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성미술ㅣ교회건축

슬기로운 성당 이야기: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6-01 ㅣ No.799

[슬기로운 성당 이야기] (9)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상)


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해진, 1200여 년 역사 간직한 성당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전경.

 

 

영화 ‘로마의 휴일’의 그곳

 

전 세계 관광객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 바로 이 성당 입구다. 사진 한 장 찍으려고 긴 시간 줄을 서야 하는데도 그 누구도 마다치 않는다. 또한, 순례객들에게는 이 성당의 이름이 낯설다. 코스메딘의 성모마리아 성당을 순례한다고 하면 거기 왜 가느냐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들을 마주할 때가 많았었다. 그럴 때마다 “진실의 입에 가는 겁니다”라고 말을 바꾸어야만 했다. 이곳에 오면 누구나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사진 찍고 되돌아가기 바쁘지만, 그들이 서 있는 이곳이 수천 년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대부분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하지만 먼 곳 이탈리아 로마까지 와서 이 엄청난 역사의 현장 속에서 손만 넣고 돌아간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여 성당 곳곳을 들여다보면 굉장한 역사의 흔적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의 상업지구에 있는 성당

 

이 성당과 관련된 최초의 역사는 고대 로마로부터 시작된다. 포룸 보아리움(Forum Boarium)과 포룸 올리토리움(Forum Holitorium)이라고 불리는 포룸 두 곳이 만나는 지역이었다. 포로 로마노라고 불리는 로마 포룸은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였고, 이곳은 가축시장과 채소와 과일 시장이었던 곳으로 상업지구였다. 이 두 곳의 포룸이 이곳에 형성된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도 성당을 나와 길을 건너면 로마의 젖줄이라고 불리는 테베레 강이 있다. 이 강을 통해서 배를 이용하여 가축들과 채소들을 로마 시내로 운반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또 이 근처에 시작되는 아우렐리우스 가도와 가까우므로 내륙으로 운반할 수도 있었다. 이 두 개의 포룸 터가 현재 성당 지하의 일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성당 앞 광장이 바로 이 포룸의 중심지였다. 또한, 이 포룸에서 최초의 검투사 경기가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기원전 264년)

 

이 포룸에서 이어지게 되는 곳은 헤라클레스 신전이 있었던 곳인데, 이 신전을 ‘아라 막시마(Ara Maxima, 최고의 제단)’라 불렀고, 현재 성당의 뒷길 이름을 ‘무적 헤라클레스의 아라 마시마(Via dell‘Ara Massima di Ercole Invitto)’라고 하며 이곳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최초의 신전은 기원전 753~509년이라고 전해지지만 그 후 기원전 142년 로마의 유명한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스키피오 아밀리아누스에 의해 재건되었다고 한다. 이 내용 또한 성당 지하에 있는 명판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지하실 정문과 지하 계단에서 이어지는 복도 등에서 헤라클레스의 아라 마시마 터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아라 마시마에서 바로 이어지는 건축물은 ‘스타티오 아노내(Statio Annonae)’라고 불렸던 고대 로마 시대 관청 중 하나이다. 이곳은 빈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고 관리했던 관청인데 여기에는 그 관청의 사무실이 있었다. 이 사무실 터는 현재 성당 내부 측벽들에 사용한 매몰된 기둥들을 통해 그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고대 로마 두 곳의 포룸과 헤라클레스 신전과 로마 관청의 사무실이었던 곳이 이 성당의 터가 된다.

 

-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1700년대 바로크 양식 정면.

 

 

성화상 논쟁 시대에 이주해온 ‘그리스 공동체’를 위한 성당

 

이런 모습으로 7세기 후반까지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종종 6세기 후반 당시 성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재위 590~604)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을 것이라는 의견도 지금까지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성당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하드리아누스 1세 교황(재위 772~795) 때라고 보고 있다. 그 후 815~84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벌어진 성화상 파괴의 박해를 피해 온 수도자들에게 이 공간이 허락된다. 이때부터 이곳의 명칭은 ‘그리스 교회(Ecclesia Grecorum)’ 또는 ‘그리스 공동체(Schola Graeca)’라고 불렸다. 오늘날 성당 옆길의 이름이 ‘그리스의 길(Via della Greca)’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현재 이 성당의 이름인 ‘코스메딘(Cosmedin)’이라는 단어도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다. 이 이름에 대한 유래도 두 가지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콘스탄티노플 근처의 수도원 이름인 코스미디온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와 성당이 아름답게 장식되었다는 뜻으로 아름다운, 우아한 등의 그리스어 ‘코스미디온(kosmidion)’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그들에 의해 동방의 이콘이 서방 교회 즉, 로마 교회에 들어오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1123년 재건 당시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내부.

 

 

로마네스크로 재건된 성당

 

그 후 1084년 노르만의 침공으로 인한 파괴로 1123년 성당의 대대적인 복원과 확장이 이루어진다. 갈리스토 2세 교황(재위 1119~1124)에 의해 진행되는데,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과 성당 내부의 성가대석이 추가되며, 또한 이 성당을 유명하게 만든 바닥 장식이 만들어진다. 이 바닥 장식을 ‘코스마테스크(Cosmatesque)’라 부르는데, 모자이크 예술의 명가였던 코스마티 가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 장식은 12~13세기에 크게 유행했는데 로마,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 중세 성당들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로마에는 이 코스마테스크 장식으로 유명한 성당들도 많지만 대부분 화재나 파손으로 인해 복원된 바닥 장식들이다. 하지만 이 성당의 코스마테스크 바닥 장식은 20세기에 복원을 한 부분들도 있지만 대체로 원본을 유지하고 있다. 성당 내부를 걷기만 해도 900여 년의 시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 후 수 세기 동안 복원이 진행되고 장식들이 추가되는데, 17세기에는 바로크의 영향으로 성당의 정면이 바로크 양식으로 재장식되었고, 이때 그 유명한 맨홀 뚜껑인 ‘진실의 입’이 성당 현관에 놓이게 된다. 지금은 17세기 판화로만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바로크 양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필자 또한 그 판화를 보는 순간 너무 엉뚱하고 이 성당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엉뚱한 모습은 100여 년이 지나 1894~1899년 조반니 바티스타 조베날레(Giovanni Battista Giovenale)에 의해 중세의 모습으로 재복원되었고, 그 중세의 모습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이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로마 포룸과 콜로세움에서 고대 로마 시대의 석재들을 옮겨와 성당을 복원하면서 또 다른 유적의 파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성당 내부에는 총 22개의 기둥이 있는데 이 기둥들의 일부가 그때 가져온 기둥들이다.

 

다음에는 성당의 입구에 있는 ‘진실의 입’에서부터 내부의 공간에 대한 역사와 의미를 알아보려 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5월 30일, 윤종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박원희(사라, 이탈리아 공인 가이드)]

 

 

[슬기로운 성당 이야기] (10)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하)


‘진실의 입’ 보고 들어가, 중세 전례 공간과 성인 유해를 만나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와 유명한, 성당 현관 앞에 있는 ‘진실의 입’.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을 유명하게 한 것은 아무래도 성당 현관에 있는 ‘진실의 입’(La Bocca della Verit)이라고 불리는 고대 로마 시대의 유물일 것이다. 이 고대 유물은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 주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며 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려졌다. 1631년에 현재의 위치에 배치된 1200㎏의 대리석 원반은 강의 신(포르투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근처 로마의 유명한 하수도가 있었기 때문에 맨홀 뚜껑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기하학적인 대리석 모자이크

 

진실의 입이 있는 현관을 지나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두 줄의 코린토식 기둥열로 구분된 세 개의 회중석을 볼 수 있다. 18개의 기둥 중 로마 시대의 것은 11개 젤라시우스 2세 교황에 의해 복원되었다. 중앙에는 전례 거행에 있어서 꼭 필요한 공간인 회중석, 성가대석, 제단이 배치되어있다.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가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코스메딘식 모자이크로 장식된 대리석 바닥이다. 그리스어 형용사인 ‘kosmidion’은 ‘아름다운, 장식된’이라는 의미로, 이 양식은 중세의 성당에서 바닥, 주교좌, 성가대석 및 천개(발타키노) 등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유명한 로마 대리석 조각가 가족인 코스마토에서 유래했다. 이 작품은 성모 마리아 대성전, 라테라노의 성 요한 대성전, 성 크리소고노 성당 등에서 볼 수 있다. 이 원, 사각형, 삼각형 등의 기하학적인 문양의 코스메딘식으로 꾸며진 대리석 바닥을 따라가면 나지막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성가대석(Schola Cantorum)이 나온다.

 

-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내부 전경.

 

 

하느님과 대화하는 동산인 성가대석

 

대리석 벽으로 둘러싸인 측면에는 두 개의 독서대가 있다. 하나는 사도 서간 낭독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다. 서간 낭독용 독서대는 동쪽의 제대를 향해 있으며 그리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기초에 적자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져있다. 복음 선포용 독서대는 피레네 산맥의 각력암이 들어있는 기초 위에 있고, 측면에는 ‘빈 무덤’을 상징하는 회색 대리석이 있으며, 빛의 세계인 남쪽에서 어둠의 세계인 북쪽을 향해 보면대가 배치되어 있다. 이 복음 선포 독서대 옆에는 파스쿠알레 로마노가 제작한 웅크리고 있는 사자 조각이 돋보이는 기둥 모양의 파스카 촛대(13~14세기)가 서 있다.

 

거룩한 장소를 지키는 사자는 일반적으로 강력한 힘과 정의를 구현하는 특별한 권한을 지닌 존재로 상징화되었다. 왕좌나 주교좌를 사자로 장식하기도 했다. 사자는 태어나면 죽은 것처럼 보이다가 셋째 날에 눈을 뜨기 때문에 사흘 후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연상시킨다.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유다 지파의 사자는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다.(묵시 5,5)

 

두 개의 독서대와 파스카 촛대, 그리고 성가대원을 위한 의자로 구성된 성가대석은 하느님과의 대화를 자유롭게 하던 에덴동산을 연상시키며 주님의 부활이라는 복음을 선포하는 마당이다.

 

 

페르굴라를 지나 천개가 있는 제대

 

전례를 거행할 때 사제들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제단과 성가대석을 분리하는 페르굴라(pergula, 난간)를 만난다. 비잔틴 지역에서 공간 구분을 위해 형성된 페르굴라는 모자이크로 장식된 벽을 기둥이 지지하고 가운데에 제단을 향한 통로가 있는 구조로, 동방교회에서는 성화벽으로 발전한다. 이 페르굴라를 지나면 천개가 있는 주제대를 만난다.

 

화강암 받침 위에 욕조 모양의 붉은 대리석 테이블로 구성된 주제대는 치릴라, 힐라리오, 코로나토 성인의 유해를 안치하고, 갈리스도 2세 교황에 의해 1123년 5월 6일에 봉헌되었다. 그 위에는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전의 영향을 받은 데오다토 디 코스마(1294)의 작품인 고딕식 천개가 있다. 그것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4개의 코린토식 기둥에 놓여 있다. 앞면의 펜던트는 피에트로 카발리니니가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대성당을 연상시키는 주님 탄생 예고를 묘사한 모자이크가 금색 배경에 장식되어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성 베드로 대성전에 순교한 사도를 위한 조형물로서 천개를 설치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특별히 존중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나 물건 위에 설치하는 ‘닫집’은 중세에 들어와서 제대 윗부분에 지속해서 설치되었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장소로서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안에 보관돼 있는 성 발렌티노의 두개골.

 

 

지하 무덤과 성 발렌티노의 유해

 

성가대석 아래에는 아마도 이러한 유형으로는 가장 오래된 8세기 지하 무덤이 있는데, 1717년에 양쪽 계단이 개방되었다. 코린토식 기둥으로 공간이 분절되어 있으며, 측벽을 따라 16개의 반원형 벽감이 있다. 원래 근처의 카타콤바에 안치되어있던 성인들의 유해를 보관하는 데 사용했다. 무적의 헤라클레스 제단의 석재들을 활용하였고, 안쪽으로 반원형 애프스에는 정면에 십자가가 새겨진 작은 제대(5~6세기)가 있으며, 그 위에는 성녀 치릴라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여러 성인의 유해가 성당 안에 보관되어 있다. 그중에는 ‘밸런타인데이’로 유명한 2월 14일에 경축하는 성 발렌티노의 두개골이 주의를 끈다. 발렌티노 성인이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는 설과 한 성인에 대한 두 개의 전통이라는 설이 있다. 성 발렌티노의 축일을 연인들의 축일로 기념하게 된 것은 14세기부터이다. 연인들이 이날 서로 주고받는 특별한 형태의 축하 카드도 성행했는데, 이날을 선택하게 된 것은 이 시기가 새들이 짝짓기하는 기간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지기도 하고, 또는 젊은 여인들이 ‘발렌틴’(Valentin), 이른바 자신들을 흠모하여 시중을 드는 기사들을 선택하고 이 기사들은 젊은 여인들에게 선물을 바치는 전통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비잔틴 교회에서 벌어진 성화상 논쟁으로 인한 박해를 피해 로마로 피난 온 그리스인들의 거주지에 있는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은 전례 공간에 관한 중세 시대의 발전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성당이다. 현관에서 진실을 확인받는 큰 입을 가진 강의 신을 만나고 성당 내부로 들어와서 ‘진리’를 듣고, ‘진리 자체’이신 주님과 일치하여, 지하 무덤에 있는 순교자들처럼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진리의 선포자가 되기를 권고하는 성당이라 기억에 남는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6월 27일, 윤종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박원희(사라, 이탈리아 공인 가이드)]



1,74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