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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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바르나바의 편지: 구약성서 계시의 올바른 의미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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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46

[교부들의 가르침] 바르나바의 편지


구약성서 계시의 올바른 의미 제시

 

 

’바르나바의 편지’는 130~132년에 이교인 출신의 저자가 교의적이고 도덕적이며 실천적인 내용을 주로 다룬 논문이다. 이 편지는 그 유명한 시나이 사본에 포함되어 신약성서(요한 묵시록) 바로 다음에 수록되어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바울로 사도의 선교 동반자인 바르나바가 쓴 편지로, 오리게네스는 영감을 받은 작품이자 가톨릭 서간이라고 인용한다. 따라서 이 순회서간은 4세기까지 고대의 많은 지역에서 경전으로 인정받아 교회의 전례에서 낭독되었다. 그러나 에우세비우스는 이 편지를 비경전 작품으로, 히에로니무스는 외경으로 여겼다. ’바르나바의 편지’는 전통적으로 사도교부 문헌으로 분류되며 외경으로도 평가된다.

 

저자의 저술 목적은 독자들에게 ’믿음과 더불어 완전한 인식’을 얻게 하려는 데 있다. 또한 독자들에게 구약성서에 나타난 계시의 올바른 가치와 의미를 제시한다. 이를 위해 그는 성서의 문자적 해석방식을 거부하고 그 대신 영적 해석을 통해 ’완전한 인식’에 이르는 길을 설명한다.

 

’바르나바의 편지’의 신학적 의미는 처음으로 구약성서 전체를 예형론적, 도덕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적 생활방식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한다. 저자는 성서가 시대를 초월한 의미를 지닌다고 인식하였다. 성서의 낱말은 그 안에 다른 것을 담고 있어서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서의 다른 부분에서 참된 뜻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고대의 세속적 해석방법인 ’호메로스는 호메로스에게서’, 곧 ’저자 자신이 해석가’라는 원칙과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필로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 제1부에서는, 유다인이 해석하는 구약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악한 천사의 속임수에 넘어가 야기된 그릇된 견해라고 반박하면서, 주님의 영이 예언한 구약성서를 영적, 곧 우의적, 예형론적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구약의 역사에 관한 상이한 사건과 예식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예형으로 보았다. 곧, 무엇보다도 육화, 그리스도의 수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그 증거로 내세웠다. 모세가 눈의 아들에게 예수(여호수아)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을 그리스도 육화의 예형으로, 아말렉을 쳐 이긴 여호수아의 승리를 악마와 원수에 대한 하느님 아들의 승리의 예형으로 여겼다. 또 이사악을 희생제물로 바친 것과 모세가 뱀의 재앙 때 구리뱀을 기둥에 단 것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형으로 해석하였다. 마찬가지로 리브가의 태에서 나온 두 민족은 유다인과 그리스도교인으로 해석하였으며, 야곱이 에사오보다 탁월함과 에브라임이 므나쎄보다 탁월함은 늙은 유다인보다 탁월한 젊은 그리스도인의 예형으로 이해하였다.

 

그 밖에도 후대의 주석가들 사이에서 계속 나타나는 숫자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베푼 종 318명이 그것이다. 숫자 318에서 300(τ)은 십자가를, 10(ι)과 8(η)은 예수의 첫 두 철자를 나타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318명의 종들에게 할례를 베푼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통한 구원의 신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모세의 음식 규정도 도덕적, 우의적 의미로 해석하였다. 이 규정은 인간에게 부정한 짐승들의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어떤 교제를 피해야 하는가를 암시한다. 돼지는 부유할 때 주님을 잊었다가 곤궁할 때에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으로, 독수리는 스스로 양식을 얻지 않고 불법으로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빼앗는 사람으로, 물고기는 불경스러운 이단자로, 토끼는 어린이 능욕자로, 하이에나는 매년 수컷과 암컷으로 성을 바꾸기 때문에 부도덕한 처신을 하는 사람으로 이해하였다(고대 교회 시대에 사용된 성서는 히브리어 성서가 아니다). 이러한 도덕적?우의적 이해는 굽이 갈라진 동물들의 해석에서도 나타나는데, 저자는 유다인과 달리 이 동물들을 경건한 사람들과 교제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되새기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유다인의 문자적 해석을 철저히 거부하는 우의적 해석은 다음과 같은 요소에서도 나타난다. 할례는 우리 영혼이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할례이지 겉으로 드러난 육체의 할례를 뜻하지 않으며, 안식일은 여섯 번째 날이 아니라 두 번째 창조의 완전한 실재인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여덟째 날, 곧 주님의 날이다. 또한 참다운 성전은 인간이 세운 건물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통하여 주님의 이름에 희망을 품고 주님 안에서 새로운 인간이 된 사람들의 영적인 건물로 해석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새 율법이 하느님을 위한 참다운 희생제물 역시 죄를 뉘우치는 마음임을 강조하며, 올바른 단식은 육체적인 금식이기보다는 이웃 사랑과 선행이 따르는 것임을 증명한다.

 

한편 유다인에 대해 매우 극단적인 표현도 나타난다. 편지에 따르면 하느님과 유다 민족 사이에는 결코 계약이 없었으며 성서에 관한 그들의 문자적 이해는 근본적으로 그릇된 견해이다. 그리하여 독자들에게 구약이 유다인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속한다는 신념을 경고한다. 유다인은 우상숭배로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내려오면서 계약판을 부수었을 때 이미 하느님과의 계약이 깨졌기 때문에, 구약은 결코 그들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세상의 시대는 세상이 창조된 날의 기간에 해당하는 6000년 동안 지속된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과 같기 때문이다. 그 뒤 주님의 아들이 와 악마의 시대를 끝내고 사악한 이들을 심판하며, 해와 달과 별을 변화시킬 때 천년왕국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기간은 주님께서 칠일 째 쉬신 날에 해당한다.

 

제2부에서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다룬 ’디다케’의 첫 부분과 내용이 비슷한 빛과 어두움의 길에 대해 서술한다. 빛의 길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길이며, 어두움의 길은 온갖 악습과 죄악의 길이다. 이와 더불어 저자는 낙태로 태아를 죽여서는 안 되며 남에게 베푸는 데 주저하지 말고 과부들과 고아들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 주라는 등, 수많은 윤리적 권고로 작품을 맺는다.

 

[가톨릭신문, 2002년 12월 22일, 하성수 박사(한님성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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