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가을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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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1-11 ㅣ No.836

[레지오 영성] 가을의 영성

 

 

오랜만에 시골 어머님 댁에 들렀습니다. 햇볕이 좋은 마루에 나물이 그득했습니다. 노는 볕이 아까워 나물이라도 내 말리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햇살처럼 따사로웠습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도 어떤 이는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 가을볕에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고, 어떤 이는 숨 가쁘게 자신의 삶에만 골몰하며 무심한 그늘로 살아갑니다.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갑니다. 좋아하는 사람, 하고 싶은 일, 가지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것, 맘에 드는 물건을 고르며 삽니다. 사랑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골라잡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선택입니다. 사랑은 감당해야 할 책임과 무게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견디어 내야 하는 고통, 치러내야 하는 희생은 사랑의 무게입니다. 그 무게를 감당해내는 사랑만이 참된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선택한 것에 자신의 모든 거는 것이겠지요.

 

 

선택과 집중

 

경영학자 마이클 포터가 이론화한 경영의 전략은 ‘선택과 집중’의 원리입니다. 사업을 성공적으로 경영하는 기업이나 정책을 수립하고 운영하는 조직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원리이며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삶 또한 선택과 집중의 원리에 충실할 때 성화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식별은 올바른 것을 선택하기 위한 기도이며 수덕은 선택한 것에 집중하는 열정입니다.

 

‘선택’은 하나를 더 갖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의 가치를 소중히 지켜나가기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선택은 헛된 것들을 포기하고 선택한 것에 오롯이 집중하게 합니다. 그 집중이 삶의 진정성을 만들어내며 선택한 것을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내걸 수 있는 열정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알베르토 카뮤가 “열정이란 주어진 모든 것을 필사적으로 불태우며 최대한 성실하게 살려는 노력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듯이 열정은 신중한 선택과 과감한 포기의 산물인 집중에서 나오는 동력입니다.

 

삶이 시들하고 혼란스러울 때, 지금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힘의 근원지를 살펴야 합니다.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무시한 채, 좋아 보이는 것은 이것저것 다 기웃거리다 보면 삶은 허접한 놀이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절망 속에서 열정은 식어버리고 냉소적인 태도로 자신의 삶을 세상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돌려세웁니다. 그리고 헛된 것들만을 움켜쥐고 하느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잃고 멸망하는 불행한 삶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사랑의 순교

 

저는 올해로 사제가 된 지 꼭 30년이 되었습니다. 그 세월 중에 12년을 순교자들을 모신 성지의 머슴으로 지내면서 참으로 큰 은총과 축복 속에 살았습니다. 참된 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던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그분들의 ‘선택’이 지니는 절실함이, 그 선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치열함에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그분들이 목숨을 바쳐 선택한 신앙은 어떤 것일까? 선택한 것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열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선택과 집중이 만들어내는 생명의 열매를 나는 맺고 있는 것인가?

 

이런 물음 앞에서 늘 부끄러운 자신을 돌아보며 지낸 세월이 나를 지켜 주었고, 나약하고 부족하지만 나도 그분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동경하고 추구하며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살아갑니다. 순교는 참된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은총의 삶입니다. 결실을 위해 모든 잎을 떨궈버리고, 묵묵히 한겨울을 견디는 겨울나무처럼 의젓하고 자유로운 삶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사랑을 선택하는 일에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단순한 봉쇄수도자의 삶을 선택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수호성인이 되신 소화 테레사 성녀의 삶은 하느님의 사랑을 목도하고도 늘 멈칫거리는 우리의 영혼을 비춥니다.

 

“나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 안에서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영성이 무르익는 가을

 

11월은 위령성월입니다. 누구나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서 살아내야 할 삶의 몫을 감당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녹록지만은 않지요. 진정으로 삶을 사랑한 사람만이 죽음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듯이, 우리 앞에 당도할 죽음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순간의 삶을 가볍게 지나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진지하고 투명하게 바라볼 줄 알고, 그 안에 존재하는 진정한 가치들을 식별할 줄 압니다. 그토록 오롯한 마음이 있어야 진실한 삶을 선택하고 그 선택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바칠 수 있겠지요. 영혼이 겪어야 할 아픔과 슬픔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며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선택할 때 우리의 삶이 ‘진정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을은 풍성함과 쓸쓸함이 함께 어우러져 빚어내는 오묘한 아름다움이 물드는 계절입니다. 여름내 쏟아지는 햇볕 아래 맺은 결실을 아낌없이 다 내어주고, 때가 되면 어김없이 제 빛깔로 물들여 떠나보내는 가을 나무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이며, 영적인 삶이 도달해야 할 삶의 모습이겠지요.

 

포기를 통하여 참된 것을 선택하고, 오롯한 열정으로 진정한 것에 집중하셨던 순교자들처럼 우리의 신앙도 죽음을 통하여 삶을 깨닫고, 삶을 돌아보며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가을의 영성이 익어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11월호, 김영수 헨리코 신부(전주교구 치명자산 성지 평화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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