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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미술 이야기: 발을 씻어주시는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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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9-28 ㅣ No.48

[성미술 이야기] 발을 씻어주시는 예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 오토 3세의 기도서에 실린 채식필사화. 서기 1000년경. 33×23.8㎝. 뮌헨 시립도서관 소장.

 

 

제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수님을 쳐다본다. 뒤쪽에서 혼자 딴전을 피는 제자가 유다일 것이다. 격류가 소용돌이치는 듯한 역동적인 옷주름 처리와 등장인물의 생동감 있는 표정은 오토 시대 미술의 특징이다. 예수님은 등장인물 가운데 키가 가장 크다. 등장인물마다 맡은 역할의 무게에 따라서 비례에 차등을 두는 「가치비례」의 원칙을 따라 그렸기 때문이다.

 

 

교만을 씻어내고 겸손을 섬겨라

섬김과 낮춤을 통해 긍휼과 사랑의 본보기를 보이셨다

 

과월절 하루 전날이었다. 저녁식사 때였는데, 예수께서 무슨 영문인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대야에다 물을 떠놓고 한 사람씩 불러서 손수 때를 벗기시고 또 수건으로 닦아주셨다고 한다. 그때 제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엉겁결에 다리를 내밀기는 했지만, 모르긴 몰라도 무척 쑥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팔 소매 걷어 부치고 허리끈 졸라맨 뒤, 수건 한 장 옆에 턱 걸치고, 제자들 발의 때를 밀기 시작한다. 제자들은 무엇보다 예수님이 자기네들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무릎 꿇은 것을 보고 기겁했을 테고, 두 손으로 물을 적셔서 발을 씻어주시자 그야말로 대경실색했을 것이다. 포장된 도로가 거의 없던 시대니까, 발가락 사이에 흙 때가 꽤 실하게 달라붙어 있었을 것이다. 한 사람에 십 분씩 잡아도 두 시간이 꼬박 걸리는 중노동이다.

 

사실 고대 동방 전통에서는 손님이 찾아오면 씻을 물을 챙겨드리는 풍속이 있었다. 귀한 손님이 오면 시종이나 노예를 시켜서 발을 닦아드리게 했는데, 높으신 분이 행차하셨을 때는 주인이 직접 나서서 궂은 일을 맡기도 했다.

 

한 사람씩 씻기다가, 마침내 베드로 차례가 왔다. 베드로는 한사코 손을 내젓는다. 『안 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 하십니다』라고 버티면서 두 발을 감춘다. 그의 평소 울뚝진 성격을 잘 아시는 예수께서는 『그러면 너와 나는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라고 잘라 말씀하신다. 아예 인연을 끊겠다는 뜻이다. 발언 수위가 거의 협박성에 가깝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가 꺾이기는커녕 『그러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주십시오』하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상심할까 걱정이 되셨던지, 부드럽게 타이르신다.

 

『씻은 사람은 또 씻을 필요가 없다』(요한 13, 10 라틴성서의 qui lotus est, non indiget ut lavet을 우리말 성서에는 「목욕을 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그만이다」라고 옮겼다.)

 

물이 담긴 대야와 지저분한 발은 상상만 해도 벌써 근사한 그림이 떠오른다. 물이라고 하면 더러움을 씻고 정갈하게 만드는 종교적 의미가 있고, 발은 신체 가운데 우리가 태어난 대지와 접촉하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보면, 둘 다 훌륭한 상징에 손색이 없다.

 

이 그림은 오토 시대의 필사화이다. 베드로가 왼쪽에 앉아 있고, 예수님은 한복판에 서 계신다. 서로 상대방을 향해서 과장되게 손을 내밀고 있는데, 이런 몸짓은 미술의 어휘로는 「대화」 또는 「설득」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보나마나 베드로가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고 또 예수님이 으름짱을 놓는 대목일 것이다. 유럽의 라틴 미술 전통에서는 이처럼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 장면을 조형 미술의 주제로 즐겨 다루었다. 또 11세기 중반부터 등장한 무릎을 꿇고 앉아서 시중하는 예수님의 자세도 서방미술의 발명품이다. 오토 시대의 필사화는 제작 시기가 10세기말~11세기초쯤이니까, 아직까지는 예수님이 허리를 곧게 펴고 있다. 한편, 동방의 비잔틴 미술에서는 제 차례를 기다리면서 신발 끈을 풀고 있는 제자 하나를 그림 한 구석에 끼워 넣는 소재를 개발했는데, 보기에 재미나고 눈길을 끌어서 금세 유럽에 수입되었다. 이 그림에서는 맨 오른쪽 제자가 신발끈을 풀고 있다.

 

일찍이 신성이 손을 내밀어 인간의 발을 씻어준 사례는 없었다. 고대의 신화와 전설에 무수히 등장하는 신들은 다들 억세고 전능한 손을 가지고 있지만, 고작 벼락을 때리거나 화살을 쏘아대고 황소의 뿔을 꺾으면서 힘 자랑이나 할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종과 노예들의 역할이었던 섬김과 낮춤을 통해서 하느님의 긍휼과 사랑의 본보기를 드러내 보이셨다.

 

따지고 보면, 발을 씻는 행위는 딱히 이야깃거리도 안 되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빼먹으면 안 되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일과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그것은 겸손의 교훈이다.

 

겸손은 자신을 상대방보다 낮추어 생각하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겸손의 반대말은 오만과 교만과 자만이다. 더욱 간교한 것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거짓 겸손일 것이다. 이런 패덕들은 미움과 다툼을 부추기고 공동체의 결속을 훼방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갈라디아서 주해에서 『겸손(humilitas)은 그리스도교 최고의 덕목이다. 교만은 사랑(caritas)을 가차없이 파괴하지만, 겸손은 사랑을 지킨다』라고 덕목의 가치를 소중하게 평가한 적이 있었다.

 

과월절이면 주님이 배반과 수난을 겪기 직전이다. 또 처형과 부활의 기적도 임박했다. 사랑하는 제자들과 나눌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또 당부해야 할 중요한 일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억눌린 자들의 인권이나 하느님의 역사 또는 인류의 구원처럼 굵은 주제들을 다 제쳐두고 그 금쪽 같은 시간을 쪼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그리고 의아해하는 베드로에게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라고 이르셨다. 그것은 아마 우리에게 교만의 노예가 되지 말고, 겸손을 섬기라는 무언의 교훈이 아니었을까?

 

[가톨릭신문, 2004년 3월 14일, 노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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