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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타이완 선교 이야기2: 타이완(대만)에서의 선교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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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2-10 ㅣ No.170

김 마리안나 수녀의 타이완 선교 이야기 - 타이완에서의 선교활동

 

 

얼마 전 연중피정을 다녀왔습니다. 혼자 한 피정이라 여유롭게 산책할 기회가 많았는데 유난히 제 눈에 들어온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엄청 큰 나무였던 것 같은데 잔가지는 다 잘리고 굵은 가지만 멋없게 남아있는 그런 나무로, 그 가지에서 다시 뿌리가 수도 없이 자라나서 참 보기 흉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제게 큰 인상을 남긴 건 그 나무가  제게는 타이완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가지에서 뿌리가 다시 나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타이완에서는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제 상식으로는 뿌리는 땅 밑으로 내리는 것이고 가지는 잎과 꽃을 피우기 위해  위로 자라는 것이었는데, 대만에서는 뿌리가 곁가지에서도 잘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타이완에서 선교를 시작한 지 겨우 1년밖에 안 되었지만, 1년을 돌이켜 볼 때 참으로 제가 가지고 있던 많은 상식이 허물어졌고 지평이 넓어 졌다고나 할까요? 그러기 위해서 그동안 제가 가지고 있던 상식과 정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또 다른 모습의 상황과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제 안에서는 수없이 많은 대립과 화해를 거듭했고 뿌리가 땅으로만 자라는 게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1년밖에 살지 않은 상태에서 선교가 뭐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예수성심시녀회가 20년이라는 시간을 타이완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보냈는지, 하느님의 섭리를 어떻게 체험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지에 대해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성모성심장애아센터와 루깡천주교회

 

1991년 타이중교구 전임 교구장이신 왕 주교님의 초청으로 박 힐라리오 수녀와 김 에레나 수녀가 제일 처음으로 파견되어 약 2년간 언어수업을 받고 1993년 정식으로 타이중교구 루깡천주교회에 파견됩니다. 거주는 루깡천주교회에서 했지만 파견목적은 성모성심장애아센터 운영이었는데, 내부문제로 장애아센터 본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성당 안에서 장애아 6명을 데리고 분교형식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이후 6년 만에 본교로 들어가서 소임을 시작하게 되고 2007년 6월 28일 기금조성을 시작한 지 6년 만에 새로운 장애아센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 안에서 수녀님들은 한국김치 판매를 시작하게 되었고 여러 매체에서 ‘한국에서 장애아를 돕기 위해 온 천사들’이라는 타이틀로 기사가 실리면서 밤낮없이 김치 담그는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루깡성모성심장애아센터표 김치는 대만 전역으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으며 장 아뽈리나 수녀는 장화현 명예시민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루깡천주교회에 거주하면서 1년은 장애아센터 일만 하였지만 그 이후로 힐라리오 수녀는 본당 일에 전념하게 됩니다. 루깡은 도교민간신앙의 중심지이자 성지인데, 그런 곳에서 천주교회의 수녀가 선교를 해나간다는 것은 어쩌면 달걀로 바위치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일이 있든 없든 오토바이를 타고 루깡을 돌아다니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수녀의 존재를 알리는 방법이었지요. 시간만 되면 오토바이를 타고 방문을 다니는 것이 수녀님의 일이었답니다. 그래서 대만에 선교를 하러 오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중국어이고, 그 다음이 오토바이 타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오토바이 때문에 편리한 점도 있지만 많은 수녀들이 한두 번씩은 사고를 당했으니 한국보다 대만에서 보험료를 좀더 많이 내는 것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

 

 

2. 따리천주교회

 

따리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메리놀회 수녀님이 본당없이 신자가정을 방문하면서 부근 신자들을 돌보고 있다가 1995년 따오성회(道生會)수도회 아르헨티나 신부님들이 근처 타이핑에 거주하면서 타이핑과 따리 두 본당을 만들었습니다. 같은 수도회 소속인 수녀들이 따리에서 선교를 하다가 떠나면서 마침 타이뻬이에서 언어공부를 하던 이 스콜라스티까 수녀와 안 카타리나 수녀가 1998년 따리로 와서 정식으로 본당 수녀로 소임을 시작합니다. 정식 본당건물이 아닌 상가건물에서 시작한 따리천주교회는 1999년 타이완을 덮친 대지진으로 더 협소한 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고, 교구도 경제적인 곤란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도 새로 성당을 지을 땅을 매입하고 2002년 7월 기공식을 거쳐서 2004년 10월 23일 드디어 중화순교성인을 주보로 하는 성당을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성당을 짓기 위한 기금 마련으로 또 한 번 한국김치의 저력을 발휘하였고, 다른 본당처럼 교구에 많이 의지하지도 않고 빚도 남기지 않으면서 그 당시 신자들은 똘똘 뭉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언제든 편하게 갈 수 있는 근처 본당을 철새처럼 떠도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던 신자들에게 본당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것부터 완성하기까지 주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수녀가 성당을 짓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김치장사를 시작하니 신자들도 차츰 마음을 모으기 시작했고, 폐품수집에 김치판매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비록 본당건물은 덜 지어졌지만 신자들 마음 안에는 이미 본당이라는 한울타리가 마련되는 계기가 되어 주었던 것이지요. 지금은 아담하고 소박한 성당이 마련되어 타이완 전체에 한국김치 판매로 지어진 성당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 되었답니다. 외국신부에 외국수녀 그리고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 타이완 민난어를 쓰는 사람, 원주민에 이르기까지 따리본당은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는 살아있는 학교입니다.

 

이 안에서 과연 선교란 무엇인지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처럼 예비신자들이 늘 있는 것도 아니고 10년 전에 생긴 레지오는 아직도 하나인 데다 주일학교 학생들은 갈수록 줄어들어 운전기사 역할까지 하는 수녀가 어디 힘이 나겠습니까! 하지만 백미러도 축 처져서 그냥 장식으로 달려있고 미터기는 오래전에 정지해버린 수녀의 오토바이는 여전히 따리 구석구석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 안에서의 일치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철저히 배우면서 한국에서 누렸던 수녀라는 자리는 일찌감치 갖다 버린 채 말 그대로 이들의 시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3. 교구 성소담당과 어린이, 청소년사목

 

따리본당에는 원래 두 명의 수녀가 소임을 하고 있었는데 2008년부터 새로 교구장이 되신 주교님의 부탁으로 김 아타나시아 수녀가 교구청에 근무하며 교구 어린이, 청소년 담당수녀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소가 많이 부족한 타이완이기에 성소의 텃밭을 일구기 위해서는 어린이, 청소년부터 교육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러 가지 활동도 준비하면서 특히 어린이 월보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대구대교구 청소년담당 부서의 양해로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고 또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월보의 모양새도 점점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각 본당의 반응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타이중교구 주교님께서 저희 수녀들에게 지금 타이완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저희 수녀들은 서슴지 않고 ‘지역교회의 성소가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행히 주교님께서는 저희의 의견을 받아주시어 각 본당에서 성소를 위한 기도를 꼭 바치도록 하면서 본당마다 성소후원회를 설립하여 기금마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성소담당까지 맡아하면서 젊은이들을 위한 모임을 한 달에 한 번씩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소계발기금 마련으로 저는 김치대신 묵주를 만들어 팔고 있는데, 가끔은 ‘수녀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지만 타이완 교회 안에서 성소의 씨앗을 자라게 하는데 작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하나하나 정성껏 만들고 있습니다.

 

진정한 선교란 무엇일까요? 예비신자가 부쩍부쩍 늘고 신이 나서 예비신자 교리를 하고 모든 신자들을 레지오화 하는 것인지, 만일 그렇다면 20년 동안 타이완에 머물고 있는 예수성심시녀회의 선교는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제 선교는 이들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이들과 함께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것, 그렇게 살면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 아마도 저희보다 먼저 이곳에 왔던 선교사들은 그것을 알고 그렇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숫자에 길들여져 있고 효과를 즉시 볼 수 있었던 한국 교회 안에 살다가 온 수녀들은 시행착오를 할 수밖에 없었음을 시인합니다.

 

타이완 교회의 복음화율은 1%입니다. 한국의 딱 십분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만일 예비신자가 한 명이라면 열 명이라고 생각하고 성소자 모임에 단 두 명이 나왔다면 스무 명이 참석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당 열인 셈인 거지요. 이렇게 한 명 한 명을 귀하게 여기며 타이완에서 무엇인가를 이루실 하느님의 섭리에 미리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스무살…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충분히 새로운 도전을 위해 다시 한 발 내디딜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도전이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세 곳의 소임지에서 우리가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바라보고 계셨던, 우리가 껴안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껴안아 주셨던 사람들을 찾아서 예수성심의 그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대구대교구는 타이중교구와 자매교구입니다. 그렇기에 이 글을 읽으시는 신부님, 수녀님 그리고 교우분들께 부탁드립니다. 2013년 교구설정 50주년을 맞이하는 타이중교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이곳 타이완에서 선교하고 있는 저희 시녀들을 위해서도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월간빛, 2011년 2월호, 김 마리안나 수녀(예수성심시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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