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42-43: 1860년 9월 3일 죽림에서 쓴 열아홉 번째 서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1-11 ㅣ No.2149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42) 1860년 9월 3일 죽림에서 쓴 열아홉 번째 서한 ①


처참한 상황에도 신앙 지킨 신자들의 찬란한 믿음

 

 

- 최양업 신부가 박해를 피해 숨어 지냈던 죽림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저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최양업은 죽림에서 쓴 마지막 서한에서 이같은 심정을 토로한다.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신자들과의 만남에서 힘을 얻어 멈추지 않고 걸어온 길. 그 여정의 끝에서 최양업은 큰 위기를 맞는다.

 

 

1859년 시작된 박해, 신자들 위기로 몰아넣다

 

드러내놓고 신앙생활을 하긴 어려웠으나, 대규모 박해가 없어 전국 곳곳의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왔던 신자들. 1858년 10월 오두재에서 보낸 서한에서 “머지않은 미래에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리라고 예언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며 신앙의 자유를 꿈꿨던 최양업은 불과 2년 만에 큰 위기를 맞는다. 경신박해가 일어난 것이다.

 

1859년 말부터 1860년까지 이어진 경신박해는 천주교에 대해 개인적으로 반감을 품고 있던 좌포도대장 임태영과 우포도대장 신명순에 의해 일어났다. 천주교 교세가 날로 확산되자 임태영과 신명순은 조정의 허락 없이 서울과 지방의 교우촌을 급습, 30여 명의 신자들을 체포해 서울로 압송시킨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재산을 약탈하고 가옥에 방화한 것이 문제가 되자 조정에서는 당시 세도가인 안동김씨 집안의 호조판서 김병기, 병조판서 김병운 등이 천주교인 체포를 반대했다. 다행히 박해는 잦아들었지만 9개월간 이어진 핍박과 약탈로 많은 신자들이 피해를 입었다.

 

최양업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포졸이 사방으로 파견돼 선교사 신부님들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할구역에서 열일곱 명의 신자들이 체포됐는데 남자가 열네 명이고 여자가 세 명이라는 소식이 저에게 전달됐습니다. 그 밖의 교우들도 특히 이 도의 신자들은 거의 모두 자기 마을에서 쫓겨났고 집과 전답과 생활필수품을 전부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을 데도 없고 몸 붙여 지낼 곳도 없이 극도로 처참하게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교우들이 감옥으로 끌려간 마을에서는 포졸들이 모든 것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습니다.”

 

가혹한 고문을 당해낼 재간이 없던 신자들은 배교를 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혼란스런 상황에서 신앙을 지킨 신자들의 믿음은 더욱 찬란히 빛났다.

 

“아주 열심한 신자인 노파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리를 설명해 많은 신자로 이뤄진 교우촌을 세웠고 철저한 교리교육과 신심의 모범으로 그 교우촌을 지탱해 왔습니다. 노파는 체포돼 문초를 받았을 때 그리스도를 용맹히 증거한 후 혹독한 매를 맞고 그 상처 때문에 순교했습니다.”

 

“경주 감옥에 갇혀있던 열 명의 신자들은 세 차례나 문초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문초를 당할 때마다 용감히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증거했고, 지금까지 감옥에서 고초와 굶주림과 병고로 처참하게 고생하면서도 신앙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최양업 신부가 1860년 9월 3일 쓴 열아홉 번째 서한.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어렵게 일군 교세, 박해로 꺾이다

 

최양업이 사목방문을 시작한 1850년 1만1000여 명이었던 신자는 꾸준히 증가해 1859년에는 1만6000명을 넘어섰다. 땀과 믿음으로 일군 결과였기에 최양업은 박해로 인해 교세가 위축될 것을 우려했다.

 

“박해 전에는 천주교에 대한 인기가 상승해 사방의 많은 외교인 중에서 예비 신자들이 속출하므로 우리는 큰 위안을 받고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주민 전체가 기도문과 교리문답을 얼마나 열성적으로 배우는지 서로 경쟁을 하기도 했답니다.”

 

박해가 있기 전, 천주교의 기세가 확산되고 있었고 신자들이 늘어나자 최양업이 관할하는 구역에서 세례를 받고자 하는 예비 신자들도 100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시작된 박해는 전국으로 번졌고, 그 결과 새로운 신자를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용감하게 신앙을 지킨 신자들조차 잃을 위기에 처했다.

 

“이번 박해로 모든 외교인이 천주교를 박멸하기 위해 무장하게 됐고 마을마다 천주교의 인기는 뚝 떨어지고 아직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한 자들은 실망하며 많은 이들이 적어도 겉으로는 냉담 교우로 보입니다. 오늘까지 굳세고 용감하게 신앙을 지킨 교우들까지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마음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11월 6일, 민경화 기자]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43) 1860년 9월 3일 죽림에서 쓴 열아홉 번째 서한 ②


벼랑 끝에 놓인 양들의 가련한 처지 애통해하다

 

 

- 박해의 칼날은 납치와 능욕의 위험으로 여성 신자들에게 더욱 가혹한 상처를 남겼다. 사진은 해미순교성지에 설치된 밧줄에 묶인 순교자 조각상.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경신박해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있던 당시 최양업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좌절했다. 포졸들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오는 긴박한 상황. 언제 붙잡혀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양업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가련한 포교지를 맡아달라”고 당부한다.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 듯 하직 인사를 전했던 이 편지는 최양업의 마지막 편지가 됐다.

 

 

구원의 피난처 잃은 여성 신자들의 좌절

 

박해의 칼날은 여성 신자들에게 더욱 가혹한 상처를 남겼다. 동정을 지킨 이들을 능욕하는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스물네 살쯤 된 동정녀와 열일곱, 열여덟인 처녀를 붙잡은 포졸들은 이들을 관가로 데려가지 않고 농락하거나 다른 데 팔아먹으려 했습니다. 포졸들의 속셈을 알아차린 세 처녀는 자기들을 놓아달라고 애걸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포졸들의 짐승 같은 욕정을 진정시키셔서 무사히 풀려났습니다.”

 

또한 어린 과부나 처녀들은 납치의 위험에 쉽게 노출됐다.

 

“남편이 감옥에 갇힌 젊은 부인 한 명과 처녀 한 명도 납치를 당했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교우 처녀들을 어쩔 수 없이 외인들에게 정혼시켜 버렸습니다. 모든 희망을 잃고 이미 외인들과 정혼한 처녀도 많습니다. 납치와 능욕의 위험이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물질적 수탈로 모든 것을 잃었지만 신앙을 지킨 신자들은 크게 한탄하거나 원통해 하지 않았다. 가슴 속에는 하느님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최양업은 “집에서 쫓겨나면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친구들에게 구걸하며 살아가면서도 저 예비신자들은 크게 원통해 하지 않습니다”라며 “저들이 박해의 북새통에 아직 세례받지 못한 것만이 유일한 고통이랍니다”라고 전했다.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 신자들을 향하다

 

1836년 모방 신부의 입국 이후, 조선에서 끊임없이 선교하며 신앙의 자유를 위해 힘썼던 서양 선교사들. 그들이 조선에서 선교한 역사는 30년을 앞두고 있었지만 여전히 조선인들에게 서양 선교사는 베일에 쌓인 존재였다. 서양선교사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을 최양업은 이같이 설명한다.

 

“조선 조정과 온 백성들은 천주교 신자나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를 상대로 무슨 음모나 꾸미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합니다. 저들은 ‘자기네 종교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좋은 종교이고, 또 천주교의 외양은 그럴듯하고 멋있게 보이는데 그 외양 아래 흉측한 음모가 숨어있지 않다면 왜 비밀리에 전도하는가? 특히 선교사들이 남의 나라에 몰래 들어와 은밀하게 교리를 전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추리합니다.”

 

몰래 입국해 모든 것을 비밀리에 수행하고 있는 서양 선교사들의 태도가 조선 조정과 백성들에게는 음흉한 행동들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는 프랑스 정부가 합법적으로 나서지 않은 이유가 컸다. 이 때문에 최양업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편지를 통해 피력해 왔다.

 

프랑스 정부의 행동을 상징하는 것은 프랑스 함대였다. 1846년 세실 함장이 군함을 이끌고 조선 원정을 단행한 이후로 종종 조선에 모습을 드러낸 프랑스 군함.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조선에 대한 무력 침략과 식민지화였고, 종교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는 점차 퇴색했다.

 

이러한 이유로 서양 함선에 대한 경멸과 적개심이 조선 사회에서 확산되고 있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서양 함선들을 무서워했고 그 함선들에 굉장한 무엇이 있는 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러 해 전부터 서양 함선이 자주 나타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 이제는 해적으로 여깁니다. 조선 백성들은 ‘저 큰 함선들은 틀림없이 해적선이거나 범죄자들의 선박이다. 만일 그 함선들이 합법적인 어떤 국가에 속한다면 어떻게 공공권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이유 없이 남의 나라에 이렇게 자주 침범할 수 있는가?’라고 수군거립니다.”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이 천주교 신자들로 향한 상황. 벼랑 끝에 놓인 가련한 신자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최양업은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희를 재난에서 구원하소서”라는 기도로 편지를 마친다. [가톨릭신문, 2022년 11월 13일, 민경화 기자]



24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