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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인물과 영성 이야기45-49: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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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27 ㅣ No.857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5)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 (1)


시대와 호흡하며 다양한 사회활동… 신앙인의 모범 보여

 

 

- 독일 아헨의 주교였던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 출처 www.ecclesiopreneurship.com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에게 기도의 신비에 대해 참으로 귀중한 말씀을 남겼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귀를 당신의 마음에 지니고 계신다.’(시편 주해 148)

 

하느님의 귀를 우리의 마음에 담아두는 것, 우리의 마음을 그분의 귀에 놓아두는 것. 이것이야말로 기도의 기예다. 이 기예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이 고안한 기예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넣어주셨고,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영의 기예이기 때문이다.

 

미사에서 주례자는 참례하는 신자들에게 성찬례의 성찬기도를 “마음을 드높이”라는 기도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신자들은 “주님께 올립니다”라고 응답한다. 참으로 기도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로 고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까? 우리 마음이 지닌 감지력의 폭이라는 것은, 주님께 닿기에는 너무나 좁은 것이 아닐까? 우리의 마음이 가진 활기는 그러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것은 아닐까? 우리의 마음은 사실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절름발이로 만들고, 무거운 짐에 억눌리게 하는 중력에 종속된 것이 아닌가? 무엇이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을 당신께로 들어 높이게 하려는 용기를 주는가?

 

그분의 귀. 그분이 당신의 귀를 우리에게 향하시기에.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나는 모른다. 사실 모든 것이 내 마음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자, 그러면 ‘나의 마음’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의문들, 불안들, 희망들, 내 안에서 솟아나는 나도 모르는 느낌들인가? 스쳐가면서 소리 없이 흔적을 남겨놓는 수없이 많은 인상들과 예감들인가? 한 사람 안에서 불쑥 수수께끼같이 생겨났다가는 불투명하게 스스로를 숨기는 마음은 과연 그 사람 속에 자신의 근원을 가지고 있을까? 무엇이 나의 마음인가? 어디에 나의 마음이 있는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분은 아신다. 그분의 사랑이 나의 마음을 알기에(요한 21,17). 그분의 귀가 보듬어 주실 때만이 나는 나의 마음을 ‘가진다’. 나의 마음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너를 그분께 내어놓고, 너를 자유로이 그분께 봉헌하고, 그분께 의탁하라!

 

그러면 너는 그분께 머물 것이며, 그분은 너에게 머무실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귀를 너의 마음에 두신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너의 귀에 두신다는 것, 이로써 너의 귀를 통하여 그분의 마음이 너의 마음 안으로 오신다는 것, 이로써 그분의 마음이 너의 마음이 되신다는 것.

 

너의 마음에 있는 하느님의 귀 -

하느님의 마음에 있는 너의 귀

그러한 기도의 상호교환

오직 기도하는 이만이 하느님을 알게 되며,

오직 기도하는 이만이 인간을 알게 된다.

 

- 클라우스 헴멀레, ‘너의 마음을 주님의 귀에 - 기도를 위한 수련(Dein Herz an Gottes Ohr-Einubung ins Gebet)’ 중에서

 

- 아헨대성당 내에 있는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 기념비. 출처 위키미디어.

 

 

생활인, 신앙인, 철학자, 신학자, 그리고 사목자 : ‘영성의 자리’에 대해

 

오늘날 영성이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해 의미 있는 전망을 얻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솔직하면서도 깊이 있는 관찰과 숙고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영성의 자리’에 대한 섬세하고 다양하면서도 포괄적인 관점을 얻어가는 과정이기도 하겠지요. 먼저 우리는 신앙인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상과 영성의 관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영성이라는 것이 복잡한 현대사회 안에서 생활하는 신앙인들의 삶의 중심에 자리하는 것이 가능한지, 당위에 앞서 자신의 경험에 입각해서 되짚어 보는 것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에서 듣고 배우는 성서와 교의적 가르침들이 나의 영성적 삶에 있어 얼마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고, 나아가 이러한 가르침을 학문적이고 사변적으로 탐구하는 신학이 개인과 공동체의 살아있는 영성을 위해 어떠한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가늠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세상과 인간에 대해, 그리고 신과 정신에 대해 깊이 사유하는 철학들이 신앙인의 영성에 있어 어떠한 긍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새롭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의 구체적인 활동이며 외적이고 가시적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사목이 신앙인들의 내적인 삶의 중심인 영성과 맺고 있는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하는 것도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이 일상 안에서 살아있으며 통합적인 ‘영성의 자리’를 자신의 삶의 중심에 마련하는 길을 독일 아헨의 주교였던 클라우스 헴멀레(Klaus Hemmerle·1929~1994)의 생애와 사상을 살피면서 모색해보고자 합니다.

 

클라우스 헴멀레는 깊이 성찰하고 사색하는 삶의 자세를 지녔고, 온유한 성품이었지만 동시에 교회 안에서, 사회를 향해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범이 된 인물입니다. 그는 외적으로 보자면 별다른 풍파가 없었던 조용하고 평탄하며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증언하고 그가 남긴 글을 통해 그의 인격과 활동, 사상을 대하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한 신앙인이 어떻게 자신의 시대와 호흡하면서 깊은 숙고와 내적 체험과 구체적 실천이 함께 하는 진정한 영성을 자신 안에 형성해 갈 수 있는가라는 절실한 질문에 대하여 한 착한 목자가 보여준 힘 있는 답이라 하겠습니다.

 

클라우스 헴멀레는 신앙인으로서, 철학자로서, 신학자로서, 그리고 사목자이자 주교로서 살아가면서 통합적이고 살아있는 영성의 모범을 보여주었고, 이러한 결실 있는 삶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만남과 구도의 여정은 그의 주옥같은 저서와 글들만큼이나 우리에게 배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독일 주교회의 의장인 칼 레만 추기경은 1994년 선종, 아헨대성당에 안장된 클라우스 헴멀레의 추도미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아마도 우리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성인과도 같았던 사제이자 주교를 무덤가로 모셔가고 있는 듯합니다.”

 

1974년 독일 아헨교구의 주교로 임명되면서 클라우스 헴멀레는 요한 복음 17장 21절 말씀을 주교직의 표어로 선택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Omnes unum ut mundus credat)”

 

이 표어대로 목자로서 교회 안에서, 사회와의 만남 속에서 다양성 안의 일치를 추구하는 목자로서의 삶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한 개인이 조용한 실천과 숙고를 통해 통합되고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범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1월 27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6)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 (2)

 

나치정권 하에서 성장… 자유의 중요성 깨닫고 강조

 

 

대림 시기가 되면 우리는 창조에 대한 위대한 갈망에 대해서, 아울러 이제 다가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인간이 지니는 위대한 갈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말 그분을 갈망하기는 하는 것일까요? 혹은 그분에 대하여 거부하거나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한 것은 아닐까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위기는 오히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박한 배고픔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는 듯 보이는 데 있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감히 말하자면, 대림 시기는 마리아 안에서 참되게, 감지할 수 있게 존재합니다. 인간의 내적인 공허, 인간의 상처받음,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성모님 안에 모아집니다. 마리아는 빈터를 받아들이시고 기다리시고 준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갈망이 드러납니다. 그녀 안에서 비로소 인간 내면의 가난함이, 이제 오실 분을 향한 기다림과 준비라는 ‘대림의 태도’(adventliche Haltung)로 승화됩니다. 이제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모님 자신이 ‘살아있는 대림’이셨듯이 자신의 시대에서 살아있는 대림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의 대림 묵상

 

클라우스 헴멀레는 1929년 독일의 아름답고 유서 깊은 가톨릭 대학도시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프란츠?발렌틴과 어머니 마리아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난 그는 소박하면서도 신앙심 깊은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했습니다. 헴멀레의 집안은 예술적인 분위기도 가득했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주로 성당 스테인드글라스나 성상을 제작하는 미술가였고 어머니 쪽 삼촌인 프란츠 요셉 필립은 그 당시 프라이부르크 지역에서 손꼽히는 교회음악가이자 작곡가였습니다. 클라우스는 소년 시절을 나치정권 하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는 그 시절 부모님과 함께 다녀온 스위스 휴가가 매우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고 후에 말하기도 했지요.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신학대학. 출처 위키피디아.

 

 

프라이부르크가 스위스 및 프랑스 국경 인접 도시이기는 했지만 아주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기에 스위스 여행은 애써 저축한 돈을 다 들여야 할만한 ‘사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행은 그의 부모님들에게는 절박한 것이었다 합니다. 신앙심과 예술적 감수성이 가득한 부모님들에게 나치정권의 정치 선전과 점점 가시화되는 독재 체제는 숨 막히게 느껴졌기에 중립국 스위스에서 조금이나마 자유의 기운을 숨 쉬고 싶었던 것이지요. 소년 헴멀레에게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스위스에서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행할 수 있었던 나치정권에 대한 비판을 독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부터 입을 봉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대다수 당시 독일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헴멀레 집안도 외국으로 나가 살 수는 없었으므로 스위스에서의 해방감은 잠시의 위안이었을 뿐, 나치정권 붕괴 전까지는 이러한 억압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소년 시절 깨달은 자유의 소중함은 헴멀레의 신학과 사목에 두고두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후에 그의 말과 행동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이었지만, 남다른 유머감각과 친화력도 지녔던 클라우스 헴멀레는 일찍부터 학문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보였습니다. 그는 라틴어나 희랍어 교육에 많은 비중을 두는 정통 인문계 김나지움을 마친 후, 1947년 대학 입학 자격인 아비투어를 마치고 프라이부르크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프라이부르크 교구 신학생으로서 프라이부르크 인근 슈바르츠발트(검은숲)에 소재한 교구 신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학교 측에서는 그의 신학교 입학에 부모의 권유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판단해서 얼마간 관찰기를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곧 헴멀레 자신이 분명한 성소를 느끼고 있음이 확인되었지요.

 

헴멀레는 매우 진지하면서도 행복하게 신학교 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영적 지도자였던 루돌프 헤르만 신부였습니다. 헤르만 신부는 깊은 신심을 갖추고 스승으로서 학생들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신심운동들에도 개방돼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헤르만 신부의 영적 지도를 통해 헴멀레는 교구 사제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 영성적인 추구를 지속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며 이를 위해서는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점점 분명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루돌프 헤르만 신부 자신 역시 이러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었는데, 그에게 당시 큰 영감을 주었던 것이 키아라 루빅(Chiara Lubic·1920~2008) 여사가 창시한 포콜라레(Focolare) 운동이었습니다. 포콜라레의 국제적 모임인 마리아 폴리에 다녀온 후 깊은 감명을 받았던 헤르만 신부는 클라우스 헴멀레에게 확신을 가지고 포콜라레 운동을 권했습니다. 이렇게 포콜라레 영성과 만나게 된 클라우스 헴멀레는 포콜라레와 깊은 유대를 맺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훗날 신학자이자 주교로서 포콜라레 운동을 교회론적 지평 안에서 자리 잡도록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교구 사제로서의 영성과 품성을 수련하는 한편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이라는 학문적 차원을 통해 사제로서, 사상가로서의 능력을 도야했습니다. 이는 매우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당시 프라이부르크대학 신학부에는 매우 뛰어난 교수들이 있었고, 재능 있고 열성적인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프라이부르크대학 신학부에서 신학과 종교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 중 존재론적 깊이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앞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가시화될 인간학적 관심과 대화와 일치, 소통을 중시하는 신학과 철학을 예비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는 헴멀레 역시 평생을 통해 지키고 발전시켜나간 학문적 방향이었습니다. 헴멀레가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교수들 중에는 구약학자인 알퐁스 다이슬러(Alfons Deissler·1914~2005) 신부, 신약학자인 안톤 푁틀레(Anton Vogtle·1910~1996) 신부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가톨릭 성서신학의 중요한 선구자들로 존경받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이들을 통해 헴멀레는 특별히 당시 신학에서 중요 주제로 떠오르던 ‘하느님 나라’에 대해 깊이 성찰할 수 있었다고 술회합니다. 그러나 헴멀레에게 가장 중요한 스승이었던 사람은 무엇보다도 종교철학자인 베른하르트 벨테(Bernhard Welte·1906~1983) 신부였습니다. 프라이부르크대학 출신의 세기적인 철학자이자 문제적 인물이었던 마르틴 하이데거의 제자이면서 후에 하이데거의 장례미사를 주례하고 추도사를 했던 그는 중세 철학과 신학, 신비주의에 대한 깊은 인식을 바탕으로 교회가 사상적으로 근대정신 및 현대세계의 철학과 깊은 차원에서 대화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학문만이 아니라 사제로서, 한 인간으로서 많은 존경을 받은 벨테의 문하에서 학자의 길을 걸었던 헴멀레는 학문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실천적 태도에 있어서도 벨테에게 많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2월 4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7)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 (3)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실천 위한 시노드 실무 맡아

 

 

1971년 뷔르츠부르크 시노드에서 업무 중인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왼쪽).(출처 www.klaus-hemmerle.de)

 

 

여기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는 분이 있다. 바로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셨기에, 그분이 인간이 되셨을 때, 그분이 취하려 하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분은 오직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은, 그분 자신은 멀리 떨어져 계신 채, 우리에게 친절하게 선물을 나누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분의 관심은 그분 스스로가 우리의 상황 안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시며, 우리의 삶이라는 열차 안에 탑승하신다.

? 클라우스 헴멀레, 「우리를 위한 말씀」 중에서

 

모든 사람들은 각자 하나의 창문이니. 대성당의 찬란하고 장엄한 색유리창.

그러나 빛이 없다면 이런 창문들이 무슨 소용이랴.

성탄절에 빛이 솟아오르네. 성탄절에 나의 삶을 비추시는 그분이 태어나시네.

비록 내가 아직 나의 삶에서 오직 어둠만을 보고 있을지라도.

 

나는 이제 그분의 빛 속에서 나의 삶을 두 손에 가만히 품고 싶다네.

그리고 그 창문은 곧 빛나는 색채로 환해지겠지.

그리고 많은 이들이 빛을 보게 될 것임을.

? 클라우스 헴멀레, 「하느님의 시간, 사람의 시간」 중에서

 

 

헴멀레의 신학과 영성의 원천

 

헴멀레는 사제로서 자신에게 주어지고 허락되는 소명들 안에서 삶과 신학, 철학, 영성을 실존적으로 깊이 자신 안에 통합하고 표현하고 나누려 평생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클라우스 헴멀레의 삶의 여정은 젊은 사제이자 보좌신부로서 최초로 사목적 체험을 했던 세 가지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1950년대 중반 프라이부르크 교구의 가톨릭 아카데미의 설립과 기획, 운영의 실무 책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1960년대 후반기부터 독일 주교회의에 의해 가톨릭협의회(ZdK)의 영적 동반자 역할을 오랫동안 맡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기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독일교회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매우 의미 있는 시도였던 뷔르츠부르크 시노드(1971~1975)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실무에 참여하는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범 교구적인 다양한 활동들은 그가 교회와 세상과의 대화와 협력에 대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내의 사제들과 평신도들 사이에서의 동등하고 자유로운 대화와 이해 증진에 많은 경험과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활동들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신학과 영성을 정립하는 데 있어, 추상적, 관념적 차원에만 몰입하지 않고, 실질적인 경험에 뿌리내리고, 여러 다른 견해와 관점들에 개방돼 있는 대화적 성격을 잃지 않는 자세를 지켜갈 수 있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신학적, 철학적 사유와 일상적 삶, 사목적 활동 등을 잘 통합한 영성을 열매 맺고, 쉽고 매력적이며 인간적인 언어로 그러한 영성을 표현한 시기는 역시 아헨교구 교구장으로서 활동한 마지막 시기일 것이지만, 그 중요한 밑거름이 된 것은 신학자이자 종교 철학자로서 교수 생활을 했던 시기일 것입니다.

 

그는 학문적 활동의 시작부터 삶에 뿌리내린 신학과 철학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이자 평전을 쓴 빌프리드 하게만이 전해주는 다음과 같은 헴멀레의 인상적인 고백은 그의 신학의 동기와 원천을 잘 보여줍니다.

 

“나의 신학과 사상에 있어 중요한 하나의 원천은 내가 정신과 영혼 깊숙한 곳에서 씨름하였고 전율하게 만드는 거대한 문제의식이었습니다. 매우 종교적이고 신앙심이 가득했지만, 또한 대단히 자유롭고 개방적인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나는 청소년기에 ‘이런 책은 읽으면 안 돼!’라는 내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한 책을 탐독했습니다. 그것은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신존재 증명’을 비판하는 책이었죠. 나에게 이것은 청천벽력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당시 학생이었던 나는 칸트의 비판에 제대로 반박의 대답을 할 수 없는 자신을 보게 되었던 거죠. 그때 저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내적으로 매우 분열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시 나의 신앙이 참되다는 직감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나보다 훨씬 지적으로 뛰어나고 존경할 만한 인물이 있고, 그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으니까요. 자, 이제 나보다 더 학식 있고, 지혜롭고, 더 교양 있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하면 그를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이 되었던 거지요.

 

이러한 내적 갈등과 고민은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고, 사실 사제품을 받고 첫 두 해 동안은 특별히 심했습니다. 이는 저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운 사유의 길을 추구하고, 이해하고, 논증을 연구하고, 파악하려 노력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저의 신학의 또 다른 원천이 저를 구했습니다. 부모님은 그 시대 신앙에 대한 저술들과 강연들로 유명한 작가 라인홀트 슈나이더와 깊은 친분이 있었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라인홀트 슈나이더가 예술가라는 사실은 제 안에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있어, 철학적 논증을 넘어서고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아버지와 슈나이더 같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저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논증만으로는 결코 파괴할 수 없는 진실되고 참된(신앙적이고 종교적인) 경험이 무엇인지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정신적 위기에서 저를 구했습니다. 분명해진 것은, 신학은 이러한 가장 깊고 진실되고 실존적이며 참된 경험과 씨름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신학은 단지 이론적 사항에 대해 고투하는 작업이 아니라, 논증과 이론으로는 없앨 수 없을 정도로 절실한 경험들에 뿌리내린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가톨릭신문, 2016년 12월 11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8)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 (4)

 

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삶의 스승’으로 학생들 이끌어

 

 

- 1976년 2월 바오로 6세 교황을 알현하고 있는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오른쪽).출처 클라우스 헴멀레 홈페이지(www.klaus-hemmerle.de)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아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래로 이 진리에 예외란 없습니다.

인간이 되어가는 길은 아이가 되는 길을 거쳐가는 것이지요. 

이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아이가 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분이 가장 사랑하는 친구인 아이들을 받아들일 때, 그분께 속합니다. 

우리 모두는 아이들처럼 그 분 자신을 받아들일 때, 그분께 속합니다. 

오직 아이가 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이는 단순하게 되는 것, 맑고 가뿐해지는 것, 고통과 연민을 느낄 수 있는 것, 기뻐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거듭거듭 선사되는 존재로서 놓아 둘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아이는, 체념과 잇속을 챙기는 마음에 대해서, 이기주의와 공허함에 대해서 치유하는 힘입니다.

구유 안에 계신 아이는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분과 함께 사람이 되도록,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하느님의 생명을 받도록.

 

? 1979년 헴멀레 주교가 지인들에게 보낸 성탄인사

 

 

하느님께서 성탄에 오시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에서 시간을 쓰는 방식은 ‘합리적’이지 않았습니다.

지상에서 보내신 예수님의 시간의 대부분은 말하자면 성탄절에 깃든 약함과 가난함의 연장이었으니까요.

어떤 쓸모나 효과를 초월한 ‘여기 있음’ 자체.

그러나 바로 이것이 계시입니다.

하느님이 그저 우리가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에 계신다는 것.

 

우리는 그러니 이제 구유 앞에 머물러 그분을 바라보면 됩니다.

아무것도 말할 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여기에 있으면 됩니다.

이러한 침묵이, 우리에게 다가온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준을 뒤엎고 전복시키는 것이지요.

 

그분은 그저 이렇게 와 계십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님이 하실 수 있었던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무력하되 빛나며 존재하시는 그 자리에, 하느님 자신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제 여기에 우리를 위해 계십니다.

베들레헴의 아이의 모습으로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아기는 나에게 말합니다.

아기는 당신에게 말합니다.

아기는 모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여기 있으니, 참 좋습니다, 라고.

 

- 헴멀레 주교의 성탄 묵상집 「뒷문을 통해 구유로」 중에서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왕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답니다. 그분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의 옷을 입으신 분이지요. 그분처럼 가난하고 보잘 것 없고 약한 이들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우리는 그 왕을 만나는 거랍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들이 나의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작은 이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지.” 자, 이제 이 이야기를 이해하겠나요? 우리 모두는 마땅히 예수님과 함께 왕들이 되어야 해요. 우리는 그 분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찾고, 발견하고 사랑해야 한답니다. 그리고 그 분은 가장 위급하고 비참한 곳에 계신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 성탄절에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예수님을 찾는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잘 알고 있겠네요. 맞아요, 그분은 가장 헐벗고 누추한 옷을 입고 계셔요. 그런 옷이 있는 곳에 예수님도 계실 거예요.

 

? 1979년 헴멀레 주교가 교구의 어린이들에게 성탄절에 보낸 사목서한

 

 

교수이자 학자로서의 헴멀레

 

본당 공동체에서 보좌신부로서 가진 사목 경험, 여러 가톨릭 단체와 기구에서의 활동, 사회와 대화하고 교류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한 체험들과 함께 헴멀레 주교의 사상과 영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종교철학과 기초신학 분야의 연구가이자 학자로서 대학에서 보낸 시간과 여러 스승과 제자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는 가톨릭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근대와 현대의 철학에 개방적인 학풍을 가진 독일의 유서깊은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특히 베른하르트 벨테의 영향 하에서 수학한 후 신학교가 있는 본에서 강사로 첫 강의를 시작하며 교수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어 그는 보훔의 기초신학 교수로 임명받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걸출한 가톨릭 신학자 리하르트 셰플러와 풍요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는 보훔의 교수직에 만족했었지만, 벨테가 오랫동안 맡아왔던 가톨릭 종교철학의 교수좌를 맡는 것은 그에게 일종의 사명이자 책임으로 느껴졌기에 자신의 고향이자 소속교구이기도 한 프라이부르크의 신학부로 귀환하게 됩니다.

 

그는 스승 벨테가 전개한 가톨릭 철학의 관점에서의 종교 현상학과 해석학을 이어받으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발전시켜 나가고, 특히 구체적인 삶과의 연관성에 관심을 가집니다. 학문적으로는 프라이부르크 출신의 현상학과 해석학의 대가이자 ‘구조 존재론’을 제시한 하인리히 롬바흐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철학은 헴멀레가 종교현상학에 관해 ‘교회’가 가지는 의미를 깊이 숙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앙인의 실제적 체험에 깊이 뿌리내린 헴멀레의 고유한 종교철학은 자주 ‘신앙의 현상학’으로 표현되곤 합니다. 그는 종교철학과 기초신학을 포괄하여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자신의 학문이 지적 자기만족이 아니라 신앙인의 실천적 삶에 부합하고 도움을 주는 교회의 학문이 되도록 노력합니다. 특히 이 시기에 그는 학생들과 격의없고 가까운 관계를 맺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소박하고 검소하면서도 유쾌한 그의 태도는 많은 학생들이 ‘학문의 스승’만이 아니라 ‘삶의 스승’을 그 안에서 만나게 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2월 18일,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안식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9 · 끝)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 (5)

 

어려움에 처한 노동자와 연대… 탄광 직접 방문하기도

 

 

-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왼쪽)가 광부들과 함께했다. 출처 www.iu-sophia.org

 

 

복음 안의 삶, 동반의 여정, 일치의 추구 : 헴멀레의 주교직

 

1975년,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던 중 헴멀레는 예상치 않게 비교적 젊은 나이에 신생 아헨교구의 주교직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1994년 1월 23일 주일 아침 그 전 해에 알게 된 갑작스런 암이 악화돼 65세라는 아직 아까운 나이로 선종하기까지 착한 목자로서 주님의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였습니다.

 

그의 주교직의 근원은 일상 안에서 이루어진 깊은 하느님 체험과 복음에 대한 조건 없는 신뢰와 응답이었습니다. 그는 주교가 된 후 첫 번째 사목서한에서 ‘자신은 복음 외에 다른 프로그램을 내세우지 않는다’라고 밝히기도 했지요. 그리고 그는 이러한 복음에의 헌신과 하느님 체험을, 홀로 고립된 삶이 아니라 늘 사람들과의 만남과 동반을 통해 실현하려 했습니다. 주교로서도 그는 교구민들을 이끌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교구민 모두와 함께 지상의 여정을 순례하며 복음을 실천하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말하고 행동으로 실천했습니다. 모든 이들을 말씀 안의 형제라고 칭했습니다. 또 모든 신자 한 명 한 명이 자신이 주체성과 공동 책임성을 깨닫고 자유롭고 기쁘게 복음에 헌신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글 중 하나가, 정치적으로나 교회 내적으로나 독일에 있어 변혁의 시기였던 1989년에 교구민들에게 보낸 ‘사순절 사목서한’ 일 것입니다.

 

“올해 사목서한에서는 보통 때와는 좀 다르게 말하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제가 여러분들께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의 말을, 충고를 듣고 싶습니다… 저에게 여러분들의 근심, 희망, 경험, 영감들을 알려 주십시오. 저에게 편지로 써 보내 주십시오! 여러분들은 혼자서나 공동체 차원에서 함께 작업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서로가 (복음과 하느님 체험을) 증언하고 봉사하는 길을 함께 걷는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 주님께서 우리를 미래로 인도하십니다.”

 

그는 또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상황에 함께하려 하고 도우려 진심으로 애썼습니다. 그리고 외적인 부유함이 아니라 ‘복음적 청빈’의 정신이야말로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정치적인 정파에 휘말리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러한 두려움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고 목소리가 필요한 사람들 옆에 서는 것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이들과 함께하려 애썼습니다. 그는 주교가 되어서 그간 자신이 익숙했던 교회나 대학에서 경험하지 못한 도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노동운동의 세계였지요. 그는 진심으로 노동자들에게 배우고 공감하고, 또한 갈등 당사자들의 화해와 대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잘 나타난 것이 1991년 탄광 폐쇄에 항의하여 터키 이주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갱도에서 파업한 광부들에게 연대를 표현하기 위해 탄광을 직접 방문한 일이었습니다. 헴멀레 주교와 광부들 사이에서 자라난 진실된 존중은 헴멀레가 선종한 후 탄광의 노동조합이 신문에 실은 조의 광고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조용하면서도 끊임없이 일치와 대화, 상호 존중과 이웃사랑, 연대의 길을 추구한 헴멀레의 삶과 영성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는 젊은 시절 만난 포콜라레 영성이었습니다. 그는 포콜라레를 통해 복음에 충실하며 대화와 일치의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 길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콜라레 운동을 시작한 키아라 루빅 여사의 존재는 큰 영감이 되었으며 또한 그녀에게 포콜라레 영성을 신학적으로 정립하는 작업의 중요성에 대해 제언하기도 하였습니다. 포콜라레 영성을 시작한 키아라 루빅 역시 헴멀레 주교의 인격과 영성을 높이 평가하였고, 그의 사후, 그에 관한 질문에 대해 헴멀레는 시대를 초월하는 신앙인의 귀감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성탄을 맞이하면서 착한 목자였던 헴멀레 주교의 묵상과 함께 예수님 강생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네,

말씀이 심장이 되셨네.

하느님께서 심장을 가지셨네,

인간이 된 하느님의 심장이 뛰시네,

수백 만의 사람의 심장이 맥박 안에서.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네 사람의 심장 안에 살고 계신 것이 누구신지.

왜냐하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시는 하느님이 되고 싶으셨으니까.

그분은 단지 사람의 심장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고,

그 심장과 함께 살고 경험하기를 원하셨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경험하게 된다네.

우리의 심장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헛된 꿈같은 것이 아니며,

출구 없는 벽으로 이끄는 우리 자신의 판단도,

진실을 피해가고자 우리가 끊임없이 내세우는 알리바이도 아닌 것.

우리의 심장은 옳고 힘 있는 것이라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심장을 취하셨으니까.”

- 헴멀레 주교의 1978년 성탄 강론에서

 

 

“성탄에 내가 바라는 네 개의 열쇠

 

하나는 작은 쪽문을 위하여!

주님이 언제, 어디로 오시는지 우리는 모르지. 다만, 그분은 크고 거창한 문을 믿고 있지 않는 이들에게 오시리라.

 

하나는 안채로 들어가는 문을 위하여!

주님은 내 가장 깊은 곳보다 더 깊은 곳에 계신 분. 그리로부터 주님은 우리의 삶이라는 집으로 들어오신다.

 

하나는 이웃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문을 위하여!

나에게 가장 가까이 있으나, 나에게 가장 낯선 이웃, 형제.

주님은 바로 그들로부터 우리의 방문을 두드리신다.

 

하나는 현관문을 위한 열쇠!

거기에서 사람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있는 예수님께 경배하네.

예수님을 우리 삶에, 우리의 세상에 들어오시도록 맞이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기를.”

- 헴멀레 주교의 성탄 묵상집 「뒷문을 통해 구유로」 중에서

 

※ 이번 회를 끝으로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수고해 주신 최대환 신부님과 애독해 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2월 25일,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안식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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