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기도 배움터: 복음묵상 기도 (3) 복음묵상 기도에서 생각할 문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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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0-20 ㅣ No.846

[기도 배움터] 복음묵상 기도 (3) 복음묵상 기도에서 생각할 문제들

 

 

하느님께서는 이 시간을 통해서 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다 깊이 깨닫게 해주실 수도 있고 또 우리의 상상력을 통해서 그때 복음 속의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실 수도 있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시면서 나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또 그 말씀이나 상황에 대한 고유한 느낌, 감각을 지니게 하실 수도 있지요.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거지요. 그러니까 요점 말씀에 집중하라는 말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오시는 여러 가지 통로들도 분심이라고 생각하고 멈추어 버리는 일도 발생합니다. 이 부분은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기도는 기도함으로써 배운다고 하는데, 분심을 구별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무엇이 분심인지 아닌지는 계속 기도해 나가면서 분별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지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계속 숙고하다 보면 내가 주체가 되어 머리를 너무 쓰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요점 말씀으로 돌아가서 시작하시면 됩니다. 상상력이나 과거의 기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요. 느낌에 있어서 평소에 내가 하느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것과는 상반되는 느낌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지점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씀하고 싶어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땐 이 부분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솔직한 느낌을 말씀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런 나를 어떻게 보시는지도 여쭈어보는 것이 좋겠지요. 혹시 여기서 하느님에 대한 나의 왜곡된 상이 드러나거든 그것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지 볼 수 있게 청하고 그 부분에 대한 치유도 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도가 끝나기 10분 전쯤부터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 안에서 얻은 것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 또 기도를 하면서 좋은 결심을 했다면 그것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그 결심을 실천할 은총을 청합니다. 우리가 좋은 결심을 해도 그것을 이루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 도우심을 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묻고 싶은 것을 묻고 예수님의 응답을 들으면서 시간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나 내가 좋아하는 기도문 또는 내 마음을 담은 자유기도를 하면서 복음묵상 기도를 마칩니다.

 

어떤 형제들과 기도면담을 하다보면 좀 더 머물면서 숙고하고 음미하면 좋았을 법한 부분에서 너무 성급하게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좀 더 머물지 그랬느냐고 물으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어서 그 다음 부분을 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묵상 기도를 하는 이유는 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예수님의 말씀이기에 복음말씀 한 글자 한 글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소중한 것은 틀림없지만 우리의 목표는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걸어오시면 거기에 충분히 머무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엔 내가 복음을 잘 읽고 요점을 정하고 복음묵상 기도에 들어갔는데 복음묵상 기도가 내가 준비한 요점대로 되지 않고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갓등이 피정의 집에서 어느 본당이 피정을 하는데 미사를 해달라고 해서 복음묵상 기도를 하며 준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복음이 탕자의 비유였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요점을 잡으라면 대부분 작은아들, 아버지, 큰아들에 관한 부분에서 요점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때 그렇게 준비를 하고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참 묘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탕자의 비유가 루카 복음 15장 11절부터 시작되는데 11절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복음묵상 기도 시간 전체가 이 구절에 멈춰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두 그룹이 있었는데, 세리와 죄인들이 그 하나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다른 하나입니다. 저는 갑자기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 있었다고 말씀하시는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야기를 하시면서 세리와 죄인들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투덜대고 있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역시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좀 고민을 했지요. 강론을 준비해야 하는데 이걸 가지고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다른 걸 가지고 해야 하지 않을까? 복음의 핵심에서 너무 벗어나 있다는 생각과 함께 다시 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에서 더 나아갈 수 없었고 바로 이 부분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씀을 건네 오신 부분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내가 준비한 것과 전혀 다른 방향에서 기도가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거기에 잘 따라가는 수밖에 없는 거지요.

 

어떤 경우엔 너무 쉽게 복음의 상황과 자신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자기반성 쪽으로 나아가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가령 루카 복음 5장 1절부터 11절에 나오는 시몬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서 ‘나도 죄가 많은데…’ 하면서 자기의 죄스런 모습을 보고 ‘다음부터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하고 결심하는 쪽으로 기도가 나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자기를 돌아보고 분석하고 정리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 경우에 하느님께 관심을 기울인다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어디로 초대하시는가에 집중했겠지요.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진실된 모습은 하느님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스런 내 모습을 나 스스로 반성하고 정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볼 때 그 부분에 대한 새로운 앎이 일어나고 내 마음이 감동을 받고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를 통해서 무언가 나의 부족한 점을 고쳐서 좀 더 나은 모습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좀 잘못된 것입니다.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께서 그것을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죄스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를 부르시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 최규화(요한 세례자) 신부는 2000년 사제 수품 후, 2009년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교의 신학)를 취득 하였다. 현재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외침, 2016년 10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최규화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교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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