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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신학ㅣ교부학

[마리아] 개신교적 관점에서 본 마리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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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18

개신교적 관점에서 본 마리아론

 

 

1. 한국 개신교의 마리아 이해와 가톨릭의 마리아 공경에 대한 개신교의 의견

 

개신교는 마리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개신교에는 가톨릭 교회처럼 마리아에 대한 교의(敎義)나 전례적 공경이나 신심 행위의 풍습이 없다.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4개 헌장 중 하나인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에서 마리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 복되신 동정이며 하느님의 어머니로, 예비신자 교리서인 [초대받은 당신]에서는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으로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협력자이며, 구원받은 인간의 모범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희망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개신교는 신학, 교의, 세례 문답집, 그 어디에서도 마리아에 대한 장이나 항목을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이해를 위한 물음은 있어도 마리아에 대한 물음은 없다. 따로 목사님이 마리아를 주제로 설교하거나 교육하는 일도 일년 내내 거의 없다. 필자 역시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마리아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경험이 없다. 교회사적으로 가톨릭이 마리아에 대한 교의를 지속적으로 새롭게 제정 선포하여 늘리고 마리아에 대한 신심 행위를 권장한 반면, 개신교는 종교 개혁 시기까지 있었던 마리아 공경례도 계몽 시대 이후에는 실행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다만 정기 예배 때 사도 신경 중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부분을 고백하면서 '마리아'가 잠깐 뇌리에 스치거나, 여선교(여전도)회의 이름을 '마리아 선교회'로 이름 붙이는 정도에서 마리아를 기억할 뿐이다. 물론 이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마르타의 자매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중 어느 마리아와 자신을 일치시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예외적으로 1920년대에 미국에서 형성된 5개의 근본주의 원칙 중 예수의 동정녀 마리아 탄생이 있으나, 이 원칙은 어디까지나 마리아를 생각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의 신성을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한 마디로 가톨릭과 개신교가 분리된 이후 양자는 서로간의 차이를 주장함으로써 각자의 정체성이 주장되고 확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톨릭은 마리아 교의와 공경을 양산했고, 반대로 개신교는 있었던 마리아 교의와 공경까지도 폐기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니 개신교인들이 가톨릭의 마리아 공경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전에 몇몇 목사와 평신도에게 가톨릭 교회의 마리아상과 공경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물었다. 개신교 전체 의견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범위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 정리해 볼 수 있겠다.

 

1) 천주교는 마리아를 숭배하는 교회이다. 천주교회의 뜰 안으로 들어가 보면 예외 없이 교회의 중앙이나 또는 계단 꺾어지는 부분에 마리아상이 서 있다. 개신교에서처럼 겉으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상(像)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 마리아상이기 때문에, 마리아가 그리스도보다 신격화되었다고 판단하며 따라서 개신교인들은 천주교를 마리아를 숭배하는 이상한 기독교로 생각한다.

 

2) 천주교인들은 마리아상 앞에서 합장하고 기도한다. 개신교인들은 천주교인의 이러한 신앙 행위를 '우상 숭배'라고 안일하게 폄하하고 정죄하는 경향이 짙다. 이는 종교 개혁 교회가 모든 성상이나 종교적 상징물들, 심지어 십자가까지 제거하였고, 한국 개신교에서는 선교 초기부터 한국 전통 종교의 상징물과 조각들을 우상이라고 평가한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부 개신교인들은 바로 이 점에서 개신교의 참된 신앙을 천주교의 그릇된 신앙으로부터 구분하는 결정적 준거를 찾는다. 그래서 심지어 천주교는 우상을 숭배하며 따라서 이단이라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3) 천주교의 마리아에 대한 기도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개신교인들이라도 천주교의 소위 성인 공경과 전구(轉求, Furbitte)를 문제시 한다. 개신교인들은 구원을 위한 은총의 절대성을 믿고,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기도하기 때문이다.

 

4) 마리아상은 이방의 여신상이 기독교의 옷을 입고 환생한 것이 아니냐고 질문한다. 이는 천주교가 기독교와 전통 문화를 무분별하게 혼합시키고 있지 않느냐는 물음과 맥이 닿아 있다.

 

5) 마리아의 동정과 청순한 마리아상이 강요하듯 보여 주는 여성의 순결성은 이미 지나간 봉건 시대 이래의 가부장적 성윤리를 반영한 것이며, 따라서 여성 억압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6) 개신교 신도들은 마리아에 관한 가톨릭의 세부적 교의 ― 구원의 협조자, 하느님의 어머니, 평생 동정, 원죄 없으신 잉태[無染始胎], 성모 승천[蒙召昇天] ― 에 대하여 그러한 가르침이 있는지조차 잘 알지 못한다.

 

7) 그러나 개신교 신도들도 마리아가 동정녀이며 예수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한다.

 

이상 서술한 바와 같이 마리아에 대한 교의와 신앙 실천은 가톨릭 교회에서만 나타나고, 개신교에서는 이에 대한 반론을 제외하면 전혀 언급조차 없는, 가톨릭 교회만의 문제로 여겨진다. 따라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쟁론과 대화의 주제로 떠오를 수 있는 '성서와 전통', '은총과 행업', '성서와 성례전', '교회의 직무' 등과는 달리 여기서는 상호 이해의 노력과 의견 일치의 전망을 말할 여지가 그만큼 적지 않나 생각한다. 그러나 개신교도 마리아 이해에 대한 성서의 증언과 교회의 전통을 중시하는 만큼 천주교와 공유할 수 있는 마리아 이해에서 출발하여 개신교의 마리아 이해를 증폭시키고, 이어 가톨릭 교회의 마리아 교의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서술하고, 마지막으로 교회 일치를 바라보며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대화가 가능한 방향 제시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2. 신약성서 속에서 마리아 이해

 

최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전통적이고 가톨릭적 경향으로 마리아를 교회의 전형(典型)으로 이해하며, 다른 하나는 교회 일치적-사회사적 경향으로 마리아를 갈릴래아 여인 그룹 중 나자렛 출신 유다인 여자로 이해한다.

 

1) 바오로 서신

 

신약성서에서 가장 오래된 문서인 바오로의 서신들에서 마리아는 따로 이름이 지칭되지 않고 예수의 탄생과 관련되어 간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로마 1,3-4; 갈라 4,4-5 참조). 이는 바오로가 부활 이전 예수의 지상적 삶과 인간 실존에 관심이 없고 하느님의 아들의 선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가 잉태되는 방법이나 마리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2) 마르코 복음서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는 처음으로 예수의 어머니 이름을 언급한다(마르 3,31-35; 6,1-6). 그러나 마리아는 그의 아들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했으며 먼 관계를 유지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물론 마리아론적 요소는 등장하지 않는다.

 

3) 마태오 복음서

 

마태오 복음서에는 이른바 '예수의 어린 시절'이 이야기되는 가운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동정녀 수태가 고지된다. 동정녀 수태는 예언(이사 7,14)의 성취(마태 1,18-25)로 해설된다. 마리아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줄곧 수동적으로 등장하지만 구원사를 성취하는 입장에서 보면 능동적이다.

 

4) 루가 복음서

 

루가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마리아는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마리아는 신앙의 전형이다.

 

5) 요한 복음서

 

예수의 어머니 이름은 요한 복음서에서 따로 언급되지 않고 있으나 가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2)와 예수의 십자가 처형(19,25-27)에서 두 번 등장한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루가의 전통에서처럼 신앙의 전형이다.

 

신약성서가 말해 주는 마리아상은 놀랍게도 다양하다. 그러나 이 모두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마리아상이 못 된다. 마리아에 대한 모든 신약성서 주석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라는 진술에 모아지며, 이 진술의 의미는 하느님의 구원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사건에 있다. 바오로는 구원 사건을 마리아에 대한 언급 없이 선포한다. 마리아에 대한 신약성서의 연구로부터 다음의 결론이 추론된다.

 

첫째, 하느님 아들로서 예수는 처음에 동정녀 탄생과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부활(로마 1,3-4)이나 세례(마르 1,9 이하)에서 영의 활동과 관계되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알았던 공동체와 알지 못했던 공동체가 서로 나뉘지 않고 병존할 수 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둘째, 사회사적 연구가 밝혀 주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길로서 신앙의 길은 고난을 받는 배움의 길이라는 사실이다. 사변적 마리아론이 고난의 역사를 상대화할 때 마리아론의 의미는 상실될 뿐 아니라, 잊혀진 자들의 고난과 희망은 무의미하게 된다. 마리아론은 인간의 고난사와 작은 자들의 희망을 떠나서 논의될 수 없다.

 

셋째, 신약성서가 그리는 마리아상은 역사적 마리아상이 아니라 오직 신앙의 증언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상이다. 역사적 마리아상은 어둠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마리아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종말(희망)론적 지평에서 성찰되어야 하며, 그 어떤 마리아론보다 우선적인 것은 마리아적 실천이다.

 

 

3. 가톨릭 교회의 마리아 이해와 공경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신교는 마리아의 전통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천주교에 대하여 개신교는 마리아를 언급하지 않는 것을 자신의 특징으로 여기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침묵 속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마리아론에 대한 양 교회의 차이는 19세기와 20세기에 제정된 두 가지 마리아 교의를 계기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듯하다.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는 마리아가 원죄에 물들지 않고 잉태되었음을 하느님이 계시한 교의로 선포하였다(원죄 없으신 잉태). 이 교의에 따르면 마리아는 다른 사람과 달리 처음부터 원죄에서 자유롭다. 마리아는 원죄로부터 자유로운 자로서 구원자인 예수를 잉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후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는 "지상의 생애가 끝나자, 죄에 물들지 않은 하느님의 어머니요 항상 처녀인 마리아는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상 영광 속으로 받아들여졌다."(성모 승천)고 결정하였다. 마리아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교의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동시에 항상 동정녀이다.

 

둘째, 마리아는 공로와 상관없이 하느님이 거저 주신 은혜로 거룩하다. 곧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한 은총으로 원죄에서 면제되어 있다(원죄 없으신 잉태).

 

셋째, 마리아는 육신과 영혼이 모두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성모 승천).

 

이른바 '성모 승천' 교의의 배후에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70년)에서 제정된 교황의 무류성 교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황의 무류성을 확인하는 성모 승천 교의 제정과 이로써 마리아가 천상의 여왕으로 신격화됨으로써 마리아론을 놓고 양 교회 사이의 대화 가능성은 완전히 없어졌다. 천상의 여왕이 암시하는 바는 "주님의 종"(루가 1,38)이었던 마리아가 주님과 함께 고양되었음을 의미할 뿐 아니라 주님과 함께 구원 사역을 나누어 맡는 "공동의 구원 사역자"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에게 "공동 구세주"(corredemtrix)라는 직무가 수여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처음에 하느님의 뜻에 대한 마리아의 자발적인 복종이 마침내 구속 사역에서 마리아의 협력으로 이해된 것이다.

 

마리아에 대한 두 가지 새 교의에 대해서는 개신교에서 대단히 비난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서상 아무 근거도 없을 뿐 아니라 성서와 모순되기 때문이다(sola scriptura의 원칙). 또 개신교는 마리아와 성인들의 공동 구속직에 대하여 비난한다. 왜냐하면 이는 모든 은총의 원인인(sola gratia:solus Deus)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 중재성의 원칙(solus Christus)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4. 가톨릭과 개신교가 대화할 수 있는 출발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위험한 교리적 발전에 대하여 어느 정도 제동을 걸었다. 우선 마리아론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독립된 헌장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눈에 띄는 대목이다. 그 대신 마리아론은 1964년 제5차 회의에서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에 편입되어 한 장으로 정리된다. 이것은 마리아론이 교회론 위에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론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전통적으로 부여된 존경의 호칭 ― 천주의 성모, 성부의 가장 사랑하시는 딸, 성령의 궁전, 복되신 동정녀, 하늘의 여왕, 교회의 전형, 완덕의 모범 ― 이 그대로 사용된다.

 

그러나 마리아는 원죄 없으신 잉태에도 불구하고 모든 다른 사람들의 본성과 다른 분이 아니다. 마리아의 구원을 위한 "중재직"을 인정하지만 모성적 역할로 해석되고, 이 역할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성을 흐리게 하거나 감소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갈라져 나간 형제들"과 반대되는 진술들이 많이 있지만 특히 개신교 형제들을 고려한 진술들을 찾아볼 수 있다. 마리아론이 갈라져 나간 형제들을 분개하게 만드는 원인의 제공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신학자들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성모의 고유한 품위를 존중하는 데에 지나친 마음의 협소함"도 금물이고 "온갖 거짓 과장도" 힘써 피할 것을 이 헌장은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공의회 이전에 대화가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마리아론에서 한 걸음 후퇴했으나 개신교적 시각에서 볼 때 의문과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의학적 토론을 전개할 수 없다.

 

그 대신 개신교에서도 루터(M. Luther)와 츠빙글리(H. Zwingli)에 의하여 보존되었고 바하(J. Bach)의 웅장한 작품 속에서도 살아 있었던 마리아 공경이 계몽 시대 이후에 사라지게 된 원인을 추론하면서, 사라진 마리아상의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마리아상을 제시함으로써 양 교회 사이에 대화의 출발점을 마련하고자 한다. 개신교에서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절대적 신앙(sola gratia)으로 그 어떤 유형의 성인 공경도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마리아의 역할은 구원 사건에서 실제적으로 배제되었다. 그 후 마리아는 개신교의 교의와 신앙 실천 어디에서도 마땅한 자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와 결부된 성탄절 설교에서만 마리아가 언급될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성서에 기록된 마리아에 관한 증언을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하여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검토하고, 대화를 위한 공동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입장을 표명하려고 한다.

 

첫째, 계몽주의 시대에서처럼 마리아에 관한 증언이 전설이라는 이유로 제거될 수 없다는 점이다. 신학적 상상력만이 원자적인 사실적 지식을 서로 결합하는 진리로 만들 수 있다. 신화의 언어가 재발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화는 사실로 옮겨 놓을 수 없는 통찰과 진리를 언어 구조상 갖고 있다. 신화는 신비적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신비적으로 말하게 한다.

 

둘째, 동정녀 탄생을 중심으로 한 성서 증언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진실된, 이 경우 육체적으로 이해된 예수의 하느님 아들 됨이다. 이를 위하여 성서는 마리아라는 여인과 그의 남편 요셉을 언급한다. 마태오 복음에서 요셉은 아들의 탄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아들의 탄생은 오히려 그를 어렵게 만든다(마태 1,18 이하). 그러나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남편과 아버지로서 걸맞는 사명을 부여한다. 요셉은 아들의 탄생에서 전혀 가부장적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반면 마리아는 처음 예수의 탄생뿐만 아니라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에서도 아들 예수와 함께한다(요한 19, 25-27). 요한의 이 본문은 아들의 죽음을 아픔으로 함께하는 고난의 어머니에 대한 원형이 되었다. 루가의 본문은 수백 년 동안 아주 미약하고 전설적으로 해석된 마리아의 가냘픈 모습에서, 하느님의 구원 사건에서 여성의 특별한 역할을 묻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의미를 준 마리아상이 가부장적인 사회와 교회 구조를 충실히 반영하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느님이 요셉을 무시하고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신"(루가 1,48) 사실이 역사상 여성의 사회적, 교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반대로 마리아상은 극도의 관념화된 형태로 가부장적인 왜곡 구조와 억압 구조를 강화하고 고착화했다. 고대의 영원한 동정녀상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교회 안에서 자행된 성차별은 여성이 하느님의 구원 사건의 담지자가 되는 것을 방해했다. 이 때부터 마리아상은 가부장적 구조 속에서 왜곡된 여성성을 관념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곧 마리아 안에서 해방된 여성의 본질이 찾아지지 않았다. 루가는 여성인 마리아가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며 모든 것을 전복시킨 구원의 도래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여인으로 묘사한다.

 

셋째, 마리아에 관한 신화적 증언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사건의 시각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새롭게 성찰해야 한다. 루가 복음은 하느님의 선택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마리아에게 내린 하느님의 영에 대해 보도한다. 여기서 남편과 아버지로서 요셉은 일단 이차적이다. 그러나 이 본문은 여성의 신격화를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본문은 오히려 하느님의 해방하시는 현존 속에 있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 곧 인간을 묻는다. 마리아에 관한 신약성서의 증언과 교회사의 마리아 교의는 하느님 영의 현존 안에서 해방된 남자와 여자의 본질을 성찰하는 방향으로 읽혀져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리아론은 교회론이 아니라 다가오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여 삶의 온갖 어둠을 무릅쓰고 해방된 인간을 지향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원형을 다루는 구체적 인간학에 속한다.

 

넷째, 특히 개신교 전통은 타락한 남자와 여자의 문제를 (아담과 하와의 예에서) 창조 신학적으로만 해석해 왔다. 마리아 공경이 사라지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개신교 신학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구원론적, 곧 종말론적 관점에서 새로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남자와 여자, 곧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원초적으로 선했으나 타락한 피조물로 볼 것이 아니라 구원의 과정, 곧 종말론적 해방의 관점에서 읽자는 것이다. 필자는 이 통찰이 마리아 교의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 전통의 건널 수 없는 차이를 넘어서 개신교와 가톨릭의 대화를 여는 새로운 목표가 되길 바란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과거의 전통 때문에 현재 서 있는 자리는 다르나 종말론적 목표는 동일하다.

 

남자와 여자의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발산되는 문제가 항상 눈앞에 존재하는 한, 마리아 교의에 대한 침묵은 결코 개신교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없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유하는 고백인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교의적이고 전례적 행위에서 비롯된 개별적 차이를 넘어 나자렛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실제적이며 진실되고 구원으로 충만한 현존을 지각하게 한다는 사실을 양 교회는 인식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복음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하여 차이는 있지만 침묵했거나 잊은 적이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목, 1999년 5월호, 심광섭(기독교 대한 감리회 서울 신애교회 부목사, 조직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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