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가톨릭 영성 산책48: 신비적 관상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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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17 ㅣ No.790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48) 신비적 관상 기도 


성령의 이끄심이 또렷하게 느껴지세요?

 

 

1980년대 한국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애독서이자 필독서로 여겨진 「이름 없는 순례자」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19세기 후반 「어느 러시아인의 순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이 책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러시아 지역의 주인공이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실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여러 수도자를 방문하면서 기도를 배우는 내용입니다. 결국 주인공은 어떤 노(老) 수도자에게 ‘예수 기도’라고 불리는 기도 방법을 배웁니다. 즉, 숨을 쉬는 동안에도 들숨과 날숨의 리듬에 맞춰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문을 외운다면 취침 시간까지 포함해 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도 방법의 배경에는 동방 교회에서 고요하게 기도하는 전통인 ‘헤시카즘’(hesychasm)이 놓여 있습니다. 중세 말엽 동방 교회 신학자들은 고대와 중세에 동방 교회에서 덕망 있고 유명한 수도자들이 언급했던 영성 생활과 기도 생활에 대한 가르침을 집대성해 동방 고유의 신비신학을 정립했습니다. 동방 신비신학자들은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님 이름을 암송하며 바치는 고요한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합일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기도는 관상 기도의 한 형태입니다. 이렇게 단순함을 극대화 시켜서 바치는 기도는 동방 교회뿐 아니라 서방 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근세 이후 서방 교회는 기도 동작과 기도에 임하는 마음 자세를 최대한 단순화한 ‘마음의 기도’라 불리는 또 다른 형태의 관상 기도를 실천했습니다. 관상 기도는 신비 생활을 완성하는 데 꼭 필요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단순한 마음의 기도를 통해 신비적 관상 기도를 바치려 노력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도 마음의 기도나 예수 기도와 같은 단순한 기도를 실천하려는 신자들이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다만 이러한 기도가 신비적 관상 기도가 되려면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성 중심의 머리가 아닌 감성 중심의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는 기도는 자칫 잘못하면 감정에 마음을 빼앗겨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달콤한 위로에만 머물러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데레사는 저서 「영혼의 성」에서 신비적 관상 기도의 단계까지 도달하는 기도 단계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데레사에 따르면 정감적 기도와 단순한 기도는 아직까지 능동적인 수덕 생활 단계에 속하는 기도이고, 제5단계인 주부적 관상부터 시작해 정적인 기도 및 일치의 기도 등이 본격적으로 수동적인 신비 생활의 단계에 속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동적인 신비 생활의 단계에 속하는 기도로 넘어가야만 비로소 신비적 관상 기도를 바치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비 기도가 강조하는 수동성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수동적인 신비 기도를 바치는 그리스도인은 첫 순간부터 성령의 이끄심으로 자신의 의지가 하느님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느낍니다. 이후 자신 안에서 일어난 상황을 지성으로 대응하면서 최종적으로 신비 상태에 참여한 것을 감성을 통해 느끼게 됩니다. 이때 기도의 수동성은 하느님께서 모든 상황을 주도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지 인간의 정신 작용을 방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의식을 잃어버려서 기도 중에 무슨 체험을 했는지 기도 후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수동성의 체험은 하느님께서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무상으로 모든 것을 거저 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순간이 됩니다.

 

그러므로 수동적 단계로 넘어간 관상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정서적으로도 전혀 새로운 느낌이고 이성적으로도 전혀 새로운 인식인 하느님과 상호 인격적인 현존의 체험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은총과 성령의 활동에 이끌려 자신 안에 확실한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평화신문, 2016년 4월 17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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