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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김대건 · 최양업 신부의 삶과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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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1-03 ㅣ No.2034

[조찬 세미나 02] 김대건 · 최양업 신부의 삶과 영성

(2021년 3월 9일)

 

 

한국교회는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당시 서울(한성) 명례방 마을에 기도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선교사를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주어사 강학회 모임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설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저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준으로 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 사도들과 성모마리아, 사람들이 많이 모여 기도하였고, 거기에는 성령이 함께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시작되었습니다. 강학회 모임은 천주학, 서학을 공부한 것은 맞지만 일단 학문적인 관심에 그쳤고, 이승훈 베드로가 돌아와서 천주교 서적을 읽고 기도하는 모임이 생겼을 때를 한국교회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승훈 베드로는 1783년 북경에서 예수회 루이 드 그라몽 신부님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고 이듬해 돌아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한국교회는 시작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1784년에 귀국한 이승훈 베드로는 이벽과 권일신 두 분에게 세례를 주게 됩니다. 수표교 인근의 이벽의 집에서 공부방을 열었고 그곳에서 매주 한 번씩 모여서 기도모임을 하며 공부하고 그해에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줍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정약용, 정약전, 김범우, 최창현 등 중인들과 다함께 세례 예식을 하면서 모임을 갖게 됩니다. 한양에 얻은 공부방이었기에 이벽의 집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조금 큰 집으로 이사 간 곳이 명례방 공동체, 김범우의 집입니다. 그때는 세례를 주게 되면 세례를 준 사람을 신부, 교리를 가르쳐주면 대부라고 불렀습니다.

 

명례방 공동체는 옛 외환은행 자리이며 지금의 하나은행이 위치한 김범우 토마스의 집입니다. 그곳은 예전에 장례원(掌禮院)이었다가 장악원(掌樂院)으로 바뀐 궁중음악과 예식을 담당하는 국가기관이 있었고, 그 앞쪽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하게 됩니다. 명동성당에 그림이 걸려있는데, 가운데 설교하는 분이 이벽이고, 옆에서 사람을 맞이하는 분이 김범우라고 합니다. 이벽이 이 모임에서 청색두건을 머리에서부터 길게 무릎까지 내리고 있었고 설법을 하였다고 되어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설법이 아니라 강론으로 그렇게 모임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발각되어 김범우는 유배를 받고 그 유배지역에서 먼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분이 최초의 순교자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 순교에 대한 확실성이 없어 미루다가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 올라가 계십니다. 그래서 김범우 토마스가 시복이 되면,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이 사건으로 유배를 가고 1년 동안 공부도 중지됩니다. 그러다 봄에 모여 기도모임을 재개하여 기도하는데 이제는 고해성사와 견진도 주면 좋겠다 해서 이승훈이 견진을 주어 10명의 성직자를 임명했다고 합니다. 이를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임시 성직제도 또는 가성직제도라고 부릅니다.

 

당시 가성직제도 하의 성직자 중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라고 추정되는, 알파벳어로 ‘훤전(Hiuenchen)’이라고 되어있는 성직자가 더 열심히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려 여러 교리서를 뒤져보다 아무나 성사를 주면 안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승훈에게 “우리가 하는 이 일이 아무리 좋은 뜻이라 해도 서품도 안 받고 성사를 주는 것은 ‘독성죄’라고 하는 큰 잘못이니 알아봐야 한다.”고 편지를 보냅니다.

 

또 급하게 윤유일 바오로라고 하는 양반출신의 평신도를 밀사로 보냅니다. 그리하여 1789년과 1790년에 북경을 가는데 처음에는 이승훈에게 세례를 주었던 그라몽 신부님을 찾았으나 신부님이 마카오로 떠나고 북경에 안 계시는 바람에 로우 신부님이라는 라자리스트 신부님에게 세례를 받고 구베아 주교님에게 가서 견진까지 받습니다. 그라몽 신부님이 이승훈에게 세례를 줄 때 구베아 주교님은 부임 받기 전이라 현장에 안 계셨답니다. 그리고 이승훈이 세례 받고 떠난 얼마 후 도착해서 함께 있던 신부들에게 그 당시 이 씨 성을 가진 귀족 한 명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갔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가 5년 후 밀사의 방문으로 이승훈이라는 조선인이 자국에서 견진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즉시 구베아 주교님께서는 “모르고 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당장 성사를 중지시키고 다만, 교회에는 상등통회제도가 있으니 진심으로 뉘우치는 그 순간 고해성사랑 똑같은 효력을 발휘한다. 그 상등통회에 의해서 기도모임을 하라. 내가 빨리 사제를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이후 윤유일이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포도나무 가지 같은 것을 가지고 오고 성작도 길이를 재서 왔는데 6개월도 못되어 재차 가서 성직자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성직자는 오지 않고 천주교 신자는 앞으로 제사를 지내지 못하며 절하면 안 되고 신주도 모시면 안 된다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 후 전라도에서 윤지충, 권상연이 어머니 제사를 모시면서 신위, 신주, 위패를 땅에 묻고, 그로 인해 사형을 당하게 되는데 이것이 ‘진산사건’입니다. 1794년 12월 겨울, 주문모 신부님이 처음으로 입국하여 지금의 가회동 성당 인근 현 한옥마을로 오셔서 미사를 드리고 조선말을 배우다 발각되기 전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6년간 머물며 사목하셨는데 그동안 1년에 천 명 정도 세례를 주십니다.

 

한국교회에 신유박해 때까지 만 명의 신자가 있었지만 여러 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고 주문모 신부님은 배를 타고 중국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발이 안 떨어져 다시 돌아와 자수를 하고 새남터에서 순교하십니다. 이승훈, 정약종, 황사영, 강완숙 등 훌륭한 평신도 지도자들도 그때 순교하게 되는데 이것이 정조임금 사후에 일어난 신유박해 사건입니다.

 

이때 300여 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순교자 명단은 150명 전후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후 많은 신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우촌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1825년 유진길이 쓴 편지가 교황청에 도착하고, 교황청에서는 1831년에 브뤼기에르 주교님을 첫 번째 주교로 임명하시어 오늘날 교구에 준하는 지역을 선교지로 설정해줍니다. 이것으로 1831년에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서 조선대목구가 탄생하는데, 바로 서울대교구의 예전 명칭입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1835년까지 계속 조선에 들어오려고 노력하셨는데, 조선은 포르투갈에 선교우선권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선교보호권이라고도 하는데 흔히 ‘빠드로아도(padroado)’라고 하는 제도에 의해서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열어주는 협조를 안 해서 돌고 돌다가 내몽고 인근에서 선종하시게 됩니다. 다행히 이후 처음으로 모방(Pierre-Philibert Maubant) 신부님이 오시고 바로 3명의 신학생을 뽑습니다. 1월에 들어오셔서 2월에 최양업, 3월에 최방제, 7월에 김대건 소년을 뽑습니다. 한양에 와서 라틴어 기초를 가르치고 유학을 보내는데, 늦게 들어온 김대건 소년은 기초가 없어서 유학을 안 보내려고 했습니다. 기초를 좀 하고 1년 후에 보내려고 하다가, 압록강이 얼 때 걸어서 보내야만 하는데다, 1년 후엔 박해 때문에 유학의 기회도 놓치겠구나 싶어서 함께 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3명의 소년이 압록강 위를 걸어 유학을 가게 됩니다. 12월 3일에 출발해서 다음해 6월 7일에 마카오에 도착합니다. 거의 6개월을 걸었다고 보면 됩니다.

 

올해는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입니다. 세계교회의 두 기둥을 베드로와 바오로라고 한다면 한국교회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이 계십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교회의 첫 번째 사제로서 이 땅에 크게 교회 제단을 세우셨고, 최양업 신부님은 11년 6개월 동안 직접 발로 뛰며 사목하시다 업적을 많이 남기고 선종하셨습니다. 故 정진석 추기경님(2021년 4월 27일 선종)께서 최양업 신부님 편지를 번역하면서 편지의 제목을 “김대건 너는 주추 놓고 나는 11년 6개월 동안 사목하면서 세우고”라고 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스승들의 초기 평가서인 생활기록부가 편지로 남아 있는데, 1839년 조선으로부터 받은 편지에 유진길, 조신철, 정하상 지도자들이 세 명의 유학생들에게 기대를 많이 걸고 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가장 뛰어났다는 최방제가 첫 해에 위열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고 둘이 남았는데, 리브와 신부는 “토마스는 계속해서 유리한 상태에 있고 천주님께서 그의 건강을 허락해 주신다면 조선 포교지를 위해서 유익한 몸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불쌍한 안드레아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편지에 썼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학생 때 자주 아프고 기초도 못 마치고 마카오로 간데다 기후와 음식이 바뀐 상황에서 라틴어도 어려워 여러 병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데플레슈 교장 신부님은 둘이 균형이 없이 너무 차이가 난다고 걱정을 하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나중에 병이 나아지고 키가 많이 자랐답니다. 그 후 이분들의 부모님들과 스승들이 순교하게 되고, 페레올 주교님이 3대 주교님으로 임명이 되시면서 김대건은 8월 17일에 먼저 사제서품을 받게 됩니다. 당시 사제서품을 받게 되면 친필서약을 하는데 교황청에 있는 서약서의 내용을 보면, “조선인 사제 김 안드레아는 중국인의 의식과 제례에 관해서 클레멘스11세 교황님의 명령에 따라 서약을 한다.” 이것은 중국 의례, 조상제사, 즉 신주를 모시는 것을 하지 않겠으며, 신자들에게도 그것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한 내용으로 서약을 하고 친필에 따라서 “하느님과 이 거룩한 하느님의 복음서는 저를 도우소서.” 하고 김해 김 안드레아라고 편지 끝에 자신의 본관을 넣어 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페레올 주교님께서는 잘 받았다고 하는 싸인을 적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최양업 신부님 실력이 더 뛰어나다고 하셨는데, 김대건 신부님이 왜 먼저 서품을 받았을까요? 궁금하시죠? 실제로 최양업 신부님에 대한 평가는 늘 훌륭했습니다. 항상 규칙적으로 열심히 생활하셨는데, 페레올 주교님도 처음 최양업을 만났을 때 “이 이는 너무 훌륭해서 바로 서품을 주어도 되겠다. 하지만 나이가 교회법으로 만 24세가 넘어야 하니 조금 기다려야 하겠다.”라고 했었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두 분에게 갈등이 생깁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업적을 이야기하자면 바닷길을 통해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했고, 실제로도 부제서품을 받고 압록강을 건너 주교님을 모시기 위해 한양에 집을 하나 얻어놓고 배를 타고 서해로 갑니다. 나중에 ‘라파엘 호’라고 이름 지어진 이 배는 나룻배인 노젓는 작은 배였습니다. 상해에 도착했을 때 페레올 주교님은 “아니 어떻게 이런 배를 타고 왔느냐? 또 이 배를 타고 조선에 들어가려고 하느냐?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편지에 “조선인 교우들은 놀라운 신앙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저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중국 배를 구해보았지만 여의치 않게 되자, 대대적으로 보완을 하고 수리를 한 다음 거기에 ‘라파엘 호’라고 이름을 붙여서 타고 조선에 들어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라파엘 호’입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히시기 전에 조선전도를 작성하셨고 서해 바다를 통해 선교사를 모시기 위해서 우리나라 지도를 그리고 특히 섬을 자세히 그렸는데 여기에 울릉도와 독도가 고스란히 들어가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친히 작성한 것이 세 개 있는데 원본이 하나 있고 미국이나 다른 유럽에서 그것을 필사한 것이 계속 발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각종 지도를 번역했습니다.

 

7개월의 짧은 사목생활 중 딱 한 번의 부활절을 어머니 우르술라와 함께 보냅니다. 순교하시던 1846년 그 해에 많은 증언들이 나타나는데 부활절 전에 신부님은 서해 바다로 선교사들을 맞이할 길을 만들기 위해 떠나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님이 부활까지만 꼭 같이 지내 달라 하여 부활미사를 마치고 출발하셨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3개월 계시다 순교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첫 사제이며 순교자로서 순교하는 그 순간에 “지금 이 순간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들도 천국에 가려면 천주를 믿으십시오.”라는 말씀을 남기고 떠나십니다. 이 때 일어난 짧은 박해를 병오박해라고 합니다.

 

페레올 주교님이 당시 신자들 말을 듣고 남긴 편지를 보면, 김대건 신부님께서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마련했으니 여러분들은 똑똑히 들어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천주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이제 내게 막 시작되려고 합니다. 죽은 뒤에도 행복하게 살려거든 여러분도 천주님을 믿으십시오.”, “내가 이렇게 목을 돌리면 쉽게 칠 수 있느냐” 하면서 목을 내밀며 사형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1845년에 김대건 신부님이 서품 받고 귀국하고도 4년이나 늦게 서품을 받았는데, 사실 실력도 좋고 항상 모범생이라고 평가되었습니다. 이 분의 생활기록부를 보면 “브뤼니애르 신부는 우리와 남은 조선학생(최양업)을 교육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그는 이 학생에게서 많은 재능, 무엇보다도 좋은 판단력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브뤼니애르 신부는 그를 가르치기에 아주 적절한 학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지도하는 대다수 스승들은 최양업 신학생이 훌륭한 학생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1844년에는 두 신학생이 부제품까지 같이 받았습니다. 나이가 그때 만 23세라 지금 바로 서품을 주어도 되는데 1년만 기다리자 하다가 김대건은 다음 해에 서품 받아 돌아오고 최양업은 5년이나 늦어진 것입니다.

 

그 이유에 관한 메스트리 신부님 편지가 남아있는데, 페레올 주교가 토마스에게 반감을 가졌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은 주교와 얼마동안 같이 지내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아주 쉽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옆에서 지켜본 메스트리 신부님이 본부에 몰래 보내는 편지를 보면, 원래 페레올 주교님이 최양업 신학생을 처음 만났을 때는 바로 서품을 주어도 되겠다고 하였다가 두 분이 무엇이 안 맞았는지 반감이 생겼나 봅니다. 그 후 페레올 주교님께서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조선에 들어가는 바람에 최양업 신부님의 서품이 늦어집니다.

 

최양업 신부님 생애를 보면 김대건 신부님이 먼저 조선에 들어간 이후 1847년 본부가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옮겨지는 그 해에 홍콩으로 가게 되는데 여기서 사전(辭典)도 없이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합니다. 이것을 스승에게 교정해서 교황청에 올려달라고 하는데 서너 개 단어를 고쳐서 올리게 되고 나중에 79위 복자가 될 때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네 번의 조선 입국을 실패했고, 마침내 1849년 상해에서 마레스카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이 되고 다음 해에 육로를 통해 우리나라에 도착하게 됩니다. 첫 6개월간 5천 리를 넘게 걸었고, 11년 6개월을 살면서 1861년 문경 일대에서 서울로 오는 길에 선종하시게 됩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업적을 보면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교우촌을 사목 방문하고 요리문답, 옛날 교리서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기도문들이 최양업 신부님을 통해서 한글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천주가사를 작성하셨고, 사제양성을 위해 신학생을 추천합니다. 신학생들을 페낭 신학교에 보내며 “우리 조선인은 회개를 할 줄 모르니 잘 가르쳐주시고 교만한 것들이 많으니 그러한 것들을 바로 잡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당부하는 편지를 같이 보냅니다.

 

편지에는 “조선에는 현재의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모의 초상부터 탈상까지 입어야 되는 상복의 풍속과 한글이 전교활동과 교리 공부에 큰 도움을 줍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조선의 모든 법이 복음을 전하기는 어려운데 딱 두 가지 하느님이 발명품을 주셨는데 하나는 상복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한글이라는 것입니다. 상복제도는 선교사들이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을 피할 수 있게 만들어서 그것이 선교에 도움이 되고, 한글은 너무나 쉽게 쓸 수 있기 때문에 잘 번역하면 아이들도 쉽게 교리를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11년 6개월 동안 많은 이들을 직접 찾아 사목하시다가 11년 반 만에 과로로 선종하시게 됩니다. 신부님께서 지으신 신앙가사로 영원한 본향인 천국을 직관하도록 하는 경세가(警世歌)로 알려진 사향가(思鄕歌)가 남아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손풍금도 선배들에게 돈을 줄 테니 사다 달라고 해서 수입해 오십니다. 신부님은 알게 모르게 전례음악도 처음으로 이 땅에 실현하셨고, 여러 교리를 천주가사를 통해서 전달해 주셨습니다.

 

페레올 주교님이 병으로 돌아가신 후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를 보면 주교님께 서운한 대목이 조금 나타납니다. 그러면서도 순명하며 열심히 사목활동을 하셨습니다. 베르뇌 주교님이 들어오셨고 배론에 요셉 신학교가 설립됩니다. 병인박해가 찾아왔는데, 그 이전에 최양업 신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때까지 계셨다면 순교하셨겠지요. 병인박해 이후로 한국교회는 그동안 있던 것들이 많이 무너지고 개항 이후 새롭게 재건됩니다.

 

오늘 간략하게 한국교회가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에 대한 것과 김대건, 최양업 신부님 생활기록부 몇 부분만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순교하셨지만 13개월 동안의 사제생활이 매우 다이나믹합니다. 부제 때 배를 타고 압록강이나 백두산을 넘어서 들어오려고 했던 모습들, 열정적으로 감옥 안에서 스승한테 편지를 보내며 아주 과감한 용덕을 발휘하며 선교사를 모시려 하셨던 모습이 나타나고, 최양업 신부님은 늘 성실하고 너무 한결같아서 어쩌면 우리가 볼 때 임팩트가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11년 6개월 동안 성실하게 교우들을 직접 찾아갔던 그러한 사목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올해 희년을 지내면서 김대건, 최양업 신부님을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옛 성모송으로 마침기도 바치겠습니다.

 

마침기도 – 옛 성모송(성모경)

 

성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네게 하례하나이다.

주 너와 한가지로 계시니,

여인 중에 너 총복을 받으시며,

네 복중에 나신 예수 또한 총복을 받아 계시도소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는,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아멘.

 

[평화가 넘치는 샘물(전국가톨릭경제인협의회 발행), 2021년 가을호(Vol. 31), 조한건 프란치스코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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