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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의 관계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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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2 ㅣ No.887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의 관계에 대한 고찰

 

 

국문 초록

 

본고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행적과 관련하여 기존에 제출된 바 있는 몇 가지 통설들을 되묻는 작업이다. 우선 모방 신부의 중국 활동과 관련하여 당시 중국 교회와 마카오 대표부 등지에서 제기한 문제점들과 이에 대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장을 살펴보았다.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필요 이상으로 공격적인 태도와 신중하지 못한 행동을 보였고, 이것이 북경에 있던 피레스 주교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브뤼기에르 주교 역시 모방 신부가 지녔던 선한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의 자질과 태도에 대해서는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우려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모방 신부를 원래 임지였던 사천대목구로 보내는 방안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한 뒤에 있었던 장례 등 사후 처리 과정에서 모방 신부가 맡았던 역할에 관하여 조명하였다. 특히 장례 미사 거행 및 매장, 그리고 묘비 제작 등에 관여한 내용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장례 미사를 거행한 다음, 조선으로 가기 위하여 마가자 교우촌을 떠나면서 그 묘비에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한자 이름과 지위, 선종 날짜를 새겨달라고 요청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한자 성을 소(蘇) 씨로 한 것은 모방 신부의 지시 사항이었지만, 이미 브뤼기에르 주교와 연락을 주고받은 조선인 교우들의 서한에 나타난다.

 

모방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에 의해서 조선대목구장 직무대행으로 임명되었고, 그 자격으로 조선에 입국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모방 신부를 직무대행에 임명하였다고 보고하는 서한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조선 입국 과정에서 모방 신부가 취한 행동으로 볼 때에는 과연 조선대목구장 직무대행에 임명된 것인지를 의심케 하는 정황이 여러 군데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이미 조선대목구 설정 칙서 자체에 결정적인 유효성이 선포되어 있으므로 조선대목구 신설 문제는 법적으로 해결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모방 신부나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비로소 조선대목구의 설정이 유효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

 

 

1. 서론

 

때는 1835년 10월 6일. 장소는 중국 만리장성 너머에 있는 교우촌 서만자(西灣子). 그곳에서 초대 조선대목구장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Barthelemy Bruguiere, 1792~1835) 주교는 생애의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었다. 마카오에 있는 피에르 르그레주아(Pierre Legregeois, 1801~1866) 신부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끝내면 이튿날 조선을 향해 떠날 예정이었다. 편지를 쓰는 손가락은 꽁꽁 얼어 있었다. “글씨를 휘갈겨 써서 죄송합니다. 이 편지를 쓸 때 저는 손끝이 얼어 있었습니다. 이 지방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얼음이 얼었습니다.”1) 이 구절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쓴 서한의 제일 앞 장에 세로로 쓴 추신이다. 아마 그날 밤에 짐을 정리하면서 지금까지 썼던 서한들을 모아 마카오로 보내려고 묶으면서 덧붙여 썼던 것 같다.

 

10월 하순의 서만자는 평균 기온이 대략 열씨(列氏, Reaumur)온도로 영하 9.5도라고 하였다.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섭씨(攝氏, Celsius)온도로 환산하면 영하 11.9도가량 된다. 지중해 연안의 따뜻한 카르카손 교구 출신이었던 브뤼기에르 주교에게는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임지인 조선으로 가기 위해 페낭 신학교를 떠난 뒤로 3년여 동안 중국 대륙을 헤매던 기억에 비하면 그렇게 혹독한 기후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10월 5일부터 6일 사이에 추위로 얼어붙은 손으로 힘겹게 지나온 나날들을 정리하는 글들을 끝낸 브뤼기에르 주교는 10월 7일 길을 떠났다. 그리고 2주 뒤인 10월 20일 저녁 마가자(馬架子) 교우촌에서 신산했던 삶의 끈을 놓고 영면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마지막 발자취를 정리한 사람은 피에르 모방(Pierre Maubant, 1803~1839) 신부였다. 마카오를 떠나 복건으로 가는 배에 브뤼기에르 주교와 동승하였고, 복건대목구장의 주교관에서 자신의 임지를 사천에서 조선으로 바꾸고 싶다는 원의를 드러낸 이래로 모방 신부는 조선대목구 소속 선교사로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도와서 조선으로 가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영접하기 위해 변문으로 나온 조선인 신자들과 만나서 조선으로 입국함으로써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는 첫 부임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제2대 조선대목구장 로랑 앵베르(Laurent Imbert, 1796~1839)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기 이전에는 모방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의 대리자라는 자격으로 샤스탕 신부와 함께 선교 활동을 펼쳤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데 과연 브뤼기에르 주교는 모방 신부를 어떻게 보았을까? 조선대목구를 이끌고 나갈 동료 사제이자 선교사라고 생각하면서 믿고 의지했을까? 아니면 포르투갈 선교사와 갈등을 일으키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라고 생각하여 부담스럽게 여겼을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여태껏 연구된 바가 없다.

 

또한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한 이후에 사후 뒤처리를 담당했던 모방 신부의 행적은 어떠했는가? 주교를 어디에 매장했고, 누구의 도움으로 묘비를 세웠을까? 묘비에 새겨진 비문은 모방 신부의 생각에서 나온 것일까? 모방 신부 본인이 남긴 자료를 통해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마지막 순간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소속 대목구 장상인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해서 마지막 예를 다하는 모방 신부의 정성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모방 신부는 어떤 자격으로 조선에 입국한 것일까? 만약 대목구장 유고라는 돌발적인 상황에 봉착했다면 즉시 이 사실을 교황청과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 아니면 두 기관의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알리고, 후속 조치에 대한 지시를 기다렸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가령 후임 대목구장이 임명되어 조선으로 부임할 때 자신이 새로운 장상을 보필하여 함께 입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위하여 준비된 입국 루트와 안내인을 모방 신부가 임의로 활용하였을 때에는 그런 행위가 교회법적으로 정당하다는 근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본고는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의문 사항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다. 먼저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 사이에서 모방 신부에 대한 평판이 어떠하였고, 브뤼기에르 주교는 모방 신부를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둘째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 경위와 장례 과정에서 모방 신부가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규명할 것이다. 셋째로 모방 신부의 조선 입국이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기존 통설을 재검토하고, 관련 문헌들을 조사해서 이 문제의 참모습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고자 한다.

 

 

2. 모방 신부에 대한 평판과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장

 

샴 대목구 소속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를 자원하고 나섰을 당시에만 해도 마카오와 남경, 북경 등지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그를 돕겠다는 서신을 보내는가 하면, 언제 마카오로 올지 마카오의 포교성성 대표부를 맡고 있던 돈 라파엘레 움피에레스(Don Raffaele Umpierres) 신부에게 수시로 물어볼 정도였다.2) 오히려 프랑스 선교사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파리 외방전교회를 탈퇴하고 혼자 독립적으로 포교성성 선교사로서 조선에 가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3)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신설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카오의 분위기는 급랭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마카오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으로 가기 위하여 중국 내의 포르투갈 보호권 지역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고 여행 지도를 제공하는 등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정을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사태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모방 신부가 등장하면서였다.

 

여기서 먼저 모방 신부가 태풍의 눈이 되어 사태를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몰고 간 경위를 시간순으로 재구성해보자. 모방 신부는 복건대목구장 카르페나 디아스(Carpena Diaz, 1760~1849) 주교가 머물던 복건의 복안현(福安縣) 정두촌(頂頭村)에서 1833년 3월 9일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조선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두 사람은 디아스 주교를 만나 이 문제를 상의하였고, 사천대목구장의 허락을 얻기 위한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브뤼기에르 주교는 3월 20일에 항의 서한을 받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포르투갈 선교사가 보낸 것인데, 중국 강남 지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은 브뤼기에르 주교 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일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약속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방 신부가 조선으로 가겠다고 나섰던 시점부터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불편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디아스 주교와 상의하였고, 차후에 별도의 지시를 내릴 때까지 모방 신부를 복안에 머물도록 결정하였다.4)

 

1833년 4월 23일 복건을 떠난 브뤼기에르 주교는 6개월 동안 고통스러운 여정을 거쳐서 1833년 10월 10일 산서대목구장 요아킴 살베티(Joachim Salvetti, 1769~1843) 주교의 주교관이 있던 산서의 태원부(太原府) 기현(祁縣) 구급촌(九汲村)에 도착하였다. 중간에 북경 근처까지 도착하였지만 남경교구장 겸 북경교구장 서리였던 피레스 페레이라(Pires Pereira, 1769~1838) 주교의 만류를 받아들여 더 이상 북상하지 않고 중국의 서부 내륙으로 방향을 틀어 산서로 갔던 것이다.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 소속이었던 살베티 주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과는 달리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장을 이해하고 환대하였다.

 

문제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북상하던 6개월 사이에 발생하였다. 마카오에 있던 포교성성 대표부의 움피에레스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확신하면서 조선 선교를 자원했던 자크 샤스탕(Jacques Chastan, 1803~1839) 신부를 마카오로 불렀고, 샤스탕 신부는 1833년 5월 페낭을 떠나 마카오로 갔다. 그런데 브뤼기에르 주교가 북경으로 파견했던 연락원 왕 요셉이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와 함께 요동까지 가서 조선인 신자들을 만난 뒤에 희망에 들떠서, 조선 사람들이 브뤼기에르 주교를 맞이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동원할 각오가 되어 있으며,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 날짜는 1833년 연말로 정해졌다는 내용의 편지를 마카오의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자 마카오에 있던 모든 선교사는 조만간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으로 입국할 것이고, 조선의 젊은 신학생들을 마카오로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샤스탕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를 따라서 조선으로 가고 싶은 열망에 움피에레스 신부를 설득하여 1833년 9월 마카오를 떠났다. 1833년 11월 샤스탕 신부는 복안의 정두촌에 상륙하여 모방 신부와 만났다. 두 사람은 상의 끝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찾아가기로 결심하였다. 1833년 12월 두 사람은 출발하였고, 모방 신부는 육로, 샤스탕 신부는 해로를 이용하여 중국 대륙을 북상하였다. 결국 1834년 4월 1일 모방 신부는 북경에 도착하여, 이 사실을 산서에 있던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어 보고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4월 24일에 산서에서 이 편지를 받고 깜짝 놀랐다.5) 그때까지도 모방 신부의 종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브뤼기에르 주교보다 더 놀란 사람은 북경에 있던 피레스 주교였다. 당시 북경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일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인으로서 북경에 들어온 사람은 모방 신부가 유일했다. 게다가 모방 신부는 중국 조정에서 발행한 여행증명서 혹은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아무런 서류도 지참하지 않은 상태였다. 깜짝 놀란 피레스 주교는 모방 신부를 만리장성 너머에 있는 교우촌 서만자로 가도록 권했고, 모방 신부는 6월 8일 서만자로 떠났다.

 

그런데 얼마 뒤에 이번에는 샤스탕 신부가 북경에 들이닥쳤다. 복안에서 모방 신부와 헤어진 샤스탕 신부는 1834년 2월 상해에 도착하였고, 다시 배를 타고 북상하였다. 요동 지방에 상륙한 샤스탕 신부는 조중 국경지대를 헤맸지만, 단신으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으로 들어가려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배를 타고 남하하여 북경 근처에 도착한 샤스탕 신부는 중국인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몰래 북경으로 들어갔다. 샤스탕 신부는 피레스 주교를 만나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주교는 샤스탕 신부에게 마카오로 다시 돌아가든지, 아니면 산동 지방으로 가서 카스트로(Castro e Moura) 신부 아래에서 성무 활동을 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였다. 샤스탕 신부는 후자를 받아들여, 1834년 8월 말 산동 선교지로 갔다.6)

 

사실 북경 교회의 상황은 상당히 엄중한 편이었다. 1827년에 중국 황제의 명령으로 북경의 북당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1829년에는 어느 배교자가 금품 갈취를 목적으로 중국인 라자리스트 설(薛) 마태오 신부를 북경 관리에게 고발하였다. 설 신부는 마카오로 추방당한 프랑스인 라자리스트 라미오(Lamiot) 신부의 위임에 따라 북당 책임자로 있던 인물이었다. 설 신부는 북경을 탈출하여 인근 선화부로 피신했다가 다시 만리장성을 넘어서 서만자 교우촌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 정착하여 북당 서리구좌를 건설하였다. 한편 피레스 주교는 흠천감(欽天監)의 우감부(右監副)로 임명받은 적이 있어서 중국 조정의 관리 신분이었기 때문에 북경에서 추방당하지는 않았으나, 1838년 11월 2일 선종할 때까지 거의 가택연금 상태로 지냈다.7) 그러므로 당시 북경에 거주하던 서양인은 피레스 주교 혼자였다.8)

 

이러한 상황에서 피레스 주교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아무런 기별도 없이, 그리고 자신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갑자기 북경에 잠입한 사태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행위를 북경 교회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는 중대한 잘못으로 판단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을 마카오의 포교성성 대표부나 파리 외방전교회 대표부에 알리고 책임을 추궁하는 서한을 보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파리 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의 르그레주아 신부는 8월과 9월에 걸쳐서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항의하는 서한을 작성하여 보냈다. 작성 시점으로 판단하건대 아마 모방 신부의 북경 잠입에 관한 보고를 받았거나 그 이전에도 모방 신부의 행적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서한을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1834년 8월 17일에 쓴 르그레주아 신부의 편지에 실린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파리에 있는 신부님들은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의 행동을 절대로 지지하지 않습니다.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는 잘 운영되고 있는 전교회의 모든 규율을 무시하고 그들 스스로 임무를 정하려고 하여 포교성성의 지시도 어긴 셈이 되었습니다. 포교성성은 다른 신부들을 보내기 전에 주교님이 입국하셨다는 소식을 먼저 듣고자 하였습니다. 박해가 일어날까 걱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교님께서 보내신 여러 서한들, 특히 산서에서 10월 28일에 마지막으로 쓰신 서한에 따르면, 이와 같이 신중하게 처신해야 올바르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으로 알게 되신 것 같습니다.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주교님께서 그 신부들을 잘 모르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제가 주교님께 말씀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주교님은 그중 한 사람을 협력자로 삼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건전한 분별력을 가진 어떤 사람이 바로 그 신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짧게 묘사했습니다. “그 딱한 신부는 제정신이 아니며 광적인 맹신자입니다. 만약 그가 조선에 가게 된다면 혼란을 야기할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이 편지에 쓴 허튼소리를 읽고 분개했습니다.” 또 다른 신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훌륭한 자질들을 많이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계획에는 적합하지 않음을 주교님도 알고 계십니다. 저마다 부족한 것을 그들 각자에게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길!9)

 

르그레주아 신부가 편지에서 특별히 문제 삼은 사람은 바로 모방 신부였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협력자로 삼기로 한 인물은 바로 모방 신부였기 때문이다. 이 점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5년 2월 8일 서만자에서 마카오의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괄호를 쳐서 모방 신부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였기 때문에 확인된다. 물론 샤스탕 신부에 대해서도 무언가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자 했다. 하지만 집중적으로 문제점이 거론된 것은 모방 신부의 언행이었다. 또한 1834년 9월 2일에도 르그레주아 신부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의 잘못을 지적하는 편지를 보냈다.

 

저는 지난달(8월) 17일에 주교님께 편지를 보내어, 포교성성이 우리에게 조선 선교지 관할을 승인하였음을 알렸습니다. 포교성성은 선교지들을 위태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 주교님 혼자 파치피코 신부와 함께 가시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주교님이 떠나시기 전에 제가 그 점에 대해서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시겠지요. 주교님의 여정은 중국의 모든 선교지들 그리고 심지어 조선까지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방에서 포교성성과 대표부를 얼마나 비난하고 있는지요. 적어도 주교님의 두 협력자가 파치피코 신부의 입국을 기다리며 복건에 남아있기만 했더라도 그들을 도와줄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일이 더 조용하게 그리고 더 안전하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10)

 

그런데도 모방 신부는 1834년 8월 서만자에서 산서에 있던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면서 좀 더 강력한 대응을 촉구하였다. 모방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냈다고 하는 서한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여행기에서 모방 신부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1834년 8월 31일, 나는 모방 신부로부터 긴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매우 장황한 논조로 조선 교우들이 우리에게 오지 않는 이상 우리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국경지대에 정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형들을 잘 조사한 다음, 만일 타협을 통해 자리를 차지할 수 없으면 억지로라도 빼앗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모방 신부는 제일선에서 공격을 감행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그는 샤스탕 신부에게 자신의 뒤를 따르도록 권했지만 샤스탕 신부는 모방 신부와 같은 용기를 내지 않았습니다. 다소 조급하게 달단으로 갔던 점, 부질없이 위험들을 무릅썼던 점, 그리고 돌아오면서 겪은 불쾌한 일들 등이 그에게 경험을 가져다주어, 조금은 지나치게 뜨거웠던 자신의 열정을 가라앉혔던 것입니다.11)

 

그래서 샤스탕 신부는 모방 신부에게 하느님의 섭리를 앞질러 가지 말고, 조선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자는 제안을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모방 신부의 언행은 브뤼기에르 주교나 샤스탕 신부에게도 위태로워 보였다. 사실 포르투갈 선교사들, 특히 북경에 있던 피레스 주교의 행동에 대해서 더 큰 적대감을 가진 것은 모방 신부였던 것 같다. 나중의 일이기는 하지만, 조선인 신자들과 최종적인 담판을 벌여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하기로 결정된 이후인 1835년 3월 무렵에 피레스 주교는 자신의 허락 없이는 요동으로 연락원을 보내지 말라고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명령하였다. 이에 대해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사태를 해명하려고 하자, 모방 신부는 소용없는 일이며, 브뤼기에르 주교가 피레스 주교를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식의 말을 했다고 한다.12)

 

1834년 8월에야 사천대목구장 루이 폰타나(Louis Fontana, 1780~1838) 주교가 보낸 모방 신부의 배속지 변경을 허락하는 서한이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도착하였다. 그리고 1834년 10월 8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서만자에 도착하여 모방 신부를 다시 만났다. 1833년 4월 23일에 복건성 복안현을 떠난 뒤로 처음 재회한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0월 7일 서만자를 떠날 때까지 약 1년 동안 모방 신부와 함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브뤼기에르 주교는 모방 신부의 자질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2월 8일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를 비난하는 주변의 평판들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먼저 샤스탕 신부를 비판한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변호하였다.

 

사람들은 선교를 자원한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만약 누군가를 비난해야 한다면 그것은 저 한 사람뿐입니다. 샤스탕 신부를 부른 사람도 바로 접니다. 물론 제가 그 뒤에 샤스탕 신부에게 페낭에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새로운 명령이 있을 때까지 마카오에서 멈추라고 편지를 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그가 제 편지를 받아보기 전에 길을 떠나도록 허락해버리셨습니다. 그는 지금 산동에 있고, 그곳에서 사제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교우들도 그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가 중국에 혼란을 초래할까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도 늘 조선에 좋은 일들만 할 것 같습니다.13)

 

하지만 모방 신부에 대해서는 사뭇 다른 논조의 글을 써서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냈다. 그의 성격이 조금 독특하다는 것인데, 아마 신중한 면이 부족하며 지나치게 다혈질이라는 점이 선교사로서의 자질에 방해가 된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모방 신부를 원래의 임지인 사천대목구로 보낼 생각도 하였다.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동일한 서한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모방 신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방 신부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만 제외한다면 그는 거룩한 사제 그리고 훌륭한 선교사로서의 자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에게 사천으로 갈 것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저는 그를 샤스탕 신부 곁으로 보내려고 했습니다. 카스트로 신부가 그를 이 지방(역자 주 : 산동)으로 불렀거든요. 제 의도는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시험해서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더 이상 만족스럽지가 않습니다. 그는 제가 자기를 영원히 버리려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괴로워했습니다. 그가 너무나도 큰 슬픔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저는 조건도 시험도 없이 저를 따르도록 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그만 미쳐버릴까봐 염려되는 지경이었습니다. 그에게 동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동정심에서 모든 것을 허락한 것입니다.14)

 

르그레주아 신부는 애초에 브뤼기에르 주교가 모방 신부를 조선대목구 소속으로 합류시킨 것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한 바 있었다. 이에 대해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어쨌든 간에 모방 신부의 조선 선교 자원에 대해서 별로 관여한 바가 없다고 대답한다. 즉 먼저 조선으로 가겠다고 한 사람도 모방 신부였고, 브뤼기에르 주교 자신은 복건대목구장 디아스 주교의 의견을 청취한 후에 그의 조선 선교 자원을 수락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방 신부가 복건을 떠나서 북경에 입성한 것도 브뤼기에르 주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15) 어쨌든 현재 모방 신부로 인하여 큰 위험이 초래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위의 서한을 보면 브뤼기에르 주교도 모방 신부의 극단적인 성격에 대해서 우려하는 바가 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음이 모질지 못했던 탓인지 모방 신부를 원래의 임지인 사천으로 돌려보내거나 혹은 산동으로 보내서 샤스탕 신부와 함께 카스트로 신부의 지휘 아래에서 중국 선교 활동에 종사하도록 명령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두 사람은 계속 서만자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사실 브뤼기에르 주교로서는 조선인 신자들과 교섭을 벌여 조선 입국을 보장받는 것이 급선무였을 것이다. 그래서 모방 신부에 대한 처리 문제는 차후의 일로 미루어 두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로서는 샤스탕 신부나 모방 신부, 특히 모방 신부가 모험심에 가득 차서 위험한 여정에 나섰던 것을 대단히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모방 신부를 곁에 두고 있는 한 그를 조선대목구 소속 선교사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선인 신자들과 교섭할 때에도 3명이 함께 입국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 신자들은 한 사람씩 3년에 나누어 입국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하는 수 없이 브뤼기에르 주교는 모방 신부를 서만자에 남겨 두고 먼저 조선으로 입국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던 것이다.

 

 

3.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과 장례

 

서만자에 체류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월 9일 왕 요셉을 북경으로 파견하여 조선 교우들과 마지막 담판을 벌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열흘 뒤인 1월 19일에 왕 요셉은 북경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났다. 왕 요셉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교우들에게 보낸 서한을 읽어주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매우 강경한 어조로 조선 교우들이 자신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1835년 겨울에는 반드시 조선 국경으로 갈 것이며, 대목구장의 입국을 방해하는 어떤 시도도 파문당할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교황의 교령도 알려주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조선 교우들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뜻에 순종하여 1835년 겨울에 사람을 조선 국경으로 보내어 주교의 입국을 준비하겠다고 확약하였다.

 

모든 준비를 완료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모방 신부를 서만자에 남겨두고 1835년 10월 7일 조선 국경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예정대로라면 1835년 연말 변문에 도착하여 주막에 여장을 풀고 기다렸다가 조선 교우들과 상봉하여 그들의 안내를 받아 조선으로 입국할 것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를 출발할 때 동행한 사람은 중국인 라자리스트였던 고(高) 신부와 세 명의 중국인 교우들이었다. 10월 19일 마가자 교우촌에 도착한 일행은 변문으로 떠날 때까지 약 보름 정도 머물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튿날 브뤼기에르 주교는 낮 동안 휴식을 취한 뒤에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쓰러졌다. 중국인 고 신부가 급히 종부성사를 베풀었으며, 저녁 8시 10분경에 향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급서하였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마가자에서 급히 두 사람의 교우를 파견하였다. 한 사람은 산서대목구장이 있던 태원부 기현 구급촌으로 갔으며, 다른 한 사람은 서만자로 갔다.16) 서만자에 있던 모방 신부는 11월 1일에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11월 9일 마카오와 파리로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고 나서, 서만자를 떠나 마가자 교우촌으로 갔다. 그곳에서 모방 신부는 중국인 고 신부와 함께 브뤼기에르 주교의 장례를 치렀다. 그런 다음에 모방 신부는 조선 교우들이 변문으로 올 시점에 맞추어 조선 국경으로 갔다. 1836년 1월 12일 자정에 변문을 출발하여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를 통과한 그는 사흘 뒤인 1월 15일 조선의 수도 한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모방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의 장례를 치르고 조선으로 떠난 뒤 브뤼기에르 주교의 무덤은 마가자 교우촌에 남겨졌으며, 62년이 흐른 뒤인 1897년에 가서야 조선 교회에 그 위치가 알려지게 되었다. 제8대 조선대목구장이면서 초대 서울대목구장이기도 하였던 귀스타브 뮈텔(Gustave Mutel, 1854~1933) 주교가 생전에 모았던 자료들이 <뮈텔 문서>라는 이름으로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교회의 소속 사제들이 장상인 뮈텔 주교에게 보낸 연례 보고서를 비롯하여 뮈텔 주교가 수신자로 되어 있는 다양한 공문서와 사적 서한들이 그 속에 있다. 그런데 <뮈텔 문서>에는 북경의 프랑스 공사관에서 사용하던 용지에 불어로 적은 서한이 한 통 들어 있다. 발신 일자는 1897년 11월 29일이며 발신자는 마티뇽(Matignon)으로 되어 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교님,

선(腺)페스트를 연구하려고 최근에 몽고를 여행하던 중 펠리고(Pe-li-go)에서 조선의 첫 주교이셨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무덤을 촬영하였습니다.

주교님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제 임의로 사진을 보냅니다. 주교님께 지극한 경의를 표합니다.

마티뇽

 

또한 이 편지와 더불어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비를 촬영한 사진, 그리고 묘비에 적힌 날짜의 불어 번역문(도광 15e annee 8e lune 29 jour, 20 Octobre 1835, Cher Monsieur)도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의 진실성에 관한 증언”이라는 제목의 서류철 속에 들어 있다.17) 마티뇽은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관의 부속 의사였다. 그는 1879년 4월에 조선을 방문하여 프랑스 공사관에서 뮈텔 주교를 만났으며,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백신 주사를 놓아준 적이 있었다.18) 아마 그 뒤에 조선을 떠나 북경으로 돌아가던 길에 몽골 지역을 여행하였으며, 펠리고, 즉 마가자 교우촌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무덤을 발견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마티뇽이 묘비만을 가지고 그 무덤의 주인을 브뤼기에르 주교라고 단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묘비에는 직접적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지칭하는 어떠한 표식도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티뇽이 조선에 체류하는 동안에 뮈텔 주교로부터 만약 몽골에 가게 된다면 브뤼기에르 주교의 무덤을 찾아봐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마가자 교우촌에서 그 무덤이 생기게 된 연유를 중국인 교우들로부터 전해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좌우간 마티뇽의 연락을 통해서 조선 교회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1931년에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국내로 송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브뤼기에르 주교의 옛 무덤 자리에 있던 묘비는 마가자 교우촌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묘비는 2006년에 와서 마가자 교우촌에서 약20리 떨어진 어느 마을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당시 서울대교구 개포동 본당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 활동을 벌이면서 마가자 교우촌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마가자 천주당의 중국인 사제 이금도(李金濤) 신부가 개포동 본당 주임 염수의 신부에게 묘비를 발견한 사실을 알려왔다고 한다.19) 2006년에 재발견된 묘비가 마티뇽이 촬영한 바로 그 묘비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사람은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소장이었다. 아마 묘비의 외형도 큰 손상 없이 보존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묘비에 새겨진 구절이 똑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묘비의 상단에는 가로로 “수탁”(首鐸)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세로로 “소공지묘”(蘇公之墓)라고 되어 있으며, 다시 묘비의 우측 끝에 “도광 15년 8월 29일 세움”(道光 十五年 八月 二十九日 立)이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묘비명에는 두 가지 의문이 숨어 있다. 첫째는 묘비 중앙에 세로로 새겨진 ‘소공지묘’라는 구절이다. 여기서 소공은 브뤼기에르 주교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그의 한자 이름이 왜 소(蘇)로 되어 있는 것일까? 과연 브뤼기에르 주교 본인이 선택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임의로 새긴 것일까? 둘째는 묘비 우측에 세로로 새긴 ‘도광 15년 8월 29일에 묘비를 세움’이라는 표현이다. 8월 29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20일이 된다. 그러니까 묘비에 새겨진 날짜는 묘비를 세운 날이 아니라,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한 날이다. 왜 모년 모월 모일에 묘비를 세운다고 하면서 선종한 날짜를 새겼을까?20)

 

이 의문점들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장례 미사를 집전하고 장례식 전반을 주관한 모방 신부의 증언을 찾아보아야 한다. 모방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후인 1836년 4월 4일 한양에서 파리의 지도자 신부들에게 서한을 보냈다. 자신의 조선 입국이 성공하였음을 알리고, 입국 초기의 활동 내용을 보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에 입국하기 전에 마가자 교우촌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장례를 어떻게 거행했는지를 간단히 설명하는 구절이 서한의 전반부에 들어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갑사의 주교님께서 돌아가신 몽골의 펠리쿠 마을에 제가 도착한 다음 날이었습니다. 저는 주교님을 모시고 함께 길을 떠났던 중국인 고 신부와 함께 주교님의 유해를 방문하였습니다. 우리는 주교님의 관 옆에서 만과(晩課)의 청원기도 중에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를 함께 바쳤습니다. 그다음 날 저는 고 신부와 함께 주교님 영혼의 안식을 위한 예절을 거행하였습니다. 마을 신자들이 거의 모두 참석하였습니다. 그런 뒤에 사람들은 주교님을 매장할 장소를 알려주려고 묘지 혹은 신자 묘역(축성되지는 않았습니다)으로 저를 안내하였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이 일이 너무 무신경하게 진행되었다고 놀라실지 모르겠습니다. 망연자실함이 긴급함과 뒤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저를 대신하여 그 일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한 달 전부터 기다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느 산의 북쪽 경사면에 위치한 신자 묘역 가운데에 구덩이를 팠습니다. 이 산의 주인은 창히(Tchang hi)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산서의 선한 신자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는 서만자에서 150리외(lieues, 600킬로미터) 떨어진 산서 지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주교님을 모시고 서만자에서 변문까지 가려고 왔던 사람입니다. 11월 20일 사람들은 주교님의 유해를 창히의 경당 가운데로 옮겼습니다. 그곳은 주교님께서 묵으셨고 또 돌아가신 곳이며, 당시 제가 머물던 곳입니다. 거룩한 동정녀의 현현 축일이었던 토요일에 우리는 최대로 장엄하게 예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 예식에는 마을과 인근의 신자들이 모두 참석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는 여타의 모든 장례 예식들을 관례적인 전례에 따라서 우리에게 허락된 만큼 거행하였습니다. 저는 창히와 그 가족에게 주교님의 무덤에 비석을 잘 세워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 비석에는 주교님의 한자 이름인 소(蘇, Sou) 자를 새기고, 교회가 허락한 그분의 지위, 나이, 그리고 돌아가신 연도도 함께 새겨 넣도록 하였습니다.21)

 

위의 서한을 보면 브뤼기에르 주교의 무덤에 묘비를 세우도록 주선한 사람이 모방 신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방 신부가 직접 묘비에 새길 구절들을 지정해 주었음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즉 교회가 허락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지위가 초대 조선대목구장이었기 때문에 묘비 상단에 ‘수탁’이라는 구절을 새겼고, 브뤼기에르 주교의 한자 이름을 담아서 ‘소공지묘’로 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 일자를 새기라고 하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선종 일자는 그대로 적으면서 끝에 립(立) 자를 추가하였다. 중국 현지에 남아 있는 유럽인 주교의 묘비들을 살펴보면 대개 묘비의 중앙에 중국식으로 ‘○○○之墓’라고 새기고, 좌우에 주교의 약력과 선종 일자 그리고 선종 당시의 나이를 적고 있다.22) 그런데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비는 그렇게 상세하게 기록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모방 신부가 떠난 뒤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약력을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모방 신부가 지시한 바에 따라서 소략한 형태의 묘비를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위에서 제기했던 두 가지 의문 중에서 연도에 관한 것은 어느 정도 해명이 된 셈이다. 그렇다면 첫째 의문, 즉 브뤼기에르 주교의 한자 이름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되고 난 뒤 조선으로 가기 위하여 길을 떠나서 마카오에 도착하였을 때 왕 요셉을 파견하여 조선 교우들에게 보낸 첫 사목 서한이 있다. 이 사목 서한은 라틴어본23)과 한문본24), 이렇게 두 종류가 남아 있다. 한문본에는 1832년 윤 9월 26일로 서명 날짜가 나와 있다.25) 한문본 서한을 보면 브뤼기에르 주교의 한문 서명은 려국 정주교 파이다록무(巴爾多祿茂)로 되어 있다. 아마 바르톨로메오라는 이름의 발음을 따서 한자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목 서한을 한문으로 적은 사람이 그의 한자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목 서한은 북경에 갔던 조선 교우들을 통해서 조선 교회에 전달되었다. 유진길 등이 1833년 음력 10월 25일(양력 12월 6일)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낸 두 통의 서한을 보면 사목 서한의 수령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 첫째 서한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를 ‘본목 주교 노야’(本牧 主敎 老爺)라고 지칭하였고,26) 둘째 서한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를 ‘본목 사교 노야’(本牧 司敎 老爺)라고 불렀다.27) 그러므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한자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목서한을 받았다는 답신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브뤼기에르 주교의 한자 성을 파(巴)로 이해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조선에 들어와 있던 유 파치피코 신부가 1834년 무렵에 브뤼기에르 주교와 왕 요셉에게 보낸 한문 서한에도 여실하게 나타난다.28) 즉 유 파치피코 신부는 그 서한의 서두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파목’(巴牧)이라 부르고, 왕 요셉을 ‘왕형’(王兄)이라고 불렀다. 파목은 바르톨로메오 주교라는 뜻을 담은 표현이라 하겠다. 또한 남이관 등이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낸 1834년 말 무렵의 서한에서도 말미에 수신자의 이름을 적으면서 ‘파 은부 대인 근전’(巴 恩父 大人 ?前)이라고 불렀다.29) 이 역시도 조선에서는 여전히 브뤼기에르 주교의 한자 성을 ‘파’라고 여겼음을 보여준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의 교우 및 유 파치피코 신부와 위의 서한을 주고받을 때는 서만자로 거처를 옮기기 이전이었다. 즉 마카오에서 시작하여 산서대목구장의 주교관에 머물던 시기까지이다.

 

그런데 유진길, 조신철, 김 프란치스코가 공동으로 교황에게 올린 1835년 음력 1월 19일 서한을 보면 브뤼기에르 주교를 ‘소 주교’(蘇 主敎)로 지칭하는 구절이 나온다.30) 즉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에 체류하면서 조선 교우들과 연락할 때부터 자신의 한자 이름을 ‘소 주교’로 적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에서 1834년 사이에 자신의 성을 한자로 표기할 때 ‘파’(巴)로 적었다. 그러다가 서만자에 있을 때부터 자신의 성을 ‘소’(蘇)로 적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31) 그래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한을 받았던 유진길 등이 교황에게 올린 서한을 작성할 때 자신들의 주교를 ‘소 주교’로 적었던 것이다. 또한 서만자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와 1년 정도 함께 생활했던 모방 신부 역시 브뤼기에르 주교가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표현할 때 ‘소’라고 적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한 뒤에 묘비를 세울 때 ‘소공지묘’(蘇公之墓)로 새기도록 지시하였던 것이다.

 

 

4. 직무대행 임명설에 대한 재검토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장례를 마친 모방 신부는 조선인 신자들이 브뤼기에르 주교를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한 길을 따라서 조선으로 입국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을 돌이켜 보자. 서만자에 있던 모방 신부는 마가자로 가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매장한 뒤에 어떻게 행동했어야 하는 것일까? 조선 입국을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인식하고, 이미 조성된 조건을 활용하여 브뤼기에르 주교를 대신하여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이 급선무였을까? 아니면 조선대목구 소속 선교사로서 장상의 선종과 대목구장 유고 상황을 마카오, 파리, 로마 등지에 보고하고 새로운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서만자에서 대기하고 있었어야 하는가? 모방 신부는 전자의 방식을 선택했다.

 

모방 신부의 선택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과연 그는 어떤 자격으로 조선에 들어간 것인가? 그리고 조선에서 모방 신부가 펼쳤던 성사 활동들은 어떤 교회법적 근거 위에서 행해진 것이었을까?32) 이 문제에 관하여 최초로 언급한 연구자는 최석우 몬시뇰이었다. 그는 1960년 독일 본 대학교에 제출한 박사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많은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현명하게도 미리 모방 신부를 지명하여, 필요하다고 판명될 경우에 대목구장의 직무를 대행할 수 있도록 모든 권한을 위임해 두었다.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사망한 사실을 확인하자, 대목구장 직무대행이라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서둘러 조선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모방 신부는 1835년 말 마침내 조선에 입국하게 되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를 입국시킬 목적으로 마련해 두었던 모든 예비 조치들을 활용한 결과였다.33)

 

최석우 몬시뇰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서 교황청 포교성성 문서 두 가지를 인용하였다. 첫째 문서는 포교성성에서 중국과 동인도 주변국들의 사건들을 다룬 특별 회의 회의록(Acta Congregationis Particularis de rebus Sinarum et Indiarum Orientalium, ACP)이었다. 즉 해당 지역교회에 관한 안건들을 상정하고 논의를 진행한 결과를 회의록으로 정리한 것이다. 하지만 이 문서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모방 신부를 대목구장 직무대행(Provicarius)으로 임명하였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들어 있지는 않다.34) 오히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한 뒤에 모방 신부가 조선으로 들어간 행위를 사후적으로 추인하는 성격이 강했을 수 있다. 또한 둘째 문서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장상이었던 뒤부아(Dubois, 1766~1848) 신부가 포교성성에 보낸 1836년 7월 19일 서한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 사실과 모방 신부의 입국 사실이 보고되어 있지만, 모방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에 의해서 임명받은 조선대목구장 직무대행이라는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35)

 

그 밖에 브뤼기에르 주교가 모방 신부를 조선대목구장 직무대행으로 임명하였음을 뒷받침한다고 말할 수 있는 문헌 자료로는 앵베르 주교의 서한이 있다. 앵베르 주교는 산서에서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837년 10월 10일 서한에서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와 만난 사실을 전하면서 유방제 신부가 조선을 떠나게 된 이유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생존 시에 대목구장 직무대행으로 임명한 모방 신부가 포교성성에 보고하였을 것이라고 말한다.36) 그리고 같은 날 산서에서 파리 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의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브뤼기에르 주교가 모방 신부를 대목구장 직무대행에 임명했었다는 말을 하였다.37)

 

그런데 정작 모방 신부 자신은 조선에 입국한 뒤부터 시작하여 앵베르 주교가 입국할 때까지 보낸 서한들에서 자신을 한 번도 조선대목구장 직무대행이라고 지칭한 적이 없다. 항상 ‘조선 선교사’(missionarius Coreae)라고 서명을 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직무대행에 임명되었고, 그에 상응하는 권한들을 받았다면 당연히 후임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할 때까지 그러한 직함을 사용하였을 것인데, 전혀 그런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 또한 모방 신부가 훗날 조선에 입국하여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와 모종의 갈등을 보인 뒤에 성무 집행 정지처분을 내렸음을 보고하는 서한에서도 자신이 대목구장 직무대행의 자격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말한 적이 없다.38)

 

더욱 이상한 것은 서만자에 있던 모방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 소식을 듣고 마가자로 떠나기 전에 쓴 서한에 실린 내용이다. 이 서한은 마카오의 르그레주아 신부와 파리의 지도자 신부들에게 공동으로 보낸 1835년 11월 9일 서한인데,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 소식을 알리는 부고 서한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모방 신부는 자신이 앞으로 취하게 될 행동, 즉 브뤼기에르 주교를 대신하여 조선으로 입국하려는 계획이 합당한 결정이라는 점을 대단히 길게 변명하였다. 모방 신부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친애하는 동료 신부님 여러분, 저희는, 특히 이 소식을 먼저 접한 저로서는, 이토록 어려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샤스탕 신부와 그것에 대해 협의하여 의논하는 것은 저로서는 불가능했습니다. 저는 즉시 그에게 편지를 써 보내서 주교님 대신에 그곳에 가서 다음 12월 말에 조선에 들어가도록 권유할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느 정도 서두른다 하더라도 제 편지는 빨라야 11월 17일경에 그에게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인들에 의해 결정된 시기에 변문에 가기에는 더 이상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회가 단지 3일밖에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게다가 그가 변문에 정해진 시기에 갈 수 있는 시간이 있다고 했을 때에, 만약 다른 사람이 없다면 저라도 그곳으로 갈 의향이 있고 또 가야만 한다고 가정할 경우에, 샤스탕 신부가 실질적으로 어떠한 일도, 어떤 지병도, 제 편지를 받자마자 즉시 떠나는 데에 그를 방해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지 저는 확신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지체된다면 기회를 놓쳐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제안을 그에게 보내고 나서 제가 서만자에 있는 동안 그가 떠날 것이라고 여기다가 그 후에 그가 변문에 가지 못하게 된다면 조선인들이 오든지 오지 않든지 간에 올해의 기회는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경하올 갑사 주교님께서 선종하신 후에 우리들 중 한 사람이 입국할 수 있는 이 기회를 이용해야만 한다면 제가 떠나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친애하는 동료 신부님들, 저는 이런 마음으로 월요일에 서만자를 떠나 공경하올 갑사 주교님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따라 조선 교우들이 지정한 시기에 변문에 가 있을 것이고 주교님을 대신해서 조선에 입국할 것입니다. …부탁드리건대 되도록 빨리 갑사 주교님의 후계자를 저희에게 보내주십시오.39)

 

위의 서한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왜 모방 신부가 샤스탕 신부에게 먼저 조선으로 가도록 권유할 생각도 있었다고 말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모방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대목구장 직무대행에 임명되었다면 구태여 샤스탕 신부에게 상의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대목구장 유고 상황에서 직무대행의 자격으로 사태를 판단한다면, 현실적으로 조선 입국이 가능하고 또 조선대목구의 장상이기 때문에 본인이 먼저 입국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모방 신부는 자신이 브뤼기에르 주교를 위하여 준비해 놓은 입국로를 이용하여 조선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장황한 어조로 변명을 하고 있다. 이것은 모방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직무대행에 임명된 적이 없었다는 주장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모방 신부의 조선대목구장 직무대행 임명설에 의혹을 갖게 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마카오 대표부의 르그레주아 신부가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에게 공동으로 보낸 1836년 3월 4일 서한에 담겨 있다. 당시 르그레주아 신부는 모방 신부가 1835년 11월 9일에 보낸 서한을 받았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가자에서 선종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하지만 아직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이 서한에서 르그레주아 신부는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에게 조선으로 입국하려고 너무 조급하게 서둘지 말 것을 조언하였다. 즉 포교성성과 파리 본부의 지시가 있은 후에 행동하라고 지시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대목구장 유고라는 상황에서 조선대목구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권한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대목구장 사망 이후에는 재치권이 총대리(vicaire general)40) 신부에게 귀속됩니다. 만약 여러 명이 있다면 처음으로 임명된 신부에게 재치권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낸 교령의 제1장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이 총대리 신부는 주교님 자신에게 부여된 상시적 그리고 비상시적 특별 권한들을 모두 지니게 됩니다.41)

 

르그레주아 신부의 용어법을 그대로 따르면서, 그리고 조선대목구 소속 선교사로 임명된 순서를 염두에 둔다면 조선대목구의 총대리는 샤스탕 신부여야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샴 대목구 소속이었던 샤스탕 신부가 장상인 플로랑(Esprit Florens, 1762~1834) 주교로부터 임지를 옮겨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페낭을 출발한 것(1833년 5월)이 모방 신부가 사천대목구장 폰타나 주교로부터 동일한 허락을 받은 것(1834년 8월)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즉 조선대목구 소속 선교사로 먼저 임명된 것은 샤스탕 신부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모방 신부는 서만자에서 미리 조선으로 입국하기로 결심하기 이전에 샤스탕 신부와 의논했어야 하고, 또 마카오를 경유하여 포교성성과 파리 본부의 판단을 기다렸어야 한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이 준비한 길이 과연 모방 신부나 샤스탕 신부에게도 열려 있는지에 대해서 르그레주아 신부는 최소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방 신부는 자신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서 조선 입국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르그레주아 신부는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 가운데 누가 선임자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신자의 이름을 쓰는 순서는 샤스탕 신부를 먼저 쓰고 모방 신부를 나중에 쓴 것을 보면 샤스탕 신부를 선임자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하겠다.

 

어쨌든 르그레주아 신부의 서한은 모방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대목구장 직무대행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하는 충분한 사유가 된다. 만약 브뤼기에르 주교가 모방 신부를 대목구장 직무대행으로 임명하였다면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어야 할 사람은 르그레주아 신부였다. 왜냐하면 파리 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를 책임지고 있었고, 따라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여 파리 본부와 로마 포교성성에 보고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그레주아 신부는 대목구장 사망 이후 재치권의 향방에 관하여 위와 같이 불명확하게 진술하였다. 그렇다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모방 신부를 대목구장 직무대행에 임명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이 사실을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후자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조선대목구 운영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마카오 대표부에 알리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까지 널리 인정받았던 모방 신부의 조선대목구장 직무대행 임명설은 그 신빙성이 매우 의심스러우며, 앞으로 확실한 문헌상의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유보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모방 신부의 대목구장 직무대행 임명설과 무관하게 브뤼기에르 주교와 르그레주아 신부가 긴밀하게 교감하면서 준비한 일은 대목구장직의 계승권을 지닌 부주교를 선발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일찍부터 사천대목구의 앵베르 신부를 눈여겨보면서 조선대목구의 부주교이자 자신의 계승자로 지명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산서에 체류하던 시기에 포교성성 마카오 대표부의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1834년 6월 5일 서한을 통해 앵베르 신부는 모든 면에서 보기 드문 인물이며 어느 선교지에서도 그러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칭찬하면서, 대목구장에 부여된 모든 권한을 기록한 서류를 앵베르 신부에게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42) 그리고 움피에레스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서 근무하고 있던 르그레주아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낸 1834년 9월 21일 서한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요청대로 앵베르 신부에게 권한집을 모두 보냈다고 말한다.43) 그러므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대목구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한 계승자로서 사천대목구에서 활동하던 앵베르 신부를 지목하였고, 르그레주아 신부 및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요청하여 그를 조선대목구의 부주교로 임명하는 문제를 파리, 로마, 사천 등지와 상의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로 앵베르 신부는 1836년 4월 26일 주교로 승품되었으며, 1837년 12월 18일 제2대 조선대목구장의 자격으로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모방 신부 혹은 앵베르 주교의 입국으로 조선대목구 설정의 교회법적 유효성이 확정되었다는 주장에 대한 재검토이다.44) 조선 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준교구로서 대목구가 설정되는 과정의 교회법적 의미를 다룬 연구에 따르면, 대목구장의 법적 취임은 자기의 임명장을 친히 또는 대리인을 통해 그 지역을 통할하는 자에게 제시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한다. 만일 신설된 대목구에 임명된 초대 대목구장인 경우에는 그때까지 관할권을 가지고 있던 자에게 임명장을 제시하면 된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북경에 있던 남경교구장 겸 북경교구장 서리 피레스 주교에게 왕 요셉을 보내어 자신의 임명 사실을 통고하였다. 피레스 주교가 이것을 인정하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법적으로 조선대목구장에 정식으로 취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단 취임하면 즉시 대목구장의 전권을 행사할 수 있다.45) 따라서 대목구장이 임지에 부임하고 착좌함으로써 대목구의 신설이 유효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조선대목구 설정 칙서 자체에 이미 결정적 유효성을 공표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즉 칙서의 결정에 반대되는 어떤 법령도 무효라는 조항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46) 그렇다면 설사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음모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조선대목구 설정 자체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47) 조선대목구 자체를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맡기로 한 이상,48) 브뤼기에르 주교를 보좌할 동료 선교사와 후임 주교는 계속 파견될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대목구 설정의 교회법적 유효성은 이미 확정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왜 브뤼기에르 주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자신의 조선 입국을 방해함으로써 조선대목구 설정을 좌절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여겼을까? 브뤼기에르 주교는 북경교구장 겸 남경교구장 서리 피레스 주교의 행동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피레스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들어갈 때까지 조선에 대한 재치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사실을 교황청에 알리면서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서에서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834년 9월 20일 서한을 통해서, 자신이 볼 때 피레스 주교의 생각은 교회법에 부합하지 않지만 지나친 갈등을 촉발할까 두려워 묻어두고 있는 사안이라고 하면서 포교성성 장관에게 분명한 판결을 내려달라고 요청하였다.49) 만약 피레스 주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브뤼기에르 주교로서는 조선에 들어갈 수 있는 가망이 도무지 없기 때문에 철수하겠다는 말까지 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답변을 얻기도 전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종하고 말았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한 뒤에 작성된 교황청의 1836년 6월 18일 서한에서도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의 장상은 브뤼기에르 주교이고, 따라서 유방제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순명하여야 한다는 사실만을 기록하였을 뿐이다.50) 피레스 주교와의 관계에서 조선대목구장의 재치권이 어느 시점부터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을 제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목구장의 법적 취임에 관한 기존 연구를 참고한다면, 또한 조선대목구 설정 칙서에 담긴 법적 유효성에 관한 규정을 신뢰한다면, 브뤼기에르 주교, 혹은 모방 신부나 앵베르 주교의 입국이 성공한 이후에야 조선대목구의 설정이 확정되는 것이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따라서 모방 신부나 앵베르 주교의 입국으로 말미암아 조선대목구 설정의 교회법적 유효성이 성립되었다는 말 역시 모방 신부의 직무대행 임명설과 마찬가지로 재고되어야 한다.

 

 

5. 결론

 

2015년 10월 20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가자 교우촌에서 선종한지 180년이 흘렀다. 그날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지가 있는 용산 본당에서는 선종 180주기 추모 및 현양 대미사를 거행하였다. 또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도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180주기를 맞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간행을 준비하고 있다.51) 기존에 공개된 서한들과 더불어 아직 공개되지 않은 나머지 서한까지 합쳐서 대역본의 형태로 2016년 8월에 간행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한 교회사 사료들이 정리되어 자료집으로 간행된다면 그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지리라 기대한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대목구장이었다는 상징적인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그를 기리고 현양해온 것이 지금까지의 분위기였다면, 이제 그의 행적과 업적에 대하여 좀 더 정밀하면서도 학문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본고의 내용도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주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행적과 관련하여 기존에 제출된 바 있는 몇 가지 통설들을 되묻는 작업이었다. 우선 모방 신부의 중국 활동과 관련하여 당시 중국 교회와 마카오 대표부 등지에서 제기한 문제점들과 이에 대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장을 살펴보았다.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필요 이상으로 공격적인 태도와 신중하지 못한 행동을 보였고, 이것이 북경에 있던 피레스 주교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파리 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의 르그레주아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어 모방 신부의 행동이 지닌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 역시 모방 신부가 지녔던 선한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의 자질과 태도에 대해서는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우려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모방 신부를 원래 임지였던 사천대목구로 보내는 방안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로서는 조선 입국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모방 신부에 대한 조처는 차후의 일로 미루어 둔 채 서만자를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다음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한 뒤에 있었던 장례 등 사후 처리 과정에서 모방 신부가 맡았던 역할에 관하여 조명하였다. 특히 장례 미사 거행 및 매장, 그리고 묘비 제작 등에 관여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모방 신부의 서한에 따르면 그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장례 미사를 거행한 다음, 산서에서 온 중국인 교우 창히라는 인물이 소유하고 있던 산의 묘역에 매장하였다. 그리고 모방 신부는 조선으로 가기 위하여 마가자 교우촌을 떠나면서 그 묘비에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한자 이름과 지위, 선종 날짜를 새겨달라고 요청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한자 성을 소(蘇) 씨로 한 것은 모방 신부의 지시 사항이었지만, 이미 브뤼기에르 주교와 연락을 주고받은 조선인 교우들의 서한에도 그렇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서만자에 체류하던 시기에 브뤼기에르 주교 본인이 그 성을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론에서 다룬 세 번째 통설은 모방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에 의해서 조선대목구장 직무대행으로 임명되었고, 그 자격으로 조선에 입국하였다는 주장이다. 또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이 좌절되면 조선대목구 설정 자체가 무효로 돌아갈 위기 상황이었는데, 모방 신부가 조선 입국에 성공함으로써 법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주장도 직무대행 임명설의 연장선 위에 존재한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모방 신부를 직무대행에 임명하였다고 보고하는 서한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조선 입국 과정에서 모방 신부가 취한 행동으로 볼 때에는 과연 조선대목구장 직무대행에 임명된 것인지를 의심케 하는 정황이 여러 군데에서 드러난다. 더구나 파리 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의 르그레주아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 소식을 접한 뒤에 발송한 서한에서 조선대목구의 재치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보아도 직무대행 임명설은 의심스럽다고 하겠다. 아울러 조선대목구 설정의 교회법적 효력이 발생하는 시점에 관해서도 통설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미 조선대목구 설정 칙서 자체에 결정적인 유효성이 선포되어 있는 만큼, 그리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대리자를 북경으로 파견하여 북경 주교에게 자신의 임명 사실을 통고하였으므로 조선대목구 신설 문제는 법적으로 해결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모방 신부나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비로소 조선대목구의 설정이 유효하게 되었다는 식의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

 

이제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한 연구에서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몇 가지 제시하면서 글을 끝맺고자 한다. 첫째,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를 자원하고 나선 경위에 대한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한다. 과연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교회를 어떤 계기로 알게 되었으며, 왜 샴 선교사로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조선으로 갈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당시 샴 대목구는 어떠한 상황이었으며, 브뤼기에르 주교는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도 이루어져야 한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1829년 4월 중순에 작성한 서한에는 샴 왕국에 대한 민족지(ethnography) 서술이 실려 있다. 그 속에서 상당히 자세하게 선교 지역을 관찰하고 연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52) 그러므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샴 대목구에서 어떤 활동을 하였으며, 또 선교 지역의 문화나 관습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했는지를 연구한다면 비록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했지만 어떤 비전을 가지고 조선 선교에 나섰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만자 체류 과정은 한국 교회사만이 아니라 중국 교회사와 관련해서도 연구할 가치가 있다. 그는 조선으로 가기 위하여 중국 대륙을 종단하던 시기에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비협조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사목 활동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산서와 서만자에서 체류한 기간에는 비교적 안정된 조건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과 조선의 천주교에 관한 역사적인 문헌들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사목 방침을 수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프랑스 선교수도회(CM) 소속의 선교사들(일명 라자리스트)이 건설한 서만자 선교지에는 관련 문헌 자료들이 다수 모여 있었을 것이며,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를 활용하여 조선과 중국의 천주교 역사를 파악하였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므로 당시 서만자 교우촌은 어떤 상황이었고, 선교지로서 어떤 시설을 갖추고 있었는지를 연구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선교와 관련한 구상들을 파악하는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셋째, 브뤼기에르 주교의 행적 가운데 아직 밝혀지지 않은 대목이 여럿 남아 있다. 복건대목구나 산서대목구와 관련한 행적과 도착 지점 등은 어느 정도 해명되었다.53) 하지만 복건을 출발한 브뤼기에르 주교가 도착한 절강성 북쪽의 항구 이름은 사포(乍浦)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며 아직 정확하게 입증된 것은 아니다.54) 뿐만 아니라 양자강과 황하를 건너서 이동하였던 경로, 그리고 직예 지방에 도착했을 때 잠시 머물었던 교우촌의 이름 등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앞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교회를 위하여 이룬 업적이나 그 개인의 성덕 등에 대한 연구들이 제출되겠지만, 이와 더불어 그의 행적과 중국 여행 경로에 대한 정밀한 규명 작업도 계속 필요하리라고 본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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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우,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de Moidrey, Joseph, La Hierarchie Catholique en Chine, en Coree et au Japon(1307-1914), Zi-Ka-Wei(Chang-Hai) : Imprimerie de l’Orphelinat de T’ou-Se-We, 1914.

Thomas, A., Histoire de la Mission de Pekin : depuis l’arrivee des Lazaristes jusqu’a la Revolte des Boxeurs, Paris : Louis-Michaud,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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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MEP : Vol. 579, f. 127.

2)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39 · 41 · 85쪽 참조.

3) 위의 책, 75쪽.

4) 위의 책, 101~103쪽.

5) 위의 책, 233쪽.

6) 위의 책, 257쪽.

 

7) A. Thomas, Histoire de la Mission de Pekin : depuis l’arrivee des Lazaristes jusqu’a la Revolte des Boxeurs, Paris : Louis-Michaud, 1925, pp. 112~115 참조.

 

8) 피레스 주교와 함께 있던 세라 신부가 1826년 10월 초에 북경을 떠나 마카오로 가고, 리베이로 신부가 1826년 10월 14일에 선종한 뒤로 북경에는 피레스 주교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1835년 물리 신부가 북경에 도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9) AMEP : Vol. 321, f. 107.

10) AMEP : Vol. 321, f. 133.

11)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271쪽.

 

12) 주교님은 결코 남경 주교(페레이라 주교)의 답장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남경 주교님은 전에도 주교님께 편지를 쓰지 않았으니까요. 그의 말은 아무런 소용없는 실없는 언변입니다. 주교님께서는 그분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405쪽).

 

13) AMEP : Vol. 579, f. 117.

14) ibidem.

 

15)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한을 받은 르그레주아 신부는 모방 신부의 말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는 기록을 남겼다. 즉 모방 신부는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명령에 따라서 복건을 출발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AMEP : Vol. 303[Procure de Macao 1824-1838], f. 689). 이런 사실들로 인하여 마카오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나 샤스탕 신부보다 모방 신부가 더 큰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16) 브뤼기에르 주교의 부고를 전하러 두 명의 연락원이 각각 산서와 서만자로 파견되었다는 사실은 산서대목구의 알폰소 데 도나타(Alphonso de Donata) 부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랑글루아 신부에게 보낸 1835년 10월 서한에 나타나 있다. AMEP : Vol. 577, f. 451.

 

17) 개포동 성당 현양위원회 편,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 사업의 징검다리 : 현양 사업과 이장기, 그리고 순례길》, 천주교 개포동 성당, 2006, 56~59쪽.

 

18) 천주교 명동교회 편, 《뮈텔 일기 II(1896~1900)》,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170 및 172쪽.

19) 개포동 성당 현양위원회 편, 앞의 책, 36~37쪽 참조.

 

20) 사실 이 두 가지 의문점을 처음 제기한 것은 필자가 아니라 창원대학교 사학과 도진순 교수이다. 도진순 교수는 필자가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재직할 때 연구소로 전화를 걸어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비명에 대한 의문점 두 가지를 질의하였다. 관련 사료를 제대로 검토하지 못했던 필자는 도진순 교수의 질문에 아무런 답변도 드리지 못했다. 시일이 한참 흐른 뒤에야 이 문제를 다시 다루게 되었음을 도진순 교수께 지면을 통해 보고 드린다.

 

21) AMEP : Vol. 1260, f. 78.

 

22) Joseph de Moidrey, La Hierarchie Catholique en Chine, en Coree et au Japon(1307-1914), Zi-Ka-Wei(Chang-Hai) : Imprimerie de l’Orphelinat de T’ou-Se-We, 1914, pp. 54~59 참조.

 

23) AMEP : Vol. 579, ff. 91-93. 그런데 이 라틴어본은 사본인데, 서명한 날짜가 1832년 윤6월 26일(1832 die 26 mens Junii intercalaris)로 되어 있다. 이 날짜는 아마 음력인 것 같지만, 원래 동아시아에서 사용하는 음력 날짜를 라틴어로 적을 때 이런 식으로 적지 않는다. 6월이라면 ‘sexta luna’라고 적었을 것이다. 게다가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카오에 도착한 것은 1832년 10월 18일이었다. 그러므로 사목 서한을 적은 날짜는 10월 이후가 되어야 맞다. 아마 한문본 서한을 라틴어로 옮기면서 벌어진 착오인 것 같다.

 

24)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목 서한 한문본은 정양모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가톨릭출판사, 2007, 353~356쪽에 실려 있다. 출처는 파리 외방전교회 문서고 소장 한국 관계 문서철 제579권 91-93폴리오로 되어 있다. 하지만 확인 결과 그것은 라틴어 필사본의 출처이다. 그러므로 그 책에 실려 있는 한문본의 출처는 아직 불분명하다.

 

25) “降生 一千八百三十二年 閏 菊月 二十六日”로 되어 있다. 이 날짜를 음력으로 보고 양력으로 환산하면 1832년 11월 18일이 된다. 그렇다면 라틴어본의 날짜 오류가 정확하게 바로 잡힌다.

 

26) Congregazione per l’Evangelizzazione dei Popoli, Archivio Storico : Fondo SOCP, Vol. 76, f. 405.

27) Congregazione per l’Evangelizzazione dei Popoli, Archivio Storico : Fondo SC Cina e Regni adiacenti, Vol. 8, f. 333.

28) AMEP : Vol. 577, f. 277.

29) AMEP : Vol. 577, f. 299.

30) Congregazione per l’Evangelizzazione dei Popoli, Archivio Storico : Fondo SOCP, Vol. 76, f. 498.

31) 하지만 왜 ‘소’(蘇) 자를 자신의 한자 성으로 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

32) 조현범, <특별 권한(Facultates) 연구 : 브뤼기에르 주교의 경우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38,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63쪽.

33) 최석우,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151쪽.

 

34) Congregazione per l’Evangelizzazione dei Popoli, Archivio Storico : Fondo Acta CP, XXII, f. 174v. 해당 원문은 다음과 같다. “Questo incidente avrebbe potuto portare un grave disordine in questo affare, ma il defonto Vicario Apostolico aveva gia avuta la providenza di accordare per il caso tutte le facolta necessarie al Missionario Francese Sig. Mauband, perche potesse prendere il governo della Missione, e questo sentita la morte di quel Prelato si affretto di correr subito al suo posto per sostenere il peso di Pro-Vicario.”

 

35) Congregazione per l’Evangelizzazione dei Popoli, Archivio Storico : Fondo SOCP, Vol. 76, ff. 431r-431v.

36) 수원교회사연구소 엮음, 《앵베르 주교 서한》, 하상출판사, 2011, 170~171쪽.

37) 위의 책, 178~179쪽.

 

38) 원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Episcopi, pastorisque vices gerere debens non potui non manifestare vobis filiis dilectis spiritualibus hoc fratris nostri negotium”(Congregazione per l’Evangelizzazione dei Popoli, Archivio Storico : Fondo Acta CP, Vol. XXII, f. 269r). 이 구절을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다. “저는 주교와 목자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지극히 사랑하는 영적 아들인 여러분에게 우리 형제의 이 문제를 공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보다시피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한다고 하였을 뿐이지 대목구장 직무대행으로서 공표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39) AMEP : Vol. 1260, ff. 57-59.

 

40) 엄밀하게 말하면 르그레주아 신부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정식 교구일 경우에만 교구장이 교구를 통할하기 위하여 총대리를 임명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식 교구가 아닌 대목구일 경우에는 총대리를 임명할 수 없었다. 대신에 대목구장 직무대행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대목구장에게 부여하였다. 정진석, <초기 한국교회의 교계적 구조의 역사와 그 해설>, 《신학전망》 55, 1981, 34~35쪽.

 

41) AMEP : Vol. 303(Procure de Macao 1824-1838), f. 808.

 

42) Congregazione per l’Evangelizzazione dei Popoli, Archivio Storico : Archivio della Procura(Canton/Macao/Hong Kong), Vol. XX, f. 81.

 

43) AMEP : Vol. 321, f. 154.

 

44) 필자 역시 조선대목구 설정의 법적 유효성에 관하여 유사한 주장을 개진한 바 있었다(조현범, <제3장 조선 대목구의 설정과 선교사의 입국>, 《한국천주교회사》 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287쪽). 그런데 본고를 집필하면서 그러한 논리가 상당히 허약한 것임을 발견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한국교회사연구소의 방상근 연구실장께서 중요한 조언을 해 주셨다. 지면을 빌려 감사의 뜻을 전한다.

 

45) 정진석, 앞의 글, 26쪽.

 

46) AMEP : Vol. 579, f. 88. “이 칙서의 효력은 교황의 법령과 규정, 그밖에 특별히 그리고 명백하게 언급하여 폐지해야 마땅한 다른 법령들 등에 나와 있는 반대되는 것들에 의해서 제약을 받지 않음”(Non obstantibus constitutionibus et sanctionibus Apostolicis, caeterisque etiam speciali et expressa mentione et derogatione dignis, contrariis quibu scumque).

 

47)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면 조선대목구 설정 자체가 무효로 돌아간다는 주장은 1831년 7월 4일 신임 포교성성 장관 페디치니(Pedicini, 1769~1843) 추기경이 주재한 회의에서 내려진 결정 사항 가운데 제3항에 근거한다. 즉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대목구를 조선에 설정하는 것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에 허락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결정 사항은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반포한 칙서와는 상충하는 면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대목구 설정 칙서에서 표방한 대로 ‘이 칙서에 반대되는 어떤 법령에도 제약받지 않음’이라는 조항에 무게를 둘 경우에 7월 4일의 결정도 무효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8)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대목구 관할을 수락하였다는 사실을 1835년 초에 알게 되었다(AMEP : Vol. 577, f. 319 참조).

 

49) AMEP : Vol. 577, f. 275.

50) AMEP : Vol. 579, f. 134.

51)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180주기 미사>, 《평화신문》 2015년 10월 11일자.

 

52)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있다.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 기록에 나타난 샴과 중국>, 《동국사학》 49, 동국사학회, 2010, 150~159쪽.

 

53)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의 복건 체류>, 마백락 선생 교회사연구 50주년 기념논총 간행위위원회 엮음, 《발로 쓰는 한국 천주교의 역사》, 분도출판사, 2011 ; - - -, <브뤼기에르 주교의 자취를 찾아서 산서를 떠돌다>, 김성태 신부 고희기념논총 간행위원회 엮음,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와 문화》,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54)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와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갈등>, 《교회사연구》 44,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200쪽 참조.

 

[교회사 연구 제47집, 2015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학 전공 조교수)]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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