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세상을 떠난 후에도 기억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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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0-06 ㅣ No.833

[허영엽 신부의 ‘나눔’] 세상을 떠난 후에도 기억되는 사람들

 

 

염수정 추기경은 지난 8월25일, 故김홍섭 판사(바오로)의 부인 김자선(엘리사벳, 96세) 여사의 선종 소식에 애도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유흥식 추기경 서임식과 추기경 회의에 참석차 로마에 체류 중에 선종 소식을 들으신 염 추기경님은 몹시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나는 염 추기경님을 통해 김 엘리사벳 자매님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리고 염 추기경님이 교도소에서 미사를 하실 때 자매님을 직접 뵌 적도 있었습니다.

 

염 추기경님은 애도 메시지에서 “엘리사벳 자매님은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늘 기도하고 고뇌하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고 회개와 재생을 권면하여, 많은 죄인들을 하느님의 품으로 인도했다”고 말하셨고 “사형수들의 어머니로 봉사하면서 평생을 지내신 자매님이 이제 모든 짐을 내려놓으시고, 김홍섭 바오로 형제님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늘 행복하시기를 기도한다”고 전했습니다.

 

故김자선 여사는 남편인 故김홍섭 판사 선종 이후 1970년대 초부터 천주교 교정 사목 발전에 기초를 놓고 이후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서울대교구 교도소 후원회(지금의 사회교정사목위원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1970~1977년 교도소 후원회 부회장, 1978~1980년 교도소 후원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1975년부터 서울구치소에서 말씀의 전례 봉사자로 활동하며 매주 사형수를 방문하는 등 수용자 선교에 헌신적으로 노력해왔습니다.

 

그분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78년 발행된 김정훈 베드로 부제의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라는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1977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유학 중에 떠난 산행에서 불의의 사고로 하늘나라로 떠난 김 부제의 유고집입니다. 사제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먼저 간 친구의 자취를 보존하려고 동창 신부들이 엮은 것입니다.

 

짧지만 아름다웠던 삶의 단편을 엿보며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 고민하곤 했는데, 그 김 부제의 어머니가 김자선 엘리사벳 자매님이었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평생을 마음속 깊은 상처로 삼키며 사셨을 어머니의 절절한 심정은 상상만으로도 힘이 듭니다. 김자선 여사, 그리고 김정훈 부제를 생각하면 항상 남편이며 아버지인 김홍섭 바오로 형제님이 떠오릅니다.

 

 

천주교 교정 사목 발전에 기초를 놓은 故김자선 여사

 

지난 2015년 3월16일 서울법원종합청사 1층 대회의실에서 서울고등법원 주최로 한 법관을 기리는 특별한 추모행사가 열렸습니다. 후배 판사들이 1년여 동안 추모행사를 준비한 주인공은 사도법관 김홍섭(1915~1965) 판사였습니다. 지금도 후배들에게 사도법관이라 칭송받는 그분은 충실한 그리스도인인 동시에 훌륭한 법조인으로 생활했습니다. 김홍섭 판사는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과 인도인 마하트마 간디의 영향을 받아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링컨과 간디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존재를 존중했으며 법에 대한 사색을 그치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후배 판사들은 김홍섭 판사의 50주기를 기리며 입을 모아 고인의 삶과 자세를 주목해야 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변호사, 검사에 이어 서울고등법원장까지 지낸 김 판사는 김병로 선생, 최대교 선생과 함께 한국의 3대 법조인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1962년 10월12일 광주고등법원 대법정에서 경주호 납북미수 사건의 공소심 판결 공판에서 재판장 김홍섭이 판결문을 통해 3명의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후 한 말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었습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이렇게 판결을 내리고 있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기에는 누가 죄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제가 능력이 모자라 여러분에게 사형을 선고하니 그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선종한 지 50여 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에도 훌륭한 법조인으로 존경받는 이유는 법관으로서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가슴 깊이 지니고 있었고 스스로 그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김 판사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법관의 사회적 위치가 아주 높은 때였지만 그는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법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양복 하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대법원 판사가 되어서도 고무신을 신고 물감 들인 군복을 입은 채 대법원에 출근했고, 관용차가 있었지만 언제나 걸어서 출근했습니다. 점심을 사먹지 않고 매일 집에서 싼 도시락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의 남루한 옷차림 때문에 경찰관으로부터 불심검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청렴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덟이나 되는 자식들의 공부를 시키고, 죄수들을 돌보고 책을 사는데 월급을 거의 써버리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형수들의 대부 사도법관 故김홍섭 판사

 

자신이 사형선고를 내린 죄수를 찾아가 신앙의 길로 인도하여 대부가 되기도 했습니다. 피고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한 인간으로 존중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했기에 중형을 받은 죄수가 판결을 듣고서 깊이 감동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다른 사형수들에게 책을 넣어 주며 그들의 남은 삶을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길까지도 의지할 곳 없는 사형수들을 위해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에 있는 천주교회 묘지에 안장되도록 해주었습니다. 그 역시 자신이 생전에 돌본 사형수들과 함께하기 위해 그곳에 묻혀있습니다.

 

‘사람이 과연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가? 재판은 어떤 근거로 할 수 있는가?’ 김홍섭 판사는 삶의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최선을 다해 공정한 재판을 이끌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판사로서 남을 재판하기 위해서는 삶과 세상에 대한 보다 넓고 깊은 통찰력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평생 구도의 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보다 늘 인간이었습니다. 인간보다 우선하는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 김홍섭 판사는 그야말로 죄를 미워하지만 죄인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정치 권력에 대해서도 용기 있게 자기소신을 당당히 지켰습니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김홍섭의 확신은 자신의 신앙을 통해서 더욱 분명히 터득되어 갔습니다. 즉, 김홍섭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았음에 틀림없지만, 인간이 영성적 존재임을 주목하게 되었던 까닭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고 이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확신을 가능하게 해준 자신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가 주장했던 인간존엄성은 특정 종교의 가르침을 떠난 보편적 가치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많은 흐른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김홍섭 판사를 그리워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10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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