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영성심리: 아플 때만 찾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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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5-01 ㅣ No.1937

[영성심리] 아플 때만 찾는 하느님

 

 

영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첫 번째 모습으로,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기’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우리가 많이 듣고 쓰는 표현인데요. ‘현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이 현존이 ‘물리적’ 현존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건물에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면 모르는 사람과 같이 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 물리적으로 함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의 삶에 ‘현존’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나와는 상관없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침에 출근할 때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다고 하면 어떨까요? 출근해 있어도 온종일 ‘몸은 어떤가?’ ‘병원엔 다녀왔나?’ ‘약은 챙겨 먹었나?’ 하고 걱정하겠죠.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그 사람의 하루 안에 그 가족 구성원은 분명히 현존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리적으로 성당에서, 성체 앞에 앉아있을 때만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의 구체적인 순간들 안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있죠.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긴 한데, 쉽지 않죠? 자꾸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평소 별 탈이 없을 때는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내다가, 어려움이나 힘든 일이 닥치면 하느님을 찾곤 합니다. 그리곤 생각하죠. ‘내가 또 하느님을 잊고 지냈구나! 아쉬울 때만 하느님을 찾는구나!’ 왠지 모르게 죄책감이 듭니다. 이래도 되는 걸까요?

 

본당에서 초등부 저학년 신앙학교 때 물놀이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한참을 재밌게 뛰어다니다가, 제 근처로 오면 두 팔을 벌려 제게 안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넘어진 아이가 있어서 얼른 가서 일으켜 세우려고 하면, 아이는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울면서 자기 엄마 아빠를 찾아 뛰어가는 겁니다. 저야 순간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아이 부모의 입장에서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요 녀석 봐라? 신나게 놀 때는 우릴 찾지도 않더니, 넘어져서 아프고 서러우니까 그제야 찾아오네?’ 하고 괘씸하게 생각하는 부모가 있을까요?

 

아이가 엄마 아빠를 기억하든 못 하든, 달려가 찾든 찾지 않든, 부모는 늘 아이와 함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만 부모를 찾더라도 부모는 그 자녀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지내더라도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만 하느님을 찾더라도,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마다하지 않고 반겨주십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것, 내가 어떤 모습이든 간에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영성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2023년 4월 30일(가해)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서울주보 6면, 민범식 안토니오 신부(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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