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김수환 추기경님의 가난과 겸손, 온화함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1-11 ㅣ No.837

[허영엽 신부의 ‘나눔’] 김수환 추기경님의 가난과 겸손, 온화함

 

 

올해는 김수환 추기경님 탄신 100주년이라 전국 교구에서 각각 많은 행사가 있었고 또 있을 예정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수환 추기경께서 2009년 2월16일 오후 6시12분에 우리 곁을 떠나 하느님 품 안에서 선종하셨습니다.” 나는 김 추기경님의 선종 소식을 가장 먼저 많은 기자들 앞에서 알렸던 때를 생각하면 늘 가슴이 아려옵니다. 선종 메시지를 발표하는 동안에도 편안하게 잠들어 계시던 모습이 자꾸 떠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하시며 위독하신 적도 몇 번 있어 교구에서는 선종 전에 이미 장례위원회를 꾸려놨습니다. 그런데 선종 후 다음날 새벽부터 명동성당 주위를 둘러싸고 끝없이 돌아서 명동 입구에서 신세계 백화점 건너편까지 수백 미터의 애도 인파가 몰려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광경이었습니다. 내가 속한 홍보 분야는 우리가 준비했던 것을 모두 수정해야 했고, 예외의 상황에 순발력 있게 대처해야 했습니다.

 

추기경님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려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한밤중에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장례가 끝난 후 나는 한 방송국과 인터뷰를 통해 “추기경님 장례 닷새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나”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난 주저 없이 “그 시간들은 기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5일간의 장례는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강한 체험이었습니다.

 

지금도 병실에서 만난 김 추기경님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추기경님은 낮인데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간호하시는 수녀님 말씀이 추기경님께서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시고 몇 시간 전에 잠드셨다고 했습니다. 잠드신 모습이 아주 편안하게 보였습니다. 벽에는 김 추기경님이 직접 종이에 그린 그림들이 붙어있었습니다. 나중에 바보 심볼이 된 그림도 걸려있었습니다. 나는 추기경님께서 일어나시길 기다리다가 성호를 긋고 잠시 기도를 바친 후 병실을 나섰습니다. 그때의 추기경님과의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 되어버렸습니다. 추기경님은 얼마 후 선종하셨습니다.

 

 

선종 후 예기치 못했던 애도 인파, 기적의 시간들

 

김 추기경님이 선종하시기 전 한 방송사 PD가 찾아와 내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 신부님이 김 추기경님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무엇을 주제로 하시겠습니까?” 당시 많은 언론에서 입퇴원을 반복하고 계신 김 추기경님의 특집 프로그램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글쎄요, 저라면 추기경님의 인간적인 면을 집중적으로 다룰 것 같습니다. 겸손함이나 따뜻한 마음이 좋을 것 같네요. 그리고 그분의 유머 감각도요.”

 

김 추기경님은 겸손한 성품을 가지셨고,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실 수 있는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신학대학 1학년 때였습니다. 학보사 기자였던 나는 편집장 선배의 김 추기경님 인터뷰에 동행했습니다. 인터뷰 내용은 교황 선거에 관해서였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교황 선거에 참여하고 김 추기경께서 막 귀국하셨을 때였는데 신학생들이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추기경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사 가능성은 별로 없었지만 무작정 비서실에 인터뷰를 부탁했고 놀랍게도 며칠 후 연락을 받은 것입니다.

 

막상 추기경님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우리는 몹시 긴장했는데 명동 집무실에서 처음 만난 김 추기경님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셨습니다. 실제로 인터뷰에 들어가자 우리는 실수를 연발했습니다. 질문에서 사용한 라틴어 단어를 틀리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틀린 단어를 교정해주시고는 “기사를 쓰려면 이런 것을 질문해야 하지 않아?”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한 시간가량 마치 오래된 벗처럼 우리와 격의 없이 대화하셨습니다. 헤어지면서 우리는 준비가 소홀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는데 김 추기경님은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누구나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야. 나도 그랬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 한마디로 잔뜩 얼어있던 우리들의 마음은 어느새 봄날처럼 풀렸습니다.

 

우리는 인터뷰 끝에 사진 촬영을 위해 정장을 입고 포즈를 취해주시기를 요청드렸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흔쾌히 옷을 갈아입고 나오셨는데, 그만 바지 단추가 제대로 잠기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자 김 추기경님은 돌아서서 “남대문이 열렸네!” 하시며 파안대소하셨습니다. 우리 신학생들도 같이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나 인간적인 면을 지니셨던 분이었습니다.

 

김 추기경님은 은퇴하신 후 강의나 강론 때 꼭 유머로 시작하셨습니다. 시중에 유행 중인 유머를 기억하셨다가 꼭 사용하시곤 했는데, 어느 자리에서든 유머로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시려는 그분의 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김 추기경님은 스스로 가난하게 사시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내가 대신학교 4학년 당시 나의 형님 신부님은 교구장인 김 추기경님의 비서 신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오후에 형님의 숙소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방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열어 보니 김 추기경님이 서 계셨습니다. 형님 신부님이 신학생 동생이라며 나를 소개하자 아주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리고는 형님 신부님에게 “허 신부! 천 원짜리 몇 장 있나? 택시를 타야 하는데 차비가 없어서…” 잠시 후 김 추기경님은 형님이 드린 천 원짜리 몇 장을 주머니에 넣고 외출하셨습니다. 뚜벅뚜벅 교구청 걸어가던 그분의 뒷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권위적이지 않고 늘 다정하시던 김 추기경님

 

언젠가 김 추기경님께서는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김 추기경님을 만나본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에 한 사람’이라고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 만나는 그 한 사람에게 집중하신다는 뜻입니다. 김 추기경님은 대화를 하실 때 끊지 않고 상대의 말을 많이, 그리고 끝까지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존중받는다고 느끼게 해주십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른으로서 참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보좌신부 시절 나는 유학을 떠나고 돌아오면서 김 추기경님과 독대할 기회가 몇 번 더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김 추기경님은 마치 영성 지도 신부님처럼 영적인 대화를 한 시간 넘게 편하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때로는 외국에서 받은 편지에 당신의 인간적인 느낌을 아주 솔직하게 써주시기도 했습니다. 나는 동생 신부의 사제 서품을 앞두고 귀국 허락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는데 김 추기경님은 답장을 바로 주셨습니다. 김 추기경님께서는 다정한 안부와 함께 내 글을 읽고 김 추기경님의 형님 김동환 신부님이 동생인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새롭게 알게 되어 가슴이 찡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선종하신 날 밤, 나는 추기경님께서 보내주셨던 편지를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지난 2002년 어머니를 떠나보낸 우리 형제들에게 친필로 보내주신 편지였습니다. 몸이 많이 아파서 장례미사에 참석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김 추기경님의 편지들은 모두 직함 없이 그냥 ‘김수환’으로 적혀 있습니다. 격의 없고 권위적이지 않은 모습이 느껴집니다. 늘 다정한 말씀과 함께하시던 김 추기경님의 바보 웃음이 그립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11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4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