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레지오ㅣ성모신심

길 위의 사람들: 성모님의 전 생애는 받아들임의 여정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2-05 ㅣ No.843

[길 위의 사람들] 성모님의 전 생애는 받아들임의 여정

 

 

하느님의 말씀을 품고 평범하게 살았던 소녀 마리아의 삶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발현한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 이후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라는 말씀이 이뤄지는 과정은 엄청난 받아들임의 여정을 동반합니다. 이후 헤로데의 명령으로 죽은 수많은 아기와 어머니들의 울부짖음을 뒤로한 채 이집트로 피신해야만 했던 마리아와 요셉의 곤궁한 처지는 어떻습니까? 아들의 출가 이후 범상치 않은 말과 행동을 하고 다니면서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고, 채찍질 당하고, 조롱당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 어머니의 심경을 우리가 감히 이해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길 떠나는 마리아> 마리아 봔 갈렌 수녀 작

 

 

아마도 어머니 마리아는 세상에서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겪어가면서 ‘자신이라는 집’의 문을 열고 나와 또 다른 세상으로 건너갔을 것입니다. 마리아 봔 갈렌의 ‘길 떠나는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성모님의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이는 구세사를 여는 과정으로 구태의연한 삶이 아닌 기존의 질서를 벗는 긴 어둠을 통과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하여 인류는 그녀를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라고 부릅니다. 성모님은 존재 안팎의 찢어지는 듯한 받아들임의 여정을 통과한 후에 거룩한 칭호와 천상 모후의 관을 받으십니다. 통고의 어머니, 영광의 어머니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이탈리아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원 벽에 그려진 ‘조롱당하신 예수’(프라 안젤리코)에 표현되듯 성경을 들고 있는 도미니코 성인과 달리 하느님의 뜻에 ‘피앗(Fiat)’으로 응답하신 성모님은 성경 말씀이 자신에게 그대로 이루어져 성령과 나누는 친교와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열려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겠죠. 그러기에 우리는 평범한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로 되어가는 과정을 세밀히 관상해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성령께 민감하게 귀 기울이는 것이 그 첫 단계입니다. 성령께서는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의식을 깨워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열리게 하십니다. 저는 이것이 인간의 꼴을 만드신 하느님께서 내면을 어루만지시는 창조의 연장선으로 여겨집니다. 평범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수용하기 위해 깨어지고 넘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광대무변하신 하느님을 조금이나마 닮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살이는 이 여정에 동참하는 장입니다.

 

마리아라는 한 여성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여정을 관상하면서 제가 결정적으로 의식의 전환을 하게 된 중요한 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을 보면서였습니다. ‘너에게 가는 길’은 나는 그리고 우리는 누구인가를 묻게 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돌아와서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이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충격에서 헤어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정말 평범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부모가 되어 예사롭지 않은 아이들을 통해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리는 과정은 마치 그들이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해 가는 듯한 경이로움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런 중에 저는 한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카타리나 자매님은 정말 아름답고 맑은 미소를 머금은 소녀 같았습니다. 경남에 사는 자매님은 제가 돌보고 있는 네팔 대학생들에게도 관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예쁘고 참한 막내딸 세실리아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세실리아는 조용히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자취하는 딸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세실리아는 엄마를 만나자 “엄마,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사랑해 줄 수 있어?”라고 물었습니다. 평소와 달리 진지한 태도로 어렵게 말을 꺼내서였던지 음성은 떨렸고, 눈빛은 흔들렸습니다. 그 미세한 움직임을 다 알아차린 카타리나 자매님은 딸을 꼭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그럼, 엄마는 우리 세실리아를 있는 모습 그대로 다 사랑하지.”

 

그 후 세실리아는 그동안 고뇌하면서 자신도 자신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동성에게 마음이 사로잡히는 자신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을 겪어서였던지 세실리아는 입장을 분명하게 정리했습니다. 그것은 관계, 끌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많은 혼란을 겪는 아이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잘 돕기 위해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고 싶었지만, 우선 딸아이의 말대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였습니다. 충분한 숙고가 있었던 세실리아의 심중을 다 듣고 헤아리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현실을 밀어내는 아우성이 일었습니다. 충격이 너무 커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새벽녘 딸의 자취방을 빠져나와 성당으로 달려가서 하느님께 하소연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도록 허락하셨느냐고 울부짖었습니다. 한참을 하느님께 말씀드리고 나니 솟아날 구멍이 있는 듯 마음이 따뜻하고 편안해지면서 이제부터 넘어가야 할 산을 하나하나 헤쳐 나가기 위해 지혜를 청했습니다. 첫 번째 관문은 남편이었습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그래도 용기 내어 남편에게 사실대로 말을 하고 찢어지는 마음이지만 딸을 받아들였습니다.

 

 

성소수자 딸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또다른 세상 열려

 

세실리아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큰딸의 권유로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에 참석한 부모들은 자식을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는 마음의 여정을 걸어서인지 품이 넉넉해 우선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신부님들과 수녀님들도 모임에 참석하셔서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너에게 가는 길’의 주인공, 비비안(성소수자 아들을 받아들인 어머니)과 나비(자녀의 성전환 여정에 함께한 어머니)를 보면서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성소수자’들은 죄인이 아니라 그런 경향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카타리나 자매님에게 일어난 일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해가면서 세상은 다수의 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들만 사는 곳이 아니라 소수의 다름을 지닌 사람들이 공존하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카타리나 자매님과의 만남은 인간이 자연임을 다시금 인식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자연은 변화되고 변형될 수 있습니다. 틀에 맞춰 가야 하는 곳이 아니라 규정된 틀을 넘어서 다양한 경향을 가진 사람들을 수용할 때 세상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카타리나 자매님은 딸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남편이 든든한 반석처럼 느껴져 관계도 더 돈독해졌고 세상을 보는 눈도 넓어졌다고 했습니다. 예쁜 딸이 더 아름다운 자신으로 피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인 자신도 성장으로 초대되었음에 감사했습니다. 엄마는 그렇게 자식을 통해 찢어지고 깨어지면서 또 다른 세상으로 열리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카타리나 자매님을 통해 더 깊이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12월호, 이은주 마리 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



96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