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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신학서원19: 영화적 상상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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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0-04 ㅣ No.633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9) 영화적 상상력에 대하여


하느님 신비 전하려면, 신학은 영화의 설득력과 상상력 배워야

 

 

영화에 관한 기억과 고백

 

나에게 영화는 무엇보다 엔터테인먼트였다. 어린 시절 시골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학생의 극장 출입이 제한되던 시절이었다. ‘문화교실’이라는 이름으로 학생에게 저렴하게 제공되었던 오락 영화는 그 시절 우리가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유흥이었다. 서부 활극 영화, 홍콩 무협 영화, 학생 청춘 영화는 우리의 감성과 정서를 지배했다.

 

극장에서 내가 선택한 영화는 주로 엔터테인먼트였는데, 텔레비전 브라운관에서 선택되어 제공되는 영화는 일종의 ‘명작영화’였다. 브라운관에서 보았던 영화들은 그 시절 우리들의 상상과 경험의 세계가 확장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활자와 텍스트가 내 지난 시절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아보면 영화는 늘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오락이었든 세계의 확대였든 간에 말이다.

 

지적 허영에서 기인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터인지 영화를 인간과 삶에 관한 텍스트로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영화 서사와 감독의 통찰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당대의 문화적 지성의 유행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문화적 허세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강제되고 강요되는 것을 싫어한다. 어두운 장소에서 중단 없이 영상의 흐름에 집중해야 하는, 극장에서 영화 보기는 나에게 힘든 일이다. 내 맘대로 펼쳤다 덮을 수 있는, 이기적 독서를 사랑한다. 멈춤과 건너뛰기를 할 수 있는, 컴퓨터 파일로 영화 보기를 선호한다. 영화 자체보다는 그저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영화 잡지 ‘씨네 21’을 읽는 것을 더 좋아한다.

 

 

영화 보기 vs 영화 읽기

 

본다는 것과 읽는다는 것은 뉘앙스가 다르다. ‘보기’는 우연성과 즉흥성과 수동성의 요소를 포함하는 체험적 행위다. ‘읽기’는 주체성과 사유성과 능동성을 강조하는 성찰적 행위다. 우리는 눈앞에서 우연히 펼쳐진 행위와 사건을 그저 바라본다. 그 행위와 사건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생각하는 것은 읽는 일이다. 현상을 보고 그 이면을 읽는다. 읽기에는 읽는 주체의 생각과 관점과 성찰이 개입되고 투입된다. 읽기는 대화다.

 

영화 보기와 영화 읽기는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 영화 보기는 영화의 오락성과 예술성을 체감하고 체험하는 일이다. 영화 읽기는 영화의 재현성에 초점을 둔다. 우리는 현실을 살고(보고) 있지만, 현실을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다. “영화라는 재현의 형식을 통해서 우리는 현실을 깨닫고, 직면하고, 생각하게 된다.”(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 영화를 읽는다는 것은 영화를 통해 인간과 삶의 현실을 사유하고 성찰한다는 뜻이다. 감정과 정서는 일차적이고 사유와 성찰은 이차적이다. 영화 보기는 감정과 정서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영화 읽기는 사유와 성찰의 입체적 구성에 개입한다. 영화를 보고 읽는 일은 세계의 확장을 뜻한다. 오늘날 감정과 정서의 다채로움을 맛보려면, 사유와 성찰의 깊이를 강화하려면 영화를 보고 읽어야 한다.

 

 

이야기 매체로서 영화

 

사람과 삶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에서 문학을 읽는 것처럼, 사람과 삶을 읽기 위해 영화를 본다. 물론 엔터테인먼트로서 영화를 더 좋아한다. 현실에서 사람과 삶의 복잡성을 견뎌내는 일은 힘들고 어렵다. 영화에서까지 그 힘듦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 가벼운 영화를 보는 것이 즐겁다. 힘든 현실을 망각하게 해주는 판타지와 오락으로서 영화의 기능을 존중한다. 하지만 보는 영화만큼이나 읽는 영화의 유익함과 즐거움을 사랑한다. 신학교 선생 시절, 신학생들과 오랫동안 영화 읽기 수업을 진행했었다. 영화를 매개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일방적 가르침의 문화가 가득한 공간에서 평등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영화라는 매체가 도움이 되었다. 영화를 여럿이 함께 보는 일은 즐겁고 유익했다. 어두운 공간의 지루함을 견디게 했고, 공통의 이야기 주제를 제공했다. 좋은 영화 이야기는 의미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

 

현대 문화의 담론장에서 문학보다 영화가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문학 평론가 김현만큼 영화 평론가 정성일이, 여느 문학인들보다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감독이 문화의 세계에서 더 자주 언급된다. 인간과 삶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영화가 소설(문학)보다 더 입체적이다. 재현과 풍속도라는 차원에서 영화는 소설보다 당대를 더 잘 반영(재현)한다. 근대 자본주의의 풍속도를 소설이 잘 재현한 것처럼, 후기 자본주의의 풍속도는 영화가 더 잘 재현하고 있다. “영화의 매체적 중요성은 그 대중적 파급력과 편이성에 기대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은 자본제적 삶의 양식에 얹혀 있는 볼거리사회(spectacle society), 모의사회(simulation society), 거울사회(mirror society)와 깊이 연루되고 있다.”(김영민 「영화인문학」)

 

영화를 보며 세상을 읽는다. 영화 ‘기생충’만큼 당대의 계급적 갈등을 정확하고 설득력 있게 보여준 매체가 어디 있던가. 장률 감독의 영화만큼 삶과 죽음의 몽환적 신비를 잘 재현하는 것이 있던가. 이창동의 영화만큼 삶의 현실과 운명의 질곡에 대한 질문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것이 있던가.

 

 

신학의 영화적 상상력을 위하여

 

“나는 처음부터 영화가 상상의 여행이나 타자에 대한 사유의 도구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알랭 바디우 「알랭 바디우의 영화」) 문학이 언어와 상상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면, 영화는 영상과 상상을 통해 구성된다. 언어적 상상은 더 많은 여지를 갖는다. 하지만 영상적 상상은 구체성과 입체성을 확보한다. 소설의 인물과 영화의 인물은 재현의 방식과 폭이 다르다. 소설 속 인물은 작가의 묘사 안에서 그리고 독자의 상상 속에서 재창조된다. 영화 속 인물은 시나리오 작가의 묘사 안에서, 감독의 지휘와 조율 안에서, 배우의 연기와 이미지 안에서, 독자의 상상 안에서 여러 겹으로 뒤틀리고 재해석된다. 인물에 대한 복합적인 묘사와 해석을 통해, 영화는 사람에 대한 입체적 전망을 보여준다. 영화는 타자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신학은 언어와 상상을 매개로 하느님의 신비를 탐구한다. 언어적 상상이라는 측면에서 신학은 영화보다 문학에 더 가깝다. 하느님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신학은 영화의 대중적 설득력과 입체적 상상력을 배워야 한다. 신학이 단순히 신앙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신학은 사람들이 하느님과 신앙의 신비에 관한 대화를 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여야 한다. 매체로서의 신학의 역할을 기대하고 상상한다. 한편으로 신학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입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사람과 삶에 대한 신학의 서술은 너무 평면적이고 도식적이다. 신학적 서술의 입체성과 구체성을 위해 신학자들이 영화를 더 많이 보고 읽기를 희망한다.

 

[가톨릭신문, 2021년 10월 3일, 정희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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