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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에서 배운다: 프랑스의 갈리아주의와 그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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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21 ㅣ No.553

[교회사에서 배운다] 프랑스의 갈리아주의와 그 영향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오늘날에도 많은 부분에서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그런데 역사 안에서 종교가 정치에 완전히 자유로웠던 시대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아무리 종교가 정치에 초연하다고 스스로 이야기해도 당대의 정치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역사 안에는 종교가 국가권력과 결탁하거나 예속되는 사례들이 빈번하게 있다.

이번 호에서는 국가권력이 과도하게 교회를 간섭한 대표적인 사례인 갈리아주의에 대해 알아본다.


갈리아주의가 일어난 배경

갈리아주의(Gallicanisme)는 피에르 피투의 저서 「갈리아 교회의 자유(Les libertes de l’Eglise gallicane)」에서 유래되었다. 여기서 피투는 프랑스 왕의 교회 권한을 주장하였다. 곧, 프랑스 왕은 국가 차원의 공의회를 개최하고 프랑스 주재 교황사절의 관할권을 제한할 수 있으며, 교황을 전체 공의회에 기소할 수 있고, 교황 칙서의 유효성을 자신의 동의에 매이게 할 권한이 있다고 서술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갈리아주의가 일어난 배경, 특히 프랑스에서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권력이 교회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프랑스에서 나타나게 된 것은 1309년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진 사건에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프랑스 왕은 교황으로부터 프랑스 교회의 자율권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콘스탄츠 공의회는 교황에 대한 공의회 수위설을 확인하였다. 1438년 프랑스 왕 샤를 7세는 부르주 국사조칙을 공포하였다. 이 법령은 교황보다 공의회를 우위에 두고 교황의 프랑스 왕국에 대한 간섭을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교황은 이 조칙의 철회를 주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516년에 이르러서야 레오 10세 교황과 프랑수아 1세가 볼로냐 정교협약을 제정함으로써 이 조칙을 철회할 수 있었다.

이후 가톨릭교회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되자, 트리엔트 공의회는 교황의 권위와 위엄을 회복할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점차 국민주의와 절대왕정이 강화되면서 유럽의 국왕들은 교황의 권위를 문제시하였다. 특히 역사적 배경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프랑스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결국 갈리아주의가 등장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갈리아 4개 조항

1673년 2월, 루이 14세는 「본질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국왕의 특권」이란 칙령을 반포하여 교회에 대한 국왕의 특권을 과거로 소급하여 확대시켰다. 오랫동안 국가에 대해 무력함을 보여왔던 프랑스 성직자들은 적법한 토대를 지니지 못한 이 법에 복종했다.

120명의 주교 가운데 당시 알레의 주교 니콜라우스 파비용과 파미에의 주교 콜레 두 사람만이 반대했으며, 그 이유로 이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다. 프랑스 왕의 이러한 조처에 대해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은 권고와 경고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1681년과 1682년 사이에 파리에서는 프랑스 성직자 총회가 개최되어 까다로운 몇몇 조항을 제외하고 교회에 대한 왕의 특권을 확대 적용하는 내용을 승인하였다. 그 결과 1682년 3월 19일에 ‘교권에 대한 갈리아 성직자들의 선언’이라는 ‘갈리아 4개 조항’을 장엄하게 선언하였다. 보쉬에 주교가 작성한 이 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어떤 교회 권력도 왕을 예속시킬 수 없다.

2. 콘스탄츠 공의회의 교령 : 사도좌의 승인과 갈리아 교회의 수용은 공의회 수위권 안에 있다.

3. 프랑스 왕국과 교회가 받아들인 법령, 관습, 헌장은 효력을 가지며, 프랑스 성직자들의 관습은 견고해야만 한다.

4. 교황은 신앙문제에 대하여 주요한 임무를 가지며 그의 교령은 모든 교회와 관련이 된다. 그럼에도 교황의 판단은 교회의 승인이 있지 않는 한 오류가 없다고 볼 수 없다.

이 조항에 대하여 로마 교황청은 매우 놀라고 분노하였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논쟁, 곧 로마 안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 구역의 자유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리고 교황 칙서 「주님의 만찬에서(In Coena Domini)」를 비판한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의 오만한 태도에 반대하는 포고문을 1687년에 교황이 발표하자, 루이 14세는 프랑스 남부의 교황령 아비뇽과 베네생을 점령했다가 후임 교황 알렉산데르 8세에게 되돌려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교황청과 프랑스 국가 사이의 갈등은 인노첸시오 12세 교황에 와서야 루이 14세가 ‘갈리아 4개 조항’을 철회함으로써 완화되어 갔다.


갈리아주의의 영향

‘갈리아 4개 조항’의 철회로 갈리아주의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 영향은 프랑스 왕국과 교회 안에 존속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교회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대내적으로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교회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에도 영향을 주었다.

페브로니우스주의와 요셉주의 : 갈리아주의는 독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트리어의 보좌주교인 요한 니콜라우스 폰 혼트하임은 유스티누스 페브로니우스라는 가명으로 「교회의 상태와
로마 교황의 합법적인 권한에 대하여」라는 저서에서 국가 교회적 경향과 공의회 수위설을 종합하여 자신의 사상을 기술하였다.

그는 교황은 교회의 수뇌이지만 공의회 아래에 있기 때문에 신앙문제의 결정권이 없으며, 교회 전체만이 무류성을 소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페브로니우스주의 또는 주교주의라는 이름으로 확산되었다.

1764년 교황청은 혼트하임의 이 저술을 단죄하였다. 이에 대해 1769년 독일의 트리어, 마인츠, 쾰른의 대주교들은 코블렌츠에서 혼트하임과 함께 31개의 명제로 페브로니우스주의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몇 년 뒤 실제적인 효력을 발휘했는데, 1785년 비오 6세 교황이 뮌헨에 새 교황대사관을 설립하자 앞의 세 대주교들과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는 1786년 엠스에서 23개 조항으로 된 ‘엠스의 논점’을 작성하여 교황대사관을 부정하였다. 1789년 교황은 이러한 요구를 서신을 통해 완전히 거절했으며, 이 문제들은 프랑스 혁명과 헝가리인들의 독일 침략 등으로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다.

페브로니우스주의와 같은 국가 교회주의는 오스트리아 황실에도 나타났다.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가그러한 경향을 드러냈다. 그는 국가의 교황 칙서들에 대한 선택적 권한 부여, 주교 입법권 탈취, 성직자 면세 취소, 모든 혼인문제에 대한 국가의 관여, 교황과의 직접적 관계 단절, 모든 수도원의 국가 예속 조치 등을 취했다. 이와 더불어 신학교도 새로 개편하고 신설하였으며, 교회의 전례까지 바꾸려고 시도하였다.

요셉주의라 불린 이러한 경향은 벨기에를 중심으로 한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주교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며, 요제프 2세 말년에는 그의 개혁 작업이 실패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국가의 교회 간섭 :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뒤 국민의회는 국가의 재정 궁핍을 메우려고, 교회 재산을 징수할 것을 주장한 탈레랑 주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790년 2월 13일에 비자선 사업을 하는 모든 수도회가 폐지되었고, 4월 14일에 교회의 모든 재산의 몰수와 국유화에 관한 법이 공포되었다.

1790년 7월 12일에 국민의회는 ‘성직자 공민헌장’을 통과시켜 모든 성직자는 이 헌장에 순종한다는 선서를 요구하였다. 이 헌장의 내용에 따라 135개의 교구가 83개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주교와 주임사제를 선거로 선출할 것을 규정하였으며, 국가가 성직자에게 지급하는 봉급의 액수를 규정하였다.

또한 주교, 주임신부, 보좌신부에게 임지에 거주할 의무를 부과하고, 세속 권력과 협의하지 않고는 임지를 떠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그런데 성직자들의 3분의 2가 이 헌장에 대한 선서를 거부하였다.

비오 6세 교황은 1791년 교황 교서를 통해 40일 이내에 선서를 취소하지 않으면 성직정지 처분을 내릴 것이며, 이 헌장에 따라 임명된 주교들도 무효임을 발표했다. 이 때문에 선서를 거부한 성직자들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4만 명의 사제들이 투옥되고 유배되었으며, 때로는 처형되었다.

그런데 절대왕정 시대의 프랑스 교회는 갈리아주의의 혜택을 입은 것이 사실이다. 국가권력의 도움 덕분에 교황청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위치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내부에서도 국가권력의 비호 아래 적지 않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교회에 특권을 부여해 준 국가교회 중심의 갈리아주의가 혁명시대에는 교회에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혁명으로 바뀐 국가 권력이 교회가 가진 특권을 박탈하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교회가 국가권력에 의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놓이게 될 때, 교회는 어떠한 자세를 선택해야 하는가? 그러한 국가권력에 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그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교회의 이익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얼핏 보면 후자를 택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이것이 교회의 발전과 유지를 저해하는 부작용으로 돌아올 수 있다. 갈리아주의에 편승했던 프랑스 교회의 모습이 우리에게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가르쳐주는 듯하다.

* 김규성 요셉 - 인천교구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에서 한국사학을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0월호, 김규성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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