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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교회의 어제와 오늘: 중국 선교의 교두보 홍콩에 복음화 바람 솔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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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4-25 ㅣ No.172

홍콩교회의 어제와 오늘 - 중국 선교의 교두보 홍콩에 복음화 바람 ‘솔솔’

 

 

51개 본당을 보유한 홍콩교회는 사회와 교회의 발전을 도모하며 꾸준히 성장해 나가고 있다.

 

 

새로운 복음화

 

홍콩교구장 통 혼 주교는 지난 3월 올 부활절에 3400명의 성인 영세자가 탄생할 것이라고 밝힌바 있다.

 

지난해 신영세자 기록인 3040명보다 11%나 증가한 수치이다. 2004년부터 매년 부활절을 기해 2천명 가량의 신영세자 수를 기록해오던 홍콩 교구로서는 7년 만에 신영세자 수의 최고 정점을 돌파한 셈이 됐다.

 

이 같은 선교의 청신호와 더불어 2000년 시노드 결정에 따라 올해 개막된 ‘평신도의 해’는 홍콩 교회의 평신도 양성 노력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2012년까지 이어질 평신도의 해는 양적으로 늘어가는 신자 수에 비례, 질적인 면에서도 그만큼 홍콩교회가 성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위해 평신도의 해 추진위원회 및 평신도협의회를 비롯해 각 지구와 본당 차원에서는 ‘평신도의 해 10가지 실천방안’등 활발한 재교육 프로그램들을 내놓고 신자들의 실천을 독려하고 있다.

 

통 주교는 최근 홍콩 가톨릭 평신도중앙협의회 정기 총회에서 “평신도의 해를 보내며 홍콩 신자들이 보다 활기차고 깊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게 될 것”이라는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홍콩교회에 복음화 운동을 위한 좋은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홍콩 가톨릭평신도중앙협의회 한 관계자의 말이 보다 실감나게 들려오는 흐름들이다.

 

 

1997년 중국 귀속 이후

 

홍콩은 1997년 7월 155년에 걸친 영국의 식민지 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으로 반환됐다.

 

영국이 홍콩을 직할 식민지로 삼은 것은 제1차 아편전쟁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체결된 난징조약에 따라 홍콩섬 등을 영국이 영유하게 되는 사태를 맞았고 제2차 아편전쟁을 통해 1897년 구룡반도 전체를 영국이 99년동안 조차하는 계약이 체결된 바 있다.

 

1984년 중국과 영국 양국 정부간 홍콩 반환이 결정되자 홍콩내 기업가들과 주민들 사이에 적지 않은 동요가 있었다. 반환 이후에도 한동안 자본이 캐나다 미국 호주로 빠져나가는 경향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안정을 되찾아 오히려 유출된 인력과 자본이 홍콩으로 재귀환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 추세다.

 

또 중국과 인접한 광동성 선전 지구에 홍콩 자본으로 이루어진 합작 기업의 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등 중국 대륙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이 보다 활발해 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1997년 중국 반환 당시 덩샤오핑이 ‘1국가 2체제’ 노선을 선언함에 따라 2047년까지 50년 동안 외교·군사 등을 정치적으로는 중국이 통치하면서 경제적인 면에서는 예전대로 홍콩의 자본주의 시스템과 생활 방식, 즉 이전에 홍콩을 성공적으로 국제 비즈니스 센터로 이끈 모든 요소를 법률적으로 모두 보장 유지한다는 법이 도입된 배경이 크다. 그런면에서 종교 역시 신앙 생활과 선교의 자유가 이전과 다름이 없다.

 

가톨릭 교세는 2010년 8월 현재 35만 7천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외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의 가톨릭 신자 수가 12만 8천 명 정도로 예상되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50만 명 이상이 가톨릭 신자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009년 은퇴한 조셉 첸 추기경에 이어 통 혼 주교가 교구장을 맡고 있는 홍콩교구는 51개 본당을 보유하고 있으며 교구 사제 수는 69명이다. 16개 수도회 177개 국적의 240명 사제들도 각 기관에서 활동 중이다.

 

홍콩 가톨릭교회 역사는 1841년 교황청의 홍콩 대목구 설정으로 비롯됐으며 1946년 중국 교계제도 수립과 더불어 교구로 승격됐다.

 

교구 산하에 유치원을 포함한 278개 학교가 운영되는 것과 280개가량의 사회복지 시설은 홍콩 교회가 사회 저변 속에 영향력을 뿌리내리는 큰 힘이다.

 

특히 ‘홍콩 카리타스’로 대표되는 사회사업의 저력은 홍콩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다.이 같은 교육 및 사회복지 사업의 활성화는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대거 홍콩으로 이주해온 난민들, 또 이들과 함께 옮겨온 선교사들이 해외 도움으로 사회복지 사업을 벌이고 학교를 설립해 사회와 교회의 발전을 도모한데서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홍콩 전체 교육기관의 30% 정도를 점유하고 있는 가톨릭 학교를 통한 배출 인력들이 사회의 잠재적인 영향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현 사회 안에서도 고위 공직자와 각계각층 인재들 중 가톨릭교회 교육을 받은 이들이 깊숙이 포진돼 있는 현상은 교회의 숨은 저력으로 평가 받을 만하다.

 

교회 관계자들은 최근 들어 영세자 수가 증가하는 움직임들도 이러한 천주교 학교 운영의 영향이 클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중국 선교를 향한 교두보

 

홍콩교구장 통 혼 주교.

 

 

통 혼 주교는 최근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07년 중국 가톨릭교회에 보낸 서한 ‘대요(Compendium)’와 관련, “중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 일치를 발견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밝혔다.

 

또 “2007년 이래 공식 교회와 지하 교회간 화해와 협력을 위한 다각적 방안이 모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하면서 “중국 가톨릭교회는 점진적으로 서로 자주 만나며 함께 기도하고 대화와 협력을 한 단계씩 차근차근 이뤄나가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아마도 중국교회 선교에 대한 홍콩교회의 바람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풀이되는데, 관계자들은 “홍콩교회가 중국 가톨릭교회와 공식적 관계는 없는 상황이지만 특별행정자치구라 해도 중국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홍콩 입장에서 중국 교회에 대한 역할과 책임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식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여러 차원의 제한된 환경 속이지만, ‘형제의식’에 바탕을 둔 기본적 개념 위에 중국교회를 위한 일들을 하고 있고 또 계속해서 도움을 주기 위해 다각적인 방법 모색에 힘쓰고 있다는 것이다.

 

2010년 전교주일을 맞아서 봉헌된 홍콩교구 전교주일 기념미사 장면.

 

 

예를 들어 1980년 시작된 중국연구소 ‘성신연구센터’만 해도 그동안 전문적으로 쌓아온 대(對)중국 관련 경험과 정보들이 상당한 수준이며 해외 관련 연구소들과 연계가 돼 있다는 면에서 홍콩교회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대 중국 선교의 ‘싱크탱크’ 역할을 담당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오랫동안 ‘성신연구센터’를 책임져 오면서 누구보다 중국 선교 전망에 밝은 통 주교로서는 전임 교구장의 대 중국 관계에 대한 교구 방침을 크게 변경하지 않으면서 점차적으로 대 중국 관련 일들을 확장시켜 가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진다.

 

중국과 중국 중앙정부, 또 중국교회 등이 전체적으로 획기적인 변환을 가지기 힘든 상황에서 그들에 대한 홍콩교회의 정책적 변화 역시 큰 틀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성신연구센터 한 관계자는 “중국 인구의 99% 이상이 가톨릭교회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때, 선교의 출발점은 중국교회와의 교류”라고 밝히면서 “지속적인 교육과 만남을 통해 본토의 신자들이 의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중국 귀속 이후 대륙 사회주의 경제와 서쪽 자본주의 경제가 미묘하게 교차하는 ‘아시아의 십자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그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홍콩, 그리고 그러한 환경 안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중국인 교구로 지칭되는 홍콩교구. 삼천년기 아시아교회를 향한 중국 선교 교두보로서의 역할 기대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24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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