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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일본 나가사키 운젠 지옥과 히라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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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3-01 ㅣ No.598

세계 교회 신앙유산 순례 - 일본 나가사키 운젠 지옥과 히라도 성당

 

 

나가사키 동쪽에 있는 시마바라 반도의 중앙에 있는 운젠의 고산지대는 운젠다케(雲仙岳)라 불린다. 바로 턱밑에 위치한 온천 지대. 비신자들은 휴식과 관광을 위해 이곳을 찾지만, 순례자들은 신앙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고자 산을 오른다.

 

 

누구도 열탕을 피해갈 수 없었다

 

약 380년 전, 이 온천 지대에서는 그야말로 유례가 없는 일이 벌어졌다.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 막부의 도쿠가와 정권이 그리스도인들의 숨통을 조이던 그 시절. 시마바라의 영주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잔혹하면서도 기묘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온천의 열탕을 이용하여 끝까지 배교하지 않는 천주교 신자들을 굴복시키려는 ‘지고쿠 세메(地獄責, 지옥 형벌)’였다. 이때부터 시마바라와 나가사키 등지에서 끌려온 신자들은 그 누구도 이곳의 열탕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박해자들은 신자들을 발가벗기고 칼로 수십 군데나 찌른 뒤, 그 상처 위에 열탕의 물을 조금씩 부어가면서 배교를 강요했다. 입에 재갈을 물린 채 밧줄에 매달아 열탕에 넣었다 건져 올리기를 반복했다. 한 꺼풀씩 벗겨지는 가죽,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 그러나 손가락, 발가락이 잘리면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은 그들에게는 이처럼 잔혹한 고문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박해자들의 조바심이 용맹한 그리스도의 전사들을 열탕에 넣어 쪄 죽이곤 했으니, 이러한 형벌은 1627년부터 1632년까지 지속되었다.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때부터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져 온 것이 ‘운젠 지고쿠(雲仙地獄)’이다. 특히 30여 개 열탕 중에서도 ‘오이토 지고쿠’란 이름이 붙여진 곳에는 나가사키현에서 세운 비석과 나가사키 대교구에서 세운 십자가 순교비가 함께 서있다. 비석에는 시인이쿠타 쵸스케가 운젠 주변의 붉은 철쭉을 순교자들의 피에 빗대어 지은 “성스러운 불이 타오르는 것과 같다.”고 한 시구가 비문으로 적혀있다. 그리고 뒤의 순교비는 순교자들의 영광을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그 좌대에는 지고쿠의 열탕을 극복한 안토니오 이시다 신부, 미카엘 나카시마 수사 등 6명의 복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지난해 11월 24일에 시복된 바오로 우치보리 사쿠에몬은 시마바라에서 세 아들발타사르, 안토니오, 이냐시오가 순교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뒤에 이곳으로 끌려와 1627년 2월 28일에 순교했다. 잘려진 두 손의 손가락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서 아름다운 장미꽃을 이야기하던 다섯 살의 막내 이냐시오를 생각하면서….

 

그 뒤로 운젠다케를 오르던 요아킴, 미네수케, 타유우 등 남은 동료 순교자들에게는 한 가지 소망만이 남아있었다. “주님, 주님의 손에서 저를 떼어놓지 마소서!” 그들은 같은 해 5월 17일 운젠 지고쿠에서 순교하였다. 그 순교비 앞에 선 신앙후손들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내용을 떠올려본다. 하느님은 왜 죄 없는 이들이 받는 고통을 보면서도 침묵하고 계시는가? 들리지 않는 주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다. 신자라는 것을 속이고 성상 후미에(踏繪)를 밟아라. 그 발은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수없이 용서의 기도를 바치며

 

다음날, 나가사키 북쪽의 사세보 숙소를 출발한 버스는 히라도로 향했다. 큐슈 북서쪽에 위치한 히라도 섬과 동쪽편의 내륙이 히라도 대교로 묶여있는 도시다. 대교를 건너기 전에 오른편 남쪽으로 내려가면 바다를 보면서 아름다움을 뽐내는 ‘다비라(田平) 성당’이 보인다. 1919년에 완공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일명 ‘세도야마 성당’이다. 현재 일본의 국가 주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7년 1월 23일 유네스코에서 잠정적인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나가사키 교회군’에 속해있다.

 

히라도는 작지만 더없이 아름다운 섬이다. 박해를 피해 산간 오지나 섬으로 피해 숨어살던 가쿠레 기리시탄(潛伏切支丹) 시대에 이곳 신자들도 그렇게 숨어살았다. 겉으로는 불교 신자인 체하면서 후미에를 밟고 다녀야만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성모 마리아를 관음보살처럼 꾸민 비밀의 마리아 관음상을 꺼내놓고 수없이 ‘용서의 오라티오(기도)’를 바치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히라도 기리시탄 자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비밀성상인 난도카미(納戶神)들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지금 히라도에는 가쿠레 기리시탄이 없다. 300년이 지난 가쿠레 기리시탄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 곳은 그 서쪽의 작은 섬 이키즈키(生月)라는 지역이다. 그네들의 선조는 박해가 끝났음에도 가톨릭 교회로 복귀하는 것을 또 다른 개종으로 여겨 회두하지 않았다. 스스로 신앙 조직을 운영해 오면서 지도자와 세례자를 임명하고, 토속 신앙이나 불교가 혼합된 교리를 지켜오고 있다. 이름하여 ‘하나레 기리시탄(그리스도교의 별파)’이다. 히라도 중부의 우와도고(上床) 고원에 서면, 밤바다의 선상에서 횃불을 켜고 그들만의 대축일을 지내는 광경을 자세히 볼 수 있다. 그 고난의 역사가 가슴에 와닿는다.

 

발길을 돌려 히라도 항구로 내려오면 고딕식의 ‘히라도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1931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건립한 이 성당은 40년 뒤 북쪽 공원 언덕에 하비에르 성인 기념비가 건립되면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 성당’으로 개칭하였다. 1550년 하비에르 성인이 이곳에 상륙한 것을 기리려는 뜻에서였다.

 

히라도 지역에서는 이러한 성당의 역사보다는 ‘성당과 절이 함께 보이는 풍경’을 더욱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히라도 항구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코우묘우지와 즈이운지 두 개의 절이 하비에르 성당의 첨탑과 어우러져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는 잊지 못할 우리의 역사도 함께 있다. 임진왜란 때 영주 마츠우라 다카노부가 조선에서 데려온 도공의 후예들이 이어오는 도자기 문화다. 한편으로 보면 침략의 결과요, 다른 한편으로 보면 조선 문화의 이식이다. 그러나 지금 그 후손들은 일본인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그 가운데 자신의 역사를 잘 아는 구교우가 있다는 사실이 반가울 따름이다.

 

* 차기진 루카 -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이며,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역사전문가 위원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09년 2월호, 차기진 루카(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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