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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피숑(L. Pichon)의 조선 천주교회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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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6 ㅣ No.864

피숑(L. Pichon)의 조선 천주교회사 연구

 

 

국문 초록

 

피숑(Leon Pichon, 宋世興, 1893~1945)은 조선 교회사를 중요한 주제별로 나누어 연구하기 시작한 선구자이며, 그 결과물을 잡지를 통해 일반인과 소통한 저술가였다. 그는 각종 교회 100주년 기념행사에 맞추어 교회사를 완성해가는 동시에 연구하며 행동하는 선교사였다. 그리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진정으로 고민한 선교사 연구자였다.

 

본고는 피숑이 주목한 교회사 주제와 내용, 그의 연구 의도, 당대 사회와의 소통 관계를 중심으로 살폈다. 피숑의 연구 결과는 《가톨릭靑年》, Pro Corea-Documenta와 그의 연구노트에 남겨져 있다. 따라서 각 매체가 지닌 특징적 성격과 다룬 내용을 함께 묶어 설명했다.

 

피숑의 글은 연재글이었다. 장기간의 연재는 분명 교회와 신자의 공감을 얻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의 글은 당대 교회의 생각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헌, 모방 신부의 활동과 교회 상황, 정약용의 신앙생활과 교회 공헌 등에 대하여 연구했다. 또한 피숑은 Pro Corea-Documenta를 출간하여 조선 교회가 김대건 신부에 주목하고 그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는 데 불을 붙여 놓았다.

 

피숑은 연구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조선 교회사 연구를 위한 자료 수집과 답사를 그치지 않았고, 최경환, 정약종과 이승훈의 묘 등을 찾아냈다. 이러한 피숑의 자료 수집 노력들은 오늘날 그의 ‘연구노트’에 담겨있다. 피숑의 연구노트는 4권인데 본고에서는 2, 3권만 분석했다. 이 부분은 주로 조선 교회사 전사(前史)에 대한 메모였다.

 

피숑은 교회의 역사를 종합적인 견지에서 서술했다. 즉 그는 교회사 서술에 있어서 정치적 영향 일변도의 설명을 거부하고 문화사적 입장까지도 고려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세계사적 시각에서 조선 교회를 설명하고자 했다. 이와 아울러 그는 한국 교회의 역사 안에 숨어 있던 희망과 위로를 찾아내려 노력했다. 피숑이 인용했던 사료와 수집한 자료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1. 서론

 

역사와 역사 연구, 역사 서술은 서로 다른 작업이다. 조선 교회사 전체를 서술하려는 작업은 다블뤼와 달레에 의해 시도되어 일단 Histoire de l’Eglise de Coree(《한국천주교회사》, 1874년)로 마무리되었다. 이 책의 간행은 개별적 주제에 대한 구체적 연구에 앞서 순교사 중심의 통사를 먼저 쓴 결과가 되었다. 그런데 약 50년 후 일제 식민지 시대 조선에서는 조선 교회사에 대한 개설서를 간행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드브레 주교가 정리한 교회사이다.1) 이 직후 젊은 선교사 피숑(Leon Pichon, 宋世興, 1893~1945)은 앞선 선배들의 저서를 활용하여 대신학교에서 조선 교회사를 강의했다.2) 이 강의를 진행해 나가면서 그는 개별 주제를 선별하여 이를 구체적으로 천착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그의 연구에는 근대적인 안목과 역사 연구방법론이 적용되고 있었다.

 

피숑이 조선 교회사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는 조선 사회에서도 근대적 역사학이 진행되고 있었다. 피숑은 교회의 순교사 중심의 기록적 역사와 근대 역사학의 분석적 연구를 이어준 학자였다. 그러므로 그의 조선 교회사 연구 및 서술은 시대적으로나, 조선 교회사 연구사의 검토에 있어서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당시 교회에서 운영하는 잡지 《가톨릭靑年》에 3년간 교회사 관계 논문들을 연재했다. 그의 연구 성과가 교회에서 공인했던 정기 간행물에 연재되고 있음을 보면, 그의 연구는 당시의 조선 교회 내에서 일정한 동의를 얻었다고 인정된다. 그리고 그의 연구는 당대 교회의 교회사 인식에 대한 특성을 드러낸다.

 

그런데도 피숑에 대한 학계의 주목은 퍽 늦었다. 1982년 오기선 신부가 자신의 은사로서 자신에게 조선 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준 피숑을 추억했다.3) 같은 해 조광은 피숑의 저술 Pro Corea-Documenta를 진단했다.4) 이어 1990년에는 김영진, 1997년에 최석우가 피숑을 간략히 소개했다.

 

오기선은 피숑을 조선 교회사의 서술 중 잘못된 내용을 수정한 학자였으며, 뮈텔 주교가 순교자에 관한 사료 정리 작업을 수행하는 데 ‘오른팔’ 역할을 했다고 소개했다. 즉 뮈텔 주교가 순교자 사료를 정리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으며, 현장 조사를 통해서 그 사료를 보완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오기선은 피숑의 순교자 자료 발굴 작업을 정리 · 제시했다.

 

조광의 <《Pro Corea-Documenta 朝鮮聖敎史料》>는 자료 소개적 글이었다. 그러나 그는 피숑의 책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했을 뿐 아니라 《가톨릭靑年》에 게재되었던 글을 바탕으로 저자의 저작 활동을 총괄했다. 그리고 조광은 피숑을 “조선 교회사 연구의 선구자이며 개척자”라고 평했다. 김영진도 피숑은 《한국천주교회사》를 지은 달레를 능가할 만한 학문적 소양을 가지고 조선 교회사 연구에 매진했다고 보았다.5) 최석우는 피숑이 식민지 시대 교회를 촬영한 유리 사진 원판 등 자료 수집에 공로를 세웠다고 강조했다.6) 이처럼 선학들은 피숑을 매우 긍정적이며 높이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남긴 글들은 짧고 또 그의 논문들을 분석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들의 긍정적 평가는 선언적 의미로 끝나고 말았다.

 

반면에 2011년 조한건은 <서양선교사의 조선교회사 연구 - 피숑 신부를 중심으로>를 발표하여 본격적으로 피숑이 이용한 사료와 연구 내용들을 검토하여 그의 사관을 규정짓고자 했다.7) 그리고 그는 여기서 피숑의 ‘달레주석’을 소개했다.8) 그러나 조한건도 피숑의 연구 업적으로서 조선 교회사에 관한 특정 주제 발굴을 위한 노력과 그 연구 방법에 대한 모색 과정을 밝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달레노트’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도 미진한 점이 있었다.

 

피숑의 연구 업적으로는 《가톨릭靑年》에 14개의 주제로 된 21편의 논문이 있다. 물론 당시 《가톨릭靑年》은 가톨릭에 관한 종합 잡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본격적인 교회사 논문집이 발간되지 않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 잡지에 그는 조선 교회사에 관계되는 자신의 논고를 정리했다. 또한 그는 Pro Corea-Documenta를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출간했다. 이외 프랑스에서 간행되던 《전교회지》에 “La prehistoire de la Mission Coree”를 발표했다.9) 그리고 앞서 말한 그의 ‘연구노트’가 남아있다.

 

피숑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교재로 삼아 강의를 하면서 이를 보완했고, 달레의 책에 인용된 사료들을 검토한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한 첫 번째 사람이다. 그는 조선 교회사를 중요한 주제별로 나누어 연구하기 시작한 학자이며, 그 결과물을 잡지를 통해 일반인과 소통한 저술가였다. 그런데도 현재까지 피숑에 대한 연구 결과에 대한 철저한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피숑이 연구한 내용을 모두 철저히 분석하는 일은 한 편의 논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방대한 작업이다.10) 그러므로 본고는 역사학자 피숑을 종합적으로 진단하고자 한다. 다만 피숑이 연구한 내용을 소개한 선행 연구들과는 달리 피숑이 새로 개발한 교회사 주제와 내용, 그리고 그의 연구 의도, 당대 사회와의 소통 관계를 차례로 보고자 한다. 그리고 피숑 사후 70년가량 되는 현재, 그의 연구 주제들이 발전되어 나오는 과정을 짚으면서 그의 연구가 후대에 미친 영향을 밝히고자 한다. 특히 본고는 피숑의 연구 의도를 중심으로 그가 선정한 새로운 주제의 내용과 사료를 보겠다.

 

피숑의 연구 결과는 잡지, 서적, 연구노트에 남겨져 있다. 이는 또한 그가 교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연구를 한 특징을 드러낸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각 매체가 지닌 특징적 성격과 그곳에서 다룬 내용을 함께 묶어서 설명하겠다. 즉 피숑이 교회사 연구를 하게 되는 과정을 살피면서 그의 연구의 특징인 연재글의 성격을 살피겠다. 이어 《가톨릭靑年》을 다루면서는 피숑이 시기를 염두에 두고 집필했던 브뤼기에르, 모방, 정약용에 대한 글을 검토하고, Pro Corea-Documenta에서는 김대건에 관한 글을 묶어서 보겠다. 연구노트는 그의 조선 교회사 전사(前史) 연구의 내용과 함께 진단하겠다. 이 과정을 통해 피숑이 연구한 내용과 그 주제의 현재 교회사로의 연결 여부를 보겠다.

 

피숑의 연구는 우리 교회사가 근대적 시각으로 주제를 뽑고 연구를 진행해 나간 과정을 보여줄 것이다. 아울러 그가 처해 있던 1930년대를 전후한 시대에 교회가 처했던 상황 및 당면한 관심들을 드러낼 것이다. 이로써 당대 조선 교회사 연구의 발전 단계를 진단하고 현대 교회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보게 될 것이다.

 

 

2. 피숑의 역사 연구

 

피숑 신부의 생애는 선학들의 연구에 의해 자세히 밝혀졌다.11) 여기서는 피숑이 교회사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그 진행에 전기가 된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생애를 살펴보겠다. 연구자의 삶은 그의 연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피숑은 1893년 4월 10일 프랑스 브르타뉴(Bretagne) 지방에 속하는 플루달메조(Ploudamezeau)에서 출생했다. 그는 17세가 되던 1910년 9월 17일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일반적으로 서품을 받고 입회하는 이들과는 달리 그는 어려서부터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려서 학업을 시작한 관계로 중간에 중단한 바도 있었다. 그는 1913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육군에 복무하다가 1919년 제대했다. 제대 후 그는 다시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돌아왔다. 이 기간에 피숑이라는 미래의 선교사는 세계 대전 참전을 통해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경험했다. 그리고 그는 전쟁 체험을 통해 국제 관계의 역동성을 터득했을 것이다. 그가 조선 교회사의 전사(前史)로 유럽과 동양의 접촉에 세심한 관심을 가졌던 것도 이러한 그의 국제 관계에 대한 체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피숑은 1921년 9월 24일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11월 28일 프랑스를 떠나 이듬해인 1922년 1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고, 그날로 서울에 이르렀다. 그의 입국으로 서울 대목구는 8년 만에 젊은 선교사를 맞았다. 이 말은 그가 할 일이 상당히 많은 곳에 오게 되었음을 뜻한다.

 

피숑은 서울 주교관에 머무르면서 조선어와 조선 관습을 익혔다. 동시에 그는 당시의 관례대로 선배 선교사들에게 조선 선교지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면서 부족한 일손을 도왔다.12) 그가 조선에 입국해서 활동하기 시작하던 때는 조선의 세 교구(서울 대목구, 대구 대목구, 원산 대목구)가 모여 시복을 준비하던 때였다. 당시 서울 대목구는 황사영의 편지를 복간하고 전시회를 준비하며, 조선과 조선 순교자를 알릴 그림 및 역사서를 준비하고 있었다.13) 새로 도착한 선교사 피숑은 이때 서울 대목구 교구청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선교지에 관해서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 역사부터 이해하게 되었고, 역사 자료의 정리에도 함께할 수 있었다.

 

1923년 9월 피숑은 강원도의 이천 본당의 제3대 주임 신부로 발령을 받았다.14) 이천은 강원도의 산간 지방으로서 박해 시기 선교사와 신자들이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곳이었다. 이천 본당은 1892년에 이미 신자수가 2천여 명이나 되었던 유서 깊은 본당이었다.15) 물론 강원도 이천은 서울과는 전혀 다른 외지였으며, 아직 박해 시대 이래 교회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던 본당이었다. 그가 있는 동안 이천 포내(浦內)에 또 다른 본당이 신설되어 그는 포내 본당의 동료 선교사와 의논하며 이천 지방을 사목해 나갔다.

 

1927년 9월부터 피숑은 용산 대신학교 교수로 전임되었다. 서울 대목구에서는 1922년에 소의학교를 인수하여 남대문상업학교로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남대문상업학교는 5년제 중등교육기관이었으며, 1928년부터 서울 혜화동에 소재한 옛 베네딕도회 수도원 터로 이전했다. 그리고 이듬해 용산 신학교에서 소신학생들이 이곳으로 옮겨왔다.16) 그러므로 용산 신학교는 고등교육 내지는 전문 교육기관인 대신학교와 중등교육기관인 소신학교 과정을 분리해 운영할 준비를 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대신학교에서는 교수진을 보충하게 되었고, 그가 교수진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던 것 같다.

 

한편, 그는 1927년부터 눈에 문제가 생겼다. 그는 조선에 파견되어 오기 전에도 눈병을 앓은 적이 있다. 그가 안과 치료를 위해 서울에 머물고 있는 동안 용산 신학교 교수 발령을 받았다.17) 당시 서울 대목구에서 그가 치료를 용이하게 받을 수 있도록 서울로 인사 발령을 내렸다고 고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피숑은 신학교에서 성경과 교회사를 맡았다. 오기선은 용산 대신학교에서 피숑 신부의 ‘조선 교회사’ 강의를 들었는데, 신학교 설립 이후 그렇게 명쾌하고 새로운 역사 강의는 처음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피숑은 한문 역사책을 인용하고 그것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까지 열강했다고 전했다.18) 그의 ‘연구노트 2’를 보면 그가 한문을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피숑은 대신학교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동안, 눈병이 악화되었다. 결국 그는 눈병 치료를 위해 1931년부터 1933년까지 2년 동안 프랑스에 귀국하여 체류했다. 이 사이 그는 자신이 의문을 품고 있었던 연구 주제들에 관한 자료를 보완할 수 있었다.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의 고문서고에서 조선 교회사에 관한 자료들과 김대건 신부의 서한을 필사해 왔다.19) 이때 진행된 사료 조사 작업은 향후 피숑의 연구 여정을 열매 맺게 하는 거름이 되었다.

 

피숑은 1933년 6월에 조선에 다시 돌아왔다.20) 그는 본국 귀국 전후에 대구의 드망즈 주교를 찾아 머물렀다.21) 드망즈 주교와 특별히 친분이 있는지, 아니면 그의 성격이 적극적이고 활달하여 선배 선교사인 드망즈 주교를 찾아갔는지의 여부는 아직 분명치 않다.

 

그러나 피숑은 자신의 선교지인 조선에 재입국한 이후 신학교 교수직 대신에 본당 신부로 발령을 받았다. 즉, 그는 신설되는 덕정리 본당(德亭里本堂)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피숑의 본당 발령 연도는 분명치 않다. 덕정리 본당 관계 기록에서는 이 본당이 개성 본당의 공소로 출발해서 1930년 피숑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22) 그러나 《뮈텔 주교 일기》에 의하면, 1931년 콜랭 신부가 피숑의 자리를 대신하여 신학교에 임명되었고, 피숑은 2월 18일 치료차 프랑스로 떠났다.23) 또 가톨릭대학교의 역사를 보면, 피숑은 1931년 1월 24일까지 근무했고 콜랭은 2월 8일부터 근무했다.24)

 

1929년 용산 신학교의 소신학교는 용산에서 분리하여 혜화동 남대문상업학교 을조로 편제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 1930년 그는 덕정리 본당 주임으로 발령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는 학사 일정이 일부 끝나는 이듬해 1월까지 근무했을 수 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귀국한 후에는 신학교 교수신부직 대신에 본당 사목에 종사한 것 같다. 한편, 라리보 주교는 1933년도 보고서에서 피숑이 경원선이 통과하고 있는 덕정리에 새 본당을 세우러 갈 것이라고 했고,25) 또 덕정리 성당 건물이 1936년에야 세워지는 것으로 미루어 피숑의 본당 사목은 프랑스에서 귀국한 후에 이루어졌다고 여겨진다.

 

결국 피숑은 프랑스로 떠나기 전인 1930년에 이미 본당 신부로 발령받았고, 이 때문에 덕정리 본당 관계 기록에서는 피숑이 덕정리에 부임한 날짜를 1930년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사실은, 피숑의 조선 천주교회사 연구가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에만 목적을 두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즉, 피숑은 본당 신부로 발령을 받은 이후에도 조선 교회사 연구에 항구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 연구를 자신의 지속적인 과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기존의 교회사 서술에서 수정 · 보완하거나 새로 연구하고 싶은 내용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1933년 6월, 피숑의 연구 발표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는 《가톨릭靑年》이 창간되었다. 즉 그해 3월 서울, 대구, 원산, 평양, 연길의 5개 교구장은 정례 주교회의에서 당시 각 교구별로 발행되고 있던 각종 정기 간행물을 통합하고자 했다. 조선 관내 5교구장은 연합출판위원회를 설치하고 서울 대목구장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1883~1974) 주교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이와 동시에 대구 대목구의 <천주교회보>와 서울 대목구 청년회에서 간행하던 <별>을 폐간하고, 대신에 지식청년을 상대로 하는 《가톨릭靑年》을 발간키로 했다. 같은 해 6월 10일 서울에서 국판 크기의 100여 면에 달하는 창간호가 발간되었다.26) 이는 《경향잡지》와 더불어 조선 천주교회에서 공인한 잡지였다.

 

피숑은 ‘송세흥’(宋世興)이라는 조선명으로 《가톨릭靑年》 통권 제4호인 1933년 9월호부터 조선 교회사에 관한 연재를 시작했다. 그러나 본당 사목을 겸하면서 조선 교회사를 연구하기가 수월하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그의 연재 글이 제외된 채로 가끔 《가톨릭靑年》이 간행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피숑이 사목하던 덕정리 본당에는 사제관이나 성당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덕정리에 상주하지 못하고 주교관에 거처하면서 이곳까지 매일 왕래했다고 한다.27) 덕정리는 서울에서 50리 정도 떨어져 있는데, 경원선 기차역이 있고 성당은 역에서 5분 거리여서 그가 서울에서부터 이곳까지 출퇴근할 수 있었다. 피숑 신부가 덕정리에 정착 · 상주한 시기는 명확지 않다. 그러나 그는 1936년에 성당 건물을 완공하고 자신의 고향 브르타뉴에서 공경받는 성녀 안나를 수호성인으로 모셨다.28) 본당 건물의 완공으로 그는 성당을 짓는 일에서 해방되었고, 교회사 연구에 비교적 많은 시간을 투여할 수 있게 되었다.

 

피숑은 《가톨릭靑年》에 매월 투고하는 교회사 관계 논문의 주제 선정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잡지의 기획 의도나 교회사적 기념일과 관련하여 특집 형태의 글을 기고했다. 그의 글은 독자의 관심을 존중했고, 그의 연구는 상당히 시의적절한 성격의 글들이었다. 예를 들자면, 1935년 브뤼기에르(B. Bruguiere, 1792~1835, 蘇) 주교 선종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그는 소 주교의 업적을 소개하는 교회사적 기고문을 투고했다. 이듬해인 1936년은 프랑스 선교사의 조선 입국 100주년이었다. 이때 피숑은 1836년 서울에 들어온 모방 신부의 서한을 제시하며 선교사 입국 상황을 소개했다. 한편, 1936년 4월은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던 때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피숑은 정약용의 신앙 여부와 그가 조선 교회 초기 지도자로 활약했던 활동상을 찾아서 학계에 제시해 보고자 했다.

 

그러나 《가톨릭靑年》은 일제에 의해 1936년 12월 통권 제43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가톨릭靑年》의 폐간으로 피숑 신부의 글도 베르뇌 주교 시대를 마지막으로 멈추었다. 돌이켜 보면, 피숑이 연재했던 조선 교회사 관계의 글은 《가톨릭靑年》의 중심 기사였으며, 논문이었다.

 

피숑의 글은 연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글이 계속 연재될 수 있었던 까닭은 당대 교계 및 사회의 공감과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또한 특집호 주제를 매개로 하여 당대 독자들과 소통을 꾀했다. 아마도 그는 편집인과 특집의 주제를 함께 의논할만한 사이였다고 생각된다.29) 그리고 편집인과의 합의에 따라 자신이 집필할 글의 내용을 결정했다. 피숑은 김대건 신부, 브뤼기에르 주교, 모방 신부 등이 남긴 1차 사료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남긴 역사를 생생하게 서술했다. 이 때문에 그의 글은 생동감에 넘쳐 있었고, 사료 발굴 등에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는 자신이 집필한 주제와 관련하여 스스로 독자적인 질문을 제시했으며, 이 질문을 통해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었다.

 

또한, 이 무렵 교회에서는 가톨릭운동(Catholic Action)을 소개하며, 신앙 운동을 통해 일제 시기 암울한 일상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으려 했다.30) 또한 1939년에는 ‘기해박해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순교자 현양운동이 전개되었다. 《경향잡지》는 일 년 내내 순교 정신에 관한 논설을 실었고, 교회에서도 순교현양비를 세우고자 했다.31) 피숑도 이에 호응하여 조선인 성직자 김대건을 조선인의 신앙 모델로 제시했다.

 

피숑은 《가톨릭靑年》 폐간으로 발표의 장(場)이 사라지자 자신의 작업을 단행본으로 묶기 시작했다. 그는 연재가 끝난 지 1년여의 보충 기간을 거친 뒤 1938년 《Pro Corea-Documenta 朝鮮聖敎史料》32)를 출간했다. 그리고 그는 교회사 사료들을 계속해서 책으로 엮어내고자 했다.33) 이는 4장에서 다시 검토하겠다.

 

한편, 피숑은 조선 교회사 연구를 위해 조선 측 자료를 보완했다. 그는 자료 수집과 답사를 그치지 않았으며 잊혀진 순교자들의 묘소를 찾기 위해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리하여 피숑은 1927년 경기도 광주군 구산(龜山)에서 김성우의 묘소 발견을 시작으로34) 하여, 최경환의 묘와 허계임 및 그 일가 5명의 묘소를 잇달아 찾아냈다. 1930년대에는 정약종과 정철상의 묘35), 이승훈의 묘36) 등을 찾았다.

 

피숑은 오토바이를 타고 넓은 지역의 공소를 돌았다. 당시 덕정리 본당은 공소가 20여 개에 이르렀으며, 신자 수는 1,100여 명이었다. 피숑은 1945년 초, 봄 판공 사목 여행을 하던 중 티푸스에 걸렸다.37) 그는 그해 2월 25일 성모병원에서 선종, 24년간의 선교 생활을 마감했다. 이때는 일제에 의해 프랑스 선교사들이 감금되어 있던 시절이어서인지, 덕정리 본당에는 그의 후임 선교사가 파견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덕정리 본당은 해방 이후 자리를 옮겨 의정부 본당으로 출발했다.

 

요컨대, 피숑은 1921년 조선에 파견되어 2년간의 선교 준비, 4년간 이천 본당 주임 신부, 3년간 용산 대신학교 교수, 12년간 덕정리 본당 주임 신부 등을 역임하면서 모두 24년간 선교사로 일했다. 그는 선교지에 도착하면서부터 교구청에 머물면서 시복식을 준비하던 교구장 뮈텔 주교를 도왔고, 이를 통해서 조선 교회의 순교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이 아닌 강원도 이천 본당으로 파견되어 박해 시대의 관행이 살아있던 구 교우촌 생활을 체험했다. 이렇게 준비된 그에게 1927년부터 1931년까지 대신학교의 교회사 교수로 봉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피숑은 눈병 치료차 2년간 프랑스에서 머물면서 조선 교회사 관계 자료를 수집할 기회를 가졌다. 또한 이때는 조선 교회에서도 시복식을 준비했던 직후였으므로 순교자에 관한 조선 측 자료도 많이 발굴되어 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당대까지도 박해 시대의 생활 관행이 이어져 오던 역사 현장인 교우촌 내지 공소들을 답사하면서 자료를 보완했다. 그는 초기 교회사 연구와 순교사적지 조사 등에 열중했고 그의 이런 작업은 모두 자신의 집필 작업으로 연결되었다. 따라서 그는 단순한 사료수집가가 아닌 본격적 연구자로 불려야 할 것이다.38)

 

 

3. 피숑의 《가톨릭靑年》 게재 논문

 

피숑은 《가톨릭靑年》에 1933년 9월 순교 성월부터 교회사를 집필하여 1936년 12월까지 약 3년 넘게 거의 매월마다 다른 주제로 조선 교회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39) 이 중에서 1934년 1월과 5월, 1934년 9월에서 1935년 8월까지 1년간, 1936년 3월, 5월, 6월과 1936년 10월호에는 그의 기고 논문이 실려 있지 않다. 이를 통해 보면 이 잡지는 대략 9월에 새 주제를 시작하여 이듬해 8월에 끝낸 것 같다. 그것은 당시 신학교의 학기 운영과 같다. 피숑은 처음 1년간 원고 청탁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연재를 쉬게 되자 사람들의 호응에 의해, 이태 뒤부터 다시 교회사 난(欄)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기간 중의 연재글의 결호는 아마도 필자 피숑이 원고를 준비하는 데에 적절한 시간이 부족해서인 것 같다. 결호가 된 다음에는 대부분 주제가 바뀌고 있다. 이를 보면 그가 다음 원고의 준비 관계로 집필이 불가능하여 결호가 발생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20여회에 걸쳐 게재된 피숑의 글은 조선 교회사를 대략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배열하고 있다.

 

《가톨릭靑年》에 발표된 피숑의 논문은 특별한 주석을 달지 않았고, 단편적 주제들을 정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연재했던 글들을 모두 합치면 200자 원고지 1,800여 매에 이르는 분량으로 단행본 한 권은 족히 된다. 그가 집필한 조선 교회사의 범위는 임진왜란부터 시작하여 병인박해를 제외한 박해 시대 거의 전 기간을 다루고 있었다. 그가 잡지의 폐간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는 잡지의 마지막 호에 실린 글을 아름다운 서술로 결말지었다. 피숑의 글은 총 14개의 주제인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40) 글의 대강의 내용은 조한건의 앞의 논문에 소개되고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피숑의 연구를 일관된 연구로 간주하고, 그의 특징적인 연구 의도와 결과를 묶어 살피고자 한다.

 

피숑이 다룬 주제는 크게 ① 조선 교회사 전사(前史), ② 교회 성립과 기해박해까지의 흐름, ③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헌, ④ 마카오의 공헌, ⑤ 김대건, ⑥ 정약용의 신앙생활, ⑦ 모방 신부 편지, ⑧ 페레올 주교, 메스트르 신부 및 베르뇌 주교 관리 시대의 교회 발전 등 모두 여덟 개의 주제로 나눌 수 있다.

 

피숑이 다룬 각 주제들에서 기존의 교회사 서술에 보충한 내용, 이용한 사료, 연구 의도를 분석하려면 각각 원고를 달리하여 한편씩 새로운 논문을 작성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본고는 피숑의 연구를 소개하는 단계로서 각 주제를 그의 연구 목적을 중심으로 기존의 연구와의 차이를 찾아보겠다. 그런데 잡지, 저서, 연구노트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주제는 각각 이들과 함께 검토하여 논문 안에서 서술의 중복성을 피하고자 한다.

 

즉, 위의 8개의 주제 가운데 ‘전사’(前史) 부분은 피숑의 ‘연구노트’와 함께 제5장에서 그 내용을 검토하겠다. 그리고 ⑤ ‘김대건’의 서한과 관련된 내용은 Pro Corea-Documenta에 다시 집중적으로 정리되므로 이를 제4장에서 다루고자 한다. 또한 ④ ‘마카오의 공헌’은 피숑이 연구를 진행했던 당대의 시대적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본고의 제6장 ‘피숑의 연구 영향’에서 논의한다. 그리고 나머지 ③, ⑥, ⑦ 주제는 잡지의 시기성을 보이는 대표적 작품이므로 월간 종합 잡지를 다루는 이곳에서 검토하겠다.41)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지 앞서 피숑과 달레의 글의 차이를 보면, 피숑은 달레보다는 조선 측 사료들을 많이 활용한 점이 두드러진다. 이는 피숑이 뮈텔 주교 등이 시복을 준비하면서 발굴 · 정리했던 자료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피숑은 조선 교회에 관한 서양어 자료에서도 달레보다 더 많은 자료를 찾아냈다. 그러므로 피숑의 글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보다 분량은 짧지만, 피숑이 재론한 주제들에 관해서는 달레의 서술보다 세세한 내용들이 보완되었다.

 

피숑이 다룬 주제 ② 조선 교회 성립과 기해박해까지의 흐름에 대한 피숑의 주장을 짧게 정리하겠다. 이 논문에서 피숑은 이승훈이 배교하고 나서 권일신에게 돌아와서 참회한 다음, 다시 북경에 갔고 거기에서 신학교에서 행하는 의식과 주교 대례 미사에도 참례했으며, 이 감동으로 이승훈은 권일신을 중심으로 성직자 조직을 만들었다.

 

또 피숑은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을 왕래하던 정하상에 대한 기록을 보완해 주었다. 즉 정하상이 북경을 왕래하면서 모친과 동생을 외교인 사이에 두었기 때문에 북경 주교가 그를 북경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피숑은 서술했다.42) 그리고 “기해박해 무렵 수석대신은 세 선교사의 존재를 묵인하고 있었고, 영의정 김유근은 입교할 마음이 있었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자진하여 치명하려는 신자들이 많아 주교와 신부들이 이를 금했다”43) 등 박해 당시의 조선 사회 상황에 대해서도 설명을 시도했다. 물론, 그가 이렇게 서술한 것은 당시 선교사들의 단편적 기록에 근거하여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고자 했던 결과였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견해를 오늘날의 연구 수준에서는 전적으로 수용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또한 피숑은 박해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1802년의 윤음이 향후 박해의 기초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가 같은 이유와 비슷한 유형으로 발생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피숑은 조선 교회가 박해를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은 명도회 조직이 확고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44) 피숑은 전체적으로 박해의 원인을 정치 이외에도 사상, 종교 등에서 다양하게 찾고자 했다. 그는 당대 상황을 세심하고 다각적으로 서술하며 교회사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다음으로 피숑은 주제 ③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헌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일기와 편지를 바탕으로 그의 업적을 정리했다.45) 피숑은 조선교구 설정 당시의 상황과 브뤼기에르 주교가 취한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즉 브뤼기에르 주교가 시암교구를 떠날 때는 단순한 선교사의 신분으로 조선에 진출하려고 했다. 그런데 교황청에서 조선교구 설립을 결정했고, 이 결정은 포르투갈인과 파리 외방전교회와의 갈등을 자아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리 외방전교회는 조선교구를 맡기를 꺼렸다. 그리고 파리 외방전교회는 조선 선교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하는 브뤼기에르 주교를 출회(出會)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으로 오는 험난한 여행 중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브뤼기에르 주교의 그침 없는 노력으로 1833년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조선교구를 담당하게 되었다. 피숑은 이러한 브뤼기에르와 관련된 새로운 내용을 담담히 서술해 주었다.

 

한편, 피숑은 조선 교회에 선교사를 그침 없이 들어오게 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로를 강조했다. 그가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조선을 담임한 이후부터는 늘 선교사들이 조선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고, 또 스스로도 어려움을 뚫고 조선으로 들어오는 틀을 지었다. 이는 조선 신자들의 간절한 청에도 30년이나 성직자를 보내지 못한 북경 교회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했다.46) 피숑이 이러한 이유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역할을 높게 평가한 점은 나중에 김대건의 역할을 평가하는 면과 일맥상통한다.

 

실제로 조선 교회사를 돌아보면 초기에는 목숨을 걸고 신자들이 성직자를 영입하러 다녔지만, 파리 외방전교회가 교구를 맡기로 한 뒤로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끊임없이 목숨을 걸고 조선에 들어오고자 노력했다. 그러니까 브뤼기에르 주교는 양쪽의 노력이 맞닿도록 해 놓았다. 이리하여 조선 교회는 일본 교회처럼 오래도록 침묵의 교회로 남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 교회는 정통 교리에 충실할 수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이 출회당하면서도 확신을 가지고 이를 이루어냈다.47)

 

또한 피숑은 같은 논문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업적으로 조선, 일본, 만주라는 세 개의 교구가 창립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말하자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입국의 편의를 위해 1834년에 로마에 일본 교회의 관리권을, 이듬해에는 만주 교회의 관리권을 청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이 류큐 교구, 만주교구를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피숑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돕기 위해 조선에 먼저 들어온 중국인 유 파치피코 신부가48) 포르투갈인들과 연계되어 주교의 조선 입국에 장애를 조성했음도 언급했다. 그리하여 피숑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중국 땅에 머무르지도 못하고 조선 땅에도 들어오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던 상황에서 이 같은 요청을 할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배경에서 제2대 조선 대목구장이었던 앵베르 주교가 조선과 류큐의 교황대리가 되었음도 밝혔다. 아울러 그는 이를 통해 조선교구의 선교사들은 조선보다는 2세기나 앞서 천주교가 전래되었던 일본에 진리의 광명이 재현되도록 준비하게 되었다고 자랑스러워했다.49)

 

다음 주제 ⑥ 정약용의 신앙생활을 다룬 글에서 피숑은 정약용을 조선 가톨릭의 기초를 놓았으며, 조선 가톨릭 운동의 선구자가 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50) 당시 식민지 조선학계에서는 문화적 민족주의가 강화되어 가던 과정이었다. 특히 1936년은 다산 정약용이 세상을 떠난 지 100주년에 해당되는 해였다. 이에 조선학계에서는 다산 정약용에 대한 자료 정리 및 실학 연구가 새롭게 활기를 얻고 있었다.51) 이와 같은 상황에서 피숑은 이승훈이 교회를 떠나 지도층에 공백이 생겼을 때, 정약종 형제와 권일신이 교회를 지탱해 나갔다고 보았다. 그리고 피숑은 이승훈이 자신의 실수를 참회하자 정약종이 그를 관대하게 받아들였다고 했다.

 

또한 피숑은 다산 정약용은 교회 초기부터 지도층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특히 1777년부터 1791년까지는 가장 열성적인 지도자였다고 보았다. 물론, 피숑은 다산 정약용이 배교를 선언하고 신자들을 처벌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피숑은 정약용이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여러 해 동안 열심히 극기하고 진실히 통회 보속하며 교우들을 위로했다고 설명했다.52) 다산 정약용은 1835년 중국인 선교사 유방제 신부에게53) 종부성사를 받고 선종했다. 피숑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려 할 때 당시 조선에 주교가 임명된 줄을 아는 네 사람 중 한 명이 다산 정약용이었다고 보았다.54)

 

그런데 피숑의 이 글이 발표될 당시에도 다산 정약용의 신앙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적지 않았다. 피숑은 다산 정약용이 두 번 배반하고 회개한 것은 사도 베드로가 세 번 배반하고 회개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면서, 다산 정약용은 진정으로 회개하며 희생으로 살았다고 확신했다. 더욱이 피숑은 다산이 서양 문명이 가톨릭에서부터 시작한 것을 잘 알았고 조선의 참된 문화를 위해서는 가톨릭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고 가톨릭 보급을 위해 노력하고 저술했으며, 다산은 참 종교를 존중하는 이의 표범이라고 했다.55) 그래서 피숑은 참 종교를 무시하던 당대의 청년들에게 다산 정약용의 근본정신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숑은 자신이 다산 정약용에 대한 ‘일정 기록’을 본 것처럼 진술했다.56) 피숑은 이 진술에서 다산의 기록은 다산 자신뿐만 아니라 형제와 친구들의 배교까지도 솔직하게 기록할 정도로 진솔한 기록이었다고 단정했다. 그의 기록은 다산의 집안에만 보존하여 왔기 때문에 극소수의 사람 외에는 그 책의 존재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피숑이 본 자료를 확인하지 않는 한 그의 판단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가 보았다고 말한 다산 가문의 기록은 아마도 당시 미처 간행되지 못했던 《여유당전서》상의 묘지명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4. Pro Corea-Documenta

 

피숑은 1938년 김대건에 관한 글과 김대건의 편지를 묶어 《Pro Corea-Documenta 朝鮮聖敎史料》를 출간했다. 본고에서는 이 자료를 《Pro Corea-Documenta 朝鮮聖敎史料》 또는 Pro Corea-Documenta로 부르고자 한다.57)

 

이 책의 속표지는 ‘ANDREAE KIM’으로 되어 있다. 물론 제목의 위에는 ‘복자’, 아래에는 ‘1846년에 순교한 순교자’라는 부제들이 붙어 있다. 이 자료의 제목에서 ‘Pro Corea’는 총서의 명칭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즉, ‘Pro Corea’라는 총서 가운데 김대건에 관한 자료(Documenta)라는 의미로 이와 같은 제목을 붙였다고 생각된다. 이 자료집은 김대건의 편지 라틴어 원본을 수록한 책자와 프랑스어 역본 두 종류로 간행되었지만, 프랑스어본의 경우에도 라틴어본과 동일한 표지를 쓰고 있었다.

 

이 라틴어본 김대건 서한집은 국판 크기로 면수는 125쪽의 분량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중간 중간에 겹 페이지들이 있다. 예를 들면 76쪽은 76-a부터 76-p까지 되어 있으며 16쪽이 묶여 있다. 그리고 페이지 표시가 없이 기도문이나 설명문이 삽입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화보를 포함한 이 책의 전체 쪽수는 실제로 180쪽이 넘는다.

 

화보는 대부분 페이지가 없는데, 1857년의 EX PROCESSU에서 안드레아 김, 김대건 초상, 1839년의 복자들, 마카오 전경과 마닐라 대성당, 베롤 주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앵베르, 샤스탕, 모방 신부의 초상 등이 실려 있다.58) 이 사진들은 각 교구 주교들이 보관하고 있었던 자료이다. 복자 유 베드로 수형 광경은 드망즈 주교 문서에 들어있는 자료를 활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책의 편집은 체계적이지 않고 인쇄도 조잡하다. 이 책은 조선에서 라틴어로 인쇄된 책자 가운데 초기 단계의 작품이다. 이 책의 프랑스어본에서는 오 · 탈자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악상(accent) 부호를 잘못 넣은 경우가 여러 군데 있다.59) 이는 당시 이 책을 인쇄한 인쇄소에 프랑스어 활자가 없었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조잡한 책을 통해서 우리는 책을 발간하는 데 들인 피숑의 수고를 찾아볼 수 있다.

 

Pro Corea-Documenta는 다시 프랑스어로 번역 · 간행되었다. 프랑스어본은 32쪽씩으로 해서 5권으로 분책을 할 예정이었다. 현재 첫째 권은 대구대교구 교구청에 소장되어 있고, 둘째 권은 한국교회사연구소 도서관에 있다. 이 두 권 이외에 후속 간행된 책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는 이 책이 계속 출간되지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60) 한편, 이 책은 32쪽을 한 권의 분량으로 제한하여 분책했다. 따라서 이 책의 1권은 32쪽에서 끝나는데, 내용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기계적으로 분책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2권은 33쪽부터 시작했다. 한편, 분책 1권의 표지는 라틴어 표지와 동일했지만, 분책 2권은 Pour la Coree라는 프랑스어 총서명으로 바뀌어 있다.61)

 

Pro Corea-Documenta에는 일반적인 출판 사항마저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즉, 이 책에는 저자나 편자가 밝혀져 있지 않으며, 발간 연도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프랑스어본에 ‘한 선교사에 의해 출간된다’라고 적혀 있고, 책의 속표지 뒷면에 책 구독을 위한 연락처로 피숑 신부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한편, 프랑스어본 속표지에는 저자 소개란 아래에 “가톨릭 국가의 신부 선교사들과 비 가톨릭국가의 선교 사제들과의 일치를 위해”라는 헌사와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다.62) 그러므로 이 책의 실제 간행 의도는 책에 수록된 내용 분석을 통해서 파악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라틴어본이 교구나 단체의 지원으로 먼저 출간된 것 같다. 그리고 그 프랑스어 번역본은 예약 구독료를 받아서 출판하고자 한 듯하다. 당시 발행된 ‘구독 예약 신청 안내문’이 피숑 및 윤을수 신부의 공동명의로 되어 있다. 이를 보면 이 책의 편찬은 전적으로 피숑 신부의 작업이라 하더라도, 그 간행 주체는 파리 외방전교회였거나 혹은 서울 대목구였던 것 같다.

 

Pro Corea-Documenta 번역본 발행 비용 확보를 위한 ‘구독 예약 신청 안내문’에는, 이 책의 외적 형태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다. 즉, 이 책은 총 160쪽 분량으로 되어 있지만, 각기 32쪽씩 나누어 5권으로 출간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예약 구독료가 100엔이 모이면, 첫 권을 간행하기 시작하겠고, 두 달마다 한 책씩을 발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 책을 이렇게 간행하는데 소요되는 총 예산은 200~300엔이었다. 당시 《가톨릭靑年》 한 부는 15전이었다. 《가톨릭靑年》 700권을 살 수 있는 돈이 모이면 분책 한 권을 발간할 예정이었다는 말이다. 이 책의 2권까지는 확실히 출간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자료들은 현재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피숑은 《가톨릭靑年》에 2회에 걸쳐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의 약력>을 발표했다.63) 이 책은 앞서 발표된 글을 기본 지식으로 제시하면서 김대건 신부의 서한과 이에 관련된 글들을 실었다. 그리하여 여기에는 메스트르(J.A. Maistre) 신부가 쓴 김대건 신부의 약력과 이력서, 1857년의 시복 수속에서 작성한 김 신부의 순교에 대한 담당 검사의 변호문, 그리고 김대건의 신학생 시절 및 필리핀에서의 피난 생활, 에리곤호 승선 등에 관련된 선교사들의 미공개 서한도 수록되어 있다. 특히 지금까지 전해오는 김대건의 한글 서한 <교우들 보아라>는 그가 이곳에 처음 소개한 자료였다. 또한 이 책에는 김대건이 서술한 31명의 순교자 약전과 함께, 조선 교회 약사와 형벌에 관한 스케치를 수록하고 있다.

 

피숑은 그가 간행할 첫 사료집으로 김대건의 서한을 택했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면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다른 주교나 선교사들에 대한 자료가 훨씬 더 풍부했다. 그렇지만 피숑은 이러한 프랑스 선교사들보다는 김대건을 신앙의 모델로 조선인들에게 제시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책을 내면서 책의 독자층에 프랑스인을 포함한 신자 모두를 포함시키고자 했다. 이 책의 간행을 위해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고자 구독 예약을 받을 때 프랑스와 조선 양쪽에서 예약 신청을 받고 있었다. 동시에 피숑은 신학생들에게 김대건이 직접 쓴 라틴어 문장까지 학습시키고 싶어 했다.64) 특히 당시는 신학생들이 라틴어로 대화하던 때였다.65) 그리고 피숑은 이 편지를 통해 조선인들에게 순교신심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피숑의 김대건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이다. 그는 김대건의 행적을 친절히 밝혀주고 있다. 즉, 그는 김대건을 훌륭한 신학생이며 신부였고, 6개의 언어를 습득할 정도로 똑똑했으며, 짧은 시간 내에 아름다운 영성을 이루어낸 인물로 묘사했다.66) 그리고 피숑은 김대건이 페레올 주교 및 다블뤼 신부를 조선으로 모셔드렸음을 강조했다.

 

피숑은 특히 파리 외방전교회가 수행한 현지인 사제 양성을 위한 노력에 주목했다. 그는 현지인 사제 양성은 파리 외방전교회의 처음부터의 중요한 목표였음을 확인했다. 그는 선교사들이 신학생을 양성하려고 입국 전부터 계획하고 박해 시대 국내에서 신학교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점을 소개했고, 박해로 말미암아 신학교 운영이 불가능해지자 신학생을 피낭 신학교에 파견해서 조선의 성소자(聖召者)를 양성하고자 했음을 자세히 서술했다.67) 피숑의 생각으로는 김대건은 선교사들이 전개한 이러한 노력의 첫 번째 열매였다. 피숑은 신학교 교수였기 때문에 신학생 양성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하면서 김대건을 강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숑은 무엇보다도 김대건의 공로는 박해로 초토화된 조선교구에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연결했다는 데에 있다고 했다.68) 즉, 그는 1801년 박해 이후 30년도 넘게 노력하고 기다렸고, 마침내 들어온 선교사들이 1839년의 대박해로 유력한 신자들과 함께 참살당했지만, 이제는 30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박해가 일어난 지 6년 후에 선교사들이 순교자의 뒤를 이어 다시 조선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어 어느 경우에든 즉시 선교사를 파견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까닭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만일 김대건이 아니었더라면 선교사들도 그렇게 신속히 조선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했다.69) 실제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열어 놓은 길이 막혔을 때 김대건은 선교사의 입국로를 다시 뚫었다. 피숑은 김대건의 이러한 공로를 크게 상찬했다.

 

요컨대, 피숑은 《Pro Corea-Documenta 朝鮮聖敎史料》를 통해서 짧은 시간 안에 신학교 교육을 받고 아름다운 영성을 이룩한 김대건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그는 김대건의 행적이나 라틴어 문장까지도 당시의 신학생들에게 모범으로 제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김대건의 편지를 통해 조선인들의 순교신심을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선교지 조선에 와서 조선인 신학생들을 가르쳤던 피숑은 《Pro Corea-Documenta 朝鮮聖敎史料》를 간행하여 김대건을 모범으로 삼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열정이 전달되어 조선 교회는 순교자 김대건 신부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렇게 피숑은 김대건을 조선인 가운데 다시 태어나도록 했다.

 

 

5. 피숑의 ‘연구노트 2’

 

피숑은 대신학교에서 조선 교회사를 강의하면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교재로 썼다. 그는 이 《한국천주교회사》의 갈피에 얇은 종이를 부전지로 덧대어 여러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강의를 준비하기 위한 메모였고 더 나아가서는 연구를 위한 단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피숑의 연구노트는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본래 피숑의 연구노트는 모두 4권이었다고 한다. 원래 달레의 책은 Volume 1과 2로 나뉘어서 두 권으로 간행된 책자였다. 그러나 피숑은 두 권의 책에 연구메모를 붙여 그 부피가 커지게 되자, 매 권을 두 책씩으로 나누어 모두 4권으로 편제해서 제본했다는 설명이었다.70) 이 연구노트의 첫째 권은 달레의 책 서문과 드브레 주교의 책이 한군데 묶여 있다. 1925년의 시복식을 위해 한국 교회를 소개하기 위한 드브레의 Catholicisme en Coree가 같은 범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함께 묶은 것 같다. 또 한 권은 달레의 책 하권 후반부를 같은 형태로 제본한 것인데 메모 내용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71) 그런데 본고에서 분석한 ‘연구노트’는 부전지만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었다. 조한건은 이를 연구노트 2, 3권에 해당한다고 보았다.72)

 

피숑의 연구메모지를 통해서 그가 가지고 있던 한국 교회사 인식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메모는 완성된 형태의 연구물은 아니다. 아마도 그가 연구를 계속했다면 그 메모의 내용을 충분히 더 보완하고 수정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그 메모지는 미완성 문장이거나 단어일 수도 있고, 메모지가 원래 위치에서 이탈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제한점을 인정해야 하지만 그래도 이 연구메모를 통하여 그의 연구 경향을 어느 정도까지는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고에서는 이 연구메모를 피숑의 ‘연구노트’로 부르고자 한다. 조한건은 이 연구노트를 피숑이 달레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달레의 책 사이에 메모해 두었다고 보고 이를 ‘달레주석’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이 노트가 비록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분철해서 그 책의 내용을 검토하면서 간지를 넣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피숑은 이곳에 조선 교회사에 관한 많은 자료를 더했다. 즉, 그의 작업은 달레 교회사의 내용을 검토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그가 인용한 자료나 실제 답사 내용이 달레의 범위를 넘어서며, 또 드브레의 책도 함께 검토되고 있다. 그리고 이 내용들은 일부 《가톨릭靑年》에 발표되었다. 따라서 필자는 이를 피숑의 ‘연구노트’라 부르고자 한다. 그런데 본고에서 활용하고 있는 연구노트와는 달리, 달레 교회사 서설 부분 등을 다루고 있는 다른 연구노트가 더 있으므로 본고에서 활용하고 있는 자료를 ‘연구노트 2’라고 명명한다.

 

필자는 이 자료를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제공받아 분석할 수 있었다. 그런데 피숑의 연구노트를 읽는데 가장 큰 장애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노트가 피숑이 남긴 원형대로 전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73) 1972년 오기선은 고서점 통문관에서 피숑이 사용하던 달레의 Histoire de l’Eglise de Coree가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단다. 그런데 그가 예루살렘 여행을 다녀와서 책을 사려고 미루어두었다가 귀국 후 다시 찾아가 보니 책이 이미 팔렸다. 그는 책을 구입한 최서면(崔書勉)을 찾아가 사정하여 그 책을 얻었다.74) 한편, 1955년 성신대학에 입학했던 한 성직자는 입학 당시 그 책을 도서관에서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1972년 교수가 되어 성신대학의 후신인 가톨릭대학에 부임했을 때는 피숑의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필자가 이용하고 있는 ‘연구노트 2’에 붙어 있는 달레의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책장에는 ‘聖神大學圖書部’ 도장이 찍힌 쪽수가 있다. 아마도 1945년 피숑이 사망하자, 그가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신학교 도서관으로 옮겼나 보다. 피숑이 사망했던 당시는 용산 신학교는 폐교되었고 경성천주공교신학교가 새롭게 문을 열 때였다. 이 천주공교신학교가 1947년 성신대학으로 개칭되었다. 이 과정에서 피숑의 유품이 성신대학으로 들어갔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1955년 이후, 1972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성신대학에서는 도서관 책을 일괄 정리한 듯하다. 이 정리 과정에서 그의 연구노트가 첨부된 책은 파지로 취급되어 고서적상까지 가게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되는 바는 통문관에서 이 책이 거래되던 당시에도 피숑의 연구노트는 아직 제본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오기선이 선종한 후 그가 소장했던 책자들은 한국교회사연구소로 옮겨졌고, 이 과정에서 피숑의 연구노트가 한국교회사연구소 도서관에 소장된 것 같다.

 

본고에서 분석하는 ‘연구노트 2’는 줄이 없고 약간 번쩍거림이 있는 종이로 된 메모지로 뒷면의 글씨가 앞면으로 배어 나오는 얇은 지질의 종이였던 것 같다.75) 즉 현재 제본되어 있는 연구노트에 끼여진 메모지와는 차이가 나는 종이였다고 한다. 그 메모지의 사이즈는 달레의 교회사 책 페이지와 같은 크기였다. 그런데 메모지는 간혹 위, 아래도 글자가 잘린 경우가 있는데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리고 연구노트의 페이지가 달레의 교회사 쪽수보다 훨씬 많은데, 이는 달레의 교회사 한쪽에 여러 장의 메모지가 붙어있던 경우도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피숑의 연구노트가 달레의 교회사에서 분리됨으로써, 원문과 관련하여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받은 본(이하 스캔본이라 한다)과 타자로 정리된 부분의 페이지 수가 달랐다. 스캔본은 144쪽인데 타자본은 140쪽이었다. 이는 달레의 책 면이 붙어 있는 페이지는 판독이 필요가 없으므로 판독 과정에서 쪽수로 잡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또는 연구노트 두 면을 한 쪽으로 계산한 데서 나온 차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스캔본이나 타자본의 페이지는 순서도 다를 뿐 아니라, 두 본이 모두 다 올바르게 쪽수가 표기되었는지 의심스럽다. 예를 들면, 달레의 교회사 속표지 1쪽은 연구노트 27면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달레의 교회사 2쪽은 노트 126면에 있고, 이후 3쪽부터 12쪽까지를 차례로 연결하면 연구노트 96, 97, 85, 86, 90, 91, 101, 102, 107, 108면의 순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 연구노트가 달레 교회사의 순서대로는 제본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피숑의 ‘연구노트 2’로 명명된 타자본은 총 140장이다. 그런데 이 내용은 교회사를 서술하기 위한 기본 지식 정리와 달레의 교회사 쪽수가 그대로 붙어 있는 메모지와 빈 메모지, 연구 주제를 기록한 메모지 등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76) 피숑의 ‘연구노트 2’의 중심 주제로 교회사의 흐름대로 요약하면 <표 2>와 같다.

 

이 연구노트는 그 내용을 그룹화할 수 있다. 연구노트의 분량은 <표 2>에서 보듯이, 도표 26번의 내용이 없는 6장과 달레의 책을 그대로 붙여 놓은 번호 22번에 해당하는 22장을 제외하고 나면 112장이 남는데, 여기서는 20여 개의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한편, 교회사를 작성하기 위한 기본 지식 정리에 해당하는 내용은 <표 2>에서 12번 드뇌(Deneux) 신부의 편지, 16번 용어 정리, 17번 답사 기록 및 자료 보완, 19번 다블뤼와 달레의 순교자 기록 비교 및 20번의 주요 순교자 가계표, 21번의 조선의 왕 계보, 23번의 교회사 연표 정리, 25번의 교회사 기록 등이 이에 해당한다.77)

 

‘연구노트 2’에서 빈 페이지 부분과 교회사 기본 지식 분량을 제외하면 연구노트는 89장이 남는다. 기본 주제를 다루는 이 89장의 연구노트는 교회사 전사 부분과 초기 교회 주요 순교자 연구로 나누어 검토할 수 있다. 첫째는 1784년 교회 성립 이전에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되었거나 조선인이 천주교와 접촉했을 가능성에 대해 검토한 내용이었다(위의 도표 1, 2, 3, 4, 5, 24번). 이 부분은 연구노트 총 89장 중 58장으로 반이 넘는 분량이다. 따라서 연구노트의 기록은 조선 교회 성립 이전의 전사를 엮기 위해 작성해 놓은 논문카드 같은 느낌을 받는다. 두 번째로 위의 도표 6, 7, 8, 9, 10, 11, 13, 14, 15, 18번은 천주교회 초기 주요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이다.

 

피숑은 조선 교회 성립 이전에 조선이 서양 가톨릭 문화와 접촉했을 가능성을 다양하게 추적했다.78) 피숑은 임진왜란 때 세스페데스 신부의 입국과 세스페데스가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일본군들이 3년이나 주둔한 사실과79) 여러 선교사가 기울였던 조선 입국 노력을 소개했다. 그리고 그는 달레의 책 1쪽부터 12쪽까지에 줄을 쳐가면서 메모를 남겼다. 이 메모는 주로 일본음 읽기, 일본 내 조선인 신자 순교, 그리고 시복이 된 이들의 순교 일자에 시복 날짜를 보충해 넣은 것이었다.80) 피숑은 특히 오타 줄리아의 유배지 생활 4년을 40년으로 수정해 놓았다.81) 이어 한문 교리서의 유입과 사신들의 중국에서의 가톨릭 문물 접촉 등을 주목했다.82) 피숑은 1784년 이승훈의 세례 이전에 북경의 예수회 신부들이 조선 신자들과 접촉한 사실,83) 이벽이 읽은 한역서학서들 중에 예수회 선교사 알레니(Aleni)의 저술이 포함되어 있는 사실 등을 살폈다.84) 그리고 그는 이승훈이 예수회 그라몽(de Grammont)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음을 밝혔다.85) 그는 다블뤼가 인용한 정약용에 대한 서술을 주목했고,86) 강학(講學, 교리연구회)이 개최되기 근 200년 전에 조선에 예수회에서 간행한 한문서학서가 알려져 있었음을 중시했다.

 

조선 교회사 전사에 대한 관심은 피숑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다블뤼 주교도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집필할 때, 임진왜란 당시의 가톨릭과의 접촉을 언급하고 파리 외방전교회 도서관에서 이를 찾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부탁을 받은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할 때 이를 충분히 반영했다.87) 그러나 피숑은 달레가 놓친 부분을 보완하고자 했다.

 

피숑이 조선 교회 전사를 연구함은 조선 천주교회 성립 연대를 올리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선인들이 가톨릭과 접할 기회는 많아도 국내에 천주교 조직이 성립된 적은 없었다고 단언했다.88) 피숑도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89)에서처럼, 1777년에 이루어졌던 ‘연구회’를 중요시하고 있다. 그는 모방 신부의 서신을 약술함으로써 이벽의 자발적인 신앙을 더 강조했다.90)

 

그렇다면 그가 교회사 전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숑은 스스로, 다산이 이벽이 활동하기 200년 전에 이미 가톨릭 서적이 전래되었음을 강조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고 하였다. “다산 선생이 조선 가톨릭 역사를 기록할 때 그 기원을 할 수 있는 대로 멀리 찾아올라간 이유는 그 후 1791년과 1801년에 처형당한 자들의 책임을 어느 정도 풀어주기 위함이오. 당시 박해 역시 무슨 정치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91)고 했다. 이는 피숑 자신의 작업 이유일 수도 있다. 그는 박해가 정치적인 이유에서만 나오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조선이 이전에도 천주교와 접촉했을 가능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하느님이 조선에도 충분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고자 함이었다고 해석했다. 그는 중국과 일본에는 일찍 천주교가 들어갔는데 그 가운데 위치한 조선 사람만 ‘모르쇠’로 일관한 것이 아님을 알리려고 했다.92) 그는 이를 밝히기 위해 동양에서 활동한 선교사들, 특히 중국과 일본에 들어갔던 선교사들의 자료를 폭넓게 검토했다. 이 검토 작업은 그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경험했던 국제 관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때문에 시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조선 교회사를 바라볼 때 언제나 세계 교회사의 거대한 틀 속에서 바라보았다.

 

한편, 피숑은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보완을 시도하고 메모를 남겼다. 피숑은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 놓고도 미처 자신의 기고 논문에 인용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피숑은 1930년 이재의의 후손 도미니카와 이승훈의 묘를 찾았다. 그가 찾은 인천의 마주동 새골에는 13대를 내려오는 평창 이씨 가문의 선산이 있었다. 그러나 이승훈의 묘는 산 반대편 한 귀퉁이에 있었다. 이재의의 묘도 그쪽에 있었다. 그들의 묘는 조상과 다른 쪽에 있고, 비석도 없었다. 피숑은 이를 그들이 하늘과 부모를 거슬러 죽었기 때문이며,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지킨 흔적으로 보았다. 그는 이승훈의 가계도를93) 작성하는 등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 피숑은 이승훈 가계도를 작성한 후 동료 선교사인 드뇌 신부에게 보내 검토를 부탁했다. 이에 대해 드뇌 신부가 이승훈의 가계에 대해서는 피숑의 주장이 옳다고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94)

 

피숑은 정약종의 묘도 찾았다. 정약종의 묘도 정씨 선산이나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들 정철상의 묘는 정약종의 묘 근처에도 마을 근처에도 없었는데,95) 그는 묘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형태가 그들이 순교자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피숑은 1933년 10월 13일에 서울교구의 신부들과 함께 정약종의 묘를 순례했다.96) 피숑은 그 밖에도 정약용이 배교하고 곡산 부사로 있을 때 바위에 남긴 시, 아버지 이름을 잊었다고 대답하여 관리들이 어이없어했다는 최창주, 이도기의 <정산일기> 등도 노트에 기록해 두었다. 이와 같이 피숑은 교회사 연구의 자료들을 발굴하고 정리하는 데도 적잖이 공을 드러냈다.

 

요컨대, 피숑의 연구노트를 보면 그는 교회사에 얽힌 인물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피숑은 조선 교회사 전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하느님의 관심과 사랑이 조선에도 늘 미치고 있었음을 보이고 싶어 했다. 그는 또 광범한 자료 연구를 통해서 순교자들의 공로를 기억하고 드러내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 당연한 결과로 그는 다양한 자료들을 준비했고, 현장 조사로 이를 보완해 나갔다. 이러한 내용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는 그의 연구노트를 복원하여 종합적이고 세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6. 피숑의 연구 업적과 그 영향

 

피숑은 이상에서와 같이 조선 교회사에 관한 광범한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피숑은 당대까지 개별적 연구 없이 개설적인 저술로 시작된 조선 교회사를 개별적 주제로 다루어지도록 길을 연 사람이다. 그러나 주(注)가 없이 진행된 그의 글은 아직 더 정치하게 분석되어야 한다. 다만, 여기서는 그의 연구 태도와 그의 연구 중 후학들에게 미친 영향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피숑은 교회사 연구에서 첫 출발들을 중요시 여겼다. 그래서 조선 교회 전사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피숑은 <조선교회의 前史>로 연재글을 열었다. 그리고 1934년 이를 “La prehistoire de l’Eglise de Coree”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의 Revue de l’Historire des Missions에 발표했다. 이 글은 일본의 센다이 교구장 우라카와 와사부로[浦川和三郞] 주교의 《朝鮮殉敎史》에 거의 그 전문이 번역 · 수록될 정도로 당시 학계에 영향을 미쳤다. 우라카와 주교는 자신의 저서가 거의 출판에 들어간 단계였는데, 이 글을 읽게 되어 인쇄를 멈추고 글을 다시 썼다고 했다.97)

 

피숑은 역사 흐름에서 조선과 서양이 만났을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찾으려 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언급했듯이 그는 박해 시대 신자들의 고통에 동참하고자 했다. 그는 또 하느님의 섭리가 조선만 외면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피숑이 중요시했던 조선과 서양의 만남에 관한 주제는 역사학의 발전 과정에서 조선의 국제적 관계를 주목하면서 조선과 서양의 만남이나 충돌이라는 입장으로 다양하게 보완되어 나갔다. 최석우나98) 조광,99) 이진명100) 등도 피숑이 가지고 있던 이 논의를 더욱 발전시켜 나간 연구자들이다. 그리고 국제 관계에 대한 피숑의 관심은 이제 한국 교회사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도 세계 교회사의 움직임을 함께 고려하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다시 강조되고 있다.

 

피숑이 수행한 연구 주제 가운데 하나로는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평가를 들 수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편지 한 통에 감동하여 수없는 고생을 감내하면서 성직자 없는 조선 땅에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닦아 놓았다. 브뤼기에르는 조선 교회가 일본처럼 300년간을 침묵의 교회로 남아 있지 않도록 하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교구의 선교사들이 만주 지역 및 일본이나 류큐 지역까지도 관할토록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피숑의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넓은 호응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연구가 새삼스럽게 일어나게 된 계기를 피숑이 만들어 주었다.101)

 

피숑은 김대건 신부를 브뤼기에르 주교가 놓은 길을 연결시켜준 다리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업적으로 늘 선교사들이 조선을 위해 대비하고 있도록 마련했음을 들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이끄는 통로를 개척한 사람은 김대건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김대건 등의 노력으로 페레올 주교 이래로 조선 교회는 늘 세계 교회와 연결되어 있었다. 병인박해 이후 잠시 국내에 선교사가 없던 때에도 칼레 신부 등 조선 선교사들이 해외에서 노력하고 있었고, 선교사들이 계속적으로 입국하여 사목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피숑은 조선 신자들이 본받을 모델로 김대건을 선정했다. 피숑이 조선 교회사에서 여러 교구장 주교 등을 비롯하여 뛰어난 인물이 많았는데도 김대건을 모델로 선택한 것은 탁견이라 하겠다. 그는 김대건에 대해 연구했고, 특히 김대건의 한글편지는 피숑에 의해 빛을 보게 되었다.102)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순교자 김대건 신부에 대한 현양 활동은 피숑이 그 불을 지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김대건 현양은 유영근,103) 김구정 등을 비롯한 순교사화 발간부터 어린이용 만화 출판은 물론 중 · 고등부 연극 등 많은 행사로 이어졌다.104) 피숑은 1945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기해서 순교기념탑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한창일 때 선종했다.

 

그리고 피숑은 파리 외방전교회의 성직자 양성에 대한 노력과 신학교 설립 · 운영에 대해 천착했다. 신학교 교육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연구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1855-2005》, 이원순의 《소신학교사》, 대구대교구의 《유스티노신학교 1911-1945》 등으로 이어나갔다.

 

또한 피숑은 정약종을 비롯한 초기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본격적 연구를 진행시켜 갔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연구에서 그들의 배교에 대한 관대한 입장을 드러냈다. 피숑은 정약용이 교회 성립기에 크게 활약했으므로 그 공이 크다고 인정했다. 정약용은 천주교 신앙 때문에 유배 갔으며 유배에서 풀려난 뒤로는 절제와 보속의 삶을 살았고 종부성사를 받고 죽었음을 주목했다.105) 이와 맥을 같이 하여 피숑은 이벽과 이승훈의 공로도 높이 샀다. 피숑은 그들의 배교를 배교로 보지 않고 있다. 그가 소개한 모방 신부가 남긴 편지는 배교자를 대하는 당시 신자들의 태도를 보여준다. 모방은 이승훈과 이벽의 배교 이야기를 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모방은 그들의 배교가 입술 위에서만 그쳤다고 믿었다.106)

 

교우들이 배교하는 이유는 다만 혹형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므로 어떤 수단을 써서든지 한번 나오게 되면 다시 교회계명을 준수하여 차차 군난 전보다 수효는 많아진다거나 이 박해가 교회에 깊은 상처를 내었으나 그러나 아주 파괴하지는 못하였나니 배교자들은 거의 전부가 악형을 두려워하여 신앙을 배반하는 말을 내었을 뿐이다. 박해자의 앞에서는 예수의 이름을 배반하나 위험이 없으면 사사로이 예수성명을 부르기를 그치지 않으며 교우들의 통상적 의무를 실행하여 나간다. 그리하여 치명자의 후손들과 교제를 열어 박해로 피폐된 교회를 만회(挽回)하고 교회를 다시 진흥시키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한다.107)

 

위의 편지를 참고하면 박해 시대 당대 배교자들에게 대해 박해 당시의 교회에서는 현재보다 관대했다고 판단된다. 나아가 이승훈의 손자 이재의를 앵베르 주교의 신학생으로 선발하는 일은 자연스러웠다고 이해된다. 즉, 당대인들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요인이 있었다. 박해 시대 사회에서는 교회에 대한 공을 기억하고 ‘입술 배교’는 그리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피숑은 이를 그대로 정약용에게 적용시켰다. 정약용이 초기 교회에 공이 많았다는 사실을 높이 사고, 그가 배교했으나 다시 신앙을 찾았다면서 문제 삼지 않았다. 피숑의 입장은 1930년대 교회와 신자들이 생각했던 일반적 경향일 수 있다.

 

피숑은 순교자들의 후손들과 만났고 순교자들의 묘지를 찾아 나섰다. 일반 묘와 방향이 맞지 않거나 외따로 떨어져 있는 묘 등을 그는 순교자의 표시라고 보았다. 그는 최경한, 정약종 등의 묘를 찾았다. 이러한 연구는 피숑에게서 직접 배운 오기선에게 연결되었다. 그리고 주재용도 이를 이어 나갔다. 주재용은 《조선 가톨릭사의 옹위(擁衛)》(1970)에서 이벽과 이승훈의 순교를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변기영 등에게로 이어졌다.108) 정약용, 이벽, 이승훈에 대하여는 현재도 학계에서 토론이 활발하다.109) 이 과정에서 배교를 바라보던 박해 시대 당대에 남긴 모방 신부의 편지는 고려해 볼 만하다.

 

한편, 피숑의 연구 업적에 대한 검토에 이어서 그의 연구 경향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상당수의 교회사가는 순교자 연구에 중점을 두는 데 비해 피숑은 순교자들의 생애를 특별히 다루지 않았을 뿐 아니라, 특히 시복 대상이 되는 이들도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는 1925년 시복식이 거행된 직후여서 복자들에 대한 현양이 이루어지고 있던 때였다. 또한 그가 한창 저술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순교 정신 현양운동이 조직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1939년에는 기해박해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순교기념탑을 세우자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는 일제의 대륙 침략과 식민 통치가 극성을 떨치고 있었던 때였다. 특히 만주사변 이후 전시 체제가 강화되어 가던 엄중한 상황 속에서 조선 신자들은 순교 정신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당시의 신자들은 순교기념탑 건립 운동을 1938년 말부터 이듬해 일 년 내내 추진해 나가고 있었다. 이 운동에는 당시 16만 교우들 대부분이 참여했다.110) 이때부터 《경향잡지》는 순교 정신 현양 작품을 공모했고 전국적 규모로 순교자 현양위원회를 조직하고자 했다.

 

그러나 피숑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교재로 삼아 신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조선 교회사를 이해하기 위한 종합적인 맥락이 필요했고 또 이를 제시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순교 당시의 상황에 주목했고, 신자들이 살아가던 생활문화적인 면까지도 보완하려고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본격적인 교회사 연구, 근대적인 방법의 역사 연구를 시작했다. 피숑은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를 중심으로 기해박해를 다룰 때도 그들의 순교 사실보다는 그들이 행한 일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모방 신부에게서는 선교사 입국 초기의 모습과 당대 교회상을 설명했고, 앵베르 주교에게서는 성직자 양성을 위한 노력의 중요성과 박해 과정에 대한 기록의 노력을 주목했다. 물론 그의 연구 주제가 브뤼기에르 주교나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 등과 같이 선교사나 성직자 위주인 점은 있다. 그럼에도 그는 이러한 선교사나 성직자의 이름을 빌려 자신이 서술하고자 하는 시기의 명칭으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박해의 이유를 정치사 일변도의 해석에서 탈피하고자 했다.

 

피숑의 ‘연구노트 2’의 내용을 통해서 보면, 피숑이 가능한 언어는 매우 다양했다. 아울러 그는 서로 계통이 다른 자료를 상호 비교해 가면서 다양하게 구사했던 것 같다. 그가 집필한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때로는 세례명을, 때로는 세속명을 쓰는 것도111) 피숑이 활용했던 자료 계통이 달랐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는 조선 국왕인 정조를 정종이라고 지칭했다.112) 이는 정종으로 불리다가 1898년에 정조로 추증되었기 때문에 오늘의 공식 용어가 정조로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조라는 공식 명칭 대신에 정종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적어도 1898년 이전의 자료를 인용했던 결과로 생각된다. 그는 간지로 서력 기원을 바꾸거나 서력 기원 연도를 간지를 환원하는 메모를 남겼다. 이는 그가 관변 측 자료를 비롯한 한문 자료를 활용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가 활용한 조선 관변 측 자료로는 《조선왕조실록》, 《포도청등록》 등과 같은 자료였다. 동시에 그는 시복 자료로 발굴되었던 각종 사료도 보았다. 그는 선교사들의 자료도 넓게 활용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일기 및 서한과 조선 선교사들의 서한 등은 물론 샤를부아(Charlevoix)나 장 바티스트 뒤알드(J.B. du Halde), 파제스(Pages) 신부와 같은 예수회 신부들의 책, Nouvelles lettres edifiantes와 Revue de l’Histoire des Missions 등을 이용했다.113) 그리고 그는 조선적인 언어 표현을 썼다. 피숑은 ‘송세흥’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선교사들을 조선 이름으로 불렀다. 그뿐 아니라 모방 신부가 입국해서 순교할 때까지의 기간을 4년 동안이라고 조선식으로 셈했다. 이는 그의 글을 읽을 때 참고해야 할 표현이다.

 

끝으로 피숑은 1934년 6월에 <조선교회에 대한 마가오의 공헌 - 外國宣敎師 布敎의 眞意>이란 제명의 글을 남겼다. 이 글은 부록으로 갑자기 들어간 글이었지만, 이 글에는 그만큼 독특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피숑은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경리부가 초창기의 조선 교회를 극력 후원했음을 설명했다. 조선 교회 초기 마카오 경리부는 조선으로 나가는 선교사들의 편익을 돕고 조선인 신학생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그는 결국 선교사들은, 특정 정치적 의도가 없이 자기 생명을 온전히 조선에 희생하고 조선을 사랑했음을 밝히고 싶어 했다. 그리고 앵베르 주교의 1838년 12월 1일자 서신 중 “만일 조선왕께서 교를 봉행하신다면 나는 얼마나 감심으로 왕께 아뢰어 불란서의 보호를 청하여 이 정의에 위반되는 연공(年貢)을 폐지시킬고”라는114) 구절과 서양인의 간섭을 싫어한다고 한 베르뇌 주교의 편지를 소개했다.115) 피숑은 새남터 형장에서 주문모, 앵베르 등 선교사, 그리고 김대건이 국적은 다르지만 한 형제로서 한뜻을 가지고 순교했음을 강조했다.116)

 

피숑이 이 글을 발표할 무렵 조선에는 공산주의 운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일고 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적 역사 이론에 입각하여 선교사들을 제국주의 앞잡이라고 하는 비난이 성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천주교회는 제국주의 침략과는 거리가 있지만 때때로 선교사들은 그러한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피숑이 집필했던 글들도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항변의 의미가 있었다. 즉 피숑의 논문들은 일제 강점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장과 전혀 무관할 수는 없는 글이었다. 동시에 우리는 피숑의 자료나 연구에 미친 일본의 영향도 살펴가며 읽어야 한다. 예를 들면 그는 왕의 계보를 정리하면서 고종, 순종을 태왕, 이왕이라고 했다.117)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조선 교회사의 진행 속에 이어져 내려오는 희망을 보이고 싶어 했다. 피숑은 신유박해를 설명하면서도 박해의 결과만을 간략히 언급한 뒤, 1802년부터 1830년까지 조선 교회 안팎의 정세에 대해 요약했고, 박해를 극복한 교회사를 제시하고자 했다. 그는 기해박해에서도 박해의 진행 과정에 대해서는 비교적 약한 관심을 드러낸 반면, 교회 재건을 위한 노력을 주목했다. 즉, 그는 국외에서 페레올 주교가 조선 입국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며, 해외로 나간 조선 신학생들은 마카오와 마닐라에서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 힘을 기르고 있었음을 강조했다. 피숑은 가톨릭을 박멸했다고 자처한 조선 정부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싹들이 자라고 있었음을 밝히고자 했다.118) 피숑은 조선 교회사를 타국 가톨릭사와 비교하면서, 조선을 위해 신속하게 배려된 천주의 안배에 감탄했다. 이와 같이 피숑은 교회사를 다각적 측면으로 보면서 그 긴 기간을 이어오는 희망을 교회사에서 찾아 서술하고자 했다.

 

 

7. 결론

 

본고는 피숑에 대한 기존의 선행 연구에서 그의 생애와 연구 업적을 소개하면서 놓친 부분을 보완했고, 특히 그가 새로 개발한 주제와 그 연구 의도를 집중적으로 살폈다. 그리고 그가 특히 당대 교회사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행동하며 신자들과 소통하며 교회사를 연구한 점을 주목했다.

 

실제로, 조선 교회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마치 교본과 같은 책이 있다. 다블뤼 주교가 박해 시대 그 고난의 세월을 감내하며 교회사를 정리해서 프랑스로 보냈고 이를 기초로 달레 신부가 완성한 Histoire de l’Eglise de Coree이다. 이 책은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책에 사용된 원사료들을 밝히고 책에서 잘못 서술된 부분을 수정했다. 이 책은 1980년 초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되었다. 이 번역본이 현재까지는 가장 널리 쓰이는 판본이다. 최근에는 교회사 연구가 그동안 많이 진전되었으므로 재번역 필요성이 제기되었다.119)

 

그런데 달레의 책이 발간된 지 50여 년 후 같은 선교회의 후배 선교사가 이 책을 교재로 삼아 조선 선교지에서 장차 사제가 될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피숑은 신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신학생들에게 종합적이며 체계적 설명이 필요함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교회사의 현장을 답사하고, 순교자 후손도 만났다. 그는 정부 측 자료와 각 선교회의 문서들을 조사하며 조선 교회사를 보완했다. 피숑은 달레가 조선 교회사를 완성한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인 주석 작업을 시작한 사람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그는 꼼꼼한 메모로 가득한 그의 ‘연구노트’를 남겼다.

 

피숑은 조선에서 시복식 준비 관련 사료 작업과 전반적인 교회사 정리 작업을 할 때 조선에 도착했다. 그때 교구청에서 시복 작업을 도우면서 선교를 시작했다. 이때는 한문 사료 등 조선 측 자료가 개발되어 있었다. 이때 시복식 준비로 고조된 분위기와 새로 발굴 정리된 사료들이 피숑의 연구에 크게 활용되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자료를 보완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고 또 자신이 직접 답사나 구술 작업을 통해 자료들을 보완했다.

 

피숑이 한창 교회사 연구를 진행하던 때에는 조선 교회 내에서도 중요한 행사들이 거행되었다. 즉, 조선 교회는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100주년, 모방 신부 입국 100주년, 김대건 등 신학생 유학 시작 100주년, 정약용 서거 100주년, 기해박해 100주년 등을 지냈다. 특히 기해박해 100주년을 맞아 순교현양비를 세우기로 하고, 이 사업에는 성직자를 비롯하여 전 신자들이 교구를 넘어 협조했다. 이는 일제의 방해로 말미암아 다시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준비하기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피숑은 이러한 일에 직접 관여하고 선도하였다.

 

그는 《가톨릭靑年》에 교회의 특별 행사에 어울리는 특집호를 제작하도록 했고, 자신이 직접 교회사적 글을 게재했다. 그는 신학생 선발 100주년을 기념하여 김대건 신부 서한집 Pro Corea-Documenta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기해박해 100주년 순교현양비를 세우려고 할 때 발간되었다. 피숑은 선배 선교사의 뒤를 이어 교회사를 완성해가는 동시에 당시 교회의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연구하며 행동하는 선교사였다.

 

또 피숑은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처음부터 조선인 성직자 양성에 주력했던 활동을 드러냈다. 실제로 그들의 사목 방법은 신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는 직접 선교였기 때문에 당시 선교사들은 훨씬 더 고달팠고 또 매우 많은 숫자가 필요했다.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김대건은 그들 사목의 열매였다. 피숑은 조선 교회가 김대건 신부에 주목하고 그의 순교 정신 현양운동을 하는데 불을 붙여 놓았다.

 

피숑은 교회의 역사를 종합적인 견지에서 서술했다. 즉 그는 교회사의 서술에 있어서 정치적 영향 일변도의 설명을 거부하고 문화사적 입장까지도 고려하고자 했다. 그의 연구 이후 교회사는 순교자에 대한 단순한 서술에 그치지 않고, 교회의 일을 다루는 방향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는 60년도 더 전에 이미 세계사적 시각에서 조선 교회를 설명해 보고자 했다.

 

피숑은 교회사를 연구하는 동료가 없던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연구했고, 그 연구 기간도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그쳤다. 그래서 그의 연구는 거의 교회사 초기에 머무르고 있다. 그가 인용한 자료에는 각주 처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직접 확인하고 수집한 교회사 자료들이 활용되지 못한 것들도 있다. 이는 그가 처하고 있던 시대적 한계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며, 그가 남긴 글들은 교회사에 관한 주요한 연구 업적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피숑은 1930년대 조선 교회가 가지고 있는 열정, 지적 수준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진정으로 고민한 선교사 연구자였다. 피숑이 인용했던 자료와 수집한 자료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피숑이 다룬 각 주제 하나 하나는 보다 천착하여 각각 편을 달리하여 논문으로 발표하겠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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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숑의 ‘연구노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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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브레(E. Devred) 주교의 Le Catholicisme en Coree, son origine et ses progres(《조선 가톨릭시즘, 그 기원과 발전》), 1924, Honkong. 그리고 A. Launay의 Martyrs Francais et Coreen(《조선 순교복자 79위전》), 1925, Paris도 발표되었다.

 

2) 오기선, <은사 송세흥(송世興) 네오 삐숑 신부>, 《새벽》 74호, 1982. 5, 11 및 14쪽과 《새벽》 75호, 1982. 6, 11쪽, 서울대교구 사목국.

 

3) 오기선, <은사 송세흥(송世興) 네오 삐숑 신부> 참조.

4) 조광, <《Pro Corea-Documenta 朝鮮聖敎史料》>, 《교회와 역사》 84호, 1982.

5) 김영진, <피숑(L.Pichon, 宋世興) 조선 천주교회사료의 수집가(Collecta)>, 《교회와 역사》 183호, 1990, 8~10쪽.

6) 최석우, <피숑>, 《한국가톨릭대사전》 12, 2006, 9172~9174쪽.

 

7) 조한건, <서양선교사의 조선교회사 연구 - 피숑(宋世興, Pichon) 신부를 중심으로>, 《발로 쓰는 조선교회사》, 2011, 293~328쪽. 조한건은 피숑의 역사 연구를 ‘선교사관’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향후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다 하더라도 본고의 집필 과정에서 필자는 피숑에 관한 조한건의 정치한 작업에 힘입어 연구의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었음을 밝힌다.

 

8) 이 연구노트에 관해서는 본고 5장에서 다룰 예정이다. 아울러 본고에서는 일반 인용 자료는 쪽수로, 연구노트는 일반 자료와 구분하기 위해 ‘면’으로 표시함을 밝혀둔다. 아울러 자료를 제공해주신 한국교회사연구소와 서봉세(Gilbert Poncet) 신부께 감사드린다.

 

9) 조한건, 앞의 논문, 302쪽 및 본고 각주 97) 참조.

10) 각 주제에 대한 철저한 분석은 원고를 달리하여 차례로 펴나가고자 한다.

11) 오기선, 조광, 김영진, 최석우, 조한건의 앞의 글 참조.

 

12) 1923년 공세리 본당의 주임인 드비즈(E.P. Devise, 成一論) 신부가 휴양갔던 몇 개월 동안은 대신 사목했다. 오기선은 보좌 신부로 발령받았다고 보았다.

 

13) 김정숙, <1925년 조선교회 세계에 인사하다>, 《빛》 2013년 9월호 참조. 한편, 한국 교회에서는 1981년과 2004년 피숑 신부가 수집한 사진들을 가지고 전시회를 했었다. 이때 나온 작품의 상당 부분이 시복식 기념 사진전에 전시되었던 사진과 겹친다. 이로써 피숑이 후일의 연구자들을 위해 자료 정리를 열심히 했음을 알 수 있다.

 

14) 최석우, <피숑>, 《한국가톨릭대사전》 ; 조한건, 앞의 논문, 298쪽.

15) <이천 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9, 2002, 7063~7064쪽. 

16) 《뮈텔 주교 일기》 해당 날짜 ;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1855-2005》, 2007, 150쪽.

17) 조한건, 앞의 논문, 298쪽 ; 《뮈텔 주교 일기》 1927년 1월 4일, 7월 12일, 8월 22일.

18) 오기선, 앞의 글, 11쪽 ; 조한건은 오 신부의 증언 중 1926년을 1927년으로 수정했다. 앞의 논문, 299쪽.

 

19) 복사기의 기원은 1839년 프랑스의 다게르(J.M. Daguerre)가 은판 사진술을 발명한 것에서 시작된다. 몇 단계를 거쳐서 1930년대 말에는 정전식(靜電式) 복사 기술이 개발되었다. 앞서 언급된 선행 연구논문에서는 피숑이 자료를 복사했다고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복사라는 단어는 필사로 수정하는 편이 오해를 줄일 수 있다.

 

20) 조한건은 1933년 5월에 귀국했다고 하나, 《드망즈 주교 일기》에 의하면 그는 6월에 돌아왔다. 본고 각주 21) 참조.

21) 《드망즈 주교 일기》 1931년 2월 18일자와 1933년 6월 15일, 17일자.

 

22) <덕정리 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2, 1995, 1701쪽. Arechives Missions Etrangere de Paris, Repertoire des membres de la 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 1659-2004에도 피숑이 1930년부터 덕정리 본당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3) 《드망즈 주교 일기》 1931년 2월 4일.

24)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1855-2005》, 2007, 683~684쪽.

25) 《서울교구 연보 1904-1938(II)》, 명동천주교회, 279쪽.

 

26) 대구대교구, 《은총과 사랑의 자취》, 2013, 865~866쪽 ; 《가톨릭靑年》의 발행 및 편집인은 라리보 주교, 편집 실무는 정지용, 주간은 윤형중 신부였다. 신인식 신부, 한기근 신부도 《가톨릭靑年》에서 일했다(이원순, 《소신학교사》, 2007, 103쪽 참조). 《가톨릭靑年》은 광복 후 1947년 복간되었다가 6 · 25 전쟁으로 잠시 휴간되었다. 이후 다시 속간되었으나 1972년 11월 무기 휴간되었다.

 

27) 최석우, <피숑>, 《한국가톨릭대사전》 ; 조한건, 앞의 논문, 298쪽.

28) 최석우, <피숑>, 《한국가톨릭대사전》 ; 조한건, 앞의 논문, 298쪽.

29) 피숑은 《가톨릭靑年》 특집에 편집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편집후기>, 《가톨릭靑年》 16호, 1934. 9 참조.

30) 《경향잡지》 1933년 3월호, 1934년 8월호, 1934년 10월호, 1939년 3월호 등.

 

31) 평신도는 물론 성직자들도 순교현양비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에 동참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현양기념비로는 해방 이후 김대건 순교비를 세우게 되었다. 대구대교구, 앞의 책, 206쪽.

 

32) 이하 Pro Corea-Documenta라고 칭한다.

 

33) ‘朝鮮聖敎史料 예약구독 안내문’ 참조. 이 문서는 당시 동성상고 교사로 있었던 윤을수 신부와 연명으로 발표한 것인데,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쓰여 있다. 조한건, 앞의 논문, 323~324쪽에 전재되어 있다.

 

34) 조한건은 1927년 5월 30일에 있었던 김성우 안토니오 묘소 발굴 작업에 피숑이 동참했는지에 의문을 제시했다. 앞의 논문, 299쪽.

35) 피숑의 ‘연구노트 2’ 41면.

36) 피숑의 ‘연구노트 2’ 11면.

 

37) 《외방전교회 회원총람》(No. 3224) ; 피숑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갈곡리에서 열병 환자에게 종부성사를 준 후 열병에 전염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천주교 의정부2동교회, 《의정부본당 50년사》, 1996, 48쪽). 조한건은 증언 내용 중 “비오”를 레오로 수정했다(조한건, 앞의 논문, 300쪽).

 

38) 김영진의 앞의 글과 조한건의 앞의 논문(304쪽) 등에서 ‘Collecta Pichon’으로 불렀다.

 

39) 조한건은 피숑이 대략 9월을 기점으로 일관성 있는 주제를 기획하려 했다고 보았으나, 피숑이 한 해 동안 다룬 주제들이 일관적이지는 않다.

 

40) 김영진은 11편의 논문, 조한건은 20편의 논문으로 소개했다. 김영진은 같은 제목하의 글을 전부 한편으로 묶었다. 한편 조한건, 앞의 논문, 315~317쪽에 피숑의 논문이 표로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에는 모방 신부의 서한을 다룬 글이 빠졌다. 또 조한건은 글을 편별로 묶어 도표화했는데 본고에서는 논의를 위해 글을 주제별로 묶었다. 조한건은 참고서나 인용 사료를 제시했으나 본 <표 1>에서는 글의 내용과 피숑이 개진한 새로운 주장을 정리해 넣었다.

 

41) 위의 주제 ⑧ ‘고 주교, 이 신부 및 장 주교 관리 시대’는 1840년대 이후부터 1860년대 초반까지의 교회사를 간략하게 서술한 글이므로 따로 정리하지 않는다.

 

42) 피숑, <朝鮮가톨닉史의 片影(三) - 1801년 (辛酉) 大迫害>, 《가톨릭靑年》 1933년 11월호.

43) 피숑, <朝鮮가톨닉史片影(六)>, 《가톨릭靑年》 1934년 3월호.

44) 피숑, <朝鮮가톨닉史의 片影(三) - 1801년 (辛酉) 大迫害>, 《가톨릭靑年》 1933년 11월호.

 

45) 피숑은 1933년에 <朝鮮第一代主敎 1831-1835>를 발표했다. 그리고 1935년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100주년을 맞아 소 주교 특집을 펴내자 <朝鮮가톨릭 敎會의 恩人 蘇主敎>를 발표했다.

 

46) 피숑, ‘소 주교 특집’, 《가톨릭靑年》 1935년 9월호, 16쪽.

47) 달레가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할 때, 브뤼기에르의 출회 건은 이미 알려진 일이었다. 그런데도 달레는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48) 여항덕(余恒德)으로도 불린다. 전수홍, <조선인들의 서신과 여항덕 신부>, 《신앙과 삶》 3, 1999, 118~144쪽.

49) 피숑, <朝鮮가톨닉史片影(五)>, 《가톨릭靑年》 1934년 2월호.

50) 피숑, <정다산의 신앙여부>, 《가톨릭靑年》 1935년 11월호, 330쪽.

 

51) 정약용은 1936년 4월이 서거 100주년이었다. 역사학계에서는 2년 전부터 여유당전서 발간을 준비하는 등 정약용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행사 때문에 피숑이 정약종을 주목한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는 이미 조선 교회사 前史를 쓸 때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주목했다. 대우학술총서, 《丁茶山硏究의 現況》 참조.

 

52) 박해 전보다 더욱 열심히 모든 신공범적을 행하며…항상 방안에 들어앉아 방문객도 많이 받지 않았다. 자주 대재를 지키고 다른 보속을 많이 행하며 항상 극히 괴로운 쇠사슬을 허리띠로 띠고 풀러 놓는 때가 없었다. 자주 긴 묵상을 계속하여 깨달은 바를 기록하여 외교를 반박하는 글과 신문교우들을 훈련하는 책을 저술했다(피숑, <정다산의 신앙여부>, 《가톨릭靑年》, 334쪽).

 

53) 전수홍, 앞의 논문, 각주 44) 참조.

54) 피숑, <丁茶山의 信仰與否>, 《가톨릭靑年》 1935년 11월호, 334쪽.

55) 피숑, <丁茶山과 朝鮮가톨릭草創期>, 《가톨릭靑年》 1936년 4월호, 20쪽.

56) 피숑, <丁茶山의 信仰與否>, 《가톨릭靑年》 1935년 11월호, 334쪽.

 

57) 이 책은 Pro Corea를 제목으로 내놓고 Documenta는 그 아랫줄에 작은 글씨로 쓰여 있다. 다음 줄에 또 朝鮮聖敎史料를 작게 썼다. 따라서 이 책은 Pro Corea로 도서관에 등재될 수 있다. 책 내용은 조한건이 앞의 논문에 정리 · 소개했다. 본고에서는 그 책의 구성과 형태, 프랑스어본과의 대조 작업 등을 수행했다.

 

58) 이 외에도 의주의 성문과 수구문, 페레올 주교,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샬, 기해박해 순교자들, 시복식 사진 등 30여 점의 사진이 실려 있다.

 

59) 최승룡 신부가 피숑의 판독 오류를 지적했다(조한건, 앞의 논문, 301쪽). 피숑의 판독 오류도 있지만 또 인쇄상 오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겠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서한 16통을 소개했는데 현재 21통이 알려져 있다.

 

60) 조한건, 앞의 논문, 300쪽 각주 30).

61) 조한건이 프랑스어본을 Pour la Coree라고 했다. 앞의 각주 참조.

62) pour aider a l’union missionaire du clerge en pays chretiens et a l’union du clerge missionnaire en pays infideles.

63) 피숑, <福者안드레아 金大建의 略歷>, 《가톨릭靑年》 1934년 7월호, 501쪽.

64) 朝鮮聖敎史料 예약 구독 안내문.

65) 이원순, 《소신학교사》, 2007 ;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1855-2005》, 2007.

66) 이원순, 위의 논문, 523쪽.

 

67) 《가톨릭靑年》에 발표한 피숑의 <이신부와 장주교 시대>, <나신부의 입선경로(2)>, <범주교 관리시대> 등 여러 곳에 설명되고 있다. 오늘날 그의 연구 내용은 학계에 반영되고 있다. 이원순, 위의 책 ;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1855-2005》 ; 대구관구 대신학원, 《성유스티노신학교 1914-1945》, 2013 ; 김정숙, <풋풋한 성소 : 대구대교구의 소신학교 운영>, 《빛》, 2014. 6.

 

68) 1839년 맹렬한 박해로 인하여 비참하게 무너진 조선 가톨릭교회를 다시 재흥시키는 천주의 안배는 우리 김 신부로 말미암아 실현되기 때문이다(피숑, <福者안드레아 金大建의 略歷>, 501쪽).

 

69) 피숑, 위의 논문, 501쪽.

70) 오기선, 앞의 글, 74호, 11쪽 ; 조한건, 앞의 논문, 297쪽 각주 15).

71) 필자는 연구노트 1권과 4권을 논문 발표 이후에야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는 원고를 달리하여 다시 분석하고자 한다.

72) 조한건, 앞의 논문, 297쪽 각주 15) 참조.

 

73) 본고는 스캔한 필사본과 서봉세 신부의 판독문을 대조하고, 서술은 서봉세 신부의 판독문을 중심으로 진행했다. 조한건은 판독문이 총 65쪽이라고 소개했는데, 이는 타자본 페이지 숫자이고, 그 판독문 안에 노트 원본의 페이지가 제시되어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이 페이지를 제시했다. 스캔본과 판독문 페이지도 서로 다르다. 필자는 원고를 달리하여, 연구노트의 스캔본과 판독문 페이지를 맞추고, 연구노트에서 참고한 책들을 찾아 보완 · 번역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조한건, 앞의 논문, 301쪽 참조.

 

74) 오기선, 앞의 글, 74호, 11쪽.   

75) 조한건, 앞의 논문, 301쪽 각주 31).

76) ‘연구노트’에서 한 페이지에 여러 개의 주제를 다루는 경우에는 대표되는 주제로 표시했다.

77) 답사를 통한 보완 기록 부분은 교회사 기본 사료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로 보았다.

78) 피숑, <朝鮮가톨닉史의 片影(一)>, 《가톨릭靑年》 1933년 9월호, 14쪽.

79)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Vol. 1, 1874, 5쪽에 본문 줄마다 번호를 달아 놓았다.

80) 위의 주 페이지 5쪽에는  등의 메모가 있다. 6쪽에는 다섯 명의 순교자 중 Ines를 지웠다.

81) 위의 책, 9쪽 ; 연구노트 101면 : ‘Son exil et ses souffrances durerent quatre ans(40 ans)’.

82) ‘연구노트 2’ 92면.

83) 피숑, <敎區設定前의 조선 가톨닉 情勢>, 《가톨릭靑年》 1933년 10월호, 14쪽.

84) 피숑, 위의 논문, 15~16쪽.

85) Nouvelles lettres edifiantes의 내용을 번역해 놓았다.

 

86) 피숑의 글에는 주가 없다. 그러나 그는 본문에서 다블뤼 주교가 밝힌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언급하고 있다. 《조선 순교사 비망기》(Notes Pour l’historie des Martyrs de Coree) 5쪽과 비교. 피숑이 1936년 무렵 다블뤼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보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조현범이 지적한 대로 현재 학계에 알려진 내용, 즉 최석우 신부가 이 문서를 찾았다는 학계의 인식은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원고를 달리하여 세부 주제 분석 논문에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87) 김정숙, <대구순교자들에 관한 사료분석 - 프랑스어 사료를 중심으로>, 《대구순교사연구》, 2001, 33쪽 각주 16).

88) 피숑의 ‘연구노트 2’ 5번.

89) 안응렬 · 최석우 역주,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1979, 300~301쪽.

90) 오늘날 조선 교회의 기원에 대해 이승훈 세례(1784)와 강학회(1777 혹은 1779)라는 두 가지 설은 피숑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91) <丁茶山의 信仰與否>, 《가톨릭靑年》 1935년 11월호, 331쪽 ; 한편 피숑은 소현세자와 아담 샬 신부의 교류가 천주교 전래로 열매 맺었다면 조선 교회가 순교를 겪지 않아도 되었으리라며 안타까워했다.

 

92) 서봉세 신부와 토론하면서 얻은 의견인데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93) 피숑의 ‘연구노트 2’ 33면. 이택규, 이구규, 이신규, 이재의 등의 가계도를 그리고 다블뤼 문서 17이라 적었다.

94) 피숑의 ‘연구노트 2’ 12면. 

95) 피숑의 ‘연구노트 2’ 41면.

96) 피숑의 ‘연구노트 2’ 36면.

 

97) 조광, 앞의 소개글, 《교회와 역사》 84호 ; 浦川三和郞, <머리말>, 《조선순교사》, 全國書房, 1944, 5~6쪽(《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2, 1977, 29~50쪽에 번역되어 있다).

 

98) Andreas Choi, 1961, “L’Erection du preimier Vicariat Apostolique et les origines du Catholicisme en Coree 1592-1837” ; 최석우, <조선교구 설정의 교회사적 의미>, 《교회사연구》 4, 1983.

 

99) 원재연, <조선시대 학자들의 서양인식>, 《대구사학》 73, 2003.

100) 이진명, 《독도, 지리상의 재발견》, 삼인출판사, 1998 ; - -, 《서양자료로 본 독도》(P.A.F.), 1998.

 

101) 조현범, <여행기를 통해 본 동서양의 교류와 소통 -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록에 나타난 샴과 중국>, 《동국사학》 49, 2010, 139~176쪽 ; 김수태, <프랑스 선교사의 조선 입국로 모색 방안>, 《교회사연구》 41, 2013, 73~113쪽 ; 오근,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임명으로 인한 다양한 상황들>, 가톨릭대학교 석사 논문, 2013 ; 개포동 성당,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와 서한집》, 2005 ; 정양모 · 윤종국 역,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007 등 다양한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102) 피숑은 1885년 실행한 순교자 조사 문적에서 이를 발견했다.

103) 유영근, 《수선탁덕 김대건》, 1942 ; 이원순, <유영근 신부>, 《교회와 역사》 437호, 2011.

104) 김정숙, <성가를 부른 사람들>, 《빛》 2012년 7월호 참조.

105) 다블뤼의 <비망기>에 대한 기록을 평가할 것.

106) 본고 6장 참조 ; <나신부의 서간수편>, 《가톨릭靑年》 1936년 1월호, 120~121쪽.

107) <라신부 편지2>, 《가톨릭靑年》, 121쪽.

108) 변기영, 《간추린 천주교회 창립사》, 2007.

109) 이들은 현재 ‘하느님의 종’에 올랐다.

110) 대구교구 조선인 신부들이 공동으로 순교탑 건립에 헌금을 했다. 《경향잡지》 33, 901쪽.

111) 피숑의 ‘연구노트 2’ 20면.

112) 피숑의 ‘연구노트 2’ 20면. “Roi Tjyeng tjong dit alors en soupirant.”

113) 피숑이 1942년에 덕원 수도원 인쇄부에서 《반도가톨릭의 순교자전》을 냈다는데 이는 보지 못했다.

114) 피숑, <조선교회에 대한 마가오의 공헌 - 外國宣敎師 布敎의 眞意>, 《가톨릭靑年》 1934년 6월호, 410쪽.

 

115) 나는 우리 조선에 서양인이 간섭함은 싫어한다. 나는 불란서 군함도 싫고 불란서 군인도 싫고 불란서 외교관도 싫다. 비록 그들에 의하지 않고는 종교 자유를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감심으로 이 가다굼바 안에 남아 있겠노라(베르뇌 주교의 1863년 2월 19일자 서한).

 

116) 피숑, <朝鮮가톨닉史片影(七)>, 《가톨릭靑年》 1934년 2월호.

117) 피숑의 ‘연구노트 2’ 108면.

 

118) 비록 마가오 주교, 부주교, 신학교 교수, 조선인 신학생들까지 쇄국주의에 감금된 조선교회의 참담한 경상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러나 비참하게 돈좌된 조선교회의 장래에 대한 계획은 이 마가오에서 진행되었고 치명상을 당한 조선 가톨릭시즘의 갱생과 부흥의 길은 이 마가오로부터 벌어졌으니 실로 이것은 가톨릭을 박멸했다고 자처한 조선정부에서 꿈에도 생각지 못한 바이었다(피숑, <朝鮮가톨닉史片影(七)>, 《가톨릭靑年》 1934년 4월호).

 

119) 조광, 《교회와 역사》 2013년 8월호, 2~3쪽.

 

[교회사 연구 제43집, 2014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정숙(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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