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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병인박해 역사신문 제7호 1866년 10 · 11월: 프랑스 군대, 조선 강화도 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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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5-15 ㅣ No.749

[병인박해 150년 - 역사신문] 제7호 1866년 10 · 11월


프랑스 군대, 조선 강화도 침략...병인양요 후 천주교에 대한 반감만 증폭

 

 

-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 군인들이 10월 16일 외규장각으로 향하고 있다. 프랑스 주간지 「일러스트라시옹」에 실린 프랑스 군인 쥐베르의 그림.

 

 

11월 11일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서 철수하면서 병인양요가 끝났다.

 

임시 군사 기관인 순무영(巡撫營)은 이날 조정 보고를 통해 “갑곶진에 정박하고 있던 크고 작은 이양선들이 오전에 전부 닻을 올리고 아래로 내려가 덕적진 앞바다를 지나 부평 일대로 향해 갔다”고 알렸다. 이로써 28일간의 전투가 마무리됐다.

 

 

프랑스, 학살 당한 선교사에 대한 보상 요구

 

이번 전쟁은 10월 14일 프랑스 로즈(Roze) 제독이 군함 7척에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강화진 갑곶진에 상륙하면서 시작됐다. 이틀 후 군사적 요충지인 강화성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민가를 불태우고, 강화부궁 내 외규장각에 보관 중인 의궤와 은괴 19상자, 도서 340여 권 등을 약탈했다. 10월 26일 김포 문수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을 압도한 프랑스 군대가 승기를 잡는 듯했으나, 11월 9일 정족산성에 매복해 있던 양헌수와 군사 300여 명의 공격으로 60여 명의 사상자가 난 프랑스군이 강화 철수를 결정한 것이다.

 

이번 전쟁으로 인한 물적 피해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순무영은 11월 12일 “강화성 남문을 비롯해 장년전ㆍ만령전ㆍ객사ㆍ공해ㆍ훈련원ㆍ어영청 등이 파괴되고 민가 절반 이상이 불에 타 없어졌다”면서 “갑곶포 민가에 보관해 뒀다가 프랑스군에 뺏긴 쌀이 약 400석 정도”라고 보고했다.

 

양국의 협상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정은 10월 19일 서한을 통해 로즈 제독에게 “너희 종교를 전교하려는 것은 더욱이 안 될 일이다. 지인지덕하더라도 제멋대로 난동을 부리게 내버려 둘 수 없다”며 “도망치지 말고 머리 숙여 명령을 따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로즈 제독이 답장에 “조선에서 학살당한 프랑스 선교사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러 왔다”며 △ 프랑스 선교사들 학살에 가담한 대신 3명에 대한 엄중한 처벌 △ 조약 초안을 함께 작성할 사절 파견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걸면서 결렬됐다.

 

 

조선, ‘천주교 전파는 문물제도 어지럽게 한다’ 비판

 

종전 이후 서양에 대한 반감과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반감이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호군 이항로는 11월 10일 자 상소에서 “남의 나라에 난리를 피운 오랑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서양인보다 더 심한 자들은 없었다”면서 “우리나라에 천주교를 전파하려는 것은 자기의 패거리들을 늘려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와 우리의 문물제도를 어지럽히고 재물을 약탈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데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고종은 11월 24일 서양 물품 사용을 금지하는 전교를 내리면서 “서양 오랑캐들이 소란을 피우며 교역을 하자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서양 물품을 사용하기 때문”이라며 “최근의 형세로 보면 더욱 엄히 막지 않을 수 없으니 수색해서 적발된 자가 있으면 의주부에서 먼저 벤 뒤에 아뢰라”고 명령을 내렸다.

 

 

리델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 프랑스군에 도움 줘, 파문

 

 

지난 7월 중국으로 피신했던 리델 신부를 비롯한 최선일ㆍ최인서ㆍ심순녀 등 조선인 천주교 신자 3명이 프랑스 군대에 도움을 준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프랑스군은 지세와 수로 정찰 목적으로 지난 9월 18일~10월 3일 강화도를 거쳐 양화진 서강까지 올라온 후 퇴각한 바 있다. 목격자들 증언에 의하면 리델 신부는 통역을, 조선인 신자들은 안내자 역할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강화도 주민은 “한국말을 할 줄 아는 프랑스 남자가 와서 여러 가지를 캐물은 적 있다”며 “조선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함께 있었다”고 증언했다.

 

조정도 이번 프랑스 침공에 천주교도들이 일정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종은 10월 17일 교서를 통해 “필시 우리나라의 간악하고 하찮은 무리가 뜻을 잃고 나라에 원망을 품었거나 벌을 받을까 두려워 망명해 그들과 오래전부터 결탁하여 몰래 내통하면서 바다를 건너가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공공연히 반역 음모를 꾸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일각에선 서양과의 화친을 주장하지만, 반대 의견이 만만치 않다. 이항로는 “양적을 치자고 하는 것은 우리 편 사람의 말이요, 양적과 화의하자고 하는 것은 적측 사람의 말”이라며 “우리 편대로 하면 나라 안의 예의를 보존할 수 있지만 그 반대로 하면 인류가 금수의 지경에 빠지고 말 것”이라며 강하게 다그쳤다.

 

고종은 10월 31일 전교를 내리며 “프랑스군이 창궐하는 것은 고금에 없었던 변고”라며 “저들과 몰래 내통하여 함께 음모를 꾸미고 돕는 자들이 많으리라고 본다. 각 관청에서 잘 적발하여 즉시 해당하는 법조문을 적용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타임머신 2016] 145년 만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약탈당했던 외규장각 의궤가 2011년 4월 14일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145년 만이었다.

 

의궤는 조선 왕실이나 국가의 큰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자세히 기록한 책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프랑스는 2011년부터 5년마다 대여 합의를 갱신하는 식으로 의궤를 한국에 영구 임대 반환했다.

 

반환 5주년을 맞은 올해, 2월 2일 한국과 프랑스 외교부는 5년간 대여를 연장한다는 합의문을 교환했다. 이어 3월엔 프랑스국립도서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이 갱신 절차를 밟았다. 의궤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외규장각 의궤 전권 원문 이미지와 텍스트는 외규장각 의궤 누리집(http://uigwe.museum.go.kr)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평화신문, 2016년 5월 15일, 백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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