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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 소명: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그리스도교적 인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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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476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 소명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그리스도교적 인간학

 

 

이 주제를 통해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과 세계의 구원이라는 대전제 아래 인간에 관한 새로운 조명이다. 이 주제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메시지이며, 동시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과 사도직 활동에 있어서 주요 기초가 되기도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끊임없이 강조된 인간과 세계의 구원을 위한 가르침은 교황 바오로 6세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승해 가는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간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 소명에 관한 가르침은 그의 재위 기간을 통해 주어지는 여타의 가르침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핵심적인 사상이며, 그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각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모든 인간을 구원에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 구원의 보편성 안에서 모든 구체적 개인은 구원자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결정적이고도 고유한 가치를 실현시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고 안에는 항상 각각의 구체적 인간을 위해 {인간의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가 반드시 요청된다는 것이 중심사상으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요청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구체적 인간과의 만남은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다가옴으로써 실현되며, 따라서 인간 역시 그가 처해 있는 어떠한 상황, 어떠한 장소에서라도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구체적으로 실현시켜야 한다는 요청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우리는 다음의 3가지 방향에서 우리의 주제를 다루려고 한다. 우선 인간의 가장 완전한 모델로서의 구원자 그리스도의 이상적인 모습을 살펴 볼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창조를 통해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에게 투영되는 인간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구원자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있어서 요청되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1.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멕시코의 푸에블라에서 있었던 제 3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총회의 개막 연설에서 자신의 가르침에서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르침들은 모두가 하나의 동일한 기원을 지닌다는 것을 밝힌다: "현대 문명의 가장 두드러진 약점 가운데 하나가 필경 부적절한 인간관에 있습니다. 인간에 관한 최대량의 글과 말이 쏟아져나온 시대가 우리 시대임에는 분명합니다. 이 시대는 잡다한 인간주의 시대요 인간 중심주의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역설적이게도 이 시대는 인간들이 자신의 정체와 운명에 가장 깊은 불안을 느끼고 있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는 인간이 이전까지 상상하지도 못했던 수준으로까지 타락하고 인간의 가치가 전례 없이 짓이겨져 버린 시대입니다. 이러한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읍니까? 우리는 이것이야말로 무신론적 인간주의가 낳은 냉혹한 역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존재의 최악의 상태로 위축된 한 편의 비극이 이것입니다. '현대세계의 사목헌장'은 이 문제의 정곡을 찌르며 말하고 있습니다: '혈육을 취하신 말씀의 신비를 떠나서는 인간의 신비가 참되게 밝혀지지 않습니다'(사목헌장 22항)." 

 

교황의 이러한 언급을 통해서 볼 때, 말하자면 인간은 인간에게 당신의 진리, 곧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그리스도의 대리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인간이 그리스도의 대리인이 되는가? 라는 질문이 당연히 제기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곧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인간의 참모습에 대해서 말씀해 주심으로써 뿐만 아니라. 성부의 모습까지도 밝히 드러내 보여 주심으로써 인간에게 당신의 진리를 분명한 방법으로 알려 주시는 분이시며, 또한 말씀은 인간에게 하느님을 계시하시고 이러한 계시의 내면에는 인간 자신에 대한 소중한 진리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신비 속으로 관통해 들어가셨고 인간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신 분이 아니신가? 

 

1.1. 그리스도: 역사의 유일한 주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설명한다: "하느님이 인류의 역사 속에 들어 오셨고 인간으로서 그 역사의 배역이 되신 것이다. 그 배역은 수십억 인간 중의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전혀 유일무이한 배역이었다." 

 

교황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유일성, 곧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존재 양식이며, 수십억의 인간들 중에서 유일한 역사적 주체라는 그리스도 자신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성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수많은 인간들 중에 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서 조명되고,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1.1.1. 예수 그리스도의 우위성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언급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주 안에 들어오게 되었고, 따라서 우주의 중심이 된다는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 중심 사상은 창조 신학에서도 그 핵심을 이루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우위성을 기초로하는 신학적 그리스도 중심사상의 배경 아래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의 구원자}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상에의 접근을 찾아 볼 수 있다.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사도 바울로의 표현들이다. "그분은 '머리'(에페 1,10: 22; 4,25; 골로 1,18)이시며,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며',(1 고린 8,6; 골로 1.17 참조)" 그분을 통해서 "인간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로 예정되었던 것이다."(로마 8,29-30; 에페 1,9 참조) 그 다음으로는 창조와 구원이 하나의 일관된 연결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 연결점으로써 인간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데, 즉 인간은 인간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을 맞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게 자신의 고유함을 완성시켜 나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은 당신을 인류에게 완전히 계시 하셨고 인류와 결정적으로 가까와지셨다. 아울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과 자기가 들어 올려진 그 높은 경지와 자기 인간성의 탁월한 가치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강조되는 모든 것, 즉 창조, 인간의 본래적 상태, 원죄, 그리고 원죄의 결과들이 결코 그리스도론적 주제와 분리된 것은 아니다. 회칙 {인간의 구원자} 전체를 통해서 예수의 우위성에 대한 강한 메아리를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회칙의 7항은 그 어느 부분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을 아주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 (요한 14,6)이시자 부활이요 생명"(요한 11,25)이시며, 또한 "그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고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분은 머리이시며,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이다. 비록 회칙이 구원의 질서 안에서뿐만 아니라 지식의 질서 안에서도 그리스도 중심사상의 최종적인 설명을 주고 있지는 못하지만 회칙은 미리 예정된 목표로서 수십 억의 인간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한 사람, 육화된 말씀에 대한 지식, 곧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예수, 죄 외에는 우리 보통 인간과 꼭 같으신 예수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고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좀 더 분명하게 알도록 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주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외에도 회칙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써 우리 인간은 기쁨에 용약하는 인간 실존과 그 심오한 의미에 대한 무지라는 죽음의 심연으로부터 구원되었다는 점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그리스도를 선물로 보내셨지 우리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선물로 바쳐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1.1.2.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 신앙 

 

나자렛 예수의 실존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며, 인간 구원 역사의 최종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역사는 하느님의 애정 깊은 계획안에서 그 정점"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은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시초부터 갖추어 주고자 뜻하셨던 그 비중(比重)을 인생에 부여하셨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고 당신의 영원한 사랑과 자비에 어울리며 당신의 온전한 자유에 부합한 방법으로 그 비중을 결정적으로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나자렛 예수, 곧 그리스도의 실존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종말론적 사건이다. 바로 이 사건이 우리들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핵심이 되며, 따라서 이 신앙고백은 "인간의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형상과 이름을 취했던" 하나의 실재와의 관계를 통해서 정립된다. 실재로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실재와 관련되어 자기 자신을 성취시켜 나아가는 경이로운 체험인 것이다. 항상 절대적인 규범과 기준으로서의 육화된 말씀과의 관계 안에서 놀라움을 가지고 고유한 그리스도적 품위에 대한 의식을 취하고, 그 품위로써 행동하고, 그 품위를 형성시켜 나아가고, 또한 능동적으로 매 순간에 응답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체험, 소위 말하는 이 세상 안에서의 그리스도교적 체험 그 자체는 "인간과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위치 - 말하자면 그분의 특정한 시민권 - 를 확고히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육화와 구원의 실재 전부를 자기 것으로 삼고 거기에 동화하는 인간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기 자신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면서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깊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수많은 종교들 가운데 오직 그리스도교만이 육화된 말씀이라는 유일한 역사적 실재와 관련을 가지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게 하는 종교인 것이다. 

 

수십 억의 인간들 가운데 한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보편적 인간'이며, 그분은 모든 시대를 통해서 모든 인간에게 교회를 통하여 선포되어야만 했던 분이심에는 틀림이 없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의 언급을 통해서 이러한 교회의 임무에 대해서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자기 자신을 발견하도록 서로 돕고, 현세대의 형제자매들, 나라와 민족들, 국가와 인류, 개발 도상국가들과 풍요한 나라들을 돕는 위대한 사명에 의식을 갖고서 가담하고자 하는 바이다. 간단히 말해서 누구나 '헤아릴 수 없이 풍요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에페 3,8)을 알도록 돕는 사명을 다하고자 하느니, 이 복음은 모든 이를 위해 있는 것이요 모든 사람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1.2. 그리스도, 하느님의 계시 

 

이제 우리는 교회의 그리스도론적 선포를 위한 중요한 시점에 도달해 있다. 곧 교회의 그리스도론적 선포라함은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은폐하고 있는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벗겨내는 일이며, 또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 그리고 세계에 대한 고정된 사고를 뒤집어엎는 일일 것이다. 또한 이는 인간의 총체적 의미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이고도 변할 수 없는 목적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실상 인간의 내적 신비 속으로 관통해 들어 가셨고 인간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셔서 인간의 구원자가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성부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주는 그리스도의 계시로써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이 그 신비에로 높이 불리었음을 밝혀 주시는 분이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와같은 매우 중요한 그리스도께 대한 확신을 인용하고 있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가 취하고 있는 그리스도론적 묵상은 교회가 인간을 향한 개방된 자세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길을 따라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으며, 결국 다음과 같은 매우 탁월한 인식에로 도달하고 있다. 

 

공의회의 언급이든지 혹은 그 해설이든지간에 요한 바오로 2세의 이에 대한 전개는 "인간 그리스도"라는 요한의 그리스도론을 매우 분명하게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요한의 시각을 따르면서, 성부의 영원하신 사랑의 계시에 대해서 더 자세하고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아버지의 부성(父性)은 "태초부터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세상의 온갖 부(富)를 주시며 '하느님의 모습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창세 1,26 참조) 사람을 만드셔서 그를 '천사들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심으로써'(시편 8,6)," 그리고 피조물의 온갖 풍요로움을 인간에게 선사하심으로써 창조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성부의 영원하신 계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곧 하느님의 계시로서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여러 번 사람들과 맺으신 훗날의 계약들을 인간들이 깨뜨림으로써 어느 면에서 인간에게 거부당했던 하느님의 부성과 사랑을 채워드렸고, 또 그분만이 채워드릴 수 있었던" 분이시라는 것이다. 인간을 위해 이러한 부성과 사랑을 지니신 분이 성부시라면, 십자가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신 구원자 그리스도는 그러한 성부의 결정적이고도 마지막이며, 동시에 총괄적인 현현(顯現)이시며, 그 이유는 성부의 사랑과 부성이 그리스도의 인간적 마음 안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 세상 무엇보다도 인간의 최후 운명을 감싸안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미리 정해 놓으신 당신과 인간과의 신적 부자(父子)관계에 이를 가능성을 보게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세상의 구속 - 창조를 새롭게 한 위대한 사랑의 신비(사목헌장 37항, 교회헌장 48항 참조) - 은 그 가장 깊은 뿌리에 들어가 보면 인간 '마음' - '맏아들의 마음' - 안에 이루어진 정의의 충만한 실현이다. 이것은 그 정의가, 영원으로부터 맏아들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로 예정되었고(로마 8,29-30; 에페 1,8 참조) 은총에 불리우고 사랑에 불림 받은 많은 인간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기 위함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이시요 나자렛의 요셉의 아들로 여겨지시던 인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하직하신 갈바리아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영원한 부성의 또 하나의 참신한 발로였으니, 이로써 하느님은 참으로 거룩하신 '진리의 성령'(요한 16,13 참조)을 주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와 다시 가까와지시고 각 사람과 다시 가까와지셨다." 

 

사실상 그리스도교가 2,000년 동안이나 자신의 상징 혹은 깃발로서 추종해온 십자가는 정의의 상징이며, 따라서 인간을 위한 하느님 사랑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은 인간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사랑의 상징이며, 이 사랑은 또한 창조와 옛 계약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과 꼭 같은 사랑이며, 따라서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충실함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는 사랑인 것이다. 

 

1.3. 그리스도, 인간의 계시 

 

구원자 그리스도의 신비는 또한 인간이 처해 있는 조건도 밝혀 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실존의 여러 형태 안에서 인간적 영역도 함께 취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좁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인간적 영역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신비에 관한 인간학적 영역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의 진실된 반성이고, 실존에 관한 참된 철학이며, 게다가 구원의 신비로부터 조명된 인간조건의 반성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사상들을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1.3.1. 인간에게 인간을 드러내 보이시는 그리스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눈에는 신앙의 스승이며 해설자는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당신의 존재를 통해서 인간을 나타내 보이신다.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요한의 시각에 의하면, 하느님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인류의 원형(原形)과 모범이 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말씀, 곧 인간 예수 안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위하여 사랑을 드러내 보이시는 분이시며, 그 자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계시가 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현대를 포함해서 각 시대의 인간을 만나실 때마다 같은 말씀을 하신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이렇듯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하느님은 육화된 말씀이 되면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며, 인간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다시 발견하고, 인간 예수와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새로운 삶을 다시 살기를 촉구하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여기서 사목헌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신다"는 매우 훌륭하고도 아름다운 문장을 해설한다: "육화(肉化)를 통해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시초부터 갖추어 주고자 뜻하셨던 그 비중을 인생에 부여하셨다.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고 당신의 영원한 사랑과 자비에 어울리며 당신의 온전한 자유에 부합한 방법으로 그 비중을 결정적으로 부여하셨다"고 언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육화 신비를 통한 하느님 사랑이 결정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되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비는 인간에게서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되었음을 명확히 하고 있으며, 결국 인간에게 인간을 충만하게 드러내 보이시는 그리스도의 신비는 창조의 신비에서부터 발전되어 나타난 사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곧 세상의 구원이라는 전체적 맥락 안에서 기본적인 진리를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진리란 바로 타락으로부터 인간과 세상을 자유롭게 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이러한 확신은 그가 행한 여러 담화나 권고를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예를 들면, 그의 첫 번째 프랑스 사목방문시, 부르제(Bourget)에서 행한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통해서 끊임없이 활동하는 영원하신 지혜와의 계약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계약을 통해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발전되고 성숙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진리 안에서 인간을 밝혀 줄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인간의 소명을 일깨워주고 또한 당신 존재와 동일한 의미를 인간에게 부여하신다. 인간의 운명은 '인간 - 하느님'이라는 복음적 신비 안에 온전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친히 인간에게 위탁하신 사명에 대하여 확고한 원리이자 혼들리지 않는 중심이 되신다." 교황은 또한 국제연합에서 행한 연설에서도 사도적 열성이 조금도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가지고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한다: "본인은 그리스도가 인간과 맺고 있는 관계는 복음을 통해서나, 그리스도 자신과 교회의 선포를 통해서나 모두 기본적으로 동일한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통해서 입증될 필요가 있읍니다... 인간과 관련된 모든 정의(定義)의 총체는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교회의 사명과 본질적인 연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1.3.2. 그리스도로 조명된 인간의 가치 

 

구원의 신비는 인간의 가치를 더욱 빛내준다. 성부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인류에게 베푸신 사랑은 인간의 고귀함을 말해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그토록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다면, 인간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느님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 주시었다면'(요한 3,16 참조) 창조주의 눈에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이겠는가!" 

 

교황의 이러한 언급은 그리스도교의 인간학적 사상을 통해서 인간의 가치를 고귀하게 평가하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로저 가로디(Roger Garaudy)의 다음과 같은 관찰은 매우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였다. 즉 인격이라는 영역이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인간의 이러한 새로운 실재를 설명할 어떠한 단어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고전적 합리주의와는 전혀 무관하였으며, 헬레니즘적 사상 역시 비록 무척 섬세한 사상이었기는 했지만, 한 인간 안에서 설명되어야만 하는 무한성과 보편성에 대해서 이해할 능력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초월적 자의식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의 초월적 자의식은 하나의 절대적 특징을 띠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인간에게 해당되는 각각의 제도나 규정들이 이 절대적 특성에 의해 상대화되기 때문이다. 즉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은 언제나 인간에게 봉사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는 인간을 위한 제도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안식일에 관한 율법의 해석이 인간에게 있어서 거역할 수 없는 절대성을 인간 사회의 구조에 예속시킴으로써 나자렛 예수라는 한 정치범에게 내려진 단죄의 근거를 제공하고 말았던 것이다.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절대성과 초월적 자의식은 인간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는 계시가 인간을 위해 가능하게끔 하는 최종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사물보다 우월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원하시고 인격적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재현,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구원의 신비는 인간에게 하나의 새로운 가치를 제공한다. 구원의 신비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에 깃들어 있는 위대함과 존엄성과 가치를 다시 발견하게 되며, 또한 이 구원의 신비 안에서 새롭게 표현되며, 새롭게 창조되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의 새로운 창조가 죄로 인해서 상실되었던 것을 인간에게 다시 복구시켜 주었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밝힐 필요가 있다. 창조는 인간을 진리와 은총의 충만함에로 인도하였고 육화된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부여하셨다.(요한 1,12 참조)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은 새 생명의 원천인 이 능력에 의하여 내부에서부터 변혁된다. 그 새 생명은 사라지거나 지나가는 법이 없어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새 생명인 것이다. 비록 인간은 죽음의 지배에 놓여 있는 존재이긴 하지만 이 죽음의 생명이 성령에 의해 불멸의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인간의 조건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존엄성과 자기가 들어 올려진 그 높은 경지와 자기 인간성의 탁월한 가치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리스도교 외의 다른 여타의 종교들을 통해서도 인간의 참된 가치가 증진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특별히 강조하고자하는 점은 인간의 위대한 영적 가치는 반드시 높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향해서 끊임없이 발전하는 인간의 이러한 영적 가치는 명백히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충만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인간 : 창조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 모상 

 

요한 바오로 2세가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는 주제 중의 하나인 인간에 관한 위대한 진리는 곧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가르침이다. 즉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인간은 인간의 역사적 구체성이며, 동시에 인간의 심오한 실재이다. 회칙 {인간의 구원자}를 통해 요한 바오로 2세가 인간의 진리에 관해 언급하는 부분을 보도록 하자.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 자체, 그의 진리 전체로 본 인간, 그의 위대함 그대로 본 인간이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인간이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인간 각자이다. 왜냐하면 개개인간이 구속의 신비에 포함되며 그리스도께서 이 신비를 통해서 당신과 영원히 일치시키신 것은 개개인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 각자는 구속의 신비에 의해서 교회의 염려에 맡겨져 있다... 교회의 보살핌의 대상은 유일무이하고 반복될 수 없는 인간 실재,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성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는 인간이다. 공의회가 이 유사성을 논하면서 인간을 가리켜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사목헌장 24항)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이 '원하시고' 하느님이 '선택하신' 인간, 은총과 영광에로 부름 받고 예정된 인간은 다름 아닌 이 '각' 인간, '가장 구체적인' 인간, '가장 현실적인' 인간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에 관한 진리의 근원에서 인간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다음의 몇 가지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2.1. 성서적 기초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간에 관한 가장 첫 번째 발언은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이 바로 인간 존재의 첫 번째 특징이며, 이로써 인간이 다른 여타의 피조물들과 구분된다. 인간은 인식할 능력이 있으며 정신적으로 사랑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며, 또한 인간은 다른 사람을 자신 안에 받아들일 능력이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연의 질서를 따르면서, 그리고 신적 명령에 순응하면서 자신 안에 우주를 소유하고 이 세계를 수용할 능력이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도, 인간 이상의 그 어떤 탁월한 존재도 아니다. 단순히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하나의 피조물일 뿐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며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여타의 피조물들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에 대해서 감정을 가지고 그 선물을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다시 바꾸어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시초부터 오직 인간과 계약을 맺으셨던 것이다. 창세기는 실재의 자연적 질서뿐만 아니라 동시에 처음부터 은총의 초자연적 질서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 선물의 실재를 인정할 때에만 은총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이 인간에게 선물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며 이 사랑은 하느님의 본질인 삼위 안에서 생생하게 표현되는 하느님만이 지니고 계시는 유일무이한 사랑이다. 바로 이 사랑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부여받았으며 이로써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된 것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해도 인간이라는 실재는 절대적 실재는 아니다. 인간이라는 실재는 그 존재의 기원에서부터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그에게 맡겨주신 선물을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 소유하면서 자신을 실현시켜 가는 존재인 것이다. 곧 인간의 하느님과의 관계가 인간의 실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범죄로 인해 이 관계는 이미 깨어져 버렸다고들 말한다. 그렇지만 비록 이 관계가 깨어졌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도 인간에게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는 기본적인 관계를 스스로 무효화시킬 수 있는 존재였다면 아마도 인간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자기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방법을 통해서 이미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다시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비록 인간이 스스로 멸망의 길로 향하고 있었지만 결국 하느님의 개입으로 인간은 파멸되지 않았고. 비록 인간 본래의 모습은 퇴색되었다고는 하지만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인간 본질은 인간 안에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의 인간은 하느님과의 기본적인 관계 하에서 자신을 상실했었고, 또 되찾은 존재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과의 그러한 기본적인 관계는 늘 인간 안에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성은 반드시 정화되어야 하고, 자신 안에서 또한 인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적 본성 안에서 끊임없이 쇄신되어야 하며,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부녀(父女) 혹은 부자(父子) 관계를 되찾을 수 있도록 불리움을 받은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계가 인간 실존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모습을 볼 때,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인간의 본래 모습은 다시 위협받고 있으며, 현대의 인간은 특별히 그의 사회적 영역에 있어서 그가 본래 지니고 있는 신적 모습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현대사회의 모습을 보면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과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관계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가정이나 국가의 내적 모습은 이제 단순히 법이나 일종의 계약에 의한 구조적인 면으로만 보여지게 되었다. 가정은 사회의 여러 구조들이 그러하듯이 가정의 각 구성원의 개별적인 원의만이 표출되는 불안정한 만남 그 이상으로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었고, 법은 단순히 사회적 기능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 전락해 버릴 위험에 직면해 있는 현실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인간 상황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의 역동적인 본질을 파헤친다.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이란 비가시적인 섭리와 무엇이든지 가능하게 하는 사랑으로써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과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은 유일하고도 반복되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비록 진흙으로 만들어졌지만 창조주로부터 생명의 숨을 받고, 그분의 모상에 따라 그분과 비슷하게 만들어졌고,(창세 1,27; 2,20 참조) 그리고 하느님과의 유사함을 통해 영원에로 불리움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와 비슷한 자리에까지 올라간 존재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러한 면이 바로 요한 바오로 2세가 전개하는 신학적 인간학의 성서적 기초라고 말할 수 있겠다. 

 

2.2. 인간의 실재 안에서의 하느님 모상 

 

2.2.1. 자유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모습대로 우리와 비슷하게 인간을 만들자'."(창세 1,25-26) 이렇듯이 인간은 하느님과의 생생한 대화를 통해서 창조된 하나의 피조물이다. 그리고 또한 이 텍스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은 자유롭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부터 인간이라는 생명이 하나의 선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개념이다. 인간 존재의 선성(善性), 그리고 인간이라는 현실은 하느님의 창조행위의 열매이며, 또한 하느님은 사물들 안에서 선성을 찾아내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은 선하지만, 그 중에서도 인간의 창조는 특별한 의미에서의 선(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온 인류와 각각의 인간이 불리움을 받은 것과 관련하여 볼 때, 인간은 반드시 하느님의 모상이어야만 된다. 자유와 자유의 의미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으며 자유는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과제이다. 곧 '하느님과 비슷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자유에 부여된 하나의 과제이며 동시에 인간의 역동성에 부여된 하나의 소명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란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 즉 그리스도와 동화될 때까지 인간의 역동성에 맡겨진 하나의 소명이다. 

 

인간의 자유에 담겨진 심오한 의미를 추구하는 자유의 온전한 사용은 하느님의 모상을 실현하기 위한 과제와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자유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명확한 설명을 하고 있다: "성숙한 인간성이란 창조주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당신과 비슷하게 인간을 존재로 불러내셨을 때에, 인간이 창조주께 받은 자유의 선물을 온전히 사용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에는 자유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삶이 자기 마음대로 자유를 행사할 때에 자유롭다는, 이것이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추구되어야 할 잘못된 주장이 종종 대두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가 우리의 참다운 선인 모든 것을 위해 자유를 의식적으로 사용할 줄 알 때에만 자유가 위대한 선물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유의 최고 선용은 사랑이라고 가르치셨으며, 이 사랑은 자기증여와 봉사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2.2.2. 책임 

 

모상이 된다는 것은 본성, 창조를 향한 책임을 전제한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인간은 하느님의 총괄적인 창조 안에서 하느님을 표현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인간은 하느님께 종속되어 있고, 충실해야만 하고, 따라서 하느님께 대한 책임을 수반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창세기의 유명한 성서 주석학자인 폰. 라트(G.v. Rad)는 이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하느님과의 유사성이라는 개념과 하느님 통치권을 부여받은 지위라는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 측에서 볼 때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은 명백하다.(창세 1,28 참조) 이는 모상을 뜻하는 셀렘(selem)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동일선상에서 다음의 두 가지 구체적인 의미로 나누어 이해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즉 개인적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하느님 나라의 영역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땅의 위대함과, 하느님의 주권의 표지로서의 인간이 하느님과의 유사성을 통해서 또 하나의 다른, 하느님의 주권의 상징인 땅 위에 살게 되었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실상 그에게 맡겨진 땅의 지배권을 보호하고 발전시키도록 하느님으로부터 계획적으로 보내진 사자인 셈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을 만드신 하느님의 품위와 날인을 자신 안에 충만히 소유하고 있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손에 맡겨진 모든 것들에 대한 한 사람의 지배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활동이 하느님께로 이미 향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이러한 삶이 바로 인간에게 맡겨진 책임이라고 하는 하나의 특수한 소명인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을 인용하면서 책임에로 불리워진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위대한 계획에 대해서,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의 계획을 위한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아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의롭고 성스럽게 우주를 통치하고,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인식하며 자신과 전우주를 하느님께 바쳐드리라는 명을 받았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을 인간에게 복종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이 전 우주에 빛나도록 해야 한다." 

 

2.3. 인간의 내면적 현실 

 

2.3.1. 고통 

 

지금까지 우리는 이 세상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우주적 실재인,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인간에 관해서 살펴보았는데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내면적 실재로 내려가 보는 것과 인간이 갖는 자기 자신과의 기본적 관계들을 관찰하는 일이다. 즉 인간이 겪는 고통 안에서, 그리고 죄와 화해를 통해서 드러나는 인간의 내면 모습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내적 모습들은 분명히 인간의 내면 생활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포도원으로 보내진 일꾼들의 비유(마태 20,1이하 참조)를 해설하면서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서뿐만 아니라 특별히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조명 하에서 노동의 참된 의미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어느 면에서는 자신의 고유한 내적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사실상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노동을 통해 땅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노동으로써 이 세상의 영역과 연결되어 있고, 동시에 영원의 영역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노동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주 고통과 노고를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의 고통이나 노고는 단지 노동에서만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다른 형태의 여러 고통들이 따른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내면 세계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인간의 구체적이며 되풀이 될 수 없는 내면에 내포되어 있는 하나의 인격적 사실로서의 주관적인 차원에서 보면, 고통이란 거의 형언할 수 없고 양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또 아마도 동시에 객관적인 현실에서 보면 하나의 뚜렷한 문제점으로서 다루어지고 묵상되며 파악되어야 할 점이 고통처럼 많은 것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현대 세계는 특별히 과거의 그 어느 시대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와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인간의 고통은 그 자체로써 이미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고통의 인간을 하느님께 인도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본성을 통해서 설명되는 고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고통'이라는 말로써 표현하고 있는 것인즉, 특히 '인간의 본성에 본질적으로' 관련된 의미를 띠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고통은 인간 자신과 마찬가지로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고통이야말로 특별히 그 나름으로 인간에게 고유한 깊이를 드러내고 있으며 또 특별히 그 나름으로 그것을 능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인간의 초월성에 속해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인간이란 어떤 의미에서 인간 자신을 넘어서 나아가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며 신비로운 방식으로 이 초월성을 향하여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들 중의 하나가 고통인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듯이 인간의 고유한 깊이를 드러내고 있는 인간의 고통이 초월성을 지니고 있고, 그 이유는 고통이 세상 구원의 신비 안에 자리잡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상 고통이 가져다주는 어려움 때문에 그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는 하지만 고통의 참된 의미는, 인간 자신의 구원을 위해 인간 자신을 넘어서 나아가도록 불리운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적 및 초자연적 본성을 통해서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소명 중의 하나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인간이 겪는 고통의 참 의미는 쉽게 다가온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써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도록"(1 베드 4,13)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으며, 이러한 부르심으로써 고통의 의미는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고통이 지닌 초자연적이고 동시에 인간적인 의미라고 교황은 확언한다: "고통은 그것이 세상의 구속 사업이라는 하느님의 신비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초자연적이요, 그 안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자기 자신의 존엄성을, 자기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있으므로 또한 인간적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내적 현실로서의 고통이 또 하나의 부르심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2.3.2. 죄 

 

인간의 구원이 이 세상의 구원인 것과 마찬가지로 불행하게도 인간이 겪고 있는 드라마와도 같은 삶은 이 세상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보다는 현재에 더욱 더 그러하다. 오늘날 우리는 새롭고도 엄청난 또 하나의 죄의 모습을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는 단지 인간 본성의 조화만을 깨뜨리면서 그 본성은 전혀 손상시키지 않은 에덴 낙원의 죄와는 물론 다른 죄이다. 오늘날 우리가 새롭게 직시해야만 하는 것은 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인해 따라온 엄청난 무기들과 그에 따른 의식의 변화로부터 야기된 죄일 것이다. 

 

어쨌든 고통은 죄의 결과로서 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왔다. 인간은 온갖 형태의 고통을 놀랄 정도로 회피해 왔지만, 그 고통의 원인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너무나 무디었다. 하느님의 상실이 이제 현대 세계와 인간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대표적인 특징이 되어버리고만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인간이 하느님께 대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의미의 전적인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그렇지만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대세계의 위협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들에게 요한 바오로 2세는 특별히 인간 심성의 종교적 의미를 회복시킬 수 있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권고한다: "죄에 대한 감각은 인간의 윤리적 양심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말하자면 그것을 잴 수 있는 계량기 역할을 합니다. 이 감각은 인간이 자기의 창조자요, 주님이며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맺는 의식적인 관계로부터 나오는 것인 만큼, 하느님께 대한 감각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감각을 송두리째 근절시키거나 양심의 소리를 완전히 억누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감각을 깡그리 제거시키기는 불가능합니다... 실상 하느님은 인간의 기원이자 최종 목적이며, 인간은 자기 안에 신적 씨앗을 지니고 있습니다.(사목헌장 3항, 1요한 3,9 참조) 그래서 인간의 신비를 계시하고 밝혀주는 것은 하느님의 실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란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거슬러 저질러지는 잘못이라는, 본래적 의미의 죄에 대한 감각이 정립되지 못한 채, 인간과 인간적 가치를 거슬러 행해지는 잘못이라는 정도의 죄에 대한 감각이 사람들 사이에 뿌리내리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결국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저버리시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에게 기억시켜주고, 또 우리 인간을 격려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이며 자비라는 사실이 바로 그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시대의 사고방식은 자주 하느님의 자비를 망각하고 방해하는 흐름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실상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 그리고 그것을 받는 인간 사이의 차이라는 관계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그 어떤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러한 형태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예리하고도 명확하게 오류를 지적하고, 또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제시하면서 인간에게 드러나는 하느님 자비의 참모습을 정의하고 있다: "현대의 사고방식은 과거 인간들의 사고방식보다 훨씬 더 심하여 자비의 하느님과 상치된 듯하며, 자비라는 이념 자체를 생활에서 배제하고 인간 마음에서 제거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상 전대미문의 과학과, 기술의 거대한 발달을 맞아 땅의 주인이 되고 땅을 굴복시켜 다스리게 된 인간에게는 자비라는 말과 개념이 매우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땅에 대한 이 지배를 흔히 일방적이고 피상적으로 알아들음으로써 거기에는 자비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교황은 계속해서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설명하면서 하느님 자비의 진면목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비유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외면상으로 일어난 것으로 평가하면 안된다. 자비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들은 거의가 외면상으로만 당사자들을 평가하는 데서 온 것들이다. 그 때문에 일반적으로 자비라고 하면 자비를 베푸는 사람과 자비를 받는 사람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가 그것을 받는 사람을 낮추게 만들며 따라서 인간 존엄성이 손상된다고 섣불리 생각한다. 탕자의 비유는 사실이 이와 다름을 보여준다. 자비의 관계도 인간이라는 선한 존재의 공통된 체험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인간에게 고유한 존엄성, 그것에 대한 공통된 체험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비란 인간이 하느님과의 친교를 가능하게 하는 본질적 핵심이다. 

 

2.4. 그리스도의 모상으로서의 인간 

 

2.4.1. 성서적 기초 

 

인간 구원의 역사 안에서 참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가야 할 필수적인 길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와의 일치(1고린 1,9)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과 인간을 완전하게 변화시키는 생명을 선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처음의 인간 아담으로부터 단지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1고린 15,47-49 참조)를 유산으로 받았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 이제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에 속한 그 분의 형상의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1고린 15,49 참조) 이러한 사도 바울로의 새로운 사상은 그전까지의 그의 모든 사상을 수렴하면서 동시에 우리들 인간이 구원의 여정을 가는 데 있어서의 최후 목적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이 여정은 그리스도의 모상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이로써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바로 이것이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획이다. 곧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다"(로마 8,29)고 말하면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그리스도라는 모상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나가고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 모두가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듯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가운데 주님과 같은 모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겨가고"(2고린 3,18) 있는 존재인 것이다.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구원 계획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점진적인 유사성으로써 실현되어 간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모상을 얼마만큼이나 완전하게 자기 자신 안에서 다시 실현시키는가 하는 인간 실현의 본질적인 사명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러한 삶은 인간의 본질적인 행복을 제시해 주시는 하느님(1요한 3,2 참조)과의 견고한 일치에로 인간을 인도하면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 모습을 실현시켜 줄 것이다. 

 

2.4.2. 모든 인간을 당신과 일치시키신 그리스도 

 

여기서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서 아주 명백하고도 보편적인 진리 하나를 말할 수 있겠다. 즉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느님과 본질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육화된 말씀과 명백하게 일치되어 있어 서로서로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치에서부터 인간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토록 불리움을 받은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인간의 의지에는 전혀 종속되지 않으면서 인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분이시다. 그렇지만 인간은 하느님과의 그러한 관련 안에서 자신의 소명, 운명, 그리고 품위를 찾아낼 수 있도록 자신의 창조주께, 그리고 자신의 모델이며 영광스런 구원자이신 육화된 말씀을 향하여 자신을 활짝 열어 놓아야만 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육화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시초부터 주시고자 의도하셨던 그 비중을 인간의 생명에 부여하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아 실현을 위해 본받아야 할 완전한 인간으로서, 또한 인간이 인간됨을 위하여 따라야 할 스승으로서 우리 인간에게 제시되는 분이시기 때문에 당위성을 갖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하느님의 모상은 육화된 말씀이다. 이는 어떤 기본 원리로서가 아닌 하나의 인격으로서의 말씀이다. 말씀 없이 모상을 이해할 수 없으며, 모상 없이 말씀은 완전하지 않다.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있어서 인간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인격이다. 인간은 그의 지성과 의지, 그의 양심과 마음에 있어서 유일무이하고도 전혀 반복되어 질 수 없는 존재이다. 교황이 {인간의 구원자}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은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에 자기만의 생명의 역사가 있고, 가장 중요한 자기만의 영혼의 역사가 있다." "인간 안에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인간은 또한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이며, 이 인간은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이 원하시고 하느님이 선택하신 인간, 은총과 영광에로 부름받고 예정된... '각' 인간, '가장 구체적인' 인간, '가장 현실적인' 인간"이다. 바로 인간의 이러한 면이 교회의 관심을 인간에게 집중시키게 하는 이유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목헌장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를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에 더욱 부합시키어 인간의 생활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일에 대한 교회의 근본적 관심을 여러가지로 표명했었다. 이것은 만인의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공의회의 사목헌장에 나오듯이 '교회는 절대로 정치공동체와 혼동될 수 없으며 아무런 정치 체제에도 얽매이지 않는 동시에 인격의 초월성의 표지요 수호자인 것이다'(사목헌장 76항)." 

 

 

3. 인간과 구원 

 

회칙 {인간의 구원자}는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두 가지 기본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다. 즉 현실의 어려움에 방황하고 있는 인간과 그리스도인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다. 첫 번째 측면에서는 인간이 살고 있는 현실 안에서 인간의 능력, 어려움, 포부, 고뇌, 그리고 실망 등 인간이 자신의 실존으로서 지니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조명하면서 인간의 모습에 대한 분석을 시도할 것이며, 두 번째 측면에서는 인간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진리, 즉 하느님의 사랑으로 감싸져 있고, 구원자 그리스도로 인해 변화되는 인간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3.1. 인간의 현실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를 통해 자신의 철학적 사고를 펴나가고 있는데 특별히 인간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회칙을 서술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인간의 구원자}에서 인간 존재에 관해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포부에 관해서, 그리고 여러가지 문제에 부딪히고 있는 인간에 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다. 교황은 인간 존재가 드러나는 현실의 여러 모습들을 주의 깊게 고려하면서 인간 본질에 접근하고 있으며, 특별히 인간 존재의 보편적 기본원리에 입각하여 인간적 현실을 설명한다. 또한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모습에서 드러나고 있는 확실한 결과들에 관한 실존적인 분석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현상적인 구조의 윤곽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자신의 정신적 삶에 대해서 하나의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은 그 어떤 다른 존재들보다도 탁월한 개별 존재로서 유일무이하고도 반복되어질 수 없는 인격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은 아니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 안에 닫혀진 존재이기도 하며,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친교를 이룰 수 있는 사회적 존재이다. 인간 실존은 젖먹이 시절부터 마지막 호흡을 쉬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주위환경과 밀착되어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의 이러한 면에 대해서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내면에서부터 정신이 개방되어 있고 그의 육체와 시간 안의 존재에서 오는 여러가지 다른 필요들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자기만의 것인 이 개인적 역사를 기록하되 지상에 존재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수태와 출생의 순간부터 자기를 타인들과 이어주는 수많은 유대, 접촉, 상황, 사회적 구조들을 거치면서 이 역사를 기록해간다." 

 

타인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은 자기 자신이 깊이 분열되어 있는 모습을 자신 안에서 발견한다. 인간은 세상이라는 무대에 등장하고, 또 자신 안에 다시 들어올 때, 자기 자신의 의도된 의지와 드러나는 의지 사이에서,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이상과 생활한 경험 사이에서 커다란 분열을 체험한다. 

 

무로부터 만들어지고, 죽음에로 운명지어진 인간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끊임없이 일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간다. 오늘날 인간 실존을 위협하는 엄청난 위험들이 인간 자신들의 손에서부터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인간들이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핵무기의 가공할만한 위력, 자연을 파괴하고 거스르는 인간의 이기주의, 그리고 소비주의의 결과로 드러나는 인간 정신의 타락 등에서 인간은 심각한 위협을 느끼며 방황한다. 

 

그러한 위협들에 인간들은 당연히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러한 공포는 결국 인간 실존의 고뇌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비상한 재능으로부터 경탄할 만한 기계문명을 발전시켰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이 이룩한 그 문명에 의해서 조정 당하고, 그 문명이 자신을 반역할 수 있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인간의 그러한 고뇌를 본다: "인간은 자기가 만든 것들 - 물론 전부도 아니고 대부분도 아니지만 그 일부, 특히 인간의 재능과 창의성을 각별히 쏟은 것들 - 이 인간 자신에게 철저하게 반역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것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자기파멸을 몰고 오는 수단이자 도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위협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생할 것인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위협들이 어떤 일정한 한 장소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고뇌하는 것이다. 

 

인간이 정신적으로 고뇌하는 또 하나의 쓰디쓴 위협은 인간 자신이 끊임없이 조작 내지는 실험의 대상이 되면서 일부 목적을 위해 기만당하고 또 소외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분명 인간과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고발되고 있는 하나의 고통스런 체험이고,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그러한 위험에 대한 해결책이 전혀 발견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상 오늘날은 대중매체를 이용한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힘의 실체들이 우리 인간들의 행동 방식을 고정시키고 있으며, 더욱이 인간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방해하고, 인간 의식을 조장하며, 인간 행동을 조정하고, 그리고 인간의 본능적인 쾌락, 이기심, 야성(野性) 등을 악용하고 있음을 본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우리 시대의 이러한 슬픈 현실을 직시하며 고발한다: "사실 물질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이 엄청난 진전을 가늠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지배권의 본질적인 맥들이 끊길 위험이 현실적으로 피부에 느껴진다. 그리고 여러가지로 인간이 자기의 인간성의 조직 전체를 통해서나 생산제도를 통해서나 사회홍보수단의 압력을 통해서나 여러 방도로 자신을 조종 - 비록 흔히는 그 조종이 직접 감지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 에 맡겨버릴 위험이 대두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유기할 수도 없으려니와 자기에게 속하는 가견적 세계 내에서 자기가 차지하는 위치를 유기할 수도 없다. 그는 사물의 노예, 경제 체제의 노예, 생산의 노예, 자기 손으로 만든 사물의 노예가 될 수 없다. 순전히 유물론적인 문명은 인간을 그러한 노예 처지에로 몰락시키고 만다. 때로는 이것이 그 선구자들의 의도나 전제 사항에 역행한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결국 그렇게 귀결된다." 

 

그러나 이렇듯이 인간에게 고뇌와 실망을 안겨다주는 것들을 통해서 인간의 실존을 비인간화시키는 모든 것들에 대항하는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들이 인간 내부로부터 제기되며 이로써 결국에는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비인간화를 대항하는 모든 노력과 투쟁은 인간이 현재 처하고 있는 상황과 앞으로의 미래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으로 하여금 예견할 수 있게 하며 또한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근본적으로 구분하게 하는 고상함을 부여한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치와 사고 그리고 언행의 모든 표현을 통해서 인간의 참모습이 드러나는 것처럼, 인간이 처한 상황의 외면적 요소들에서 출발하여 인간성 안에 깃들어 있는 인간의 위대함과 고상함에 도달하는 인간은 "진선미 및 정의와 사랑을 향하는 부단한 염원을 갖춘" 존재인 것이다. 

 

3.2. 인간의 현실에 대한 그리스도적 응답 

 

교회의 대사회 가르침은 반드시 인간이 처해 있는 다양한 역사적 상황, 즉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안고 있는 온갖 종류의 위협과 두려움까지도 포함하는 인간의 주변상황이 고려된 가르침이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그 가르침의 기초는 반드시 복음의 메시지를 통해서 찾을 수 있는 참된 가치를 향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구원자}에서 우리 시대의 인간이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인간의 구원자}는 첫부분부터 매우 장엄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강생을 통하여 하느님은 인간에게 시초부터 갖추어 주고자 뜻하셨던 그 비중을 인생에 부여하셨다.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고 당신의 영원한 사랑과 자비에 어울리며 당신의 온전한 자유에 부합한 방법으로 그 비중을 결정적으로 부여하셨다. 그리고 원죄와 인류의 죄악으로 점철된 전 역사를 돌이켜 볼 때에, 인간 지성과 의지와 마음의 오류들을 생각할 때에, 우리로서는 오로지 탄복하며 거룩한 전례에 나오는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부활성야의 부활찬송)는 말씀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만큼 풍성하게 부여하셨다." 

 

따라서 육화는 완성이며,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 영원으로부터 품으셨던 경이로운 계획의 완전하고도 전적인 실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 관한 모든 진리에 대해서 깨닫기를 원한다면 이 엄청난 육화의 신비 위에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요구된다. 사실상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에만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서 하느님과 비슷하게"(창세 1,26) 창조된 보통의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와같은 인간에 관한 진리와 관련하여 몇 가지 매우 탁월한 사고를 전개하고 있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는 구속 신비의 인간적 차원에서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에 포함된 위대함과 존엄성과 가치를 발견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새롭게 표현되고, 또 새롭게 창조된다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간에 대한 세밀한 관찰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를 통해서 인간에 관한 신비가 드러남을 잘 표현해 준다. 

 

이렇듯이 그리스도와 인간의 신비 사이를 통해서 드러나는 관계를 볼 때 그리스도는 인간에 관한 본질적이고도 기본적인 응답이며,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유일한 응답이 된다. 이미 인간의 현실을 통해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거의 해결되지 않을 듯한 문제들로써 인간을 고통에 빠뜨리면서 인간 존재의 근거에 실망과 좌절을 안겨다주는 여러가지 현실의 어두운 상황들에 이제 결정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명료한 해답이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자신에 넘쳐서 말한다: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 마음이 향할 유일한 방향은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인간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러한 인간에 관한 전망 아래서 인간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그리스도로부터 그 해답을 추구해야만 한다. 그러면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를 이렇게 정의한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도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생애, 그분의 인간성, 진리에 대한 충실, 만인을 포용하는 사랑이 말을 하신다." 이렇게 인간에게 말을 건네시고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은 "무릇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자기 존재의 즉각적이고 부분적이며 때로는 피상적이고 심지어 가공적이기까지 한 척도와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불안정과 불확실, 자신의 약함과 죄 많음, 자신의 삶과 죽음을 그대로 안고 그리스도께 다가가지 않으면 안된다. 말하자면 자신의 존재 전체로 그리스도께 몰입하여야 한다.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강생과 구속의 실재 전부를 자기 것으로 삼고 거기에 동화하여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원자로서 유일무이하고도 일회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신비 속으로 관통해 들어가셨고 인간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강생과 구속의 신비가 인간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함은 인간에게는 필연적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비록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현실 안에서 고뇌하면서도 이제 그리스도로써 전혀 손상이 없는 자신의 인간성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가장 완전한 인간됨의 실현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성을 다음의 3가지 측면에서 완성시키시는 분이시다. 즉 인식론적 측면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에로의 충만함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윤리적 측면에서 고상함과 존엄성을 지닌 인간이 인격적 조화를 이루면서 행동할 능력을 부여하며 그것을 위한 의지를 강화시켜주며, 그리고 존재론적 측면에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적 본성에 참여케 하면서 인간 존재를 변화시켜주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로부터 드러나고 완성된 신적 본성으로서의 인간성의 완성은 또한 교회의 으뜸가는 과제이며, 이렇게 그리스도로부터 명령되고 불리어진 선교로서의 교회의 사명은 명백하게 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는 인간을 거스리지 않으며, 인간을 위해 있다. 교회의 기본적 주요 관심은 인간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신적 본성을 인식하고 실현시킬 수 있도록 인간을 도와주는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인간학적 소명을 더욱 깊이 깨달으면서 더 확실한 방법으로 더욱 새로운 방법으로 그 소명에 충실하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있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시대에도 그렇지만 특히 현대의 교회가 할 근본 역할은 인류의 시선을 똑바로 돌리는 것, 전 인류의 의식과 경험을 하느님의 신비를 향하여 방향잡아 주는 것, 만인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구속의 심연에 친근해지도록 돕는 것이다. 동시에 인간의 가장 깊은 영역, 즉 인간의 마음과 양심과 사건들의 영역에 관여하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주저없이 말하고 있는 이러한 과제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또한 가장 기초적인 과제이다. 이 과제가 바로 교회의 길이며,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기본적인 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집에 이르는 길이시며 각 사람에게 도달하는 길이시다." "이 인간이야말로 교회가 자기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따라 걸어야 할 첫째가는 길이다. 인간은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하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이다. 그리스도 친히 따라 걸으신 길이며, 변함없이 강생과 구속의 신비 속을 거쳐가는 길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교회는 인간과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완전한 인간성의 실현을 위한 가장 훌륭한 변호자이며, 또한 기본원리가 되는 것이다. 이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시며 세계 교회의 우두머리이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자신이 수행하는 교황직의 가장 으뜸이 되는 임무로서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3.3. 부르심을 받은 각각의 인간 

 

회칙 {인간의 구원자}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하느님의 신비에 싸인 위대하심과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한다: "세상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는 유일무이하고 일회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신비 속으로 관통해 들어가셨고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가신 분이시다. 그래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다음 가르침은 참으로 옳은 것이다. '사실, 혈육을 취하신 말씀의 신비를 떠나서는 인간의 신비가 참되게 밝혀지지 않는다. 첫째 인간 아담은 미래의 인간, 즉 주 그리스도의 표상이었다.(로마 5, 14) 새 아담 그리스도는 성부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주는 그 계시로써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이 높이 불리었음을 밝혀 주신다'(사목헌장 22)." 

 

공의회를 인용하는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에 더 충실하기 위해서 여기에 불리움을 받은 인간 존재의 본성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공의회는 인간이 불리운 최종 목적은 사실 하나 뿐이며, 그것은 신적인 본성에로 불리었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신적 소명에의 불리움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동시에 각 인간에게 주어졌다. 곧 이러한 인간에 대한 신적 소명의 보편성은 현재라는 시간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어떠한 유보도 있을 수 없다고 회칙 {인간의 구원자}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간의 소명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서 인간에 관한 구체적인 해석을 시도해 볼 때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의 실존적인 대립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그리스도인이든가, 아니면 무(無)와도 같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든가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자}는 다음과 같이 아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이 원하시고 하느님이 선택하신 인간, 은총과 영광에로 부름 받고 예정된 인간은 다름 아닌 이 '각' 인간, '가장 구체적인' 인간, '가장 현실적인' 인간이다. 이 인간은 온갖 신비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신비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고 있다. 지구상의 40억 인간 개개인이 자기 모친의 태중에 수태되는 순간부터 그 신비에 참여하고 있다." 

 

결국,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기로 불리었으며, 은총과 진리가 새로 충만하게 창조된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는 신비"인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각 인간이 자신 안에서 반드시 실현시켜야 할 소명이며, 또한 이러한 인간 소명의 최종적 실현은 "아버지께서 언약하신 바 있고, 당신의 영원하시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 '때가 찼을 때'(갈라 4,4) 강생하시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주신 그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3.4. 성숙한 인간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 모두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한 교회이며, 그러기에 교회의 특별한 존재의의는 "성숙한 인간성을 생성해내게 만드는데 에" 있다고 {인간의 구원자}에서 강조한다. 인간이 받은 소명의 역동성 안에서 부르심을 뜻하는 3개의 단어 사이에는 하나의 방정식이 성립됨을 볼 수 있다. 즉 왕이 된다는 것은 봉사하는 것이며, 왕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성숙한 공동체를 실현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성숙성의 의미는 "창조주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당신과 비슷하게 인간을 존재로 불러내셨을 때에, 인간이 창조주께 받은 자유의 선물을 온전히 사용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자유의 원천이 어디에 있고, 또 협소한 의미에서 이 자유의 사용은 결코 남용되거나 이기적인 쾌락을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유란 "참다운 선인 모든 것을 위해 의식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인간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완성을 향하는 인간의 자유는 무한하신 완전성 안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신 하느님의 자유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자유는 단순히 자유의 선한 사용만을 예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을 그 자체로써 항상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류의 가능성이란 인간의 자유가 지니고 있는 하나의 역사적 형태이다. 인간은 선과 악을 구분하여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자신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악을 행할 수 있으면서도 자유롭게 선을 행할 때에 진정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윤리적 자유란 안다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의 일치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여기서 또 하나 잠깐 언급해야 할 것은 양심의 자유에 대해서이다. 양심의 자유는 인간에게 있어서 분명 하나의 고귀한 가치이며, 그 이유는 각 인간의 확신이 존중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각 인간의 양심의 자유 그 자체가 각 인간에게 있어서 최종 목적으로 여겨져서는 안된다. 

 

인간은 교육과정을 통해서 자유를 배우고, 또 자유롭게 된다. 복음에서 "진리는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요한 8,32)라고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자유를 통해서 진리를 행하고 진리에 의해서 자율적이 된다. 원죄의 결과로 나타난 인간 조건을 고려하면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초자연적인 본성의 지평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윤리적 자유는 단지 하느님의 은총으로써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윤리적 자유는 진리와의 조화를 통해서 항상 의지의 올바른 사용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 자신에게는 성령의 도움과 힘으로써 자연적인 덕의 함양이 요구되며, 또한 자기 자신과의 일치와 조화를 항상 유지시킬 것이 요구된다. 따라서 자유는 행하는 것에 자리 잡는 것이 아니고 존재 안에 자리 잡는다. 아니 그보다는 존재를 실현시키는 것을 통해서 행사된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본연의 모습을 더 잘 찾으면 찾을수록, 즉 자신의 인간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신의 본 모습에 순응하면 할수록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자유는 선택이 아니고 조화이며,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참된 조화를 위하여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유는 하느님의 선물이고 더 나아가서는 사랑에 봉사하는 것이 되며, 결국 나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된다. "우리를 해방시킨 자유"(갈라 5,1), 그리고 요한 바오로 2세가 {인간의 구원자}에서 언급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자유"는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가르침인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자유에 관한 진리를 인간에게 보장하고 또 보호한다. 이는 곧 인간의 가장 완전한 성숙을 위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는 각 인간이 그리스도적 소명에 충실함으로써 자신의 생명 안에 전달되며, 구체화되며, 나아가서는 성숙한 인간성을 생성해낸다. 

 

3.5. 사랑을 향한 인간의 소명 

 

인간은 사랑의 신비를 통해서 자신의 참된 소명을 발견하며 또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적 소명과 생명은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업적, 즉 "성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했다"(요한 15,9-11 참조)고 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업적에 자유롭고도 능동적으로 동의하고 전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초월적 사랑이라는 시각 안에서 볼 때, 인간의 그리스도적 소명은 사랑을 위해 스스로를 비우신(필립 2,5-7 참조)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법이며, 이 법은 곧 이웃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항상 열어 놓는 사랑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리오(Rio)의 노동자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가난한 사람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고무하고 있다: "정의와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에서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들에게 속해 있고 나아가 이 나라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가난함의 비밀을 터득하려고 노력하는 부자들에게도 역시 열려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부자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행복합니다. 만일 그들이 진정 마음으로 가난하다면!" 

 

그리스도교는 각 인간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정신 때문에 개인적인 욕심들을 포기함으로써 가지게 되는 마음의 변화에 가장 큰 관심을 갖는다. 또한 그리스도교는 사랑을 베푸는 대상들을 향해 종의 신분을 취함으로써 가장 구체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하기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적 소명은 그리스도적 행동을 위한 계획보다는 그리스도적 성성(聖性) 위에 더 초점을 두어야만 한다. 곧 그리스도적 성성이라함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협력하기 위한 자유로움을 삶의 첫 번째 자리에 놓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과의 친교가 우선이고 그 다음으로 사회적 활동을 위한 그리스도적 행동에 관한 계획들이 따라야 할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서한 {현대의 복음선교}를 인용하면서 남자 수도회의 장상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을 갈망하고 성덕에로 불리움을 받은 교회의 역동성에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수도자들은 바로 이 성덕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수도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있어서 성덕은 그들 삶의 증거이며, 이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가 보여준 사랑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사랑은 각 인간의 그리스도적 소명을 실천하기 위한 초월적인 하나의 구체적 모델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초월적 선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물로서의 사랑은 행하거나 소유하는 차원에서의 것이라기 보다는 존재론적인 차원 위에 자리잡는 인간의 소명인 것이다. 

 

이러한 전망과 함께 인간의 소명은 하느님의 계획에 맞추어 인간이 마음을 바꾸는 것만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만나는 여러가지 문제들, 즉 기아나 무지, 전쟁, 불의, 증오 등의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하느님께서 이 세상과 인간에게 원하시는 방향과 함께 인간 스스로부터의 보다 성숙된 모습을 지니면서 이 세상 안에 주어진 엄청난 도전들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모습이 인간 소명의 실현을 위한 하나의 길이 될 것이다. 인간의 소명은 또한 하느님을 향한 근원적인 자유의 획득과 인간 자신을 향한 전적인 반성으로서의 전인적인 회개를 요청하며, 이는 인간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동시에 중단없는 사랑의 자기 증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와 그 밖의 여러 담화문들을 중심으로 요한 바오로 2세의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의 소명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의 소명이란 그리스도의 세상 구원의 신비와 그에 따른 그리스도 육화의 절대적인 요청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과 현대 사회에의 봉사를 위한 신적 섭리의 활동을 통해서 드러나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 중심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계획의 도달점과 이상적인 길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구원의 성취를 위하여 그리스도 중심의 역동성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 인간은 구원자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의 출발점에서 정지할 수는 없다. 구원이 그리스도의 모든 능력과 함께 인간학적, 교회론적 및 사회적 지평에서 인간에게 실현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해 내려가야 하는 동시에 가능한 한 가장 폭넓은 영역으로 확대되어야만 할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간학을 위한 방법론은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신학적이다. 그의 방법론은 구체적인 것에 항상 연결되어 있으며 본질적인 면을 향하면서 또한 그것을 철저하게 해부한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현실은 항상 '하느님께 관한 그 무엇'이다. 인간의 현실은 비록 많은 상처들과 흠집으로 가득하지만 하느님의 모상을 드러낸다. 인간의 영성적인 본성의 힘으로 인간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비록 인간의 그러한 능력이 처음의 상태에 인간이 지녔던 능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에 계속 남아 있으면서 그것을 통해 인간의 신적 소명을 위한 현주소가 드러나게된 것이다. 

 

결론을 맺자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된 인간은 결코 자기 실존의 인간적 영역, 즉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영역 등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면서 가장 고상한 방법으로 자신의 인간조건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이런 모습 때문에 교회는 인간 실존을 위협하는 모든 권력과 사회, 사상 등으로부터 인권의 보호자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경이로운 회칙 {인간의 구원자}와 몇몇 담화문을 통해서 다루어진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소명'은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에로 불리움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 이외에도 생동하는 실재이며, 역사적이며 구체적인 실존으로서의 인간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선포의 완성을 위한 소명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가톨릭 신학과 사상, 제8호(1992년 12월,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이동익(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윤리신학)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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