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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일본 천주교회의 모퉁잇돌, 나가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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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28 ㅣ No.594

세계 교회 신앙유산 순례 - 일본 나가사키


일본 천주교회의 모퉁잇돌, 나가사키

 

 

11월 24일. 그곳으로 가는 길 위에는 아침부터 비가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지는 버스 행렬. 히라도, 후쿠오카, 사세보, 오무라 교회 등등. 가까스로 도착한 휴게소의 인파 속에는 우리와 같이 해외 교회에서 온 신자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모두의 목적지는 188위 시복식이 열리는 나가사키(長崎) 야구장. 일본 천주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어온 나가사키 교구의 주교좌 우라가미(浦上) 성당이 지척에 있는 곳이다.

 

1945년의 원폭 투하 때 우라가미 성당은 그 중심지에 위치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성당 입구의 파괴된 입상과 잔해들(위사진), 성당 안의 피폭 마리아상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본래의 성당은 박해 후인 1895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 의해 착공된 뒤 9년만에 축성되었다. 이어 1925년에는 정면 두 개의 종탑이 완성됨으로써 아름다운 로마네스크식 성당을 뽐냈다고 한다. 그러나 원폭으로 기둥과 잔해만 남게 되고, 1959년에서야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될 수 있었다.

 

성당 아래에는 원폭 기념관과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평화공원이 있다. 그 기념관 안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나가이 다카시 바오로(1908-1951년)의 일생이었다. 우라가미에 살던 천주교 신자요 방사선과 의사였던 그는 남을 위해 일생을 바친 것으로 유명하다. 방사능병을 얻은 뒤에도 살아남은 두 아이를 바라보면서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않았고, 자신의 당호인 여기당(如己堂)처럼 원폭 희생자들과 이웃을 잠시도 잊지 않았다.

 

그때 저술한 “나가사키의 종”은 잿더미 속에 갇혀 지내던 일본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희망을 낳게 한 작품이다. 원폭으로 종탑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뒹굴던 우라가미 성당의 종을 생각하노라면 그를 기린 노래와 전기가 되살아난다.

 

숨은 그리스도인

나가사키의 종소리

나팔꽃에 맺힌 이슬

고요한 밤, 그리고 귀중한 생명

성모 마리아와 창녀

위대한 목신은 죽었다.

 

 

베드로 키베와 187위 순교자 시복식

 

이번 시복식에는 일본 천주교회 16개 교구 43만 신자 가운데 3만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필리핀, 베트남, 인도 등지에서 온 신자들, 각국 주교단과 사제단을 비롯하여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대표 주교들과 여러 교구 신자 300여 명이 함께 자리했다. 공교롭게도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시복식 직전에 멈추고 간간이 햇살이 드러나기까지 하였다.

 

전 교황청 시성성 장관 호세 사라이바 마르틴스 추기경이 일본 주교회의 의장인 오카다 다케오 도쿄 대주교의 시복 선언요청에 대해 교황 서한을 낭독하고 시복을 공식 선언했다. 1603년 구마모토에서 순교한 사무라이(무사) 요한 미나미와 에도(江戶, 현 도쿄)에서 1639년에 순교한 키베 신부 등 9개 교구 지역 188위 순교자가 복자품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환호성 속에 축하와 감사, 부러움이 교차했다.

 

 

일본 천주교회의 박해와 순교자

 

1549년에 문을 연 일본 천주교회는 30여년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면서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이 박해는 메이지 유신으로 금교령이 해제되고, 1890년 천주교가 공인될 때까지 30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이 기간에 탄생한 유명 ? 무명 순교자 수는 2만 5천여 명. 그 가운데 1597년의 나가사키 순교자 26위가 1862년에 성인품에 올랐고, 17세기 초의 순교자 205위는 1867년 복자품에 올랐다. 이어 1987년에는 1633-1637년의 나가사키 순교자 16위가 다시 성인품에 올랐으니, 이제 일본 교회의 성인은 42위, 복자는 393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우라가미 성당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은 나가사키역 동쪽 언덕에는 26성인이 순교했다는 니시자카(西坂)가 있다. 나가사키항이 내려다보이는 이곳 언덕에는 26성인의 부조가 새겨진 순교비와 함께 기념 성당과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2층의 박물관은 일본 천주교회의 역사, 특히 박해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배교의 증거를 알아내려고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는 청동 성상인 후미에(踏繪)와 잔인했던 박해의 자료들, 갖가지 신앙 증거 자료들이 오밀조밀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나가사키항을 끼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아름다운 첨탑을 지닌 오우라(大浦)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박해가 끝난 직후 나가사키에 도착한 파리외방전교회의 프티장(B. Petitjean) 신부가 건립하여 1865년 2월 19일 ‘아기 안은 성모 마리아상’을 모시고 26성인에게 봉헌한 성당이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3월 17일 금요일 오후, 성당을 구경하러 온 일행 중에서 3명의 부인이 프티장 신부를 찾아 물었다. “성모 마리아상은 어디에 있나요?”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천주교 신자들인 가쿠레 기리시탄(潛伏切支丹)이 프티장 신부 앞에서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한 것이다. 프티장 신부의 놀라움과 은총의 기쁨을 상상해 보라. 일본 천주교의 부활을 알리는 ‘신자 재발견’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우라 성당의 북동쪽에 위치한 홍고시 언덕 위에는 원죄 없으신 성모기사회의 수도원과 콜베 신부 기념관이 있다. 성모 기사회는 창설자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가 1930년 4월 24일 나가사키 오우라에 도착한 데서 시작되었다.

 

나가사키에 도착하자마자 콜베 신부는 잡지 “성모 기사”를 통한 복음화 운동을 전개했다. 4주 만에 일어판 잡지를 간행하기 시작했는데, 이 잡지는3년 뒤 월간 5만 부에 이르게 된다. 또 1931년 5월에는 성모 기사회 수도원의 모체가 된 홍고시의 성모 마을을 설립하고, 다음 해에는 인도로 가서 수도원 설립 가능성을 타진하고 돌아왔다. 그런 다음 1936년 폴란드로 귀국한 뒤 체포되어 1941년 5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감금된 것이다. “저 사람 대신 내가 아사형을 받게 해주시오.” 콜베 신부는 스스로 선택한 굶주림으로 고통을 겪다가 8월 14일 숭고한 생애를 마감했다.

 

188위 시복식은 예정된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막을 내렸다. 그러나 서로의 이야기 속에서 시복식의 은총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이어 우리가 향한 곳은 순교자들을 온천 열탕에 던져 처형했다는 운젠(雲仙)의 지고쿠(地獄)였다. 한없는 고통을 이겨낸 순교자들의 용덕, 그것이 바로 기적 아니겠는가!

 

* 차기진 루카 -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이며,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역사전문가 위원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09년 1월호, 글 차기진 ? 사진 장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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