손이 발견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일본의 금교령은 1873년 드디어 철폐됐고 일본 가톨릭 신앙의 부활이 시작될 수 있었다. [가톨릭신문, 2022년 12월 4일, 일본 나가사키 방준식 기자]

 

 

[특집] 일본 나가사키 세계유산 순례의 길을 가다 (하)


지옥 같은 고문과 공포조차도… 주님 향한 믿음 빼앗지 못했네

 

 

- 일본 나가사키현 운젠시 운젠지옥 언덕에 있는 순교기념비와 십자가. 운젠지옥에서 일본인 신자들이 고문당했으며 33명이 순교했다.

 

일본 초기교회 역사는 앞을 한 치도 내다볼 수 없는 길고 거대한 터널과도 같았다. 상상조차 힘든 무자비한 탄압과 비극으로 점철된 박해의 역사. 과연 이 땅에 복음이 조금이라도 자리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직접 둘러본 나가사키 세계유산 순례의 길에는 모진 박해에도 십자가를 당당하게 내걸었던 일본 초기교회 신자들의 숨결이 묻어 있었다. 눈앞의 이익만을 쫓아 불의를 행한 정권 앞에서도, 배교를 강요하며 지옥과도 같은 형벌로 탄압했던 금교 정책 앞에서도, 신자들은 의연히 고난을 감내했고 오직 하느님에게만 의지하며 후손에 신앙을 전수해나갔다. 결국 주님의 뜻은 이루어졌다.

 

 

땅에서의 지옥, 그러나 하늘에서 구원받으리니

 

나가사키현 시마바라 반도(島原半島)에 있는 운젠(雲仙)시는 온천으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고 있다. 일대의 운젠산(雲仙山, 해발 1359m)은 운젠다케(雲仙岳)와 후겐다케(普賢岳)라는 두 개의 큰 봉우리에서 가스가 계속 분출되고 있는 활화산이다.

 

고급호텔 등 숙박시설이 화려하게 관광객을 맞고 있는 온천마을 옆으로는, 마치 ‘땅 위의 지옥’을 연상시키듯 매캐한 냄새와 함께 유황 수증기를 거침없이 쏟아 내고 있는 ‘운젠지옥’(雲仙地獄)이 자리하고 있다. 멀리서도 코를 자극하는 유황 냄새와 뜨거운 열기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수증기를 이리저리 피해 다니지 않는다면 제대로 지나갈 수 없을 정도다.

 

- 유황 수증기로 뒤덮인 운젠지옥 전경.

 

 

120℃를 넘기며 연달아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와 함께 유황 온천수가 끓고 있는 곳. 바로 이곳에서 1627~1632년에 걸쳐 금교 정책으로 끌려온 신자 ‘기리시탄’(キリシタン) 수천 명이 언덕에서 뜨거운 온천수를 몸에 끼얹는 등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끝내 배교를 거부한 33명은 언덕에서 온천수 아래로 강제로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처형됐다. 운젠지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이들을 기리는 순교비와 십자가가 있다. 매년 5월 나가사키대교구는 이곳에서 순교제를 지낸다.

 

시마바라 반도 일대의 천주교 박해 역사는 신앙을 지키려는 신자 농민들이 주축이 된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島原·天草の乱)으로 이어진다. 1637년 시마바라와 아마쿠사(현 구마모토(熊本)현 일대) 지역 영주가 세금을 마구 징수하고 천주교 탄압을 일삼자 3만7000여 명의 농민들이 봉기한 것이다. 그러나 막대한 양의 무기로 무장한 막부군(幕府軍)을 이기지 못한 봉기군은 전멸했다. 이들의 시신 중에는 탄환이나 포탄 파편으로 만든 십자가나 묵주를 입 안에 물고 있는 흔적도 발견됐다. 그 역사 기록은 시마바라성(島原城)에 있는 기념관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1997년 건립된 ‘시마바라 교회당’(カトリック島原教会)은 순교자 기념 성당으로 지정돼 불의와 탄압에 맞섰던 신앙선조들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운젠지옥에서의 박해와 순교 장면을 묘사한 시마바라 교회당 스테인드 글라스.

 

 

주님 위해 생명 바친 신자들, 간절했던 신앙 영원히

 

시마바라 반도 최남단에 있는 나가사키현 미나미시마바라(南島原)시에는 일본 최초의 소신학교이자 종합교육기관이었던 ‘아리마 세미나리요’(有馬のセミナリヨ) 옛터가 있다. 이 지역 영주였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가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위해 세례를 받으면서 천주교 선교가 가능해졌고, 예수회가 1580년 ‘아리마 세미나리요’를 설립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의 학생은 총 22명이었으며 라틴어와 포르투갈어, 미술과 음악은 물론 화약술을 배우기도 했다.

 

특히 이토 만쇼(伊東マンショ), 치지와 미구엘(千々石ミゲル), 나카우라 줄리안(中浦ジュリアン), 하라 마르티노(原マルチノ) 등 10대 학생 4명은 ‘덴쇼(당시 일본의 연호) 소년사절단’(天正遣欧少年使節)이라는 이름으로 1582~1590년 일본 최초로 유럽에 파견됐다. 예수회 선교사 발리냐노(Valignano) 신부가 일본 조정을 대신해 학생들이 교황을 알현할 수 있도록 하자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소년사절단은 스페인 국왕과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을 알현하고 환대를 받았으며 로마 시민권을 받기도 했다. 이탈리아·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각국을 차례로 방문하고 문화를 배웠으며, 교황으로부터 일본 영주에게 전해줄 선물을 받고 귀국했다.

 

이들의 업적은 서양 세계에 일본교회를 널리 알리는 한편 동아시아 최초로 유럽에서 활판인쇄기를 들고 와 일본에서 교리서를 인쇄함으로써 선교 활동에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이후 소년사절단 중 배교한 치지와 미구엘을 제외한 3명은 사제가 됐다. 특히 나카우라 줄리안은 1633년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했으며 2008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복됐다.

 

이처럼 아리마 세미나리요 옛터 인근 지역은 활발한 선교활동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금교 정책으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희생됐다. 인근 강변에 있는 ‘아리마가와 순교지’(有馬川殉敎地)에서는 1613년 당시 영주였던 아리마 나오즈미(有馬直純)가 배교를 거부하는 자신의 신하 3명과 가족 5명을 각각 8개의 십자가에 매달아 주민 2만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형시켰다. 이후에도 배교를 거부한 신자 17명이 참수되는 등 이 지역에서의 순교는 계속됐다.

 

‘아리마 기리시탄 유산 기념관’(有馬キリシタン遺産記念館)에서는 나가사키의 천주교 전래와 번영, 가혹한 탄압, 신자 잠복부터 부활까지 자세한 자료를 통해 일련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 1550년 예수회 선교사 하비에르(Francis Xavier) 신부가 나가사키에서 처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한 이래 5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일본 초기교회 신자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신앙의 발자취는 아직도 일본 땅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그리고 신자들의 가슴 속에도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 미나미시마바라시 주택가에 있는 일본 최초 소신학교 ‘아리마 세미나리요’ 옛터.




- 미나미시마바라시 ‘아리마 기리시탄 유산 기념관’에 있는 순교기념조각.




- 아리마가와 순교지에 있는 십자가.




- 시마바라시에 있는 시마바라 교회당 전경. 

 

[가톨릭신문, 2022년 12월 11일, 일본 나가사키 방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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