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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그는 과연 천주교 신자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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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5-10 ㅣ No.145

허균, 그는 과연 천주교 신자였는가


천주교 서적 유입 등 증거 제기…교회사연구소 교양강좌 열기도

 

 

학계는 현재까지 조선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을 ‘이승훈’이라고 전한다. 이승훈은 1784년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 권일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설에는 논란도 뒤따른다.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김성태 신부)는 최근 2010년도 절두산 성지 상반기 교양강좌에서 ‘허균과 홍유한 - 그들은 과연 천주교 신자들이었을까?’라는 주제로 강의를 가졌다.

 

가톨릭신문은 이 강의를 토대로 한국 천주교 역사의 흐름 안에서 ‘허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되짚어본다. 허균, 그는 과연 천주교 신자였을까.

 

 

허균과 천주교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 허균은 이 소설을 통해 모두가 평등한 이상 사회를 제시했다.

 

 

‘홍길동전’의 작가로도 유명한 허균은 어릴 때부터 시문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신동이었다. 선조 18년(1585)에는 17세의 나이로 초시에 급제했고, 21세(1589)에는 생원시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1617년 좌참찬에 이른다.

 

허균과 천주교의 인연은 관직을 통해 시작된다.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의 신분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그는 당시 중국 문명을 경험했으며 1만5000냥가량의 은을 가지고 가서, 4000권에 달하는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을 구입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이장우 연구실장은 “당시 그가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는 이미 마태오 리치 신부가 선교의 목적으로 편술한 ‘천주실의’ 등이 널리 유포돼 있었다”며 “베이징에선 최초의 천주교회 성당인 남당도 건립됐다”고 말했다.

 

허균이 구입한 서적들 가운데는 ‘한역 서학지도’ ‘게십이장’(천주교 기도서로 간주된다)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균과 천주교 서적이 처음 만남을 이룬 것은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을 보면 알 수 있다.

 

유몽인은 “그들의 가르침(천주교)이 이미 동남쪽 여러 오랑캐들에게 행해져 자못 높아져 믿고 있었다. 우리나라만 믿지 못했는데, 허균이 중국에 가서 그들의 지도와 ‘게십이장’을 얻어 가지고 귀국했다”고 기록했다.

 

강릉시 초당동에 위치한 허균 생가의 현재 모습. 허균은 어릴 때부터 시문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 17세의 나이에 초시에 급제한 신동이었다.

 

 

허균의 손위 동서였던 이수광(1563~1628)도 “그의 제자가 된 자들이 하늘의 학설을 외쳤는데, 실은 서쪽 땅의 학이었다. 그들과는 하늘과 땅을 같이할 수 없고 사람과 견주어 같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허균의 영향으로 천주교를 믿는 무리가 생겼고, 천주학을 신봉하는 자는 배격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 안정복(1712~1791) 또한 “허균은 총명하고 문장에 능했으나 행실이 전혀 없었다. 당시 그의 제자로 문장에 제주깨나 있다고 하는 경박한 자들이 천학에 대한 설을 처음으로 주장했다”고 말했다.

 

박지원 또한 ‘연암집’에서 “게십이장이 있는데, 허균이 사신으로 중국에 가서 그 게를 얻어 가지고 왔다. 그러므로 사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아마도 허균으로부터 시작되었으리라. 현재 사학을 배우는 무리들은 허균의 남은 무리들이다. 그 언론과 습관이 한 꿰미에 꿴 듯이 전해 내려왔으니, 그들이 그릇되고 간사한 학설을 유달리 좋아하고 지나치게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고 전했다.

 

 

허균에 대한 이해

 

- (사)허균 · 허난설헌 선양사업회에서 운영 중인 강릉시 강문동에 위치한 ‘홍길동전 박물관’. 이곳에서는 홍길동전 옛판본과 허균·허난설헌 연구서 등을 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허균’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일까.

 

류홍렬(1911~1955) 박사는 “허균이 명나라로부터 ‘게십이장’을 들여온 것이 기록으로 확실하니, 허균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앙인임이 확실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정작 허균 자신이 남긴 기록에는 ‘게십이장’을 중국에서 구입했다는 언급이 없다. 또 ‘게’(偈)는 부처의 공덕을 찬미하는 불교의 시사를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

 

현재 학계는 허균이 중국을 왕래하며 한역 서학서를 구해 보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이러한 사실로 허균이 천주교 신자였다고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장우 연구실장은 “그렇다고 해서 허균이 최초의 천주교 신자였다거나 그의 천주교 신앙을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그저 허균이 혼자 천주교 관련 서적을 보고 개인적 차원에서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다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허균을 천주교 신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허균은 당시 형식화된 성리학에 도전해 불교, 도교, 무속을 믿고 천주교 서적까지 섭렵했다”며 “당대의 보기 드문 자유인으로서 게십이장이 기도문이었다면 그것을 일상적으로 믿고 신봉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허균이 천주교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게십이장’의 정확한 내용파악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느냐에 대한 연구가 계속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많은 논란을 남긴 채 허균은 1618년 역모를 꾀했다는 모함을 받아 생을 마감했다.

 

[가톨릭신문, 2010년 5월 9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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