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은혜로운 위령성월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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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1-11 ㅣ No.835

[레지오 영성] 은혜로운 위령성월을 맞으며

 

 

가톨릭교회는 11월을 위령성월(慰靈聖月)로 보냅니다. 위령성월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특별한 신심 기간’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영혼들이 정화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살아있는 이들이 희생하고 선행을 베푸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요, 영원한 삶을 향해 나아가는 문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죽음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거나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위령성월을 맞아 관련된 교리와 죽음을 대하는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1. 모든 성인의 통공 교리

 

살아있는 이들이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이 기도가 죽은 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교회의 전통 교리가 위령성월을 지낼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성인의 통공에 대한 교리’가 위령성월을 지지해줍니다. 사도신경에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로 표현되는 ‘모든 성인의 통공 교리’는 교회를 이루는 세 구성원인 세상에 살아 있는 신자들과 하느님 나라에서 복락을 누리는 성인들, 그리고 아직 고통을 겪는 연옥 영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교회를 이루며 기도로써 서로의 공을 나누고 영적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령성월 동안 살아있는 이들이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 먼저 간 모든 성인들이 현세를 사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음을 믿고 기억해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또한 신자들이 살아생전 하느님과 맺은 친교는 죽어서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 즉 하느님의 백성은 죽음이 끝이 아닌, 즉 생과 사를 초월한다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통공, 즉 신도들이 공로를 서로 주고받는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정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공로나 하느님의 자비에 근거하고 있는 기도와 같은 행위는 유효하다. 다른 이를 위해서 기도로서뿐만 아니라 애덕의 효과를 통한 공로도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사랑의 한 가지 모습, 하느님 앞에서의 인간적 연대성의 공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있는 이와 죽은 이의 통교가 가능하므로 위령기도는 가능하며, 따라서 위령성월도 더욱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2. 연옥 교리

 

우리는 흔히 ‘연옥’을 하느님으로부터 무서운 형벌을 받는 어떤 장소, 반지옥과도 같은 장소로 생각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성 치릴로 성인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괴로움을 한데 합친 것보다 연옥의 아주 미소한 괴로움이 더 혹독합니다.”라고, 성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연옥에서 일순간 받는 고통은 석쇠 위에서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의 고통보다 더 무섭습니다.” “현세에서 받는 모든 괴로움보다 연옥 불은 혹독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자들은 이보다는 연옥을 ‘하느님과의 만남의 과정’과 ‘정화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 죽은 이들이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지만,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정화의 과정을 ‘연옥’이라고 부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30-1031).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속죄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이러한 영혼들을 지상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기도와 자선 행위와 미사 봉헌 등을 통해서 도울 수 있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위령성월은 연옥 영혼을 위한 은혜로운 기도의 시기가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가톨릭교회는 11월1일부터 8일까지 열심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연옥에 있는 이들에게만 양도할 수 있는 ‘전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성찬례를 거행할 때(감사기도 2양식 참조)마다 그리고 식사 후 기도를 바칠 때도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합니다.

 

 

3.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우리는 대부분 죽음을 잊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나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듯 지냅니다. 하지만 그날이 언제 올지는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그렇기에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는 소중한 가르침 속에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항상 죽음을 잊지 말고 하루하루 삶에 충실하며 후회 없는 삶을 살라는 잔잔한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죽음은 분명 슬픈 일이고,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11월 한 달, 가장 버림받은 영혼이나, 기억해 줄 사람 없이 외로이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꾸준히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나와 귀한 만남을 맺었던 이들을 떠올리며, 그 만남이 천상에서도 지속되도록 그들의 뜻을 기억하며 꾸준히 기도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은혜로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11월호, 이승환 루카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장, 수원 R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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