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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앙과 정치: 기억은 침묵의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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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17 ㅣ No.1296

[신앙과 정치] 기억은 침묵의 저항이다

 

 

이 글을 쓰기 며칠 전 한 원로 사제한테 전화를 받았다. 노사제는 이 ‘신앙과 정치’ 칼럼을 잘 읽었다면서 당신의 어린 시절 신앙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주셨다. 전화기 너머로 건너오는 그분의 말씀은 오랜 신앙생활이 묻어나는 어투였다. 천주교 신자 생활의 근거가 되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향주삼덕(向主三德)’을 강조하시면서, 저녁기도 중에 바치는 삼덕송을 통해 하루를 돌아보셨다고 했다.

 

사제로 살면서 이웃사랑을 통해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애덕 실천’의 생활화에 많은 묵상을 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그 애덕이 나와 교회를 넘어 세상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신앙인의 정치참여까지 연결된다고 하셨다. 지학순 주교를 구속한 박정희 유신독재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앙인의 애덕 실천과 현실 참여가 단절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의한 세상 구조에 대한 저항까지 도달한 노사제의 애덕 실천은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단련되어 온 신앙의 기억에서 비롯했던 것은 아닐까?

 

 

잊으라, 못 잊는다

 

기억이란 그렇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역사 앞에서 자신의 위치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지시한다. 그런데 그 기억이 권력자의 손에서 조정되고 있다. 아직도 집필진이 누구인지, 또 집필방향은 어떤지 확실히 알려진 것 없이 감춰진 채 진행되는 ‘국정’ 한국사 교과서, 그리고 일제 강점기 성 노예로 살아야 했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에게 사과는커녕 어떤 사전 이해도 구하지 않는 한일정부의 합의는 권력자의 입맛에 맞춰 기억을 왜곡하고 조정하려는 시도다.

 

게다가 2009년 용산 참사를 잊으라는 이들은 2014년의 세월호 참사도 잊으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시민들은 세월호 노란 리본을 달았다. 심지어 잊지 않으려고 리본을 몸에 새긴 이들도 있다. 잊지 않겠다는 노란 리본은 도저히 잊을 수 없다는 침묵의 저항이다.

 

이른바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는 ‘기억’을 주요한 화두로 만들었다. 누구에 의해서 무엇이 기억되는지에 따라 역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984년」의 조지 오웰이 말하듯이 “현재를 통제하는 이가 과거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승 예수님에 대한 기억, 위험하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 아니 신앙생활에서도 노사제의 이야기처럼 - ‘기억’은 아주 중요한 신앙 실천의 동기가 된다. 그리스도교의 태생은 ‘기억(memoria)’과 ‘기념(anamnesis)’에서 시작한다. 성목요일 최후 만찬, 성금요일 십자가 죽음, 그리고 마침내 부활에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그리스도교는 출발한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삶과 수난, 죽음에 대한 기억은 매우 위험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광야에서 자본(돈)과 정치(권력), 종교(기적)의 배후에 존재하는 탐욕의 악마를 물리치시고 공생활로 들어서셨다(루카 4,1-13 참조).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악마를 보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들을 챙기기 시작하셨다. 그들은 권력자의 입맛대로 편성된 세상의 중심으로부터 주변부로 밀려난 가난한 이들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변부를 강조하는 것도 그곳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서 세상이 바뀌게 될 것이라 믿으셨다. 세상에서 거절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수시로 악의 본질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은 지배자의 처지에서 본다면 제거해야 할 눈엣가시였다.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광야에서 보셨던 그 악마적 실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예루살렘 입성을 거부하지 않으셨다. 악의 세력에 당당히 저항하셨다. 그 대가는 십자가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정치 · 종교적 엘리트 집단의 독점적 지배를 폭로한 사건이었다. 십자가 사건은 그렇게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적절히 권력을 나누어 가진 악의 세력을 폭로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권력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은폐하려 했다. 오죽하면 창에 찔린 예수님의 시신마저도 돌무덤에 가두어 군인들이 지키게 했겠는가? 예수님의 시신은 아무나 접근할 수 없었고, 가족에게도 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스승의 처참한 죽음이 두려워 도망쳤던 제자들은 돌아왔다. 망각의 강을 건너 스승도 잊고 제자로서의 신분도 잊고 싶었지만, 그것은 다시 악의 관행에 빠지는 일이었다. 하느님을 버리는 일이었다. 돌아온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전승을 기억하고 기념했다. 회개는 아주 ‘위험한 기억’을 감행하게 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던 자유와 해방의 시간을 기억하고 기념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억행위를 통해 구세주 그리스도로 증언이 되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위험한 기억 속에서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는 제자들의 무리는 기득권자의 논리를 벗어나 해방의 체험을 나누는 자유로운 공동체가 되었다. 이렇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부활을 증언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태생적으로 수구적 세력에 대한 비판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기억은 저항이다

 

기억은 추억과는 달리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면서 예수님의 삶을 기억한다. 기억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게 한다. 하지만 망각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보듯이 하느님을 옆으로 밀어내고 우상을 따르게 한다. 망각은 하느님을 잊고 다른 신을 그 자리에 앉힌다.

 

체코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작가 밀란 쿤데라는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권력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이라 했다. 이러한 기억 투쟁은 진실을 위한 싸움이기도 하다. 진리(aletheia)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letheia)이다. 기억마저 조정되고 진실이 감추어지는 세상에서 기억은 저항이고 망각은 투항이다.

 

기억은 증언하게 하며, 망각은 침묵을 강요한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복원이 아니다. 기억은 공감(compassio)을 불러일으킨다. 아파하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며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여 ‘한마음’을 이루는 연민이 바로 공감이다. 잊지 않고 아픔과 슬픔을 기억하고 서로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 슬퍼하는 능력을 제거해 버린 ‘무관심의 세계화’를 극복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가 분명히 선언했듯이 악을 이기는 것은 선이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악을 악으로 이긴다면, 그것은 그 나물에 그 밥인 셈이다. 우리의 정치가 매력이 없는 이유가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머리, 가슴, 다리로 이어지는 여정

 

김수환 추기경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며, 그 여행을 마치는데 칠십 평생이 걸렸다고 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머리가 아닌 마음, 공감의 능력에서 비롯한다는 말씀이리라. 영성의 길이다.

 

얼마 전 타계한 신영복 선생은 한 발 더 나아간 여정을 전해준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다시 발까지의 여행이 우리의 삶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만 못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발 좋은 사람만 못합니다.” 루쉰은 누군가 먼저 걸어가고, 또 뒤따라 가면서 길이 생긴다고 했다. 그 길은 희망과도 같은 거라며 발품을 팔라고 했다.

 

세월호의 아이들에게도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도 “가만히 있으라.”는 이 무례한 시대에, 머리와 가슴을 거쳐 다리로 이어지는 여정을 재촉한다. 하지만 길은 나서기도 쉽지 않고, 길을 나선 이들은 언제나 갈림길에서 망설인다. 그리스도인들이 머리에서 두 뼘 남짓한 가슴까지의 거리를 쉽사리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머리에서 다리까지의 여정은 너무도 멀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자. 먼저 걸어간 시대의 스승들이 있다. 그 스승들을 기억하자. 아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철저한 자기 헌신을 통해 파스카의 신비를 보여주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가? 그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온 미래’를 보지 않았던가? 스승에 대한 기억들은 제자들을 부끄럽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기억은 지배자들에게는 위협적이었다. 기억은 공감이었고, 적극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한파가 꺾이긴 했지만 여전히 밤은 깊고 아침저녁으로 냉기가 느껴지는 이때, 믿음의 내용을 기억하게 해주신 노사제의 건강을 빈다.

 

* 오민환 바오로 -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공부하였다. 현재 기쁨과희망 사목연구원 연구실장으로 있으며, 신앙의 희망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3월호, 오민환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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