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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48: 성녀 소화 데레사의 생애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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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30 ㅣ No.797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48) 성녀 소화 데레사의 생애 ⑧


아버지의 고통 속에서 ‘예수님의 성면’을 보다

 

 

- 예수님의 성면(聖面)에 대한 신심은 소화 데레사의 영성에 영향을 미쳤다. 사진은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 중 한 장면.

 

 

공정한 왕으로서의 아버지

 

소화 데레사는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자비로운 모습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것과는 대조되는 공정한 모습 또는 정의로운 모습도 보았습니다. 언급한 바와 같이, 마르탱씨는 시계 기술자였으므로 상당히 섬세하고 정확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딸들을 사랑하는 모습에서도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성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아낌없이 사랑했지만 언제나 왕다운 공정함을 잃지 않았다고 회상하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은 무엇보다 데레사가 버릇없이 자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소화 데레사 역시 어려서부터 그런 아버지의 공정함, 엄격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실수나 잘못을 하게 되면, 먼저 아버지에게 잘못을 털어놓고 이내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처분을 기다리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화 데레사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죄의 고백과 더불어 이미 용서를 받게 되리라는 것을. 

 

예컨대, 해마다 연말이면 소화 데레사의 집 한쪽 정원에서는 친구들과 더불어 소화 데레사가 참여하는 작은 연극이 있었고, 연극 공연 후에는 언제나 아버지가 시상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소화 데레사의 기억에 그때의 아버지는 받을 만큼의 상급만을 주며 공정하게 시상해 주는 품격 있는 왕이었습니다. 이렇듯 성장 과정에서 소화의 마음 안에는 공정하면서도 선한 심판관으로서의 아버지의 모습이 새겨져 갔습니다.

 

 

착하고 충실한 종으로서의 아버지

 

소화 데레사의 아버지는 가장으로서나 남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더욱이 그는 금지옥엽처럼 기른 자신의 딸을 모두 주님의 뜻에 따라 기쁘고 너그러이 교회에 봉헌한 착하고 충실한 종이었습니다.

 

마르탱씨에게는 가르멜로 들어간 네 명의 딸 이외에도 방문회에 들어간 레오니아라는 셋째 딸이 있었습니다.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레오니아는 소위 그 집안의 ‘문제아’였습니다. 성격이 거친 데다 부모님이 통제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암으로 투병하다 일찍 죽은 성녀의 어머니는 죽어가는 병상에서 셋째 딸을 가장 걱정했다고 합니다. 

 

훗날 이 딸 역시 수도 성소를 받아 글라라 수녀원에 입회했지만, 다른 자매들에 비해 수도공동체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마르탱씨는 그 누구보다 이 딸의 성소를 위해 많은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레오니아는 건강상의 이유로 6개월 만에 퇴회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수녀원을 나와야 했던 딸을 맞이해야 했던 마르탱씨는 깊은 신앙심을 갖고 기쁜 얼굴로 그 딸을 데리러 갔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레오니아가 다른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지해 주었습니다.

 

 

고통받는 종으로서의 아버지

 

생의 말년에 마르탱씨는 여러 가지 병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를 사랑했던 딸들, 특히 소화 데레사에게 큰 아픔이었습니다. 1887년 성지순례팀과 함께 로마 여행을 하기 반년 전 이미 그는 동맥경화로 인한 뇌출혈 때문에 잠시 반신불수의 몸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바로 회복됐지만, 1888년 4월 소화 데레사가 리지외 가르멜에 입회한 지 두 달 후, 그는 정신 착란으로 인해 나흘 동안 아무 소식도 없이 집을 나갔습니다. 

 

좀 더 심각한 증상은 그로부터 넉 달 후인 11월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영적 지도 사제인 피숑 신부의 출국을 배웅하기 위해 아브르에 갔던 마르탱씨는 심각한 언어 장애와 정신 장애를 겪고 말았습니다. 이때 그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으며, 증언에 따르면, 그는 본능적으로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합니다. 

 

당시 함께 했던 가족들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놀랐고, 아직 입회하지 않았던 넷째 딸인 셀리나는 리지외 가르멜에 있던 자매들에게 이 슬픈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리아 수녀, 폴리나 수녀 그리고 소화 데레사는 많은 걱정 가운데 슬픔에 젖었습니다. 그리고는 오래전 어린 시절에 소화 데레사가 환영 중에 보았던, 아버지와 비슷한 체격의 두건을 쓴 신비로운 인물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아듣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 교회에는 ‘고통받는 예수님의 얼굴’에 대한 신심이 저변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수녀원에 입회한 지 얼마 안 된 소화 데레사는 둘째 언니인 폴리나 수녀로부터 그런 예수님의 성면(聖面)에 대한 신심을 들었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당시 소화 데레사에게 고통받는 아버지의 모습, 특히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의 모습이 딸들에게 아픔을 주지 않을까 걱정하며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소화 데레사는 십자가를 지고 가던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린 성녀 베로니카의 수건을 보았습니다. 

 

소화 데레사는 입회한 지 9개월 후인 1889년 1월 10일 수도회의 영성을 배우는 수련기를 시작하며 수도복을 받고 정식 수도명을 정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수도명인 ‘데레사’ 앞에 ‘아기 예수’와 더불어 ‘성면’이란 현의(玄義)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현의는 한 수도자가 일생동안 살아갈 대의(大義)가 담긴 이름을 의미합니다. 

 

소화 데레사는 아버지의 고통 속에서 이사 53장에 나오는 고통받는 종이신 예수님의 숨은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소화 데레사는 아버지의 고통과 굴욕을 보면서 고통받는 종이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아버지가 겪었던 병에 구원적인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이 계기를 통해 고통받는 예수님을 자신 안에 깊이 받아들이며 성성에 진일보하게 됩니다.

 

[평화신문, 2016년 5월 1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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