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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청주의 순교자, 오반지 바오로와 장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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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3-01 ㅣ No.597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청주의 순교자, 오반지 바오로와 장 토마스

 

 

지난호에 이어 청주에서 순교한 오반지 바오로와 장 토마스를 만나보겠습니다. 오반지는 청주의 읍청당에서, 장 토마스는 장대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신앙이 삶의 중심임을 굳게 믿은 오반지

 

성품이 온화하면서도 심지가 굳었던 오반지 바오로(1813-1866년)는 지장골(충북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에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본디 집안이 부유했으나 배울 생각이나 일할 생각을 하지 않고 노름과 술로 가산을 탕진한 그는 궁핍하게 살다가 1857년(또는 1858년)에 입교하였습니다. 세례성사를 받고 은총으로 감화된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모든 악습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극심하게 곤궁한 삶을 인내하며 잘 견뎠습니다.그를 만난 페롱(1827-1903년) 신부는 1866년 9월 25일자 서한에서 “나는 항상 그에게서 대단한 신심과 수긍할 줄 아는 온순함을 보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칼레(1833-1884년) 신부도 1866년 병인박해 보고서에서 “그는 진실하게 신앙을 실천했고, 신앙은 그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고 하였습니다.

 

1866년 3월 중순에 청주의 포졸들에게 같은 마을 젊은이와 함께 체포되어 감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형벌을 받으면서도 오직 “나는 천주교인이요. 나는 배교할 수 없소.”라고만 하면서 신자들을 밀고하기를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선교사들에 대해 물으면 그들을 보호하려고 모른다고만 하였습니다. 형리 가운데하나가 오한으로 벌벌 떠는 그를 끌고 가면서 욕설을 퍼붓고 몽둥이로 머리를 때려 머리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그가 “나를 죽이라는 지시를 받으면 그때 자네의 본분을 다하게. 하지만 지금은 관장의 지시도 없는데 어째서 나를 때리는가?” 하고 항의하자, 형리는 한층 더 심하게 대했습니다.

 

갖은 방법으로 그를 배교시키려 했으나 그의 항구함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한 관장은 기생을 보내 그를 유혹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틀 밤 내내 기생을 쳐다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으며, 다른 이들에게도 기생의 말을 귀담아듣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관장이 그에게 “형벌을 받을 때 수차례 들었던 ‘예수, 마리아’라는 이름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그는 “그렇게 하면서 우리 천주교인들은 하느님께 전구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너희들도 잡히거든 부디 위주치명(爲主致命)하라.” 하였고, 본분을 다해 충실하게 신앙을 실천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그는 성주간이 시작된 3월 27일에 청주시 남문로 2가에 위치한 충청병마절도영의 건물인 읍청당에서 순교하였는데, 관장이 배교하면 살려주겠다며 백지를 내려 보내자 거부의 표시로 그 종이에 침을 뱉었습니다. 순교하자마자 백일청천에 무지개가 시신에서 하늘에 닿아 모든 사람이 다 이상하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이 다른 신자들과 함께 밭에 버려진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족 무덤이 있는 진천읍 인근의 선산에 매장하였습니다.

 

 

재물과 목숨보다 신앙을 중히 여긴 장 토마스

 

순량했던 장 토마스(1815-1866년)는 103위 성인 가운데 한 분인 장주기 요셉의 6촌 동생으로, 입교한 뒤 고향을 떠나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습니다. 1866년에는 진천 배티에 살면서 열심히 수계하며 아들 하나를 잘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청주 포졸에게 체포되어 진천에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이때 “천주교를 버리면 안 죽이고, 세간을 다시 주어 살게 하마.” 하자, 그는 “세간과 목숨을 버려도 천주교는 배반치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청주에서도 “천주교를 버리지 못하겠느냐?”고 묻자, “만 번 죽어도 천주교는 배반치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감옥에 있다가 순교하러 나갈 때 죽음 앞에서 배교하고 나가는 대자에게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믿다가 이런 기회를 버리고 배교하고 살면 장래 천주의 벌을 면할쏘냐?”고 하면서 권면하였습니다. 그는 장대에 나가서 참수로 순교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이 갇혀 심문을 당하고 순교한 청주 관아가 있던 중앙공원을 찾았습니다. 진실한 신심을 갖고 “나는 천주교인이오.” 하고 외친 오 바오로의 신앙과 순교는, 1,300년 동안이나 청주의 중심지 구실을 해온 중앙공원처럼, 우리에게 신앙이 삶의 중심임을 굳게 믿고 살아가도록 재촉합니다.

 

공원 북쪽 망선루 옆 입구에서 대원군이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거치면서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1871년, 충북기념물 제23호)를 보았습니다. 척화비에는 원래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國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이라고 씌어있었는데, 현재 “양(洋), 즉(則)” 자는 떨어져 나가고 없었습니다. 척화비를 보면서, 병인박해의 와중에 “세간과 목숨은 버려도 천주교는 버리지 못한다.”고 외치며 순교한 장 토마스의 신앙이 더욱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경향잡지, 2009년 2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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