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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라보는 현대세계 안에서의 인간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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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47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라보는 현대세계 안에서의 인간 위기

 

 

현대를 살고 있는 인류의 삶은 역사의 경험으로부터 철저하게 드러난 전쟁과 비참, 압제, 더 나아가 인간 역사의 발전을 뒷걸음치게 하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죄스런 실재와 함께 심각하게 얽혀져 있다. 제 1,2차 세계 대전과 엄청난 파괴, 소위 말하는 일치를 위해 노력한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나타난 숱한 오류들을 겪고 난 오늘날의 시각은 사실상 인류 역사의 미래를 그리 낙관적으로만 보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현실은 창조신학이 말하고 있는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의 본모습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인간과 인류의 역사 안에서 보여지고 있는 이러한 상반된 모습에 대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즉,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첫 회칙인 {인간의 구원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특별히 금세기에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 영역에서 이루어진 전대미문의 거창한 진보가 또한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밝혀 보이고 있지 않은가? 급속한 공업화 분야에서 빚어지는 자연 환경 오염의 위협이라든가, 끊임없이 거듭거듭 발생하는 무력 충돌이라든가, 원자탄, 수소탄, 중성자탄 및 이와 유사한 무기들의 사용으로 자멸할지도 모르는 전망 등 몇 가지 현상들만 지적해도 충분하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서 거창한 진보를 이루었지만 그러한 진보가 이미 인간에게 위협이 되어버렸다는 현실에서 진보의 개념 자체에 대해 충분히 숙고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이미 이러한 진보 개념은 현대 세계 안에서 일종의 죄라고까지 말한다 하더라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자연, 혹은 자연환경을 거슬러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던가 그 심각한 피해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자체는 그리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 심각한 현상은 모든 인간을 거스르는 하나의 거대한 불의의 형태로 이 세상 안에 등장해 있기 때문이다. 구원 신학은 창조를 기만하고 자연을 기만함으로써 자연을 거스르는 무분별한 횡포나 남용을 제거할 중차대한 임무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 안에서, 현대세계, 곧 세속 사회에서의 죄스런 모습을 형성하고 있는 일종의 소외가 인간에 대해 가하는 위협들을 먼저 살펴보고, 그런 다음 현대사회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윤리적 가치를 재정립하기 위해, 사랑에 봉사하는 정의를 가능하게 하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살펴보겠다. 

 

 

1. 종교 질서에 대한 위협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고유한 사목 경험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기초하여 현대 세계에서 대두되고 있는 하나의 위기로서의 무신론이 가져오는 혼란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특별히 교황은 종교가 정치적으로 희생되면서 그 여파로 무신론이 팽창하고 있음을 직시하면서 종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무신론적 현상에 대해서도 심각한 우려를 나타낸다. 

 

1.1. 무신론과 종교 

 

1.1.1.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에서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은 현대 세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무신론적 현상들을 열거하면서, 그 무신론적 현상의 원인들 중의 하나로 인간을 만드신 하느님께서 마땅히 차지해야할 자리에 “인간적 가치를 부당하게도 절대시하여” 그 자리를 빼앗고 "그것을 신격화하는 데서 생기는 경우"를 지적한다. 무신론의 여러 형태들 중에는 사실상 "인간의 구원을 경제적 내지 사회적 해방에서 기대하는" 거대한 집단적 형태를 무시할 수 없으며, 이러한 형태의 집단은 "종교가 본질적으로 인간 해방에 장애거리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종교가 허황된 후세 생명에 대한 희망을 일으켜 주며 인간을 지상 국가 건설에서 외면케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미 이러한 형태의 무신론이 세계 여러 나라, 여러 지역에서 점점 확산 일로에 있듯이, "이런 이론의 신봉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지역에 있어서는 종교를 맹렬히 공격하며 특히 청소년 교육면에서 공권이 장악한 모든 탄압 수단을 다하여 무신론을 선전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심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공의회가 무신론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의 언급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명백하다: 즉 "하느님과 인간에게 충실히 봉사하는 교회가 인간 지성과 공통 경험에 반대될 뿐 아니라 인간을 고귀한 천품(天品)에서 추락시키는 이같은 유해한 이론과 운동을 마음 아파하면서 단호히 배격"하고 있음은 과거나 현재나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사목헌장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교회는 세상 종말에 대한 희망이 지상 사명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새로운 동기를 주어 지상 사명 완수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와 반대로 하느님께 기초를 두지 않고 영생에 대한 희망이 없게 되면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존엄성은 심한 상처를 받을 것이며 생명과 죽음, 죄와 고통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아 절망에 빠지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이 현대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여러가지 형태의 무신론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실상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자들의 성숙한 신앙만이 이러한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목헌장이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신앙의 증거자로서의 "신자들의 전 생활, 신자들의 속세 생활에까지 침투하고 정의와 사랑을 특히 빈곤한 사람들에게 대하여 실천케 함으로써 그 풍부한 활력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며, 마침내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주기 위하여 가장 요긴한 것은 신자들의 형제적 사랑이다. 즉 복음의 신앙을 펴기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협력하여 자신들의 일치의 상징으로 드러내는 형제적 사랑"이 요구된다. 

 

1.1.2. {인간의 구원자}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무신론을 인간의 기본권과 관련하여 두 가지로 압축하여 언급한다. 인간의 기본권이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품위를 지닌 인간에 그 근거를 두고 있고, 이 기본권들 중에는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가 반드시 포함됨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현대 세계의 현상 안에서는 그러한 기본권들이 특히 정치적인 이유에서 왜곡되고 침해되고 있음을 심각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우려와 함께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특별히 구원 신비의 신적 및 인간적 차원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인간의 구원자} 9항-10항과 세상 안에서의 교회의 사명을 강조하는 11항을 기초로 하여 그 해결책을 찾고자 시도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개인 생활이나 사회 생활의 영역 전체 안에서의 신적 및 인간적 가치 구현을 위한 교회의 사명을 그 어떤 것보다도 강조하고 있으며, 이 세상 안에서의 '종교의 현주소'를 자각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황은 현대인간의 위기를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인 무신론을 통해서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 종교들의 분포를 알려주는 이 지도에는 이 시대만의 특색을 이루는 전대미문의 현상이 두껍게 채색되어 있으니, 계획되고 조직적이고 정치체제로서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무신론을 위시해서 각양각색의 형태를 띠고 있는 무신론의 현상이 그것이다." 

 

이렇듯이 인간의 특성으로서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는 정치 체제로부터 조직적으로 스며들어 인간의 권리에 대한 소명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무신론에 관한 언급은 믿음의 대상이 어떤 것인가에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무엇이 인간성의 참된 가치를 들어 높여 주는가의 문제가 근본 문제일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부터 다시 들어 높여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가 현대의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과 자기가 들어 올려진 그 높은 경지와 자기 인간성의 탁월한 가치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실상 여러가지 비그리스도교 종교이든 혹은 그리스도교이든, 종교란 "태초부터 인간의 역사와 직결된 보편적 현상"으로서, 이를 통해 인간의 양심이 표현되어 왔다는 점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결국 종교는 인간과 관련하여 다음의 몇 가지 점들에 커다란 도움을 준다. 

 

1) 인간의 기본 권리로서의 종교적 형태를 통해 신앙을 실천하고 믿을 자유가 보장된다는 점. 

2) 종교의 다양한 역사적 형태에서 공동의 영적 가치들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3) "모든 종교들에서 나타나는 인간 정신의 위대한 유산에 함께 접근"할 수 있다는 점. 

 

이러한 지평과 함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참된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부정적인 현상으로부터 출발할 수도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각별히 인간 내부의 심원한 문제, 진정 인간다운 것을 유린하는 근본적인 불의와 부딪치게 된다. 참으로 불신앙, 무종교 및 무신론의 현상까지도 인간적인 현상인 것이며, 종교와 신앙과 결부시켜 보아야만 이해할 수가 있다." 결국 근본적인 불의의 문제는 종교와 신앙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신론은 특수한 방법으로 신성(神性)에 대한 인간적 사고와 경험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실재 경험의 부정적 현상에서 보여지는 무신론의 불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러므로 순전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무신론에만 공공생활과 사회생활에서의 시민권을 부여하고 그 대신 신앙인들을 원칙상으로나마 그저 눈감아 준다거나 이급 시민으로 취급하거나 심지어 시민권을 전적으로 박탈하는 - 이런 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일어나고 있다 - 그러한 입장을 수긍하기는 어렵다." 

 

신앙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상황은 사실상 인간을 당신의 모습에 따라 당신과 닮게 창조하신 하느님께로 향하는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요구와는 대치되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하는 것처럼 "순전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종교를 반대하며 각자가 지니고 있고 또 수호하고자 하는 선(善)에 대해서조차 신적 계시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기란 사실상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는 또 다른 각도의 인권이라는 차원에서, 관심있는 대화의 상대자들과의 격렬한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용의주도한 개념을 사용하면서까지 분명한 어조로 세상 안에서 드러나고 있는 편견에 대해서 언급하며 어떠한 특권도 요구하지 않는, 교회와 신앙인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저해하는 현상을 경고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인간의 삶 안에서 진정한 진보의 척도를 제시한다: "어느 정권, 어느 사회, 어느 체제와 환경에서도 이 권리의 신장은 그곳에 진정한 인간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근본적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1.2. 신앙의 위기 

 

우리 시대의 사회-문화적인 상황을 볼 때 종교와 무신론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는 숱하게 많다. 무신론은 아무런 방어 능력도 없는 군중들에게 폭력적으로 침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경우에는 사회-문화적인 상황을 더욱 적극적으로 자극하면서 사회 안에서 잉태되고 발전될 수도 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무신론적 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 시대에 많은 도움을 준다. 사목헌장은 오늘날의 세계 안에서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무신론의 다양한 형태를 비롯해서 그러한 형태들의 실제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소상하게 밝혀주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심각한 현상은 무신론이 현대의 시민 생활에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크게 방해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1.2.1. 경제적 및 사회적 문제 

 

현대 세계는 급속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체험하고 있다. 사회적 상황과 관습의 급속한 변화뿐만 아니라 거기에 따르는 의식의 변화, 나아가서는 인간의 영혼까지도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에게서 하나의 새로운 의식을 갖게된 현대 사회의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제 어쩌면 지금까지의 긴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새로운 의식은 시민 생활의 대부분의 영역을 침투하게 되면서 전쟁과 그 후의 혼란을 과감히 떨쳐 버렸고, 기술의 발달과 함께 수많은 새로운 기술의 발명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시민 생활의 영역에서는 타지역에로의 이주나 여행이 매우 자연스럽게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발달된 매스 매디어와 함께 시민 생활은 과거와는 달리 편리함을 누리게 되었지만 동시에 상상할 수도 없는 수많은 문제들을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변화된 모습은 지난 세기부터 시작된 산업화 시대가 가져다준 하나의 결과이다. 산업화 시대의 시작과 함께 시민 생활은 경제적인 풍요와 생활의 편리함이라는 긍정적인 면들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그들 대부분의 의식은 그들 자신이 점점 더 비참한 상태로 빠져들어 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그들 자신이 생산물의 노예로 전락되어가고 있음을 느끼며, 특별히 자기들이 생산한 재화의 분배에서 커다란 불의를 체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어떤 특정인, 어떤 집단을 거슬러 투쟁하는 새로운 형태의 행동들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러한 행동들은 나아가 그들이 겪고 있는 모든 조건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떠맡고 있다고 여기는 사회, 제도를 거슬러 투쟁하는 양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고통과 불행을 겪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으며 결국 그들은 그때까지 자신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관습이나 기준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와 20세기초에 급격하게 확대되기 시작하면서 탈그리스도교화의 기초가 되었고 결국은 시민들의 마음 속 깊이 무신론이 뿌리내리게 된 배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된 상황과 함께 사실상 시민들의 경제적 조건은 이미 눈부시게 향상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시민들의 의식을 이끌어내야할 필요가 있었으며 또 지금도 필요하다. 이는 분명히 한 시대를 살아왔고 또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만 하는 하나의 의무이다. 

 

이에 대한 라이문도 스삐아찌(R.Spiazzi) 신부의 관찰은 매우 예리하다. 이러한 경제적 및 사회적 조건들 때문에 결과적으로 시민 사회에 여러가지 복합적인 문제들이 야기되었고 또 현대 사회에 수많은 위기가 조성되었으며,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스삐아찌 신부는 다음의 몇 가지를 지적한다. 

 

1) 경제생활에 부여된 절대적 가치는 필연적으로 윤리적 상대주의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모든 것은 경제 생활의 요구들을 해석하고 또 거기에 봉사한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정부나 정당의 이름으로 합리화된다는 것이다. 

 

2) 사회적 이상주의는 번영, 재물, 안락에의 갈구라는 현상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임금과 가격, 요구와 방법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을 불러 일으켰다. 만일 그러한 긴장에 어떤 정확하고도 확고한 규정이 없다면 이는 분명 또 다른 중대한 문제들을 야기시킬 것이며, 인간의 윤리 생활의 관점에서는 결국 극단적인 현실주의가 대두되게 된다. 

 

3) 극단적인 비관론은 오랜 기간동안, 구세주가 오셔서 그러한 고통과 시련에서 해방시켜 주시리라는 메시아 대망 사상을 가지게끔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러한 상황에서는 어떤 한 인간이나 한 정당이 아주 쉽게 그 메시아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그래서 군중들은 쉽게 자신들의 영혼을 그에게 맡기기까지 하고, 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기도 한다. 

 

이러한 심리적-사회적 과정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윤리성의 타락 내지는 탈그리스도교화 현상이다. 이 현상의 영향은 결국 사회 개혁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반대하여 투쟁이 될 것이며, 마침내는 장애로 비추어지는 교회와 종교가 투쟁의 대상이 되고 만다. 

 

1.2.2. 오늘날의 종교적 위기의 원인 

 

특별히 오늘날 노동자들의 세계에서 발생되는 종교적 문제는 심각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 생활의 실천이 따르지 못하는데서 오는 문제와 함께 거기서 따르는 심리적 단절 현상은 기술의 문제로 제기될 수 있는 어려움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노동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현대를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단절 현상이며, 이러한 현상은 현대 세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문화적 발전 과정에서 늘 따라다니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사회학적 관점에서 필연적이다. 사회적 발전에 따르는 여러가지 사건이나 그 영향으로써 사회 발전은 계속해서 지속되고 또 다른 발전에 동기를 부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요한 바오로 2세가 {인간의 구원자}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을 무시하지 않고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한에서의 인간적이고도 그리스도적인 기준이다. 

 

이러한 사회 발전은 필연적으로 종교적 위기를 초래하는데, 특히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제시하는 다음의 7가지 근거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1) 가정의 결핍된 모습, 탈성화(脫聖化)된 모습: 과거의 서양 문화를 볼 때, 가정 교육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교적인 가정 교육이었으며, 따라서 종교적 및 윤리적 원칙에 매우 충실했던 가정이었지만 그러한 모습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2) 인구의 도시 집중과 그에 따르는 거대한 도시 형성은 시민들을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교회로부터 격리시키는 현상을 야기시켰다. 종교의 공동체적 의미는 아주 쉽게 희석되었으며, 종교심이 약화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본당이나 그 밖의 교회내의 여타 활동들은 더 이상 시민들의 삶에 중요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3)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노동과 고된 노동: 교회적인 질서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질서를 무시하면서까지 노동자들의 영혼을 갉아먹는 현상으로서 노동자는 생산의 도구가 되어 갔다. 상품 생산을 위해서 휴식은 포기해야만 했고, 교대근무나 시간 외 근무로써 생활의 질서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4) 각 개인과 가정, 그리고 주위 환경을 짓누르는 사회적 통교 수단: 이러한 영향은 집단화 내지는 획일화를 부추기게 되었고, 각 개인의 실제적인 삶을 되돌아볼 기회를 박탈하고 말았으며, 더 나아가서는 전통적인 종교 생활 안에서의 윤리 의식이나 행동의 타락은 시민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5) 안정과 번영에 대한 이상이 대중의 삶과 정신에 자리잡기는 하지만, 그들의 삶에 있어서 열정이나 희망에 비해 모험이라든가 창조적 의지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적 심리학 안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인간의 삶 전체를 통해서 모든 것이 계획되고, 조직될 때에는 이미 신적인 것에 대한 의미는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6) 근심과 고립: 시대의 특징적인 사회화 과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나타나는 여러가지 특별한 관계에 적응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공동체의 도움이나 중재, 나아가서는 하느님께 대해서도 자기 자신을 폐쇄시키게 된다. 

 

7) 새로운 사상, 새로운 욕구의 분출: 특별히 사회주의, 공산주의, 급진주의 국가에서 널리 확산되어 있는 현상으로서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간혹 반성직주의적인 사상이 깔려 있으며 군중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심을 직접적으로 분쇄하려는 움직임이 그 바탕을 이룬다. 군중들의 시선과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그들 내부에 존재하는 종교적 욕구와 감성을 제거하며, 표방하는 제도나 체제 자체를 종교의 대용품으로 제시하면서 군중들의 심리를 사로잡는다. 

 

현대 세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종교의 문제는 실로 복합적이며, 그렇지만 무신론의 의미를 밝혀 나가면서 그 문제들을 하나 하나 풀어나간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고, 때로는 오히려 착각 속으로 빠져 들어갈 위험도 함께 도사리고 있다. 오늘날의 이러한 무신론적 상황은 어쩌면 결국에 가서는 오히려 결실을 거둔다는 희망도 전혀 가질 수 없이 수고만 해야하는 오류를 낳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마음과 의지, 그리고 의식의 전환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무엇보다도 물질에 대한 영신적 사물의 우위를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현시대에 요구되는 것은 고유하게 교회에 속해 있는 것으로서의 윤리-종교적 행위의 분야로부터 이탈하지 않으면서 교회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보편성에 항상 호흡을 함께 하는 일일 것이다.

 

 

2. 개인 생활의 질서에 대한 위협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주된 관심은 현대 사회의 문화와 정치, 그리고 사회의 실제적인 구조 안에서 드러나는 인간에 관한 문제이다. 교황은 인간 각 개인이 고유하게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그를 도와주고 수용하기를 원하며 그러기 위해서 개별 인간이 지니고 있는 문제 안으로 파고 들어가기를 원한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가지고 있는 관심의 가장 근원적인 뿌리는 인격체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생활 질서 안에서 갖게되는 위기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곧 현대의 인간은 위기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모든 사상을 펼쳐 나가는 가운데 항상 교회의 관심은 반드시 구체적 인간이어야 하며, 곧 인간은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구체적 인간이 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들이란 주로 가정과 노동 안에서 제기되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가치와 관련되는 문제들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현세적 삶 안에서 자신의 존엄성과 실존 자체에 위협을 당하고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교회는 바로 그러한 인간을 위한 일시적이고도 영원한 구원의 보증이 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는 현 시대의 인간에게 복음적 윤리 - 복음적 윤리는 자연적 윤리가 더욱 발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 를 가르치고 있으며, 인간의 진정한 발전을 도울 수 있는 다양한 교육 사업과 사회 사업을 통해서 지속적이고도 효과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숭고한 존엄성을 기억하고 있으며, 이 존엄성은 교황에게 있어서 구원자 그리스도의 신적 품위와 교회의 구원 사명에 필연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을 관찰하면서 또한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불안하게 만들고, 또 인간으로서의 객관적 실재를 방해하는 현 상황을 결코 방관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실천적인 삶에서 인간의 삶을 비인간화시키는 소외된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기술적 진보라는 세 가지 위협을 직시하면서 인간의 존엄성 확립의 비젼을 제시한다. 

 

2.1. 소외된 노동으로부터의 위협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를 사는 인간들에게 가해지는 위협들을 직시한다. 인간 자신의 손, 인간 지성과 의지의 성향으로 나타나는 결과에 의해 인간은 스스로를 위협하는 커다란 힘으로 대두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이 다양한 활동이 빚어내는 산물이 그것을 만들어낸 인간의 손을 벗어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도대체 너무도 빨리 그리고 때로는 도저히 예측 못할 방식으로 '소외'를 빚어낼 뿐 아니라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간접적인 결과를 통해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간에게 역행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을 거스르고 있거나 거스르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지적하는 것은 인간에서 확실성을 주어야만 하는 고유한 것들이 오히려 인간을 두려움으로 몰아넣는 소외의 뿌리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인간의 다양한 활동이 빚어내는 산물들이 인간 자신을 거스르게 된다는 가능성은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광범위하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인간 실존의 현대적 드라마에서 본장(本章)을 차지하는 현상인 듯하다. 그리하여 인간은 갈수록 두려움 속에 살게 된다." 교황이 언급하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노동 관계에서의 경제적 범주에만 적용하여 인간 소외 현상을 이끌어내고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말하는 소외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서의 소외 현상이며, 교황은 이러한 현상이 인간의 실존적 삶의 여러 중요한 분야에서 점점 확대일로에 있기에 더욱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는 것이다. 

 

2.2. 소비주의로부터의 위협 

 

지상 재화의 무절제한 사용이라든가 소비주의로 인해 개별 인간의 삶에 위협이 가해진다. 사실상 "산업상의 목적뿐만 아니고 군사상의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지구의 개발, 장기적이고 진정 인본주의적인 계획의 범위를 이탈한 기술공학의 통제불가능한 발전이 인간의 자연환경을 흔히 위협하고,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에서 인간을 소외시키며,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이탈시키고 있다." 

 

시대의 징표로서의 이러한 현실을 그리스도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의 조명 하에 그 상황을 해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인간은 자기가 만든 것 - 물론 전부도 아니고 대부분도 아니지만 그 일부, 특히 인간의 재능과 창의성을 각별히 쏟은 것들 - 이 인간 자신에게 철저하게 반역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것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자기 파멸을 몰고 오는 수단이자 도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때의 파멸에 비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의 모든 이변과 파국은 시시해질 정도이다.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태초부터 땅을 복종시키라고(창세 1,28)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 어떻게 해서 인간에 반역하게 되는가? 어떻게 해서 그 능력이 불안과 의식적 무의식적 공포와 위협이 되어 현대인간 가족 전체에 침투하고 갖가지 측면에서 자태를 나타내게 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자명하다.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의 계획에 맡겨져 있는 존재임을 재인식한다는 것이다. 자연을 보호하고 다스리라는 창조주의 의지와는 달리 자연 환경을 놓고서 즉각적 이용과 소비에 유익한 것 말고는 다른 의미를 찾지 못하는 현대인의 소비주의적 사고방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인간은 단순히 자신에게 맡겨진 자연 환경을 개발이나 착취의 관점, 직접적인 소비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과학 기술의 발달과 함께 따라오는 현대 문명의 발달은 반드시 그러한 발달을 주도하고 있는 인간의 책임감 있는 의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의식이 항상 기술의 발달에 뒤쳐져 있는 불행한 현실에 대해 매우 불안하게 여기면서 그는 현시대를 사는 우리 인간들이 자신에게 맡겨져 있는 자연의 품위 있는 주인이자 보호자로서의 인간으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를 촉구한다. 

 

2.3. 기술적 진보로부터의 위협 

 

현대 사회 안에서의 인간 실존의 드라마, 곧 구체적이고도 고통스러운 삶의 경험으로 드러나는 여러가지 상황은 인간 자신을 단순히 육체적 삶이라는 도식을 통해서 인간을 왜곡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인간 자신의 윤리적 및 인격적 본질의 깊이를 버리지 않음으로써 비록 기술-과학적 진보로 인한 산물로부터라도 인간의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적 상황에서의 인간 조건을 직시하면서 진보라는 주제를 선택한다. 과학-기술적인 측면에서의 괄목할만한 진보는 인간의 참된 본성을 재발견할 수 있는 도움을 주기도 하였지만, 인간의 삶에서 발견되는 근본적인 문제에 인간 자신이 과감하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적 기초 위에서 해결되어야만 하는 인간의 소외는 결국 해결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지 않는가? 

 

요한 바오로 2세는 '진보'라는 현대적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인간을 장본인이며 주동자로 하는 있는 이 진보가 지상의 인간 생활을 모든 면에서 보다 인간답게 만들고 있는가? 그것이 인간 생활을 더욱 '인간에게 가치 있는' 생활로 만드는가?" 물론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긍정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교황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 질문은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에서의 응답을 요구한다. 이 진보의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이 정말 인간으로서 더 좋아지는가? 영성적으로 더욱 성숙하며, 인간성의 품위를 잃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책임감이 생기며, 이웃들,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마음을 열고, 주려는 마음과 모든 이를 도우려는 마음이 더 생기는가? 라는 인간의 본질적 차원에서의 구체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리 긍정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윤리적 실존이다. 왜냐하면 성숙이란 고유한 가치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며, 이 가치 때문에 성숙한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역사적 및 질료적 현실과의 관계에서 발생되는 여러가지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진보라는 개념이 관념적으로 공식화되고 완성되는 진보가 될 때, 즉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경험을 외면하는 심각한 오류의 도구로서의 진보라면 참된 의미의 진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 세계의 인간 상황은 참으로 윤리질서의 객관적 요구에서 멀리 떨어진 듯하며, 정의의 요구, 심지어는 사랑의 요청에서 멀리 떨어진 듯하다"고 염려하는 것이다. 

 

그러면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시하고 있는 현대인간의 상황은 어떠한가? 교황은 자신의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에서 이 주제를 다루면서 현대의 인간이 겪고 있는 위협을 재확인하고 있다. 사실상 이 시대는 과거에는 숨겨져 있던 위험들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 긴장과 위협으로 얼룩져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긴장과 위협이 이 세월 동안에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 위험을 여러가지 양상으로 확인시키며 과거의 환상에 젖어들게 허용하지를 않는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이러한 발언은 어쩌면 매우 비관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실제로 이 세상의 상황은 이미 커다란 염려로 우리에게 닥쳐온 것이다. 불확실과 두려움, 불안의 분위기가 점점 더 확산되고 있는 오늘의 모습이 아닌가? 

 

 

3. 사회 질서에 대한 위협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 세계를 살고 있는 인간과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원동력에 관한 일련의 조사 연구를 하고 있는 듯하다. 오늘날 사회 안에서의 인간 상황에 대한 교황의 사고는 이미 교황직 수락 강론에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현대 인간의 문제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주된 관심사가 되고 있으며, 그의 이러한 관심은 그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통해서 체계화되고 발전되어 드러난다. 

 

3.1. 무력 충돌에 대한 전망 

 

인류의 역사는 사실상 형제적 사랑과 평화의 역사였다기보다는 냉혹하고도 잔인한 전쟁의 역사였다고해도 틀리지 않다. 오늘날도 다만 과거와 비교하여 형태만 바뀌었을 뿐 전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재래식 무기들은 현대화되었으며, 게다가 핵무기화에까지 이르게 되면서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우리 인류는 이미 역사상으로는 처음으로 전쟁에 사용되었던 원자폭탄 투하라는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대국들은 핵무기 생산이나 사용을 결코 포기하려하지 않는다. 초강대국은 앞을 다투어 핵무기 경쟁에 뛰어 들고 있으며 결국 더욱 엄청난 파괴력과 피해의 예상과 함께 인류는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인류의 이러한 위협적인 현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는 인류의 부분적인 파멸까지도 의미하는 무력 충돌을 염려하고 있으며, 이는 결국 현대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위협의 원인으로 등장하게된 것이다. 기술적 방법들은 현대 시민사회의 의도대로 무력적인 전쟁을 위해 쓰여지게 됨으로써 인류가 자멸하게 되리라는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첫 번째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인간은 자신의 손으로 생산한 사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고 이미 강조한 바 있으며, 자기 자신의 재능과 창의성을 쏟아 만들어놓은 사물들이 인간 자신을 철저하게 반역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 그것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자기파멸을 초래하는 수단이자 도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때의 파멸에 비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의 모든 이변과 파국은 그저 시시해질 정도라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이러한 언급들은 곧 인류의 운명에 대한 교황 자신의 깊은 염려를 드러내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이 세계를 엄청난 탄약고로 만들려는 군비 경쟁을 반대하여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내리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하다. 

 

이러한 광적이고도 터무니없는 흐름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요한 바오로 2세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들을 기억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그 가르침을 더욱 강화한다. 명백한 사실은 군비의 축적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안전한 방법이 결코 될 수 없으며, 참되고 견고한 평화를 유지케하는 평균대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전쟁의 불씨가 될 뿐이다. 사실 군비 경쟁은 평화는커녕 오히려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결국 국가간의 견해 차이를 더욱 벌어지게 할 것이며, 무력 충돌의 위험은 더욱 증가하게 되면서 관계는 끝나버리고 만다. 

 

진정한 평화는 무기의 위협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평화는 인간들의 마음에서부터 뜨겁게 용솟음쳐야 할 것이며, 백성들간의 성숙한 신뢰에서부터 가능하다. 따라서 국가간의 책임이 반드시 요구된다. 국가간의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영토확장주의의 망상에서 깨어나면서, 모든 이념적 제국주의를 포기하면서, 그리고 전 인류를 위하고 전 민족을 지향하는 깊은 존경심을 기르면서, 늘 더욱 견고한 정치적 의지로써 군비 경쟁을 하루빨리 그쳐야만할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국제연합 개막 연설에서 모든 대륙, 모든 국가에서 참석한 과학자들에게 "핵전쟁이라는 전율할 만한 공포로부터 인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도록 호소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3.2. 인간에 대한 물질의 우위 

 

현대 세계의 인간에게 가해지는 위협은 단지 군비 기술의 방법으로부터만 가해지는 것은 아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존엄성과 침해받을 수 없는 권리에 도전하는 다른 위험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인간의 구원자}에서 교황은 물질적인 사물과 관련된 인간의 무질서한 관계와 문제에 대해서도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으며, 이는 다음의 문장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인간은 자신을 유기(遺棄)할 수도 없으려니와 자기에게 속하는 가견적 세계 내에서 자기가 차지하는 위치를 유기할 수도 없다. 그는 사물의 노예, 경제 체제의 노예, 생산의 노예, 자기 손으로 만든 사물의 노예가 될 수 없다. 순전히 유물론적인 문명은 인간을 그러한 노예 처지에로 몰락시키고 만다. 때로는 이것이 그 선구자들의 의도나 전제 사항에 역행한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결국 그렇게 귀결된다."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의하면 이러한 문제는 "인본주의적 선언문들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물질의 우위성을 인정하는" 유물론적 사고 방식이 침투된 현대 시민사회에 가해지는 새로운 위협의 또 다른 유형이다. 

 

국제연합 선언문 서문에서는 국제 연합 국가들의 국민들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통해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고 장엄하게 선포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실을 직시할 때, 물질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오염된 시민 사회는 인간보다도 물질에 더 우위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사회는 인간의 완전한 발전보다는 사물의 양적 증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갖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에 있어서는 존재보다는 소유가 더 중요하게 드러나고 만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기술적 진보는 당연히 물질적 번영과 경제적 성장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존재보다도 소유가 더 우위를 차지하는 이러한 사회 모습은 그리스도교 인간학의 시각에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가졌느냐에 있지 않고 어떤 인간이냐"에 있으며, 사물을 소유한다는 것이 결코 인간의 기본적 가치를 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또한 경제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어 진보를 꾀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교회의 대 사회 문헌들은 결코 진보에 있어서의 이러한 면을 간과하지 않는다. 인간적 발전이란 반드시 총체적이어야만 하며, 이는 인간, 곧 모든 인간의 발전을 지향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3.3. 자유의 상실과 압제에 대한 두려움 

 

현대의 인간이 가지는 불안은 더 나아가서 압제의 희생이 되고 또 자유를 상실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1) 먼저 오늘날 인간이 가지는 불안으로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사회적, 국제적 차원에서이든 주위로부터의 폭력, 압제의 희생물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들 수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언급한다: "현대인은 그러한 사회 형태가 창안해 낸 수단 방법이 사용됨으로써 사회와 국가가 다른 개인과 환경과 사회의 권력 남용의 희생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 떨고 있다." 

 

지구상에는 아직도 기아와 영양실조, 비참한 상황 등으로 버림받는 수억의 인구가 있다. 아마 이러한 현상은 현대의 인류가 현재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스캔들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더구나 각국의 정부들이나 수많은 발전 재단들, 또한 소위 말하는 선진국들이 그러한 스캔들을 올바른 방법으로 극복하려고 충분히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인구 증가를 축소시키려는 의도라는 의심이 들 정도의 부적절하고도 불균형적인 방법들을 쓰고 있다는 것은 더욱 심각한 스캔들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명백히 폭력의 한 형태이며 시민의 자유와 존엄성을 심각히 침해하는 것이다. 

 

어느 지역에서는 이미 독재 혹은 전제주의적인 통치 형태로부터 계획적, 체계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힘으로써 인간은 이미 전대미문의 폭력과 압제의 대상이 되고 말았으며, 사회-문화적 및 민주적 차원에서 이미 모든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 인권으로서의 평등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버렸다. 

 

2) 또한 특별한 양상으로 현대의 인간은 인간이 가지는 최고선으로서의 자유를 상실하고 있다는 두려움이 현대 사회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그리고 종교와 학문의 자유는 거룩하며, 따라서 결코 침해받을 수 없는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는 자유로움의 특성을 지닌 인간 본성 안에 뿌리를 둔다. 따라서 인간 및 시민 사회의 문명화에 대한 노력은,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창조성, 인간적 의식, 영적 능력들에 대한 권리들이 사회-정치적 삶을 통해서 충분히 보장받기 위한 노력이 세기에 걸쳐 있어온 것이다." 그렇지만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늘날의 여러가지 세계 상황을 직시할 때, 세기에 걸친 그러한 노력들이 결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 모두가 바로 이러한 위협과 폭력에 대한 증인들이며, 이러한 위협들에 대해 상급 기관에 호소할 길도 없으며, 효과적인 치유방법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고 염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상의 모든 국가에서 위에서 언급한 인간의 기본권으로서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적 형태는 사실상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그러한 법적 장치가 있기는 하지만 드물지 않게 자유의 사용을 방해하는 사회구조가 아직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곧 그러한 사회 구조에서는 기본적 자유를 원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자녀 교육이라든가 직업적 책임의식 그리고 사회적 발전의 고유한 가능성을 위태롭게 하는 사람들로 여김으로써 그들을 제 이, 혹은 제 삼 계층의 시민으로 전락시키고마는 치명적인 결과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여러가지 이유로써 소위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평화라는 미명하의' 예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인간들은 권력을 가진 자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 길들여지면서 아무런 불편없이 그 권력에 봉사할 준비가 되고마는 것이다. 

 

인권에 대한 폭력이라는 관점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부단히 존재하는 고문을 예로 들 수 있으니, 당국자들이 지배와 정치적 억압의 수단으로 이 고문을 조직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당국자들의 하수인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서 이 고문을 자행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육체적 및 심리적 고문은 사실상 몇몇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잔존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정치적 혹은 사상적 압제의 수단으로서의 모든 종류의 고문이 인간에게 가해진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방법이 이 지구상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치욕스러운 일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고문은 인류를 거스르는 하나의 범죄이며, 고문을 당하는 사람보다는 고문을 자행하는 사람을 더 오염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교황은 특별히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차원에서 육체적이든 혹은 윤리적이든 모든 종류의 고문을 단죄하는데 있어서 단호하다. 그 이유는 고문이 "본질적으로 인간다운 것을 더욱 파괴시키는 위협이요, 진리와 자유를 향유할 남녀 인간의 권리와 인격의 존엄성과 관련되는 위협"이기 때문이다. 

 

3.4. 물질적 재화의 불공정한 분배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을 통해서 볼 수 있는 현대 세계 안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간에 대한 또 하나의 커다란 위협은 물질적 재화의 분배에 있어서의 불의이다. 

 

교황은 국제 연합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다. 인간의 권리들을 거스르는 체계적인 위협의 첫 번째 유형은 총체적인 의미에서, 지구 전체나 각각의 국가에서 불의로운 모습으로 공공연히 나타나고 있는 물질적 재화의 분배 문제로 좁혀진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에서 지상의 재화를 소유하고 그 재화를 이용하는데 있어서 드러나는 불평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매우 강한 어조로 비난한다: "부유하고 포만한 인간들과 사회들이 풍족하게 살고 소비풍조와 쾌락에 빠져 있는데 바로 곁에서는 똑같은 인류 가족의 인간들과 집단들이 기아로 고통받고 있다. 어머니의 눈앞에서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아기들이 있다. 세계 여러 지역에는, 사회 경제 체제의 여러 분야에서 전체가 빈곤과 결핍과 저개발에 시달리는 지역이 있다. 이 사실은 전세계적으로 다 알려진 사실이다 개인들 사이, 국가들 사이의 불평등 상태가 아직까지 존재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날로 증가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교황의 이러한 언급은 현대 세계의 비참한 실상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폭로와 함께 교황은 국제 연합에서 이 비참한 현실 세계가 지니고 있는 경제-사회적 체제의 유효성을 가름하는 윤리적 척도를 제시한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국제 연합에서 제시하고 있는 척도란 지배적이고도 제국적인 본성이 결코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본성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에 대해 가해지는 다양한 형태의 착취를 최대한으로 방지하고 변경시킬 수 있는 능력을 그 척도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며, 그럼으로써 노동을 통해 재화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산의 전체 과정과 사회 생활의 전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노동자 및 시민들의 참여가 가능하게 함으로써 인간을 인간답게 보장해 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질의 분야에서 인간의 권리에 대한 또 다른 여러 위협이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각 사람들과 집단 사이에서, 또 다른 측면에서는 부자들과, 기아와 질병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 일자리를 잃고 생계의 위협을 받으면서 비참한 삶을 꾸려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불균형에서부터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여기서 또 다른 위협의 원인이 제기되는데 곧 시민들과 단체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긴장이 그것이다. 이는 재산권으로부터 노동이 분리되면서 제기되기 시작했고,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의 선(善)을 위해 노동한다는 확신 없이 노동의 의무만을 강조하는 생산 체계 안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데서 제기된 문제이다. 

 

이외에도 재화의 분배에 있어서, 그리고 각 개인들, 가정들, 사회 단체들이 하는 일에서 향유하는 즐거움에서도 점점 더 심화되는 불균형의 모습을 본다. 이러한 모습은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불균형은 소위 말하는 제삼 세계, 제사 세계의 국가들에서 더 심각하다. 일인당 평균 소득이 가장 밑바닥에 있고, 생활 수준을 조금이라도 더 올리기 위해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나라들, 기아와 질병이 곳곳에서 맹위를 떨치고, 기본적인 치료조차 받을 길이 전혀 보이지 않으며, 문맹과 극도의 실업에 시달리는 국가들이 안고 있는 불균형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현대인간의 불안에 찬 염려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이며, 따라서 이러한 불안에 대한 철저한 해결이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현대의 모든 인간은 결국 이 해결을 강요당하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것이다. 실상 이러한 현대인의 요구는 너무나 절박하며, 따라서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스도적인 자비가 요청되는 시대이다. 그리스도적 자비라는 시대적 요청은 실상 "인간적인 것을 정말 깊이 존중하는 정신에 입각하여, 상호 박애의 정신에 입각하여 인간들 사이에 상호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서"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인간에게 실존적 고뇌를 안겨다주는 여러가지 위협들, 그리고 자신의 삶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참된 모습을 고양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노력들, 이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이 현대 사회의 인간 모습이다. 

 

 

4. 현대 세계 안에서의 정의와 자비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선은 모든 인류 위에, 더 정확하게는 드라마와도 같은 현 시대의 역사적 상황, 즉 항상 더 고뇌에 찬 불안과 위기가 짓누르는 현대인간의 삶 안에서 전개되는 인간적 조건 위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교황은 이 시대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하여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적 시각을 찾고자 노력한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다음 발언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현대의 사고방식은... 자비의 하느님과 상치된 듯 하며, 자비라는 이념 자체를 생활에서 배제하고 인간 마음에서 제거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상 전대미문의 과학과 기술의 거대한 발달을 맞아 땅의 주인이 되고 땅을 굴복시켜 다스리게 된 인간에게는 '자비'라는 말과 개념이 매우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교황의 이러한 지적은 오늘날의 사회는 인간을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되돌려주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회를 창조하는 특수한 연결고리, 즉 과거와 비교하여 하나의 새로운 분야를 차지한 정의(正義)가 함께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4.1. 우리 세대의 양상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으로서의 사회성과 관련되는 몇 가지 기본원리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성이란 정의(正義)의 시각과 함께 하는 의식적이고도 보편적인 연대성으로 정의될 수 있다. 

 

사회성에 대한 이러한 정의(定義)는 특별히 교황 요한 23세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사회 분석', '사회 투시', '사회 진단', '사회적 현실의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는 여러가지 사회 측정 방법을 통해서 더욱 신빙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사회 진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교황은 기술 진단 혹은 기술 측정처럼 이해되는 것을 완전히 탈피하는 한 방법으로써 세계의 양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 세계를 진단하기보다는 현대 세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확인시켜 주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의 그러한 작업은 그가 사용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솔직하고도 직접적인 표현을 통해서 더욱 잘 드러난다: "현세대는 자기네가 특권적 위치에 있음을 안다. 진보는 수십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꾸던 헤아릴 수 없는 가능성들을 현세대에게 제공하고 있다... 인간은 대자연 위에 자기 능력을 크게 확장하였고 사회적 행동 법칙에 관한 보다 깊은 지식을 획득하였다. 보편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증진됨으로써, 인류의 단일성을 더 분명하게 각성함으로써, 참다운 연대감 속에 상호 의존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인위적인 지리적 분할과 국가적 인종적 한계를 초월하여 형제 자매들과 접촉을 갖고 싶어하는 소망과 그 가능성이 많아짐으로써 개인사이나 국가간의 거리가 해소되거나 아예 제거되고 있음을 현대인은 목격해 왔다. 현대의 젊은이들은 특히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새로운 물질적 재화만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지식을 폭넓게 나누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예컨대 정보 교환과 정보 처리 분야의 탁월한 발전은 인간의 창조적 역량을 신장시키고 타국민들의 지성적 문화적 부에 협조할 수 있게 한다. 새로운 홍보 기술들은 사건들에 보다 적극 참여하고 폭넓은 사상 교환을 촉진한다. 생물학, 심리학, 사회과학의 업적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부요함을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세대의 상황 안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의 질문을 제기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후 15년의 세월이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긴장과 위협의 양상을 조금이라도 감소시켰을까?" 스스로 제기한 자신의 질문에 교황은 또한 스스로 대답하기를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세대에 대한 확정적인 판단에 대한 책임은 누가 떠맡아야 하겠는가?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시대를 사는 인류에 대한 부정적인 양상을 긍정적, 혹은 자비에 대한 요청으로 바꾸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 세상은 공동 책임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써 정의의 민감한 면에까지 응답하기를 원하고 있지만 실상 정의에 대한 의식은 정의의 결핍을 그대로 드러내는, 점점 더 증가하는 불안과 함께 왜곡되어가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정의 사상에서 출발하고 개인들 사이에 그리고 집단들 사이와 인간 사회 사이에 정의 구현을 도모하는 프로그램들이 왜곡 당하는 일이 흔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정의 사상을 계속 내세우면서도 다른 부정적인 세력들이 정의 위에 우세를 떨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증오와 야만성까지 보인다"고 한탄한다. 이는 분명 정의의 본질과 상반될 뿐아니라 정의 실천을 왜곡하는 일이다. 정의 사상의 악용과 왜곡은 "인간 행동이, 비록 정의의 이름으로 수행될지라도, 정의 자체로부터 얼마나 크게 빗나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남는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이러한 관찰은 결국 사회 안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정의의 개념이 사회에 제공해 주는 것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원리가 요구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4.2. 정의의 이상 

 

4.2.1. 정의, 물질적 재화, 그리고 시민의식 

 

정의 개념은 매우 광범위하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도적 서한 {팔십주년}에서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재화의 재분배에 있어서 보다 완전한 정의의 구현"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1971년 '세계의 정의'라는 주제로 열린 주교 시노드의 머릿말에서는 "정의를 위한 행동과 세계 개혁 활동에의 참여는 복음 선포의 본질적 구성 요소임이 명백하다. 즉 인류를 구원하고 온갖 억압에서 해방시켜야 할 교회 사명의 일부"라고 천명하고, 더 나아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우리의 사명은 오늘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의 전인적 해방을 위하여 몸 바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사실 사랑과 정의에 관한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세계 정의 구현을 위한 활동에서 효과를 보이지 못한다면, 현대인들이 그 메시지를 믿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여기서 정의가 사회의 내적인 면에서 어떠한 작용을 하는가가 조명된다. 곧 여기서 이해되는 정의는 "인간 자신이 의도하는 바대로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 있도록 각각을 일치시키는 방법을 통해서 각 개인과 사회의 내면적인 관계들을 규정한다"고 볼 수 있다. 정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서부터 정의는 "가치에 개방된 행위", "'너'가 지니고 있는 가치처럼 '나'가 지니고 있는 가치에 대한 모든 요구들을 수용하기 위한 준비"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이렇게 정의는 "윤리덕의 최상위"로 이해될 수 있으며, 따라서 정의는 개인과 가치에 대한 윤리적 사랑을 그 힘의 중심으로 가지게 된다. 

 

4.2.2. 정의의 성서적 원리 

 

정의에 대한 성서적 원리들은 특별히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 4장의 5-6항 전체를 통해서 다루고 있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 대한 예리한 분석에 잘 드러나 있다. 

 

이 해석은 두 가지 방법으로 시도되고 있는데, 곧 하강적 방법과 상승적 방법이다. 첫 번째 방법 안에서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포기에서부터 나타나는 부정적인 효과들이 서술되고 있는데, 이는 모든 시대를 통해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재산을 물 쓰듯 낭비하는 사람, 온갖 곤궁과 기아 중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게될 때까지 비참한 생활에 허덕이는 사람의 모습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모두 잃어버리고 돼지우리를 치면서 돼지 먹이로 배를 채우는 이 아들의 모습을 통해 볼 수가 있다. 상승적 방법은 인간의 내면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존엄성 상실에 대한 의식은 탕자로 하여금 극적으로 소유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만들고 있으며, 최소한 탕자에게 생동하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첫 번째 발걸음은 정의, 신념으로부터 결정된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돌아온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 행동 때문이라도 달라지거나 끊어지지 않는 법이고, 탕자가 각성한 것이 바로 그 사실이었고 또 이 각성이 그로 하여금 자기가 잃어버린 품위를 똑똑히 보게 만들었으며 자기가 아직도 아버지의 집에서 차지할 만한 자리가 무엇인지 솔직하게 따져보게 만들었다"는 점을 명백히 파악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회칙에서 보여주고 있는 성서적 분석은 정의의 기준과 그 위대함을 명백히 드러낸다. 여기서 드러나는 정의는 곧 다른 사람과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에게 속해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또한 다른 측면에서 정의는 다른 사람을 결코 '타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너'는 베푸는 행위에 있어서의 단순한 집행 대상일 뿐이며, 따라서 외적 재화 위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관계에 대한 익명의 중개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과 함께 우리는 정의에 대한 몇 가지 성서적 원리를 취할 수 있겠다. 

 

1) 정의는 인간과 관련되는 그 어떤 것으로서, 여기서 인간이란 초자연적 생명에 대한 소명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할 뿐아니라, 죄의 상태와는 독립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2) 정의는 주고받는 행위에 있어서 익명의 관계에 놓여 있다. 

3)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평등의 법칙이 작용하는데, 평등은 특별히 교환정의에 있어서 엄격히 적용된다. 

4) 정의의 대상은 객관적인 외적 선익이며, 엄격히 정의의 근본적 관계 위에 자리 잡아야 한다. 

 

4.3. 사회 생활 안에서의 정의와 자비 

 

4.3.1. 정의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계속해서 돌아온 탕자의 비유 안에서 아버지가 보여주는 특징적인 모든 면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아버지의 외적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는 내적인 모습은 비유의 전체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신뢰이다. 즉 아들을 맞아들일 준비, 기쁨의 축제, 사랑의 열정으로 아들을 맞으러 달려가는 모습, 집 나간 아들에 대한 염려, 아들과의 동등한 관계임을 보여주는 모습, 그리고 선으로써 악을 이기는 아버지의 태도에서 '신뢰'를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이 신뢰로써 우리는 무엇보다도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의 창조적 권능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성서적 분석과, 또 이미 살펴 본 역사적 분석을 통해서 성서적 및 신학적 반성이 서로 일치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과거와 우리 시대에 걸친 이같은 경험으로 미루어, 정의만으로는 족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인생의 제반 차원에서 사랑이라는 저력 깊은 힘이 인간 생활을 형성해 나가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정의라는 것이 곧 정의 자체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여기서 정의와 사랑, 정의와 자비 사이에서 여러 문제들이 발생될 수 있고, 또 과거에도 이에 대해 여러가지 문제가 있어왔다. 그러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법학자들에 의해서 세밀하게 분석되어 오던 이 문제들은 그리스도교의 등장과 그에 따르는 복음 선포의 결과로 단 하나의 메시지로 통일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개인 혹은 사회 생활 안에서의 사랑의 우위성이라는 메시지이다. 

 

정의를 추구하는 현대의 인간은 따라서 사랑에 대한 신적 메시지를 지향하는 종교적 사고와 반드시 만나야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자비의 영역에는 반드시 정의의 구조가 들어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는 사회 안에서의 철저한 윤리적 생활이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창조하며 구원하는 사랑에 인간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삶을 의미한다. 

 

4.3.2. 정의의 실현으로서의 자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정의와의 관계 안에서, 그리고 법적이고 사회학적인 평등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적 가치에 대한 책임의 차원에서 사랑의 역할을 조명함으로써 자신의 가르침을 더욱 견고히 하며,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통해서 그는 정의의 동인(動因)이며, 정의를 더욱 힘있게 하고, 또한 완전하게 하며, 정의를 실현시켜주는 사랑의 형태를 자비라고 천명한다. 

 

하느님의 자비는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드러난 일종의 사회적 체험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네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짓고,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엄하게 질책한다.(판관 3, 7-9) 그리고 백성들은 회개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새로이 찾게 된다.(1열왕 8, 22-53)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당신 백성과 계약을 새롭게 체결하고, 또한 분노를 끝까지 두지 않고 자비를 베푸시는 데 항상 너그러우신 하느님으로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미가 7. 18-20) 이러한 관계에서 자비는 단순히 일회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고, 깨어지고 다시 회복하는 관계가 반복되는 역동적인 관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신약성서를 통해서 드러나는 자비의 개념은 더 단순화되었고 또 보편화되었다. 단순히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이사 1,18)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하느님과 모든 인간과의 친밀한 관계로 확장되어 드러나며, 그 상대적 의미는 더 심화된다. 여기에 더 이상 주관적 주체라든가 수동적 주체는 없다. 자비는 이제 "성서적 용어로, 사랑 자체를 드러내는 양상 내지는 영역"이다. 

 

이렇게 자비는 사랑의 친밀한 한 관계이며,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과 사랑이신 하느님 사이에 맺어진 내적 계약의 의미가 구체화되는 하나의 체험이다. 또한 자비는 정의를 더욱 구체화시키며 인간 존엄성의 차원에서 평등을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상호 선익을 행한다는 의식 속에서 주는 자와 받는 자를 강하게 결속시킨다. 

 

이러한 지평 하에서 자비는 다음의 내용들을 포함한다. 

 

1) 정의의 일반적인 기준을 능가하는 자비로운 사랑과 정의의 구체적이고도 정확한 표현. 이로써 어떤 이해관계 없이, 그저 구체적 인간을 사랑하고 가까이 계신 하느님을 느끼게 된다. 

 

2)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자비로운 사랑의 영향 아래 부드러움과 민첩함으로써 모든 인간 관계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 

 

3) 더욱 넓은 시각에서 더욱 인간다운 세상을 위하여 사회-문화적 분야, 나아가서는 정치-경제 분야 안에서의 관계들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것. 

 

이렇듯이 사랑은 정의 위에 자리 잡는다. 이러한 사랑의 우위성은 "자비를 통해 명확하게 계시된다." 

 

현대세계는 인간의 삶에 다양한 긍정적인 면을 제공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또한 그와 반비례하여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정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과학과 기술의 현대적 진보는 과거 어느 시대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며, 실상 이러한 진보와 함께 종교적인 모든 영역은 엄청난 변화를 체험하고 있으며 현대 사회의 생활 영역에 이러한 변화가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며, 결국 현대인간의 삶은 급속한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에로 마음을 열게 하는 급속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대가 지니고 있는 불안과 염려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하루가 다르게 더욱 증가하고 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시하고 있는 것처럼 "현대의 원자무기 비축에 견주어 볼 때에 알력은 곧 인류의 부분적 자멸을 의미한다는 안목에서 인류의 존망 여부에 대한 공포"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상 현시대의 인간은 일종의 물질주의적 사회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난 위협과 위험 중에 살고 있으며, 인간보다는 물질에 더 우위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국은 인간적 삶의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그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와 {자비로우신 하느님}, 그리고 여러 차례의 담화문을 통해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의와 수많은 기본적 윤리 가치에 대한 위기 의식 속에 살고 있다고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기 의식과 엄청난 위협들 속에 살고 있는 현 세대는 무엇보다도 사랑에로 열려진 정의, 곧 자비가 요청되는 시대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인간의 참된 존엄성 안에서 인간 자신을 재평가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정의롭고 더욱 형제적 사랑이 넘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한 가장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 한다면 이 자비는 우리 모두가 의무적으로 취해야만 하는 길이다. 

 

결국 교회가 이 세대를 위해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곧 정의에 대한 열망을 우리 시대의 인간들과 함께 나누고 끊임없이 그리고 힘차게 그 열망을 지속시키는 일이며, 역사의 부정적 결과들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정의를 이 세대 안에 복음화시키는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강한 정신적 힘을 바탕으로 참된 의식의 변화가 요구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자비의 실천을 통해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를 촉구한다. 이웃을 위해 사랑을 소유하여야만 하는 사회적 및 정치적 범주에서의 보다 활력 있는 의식과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여, 가난하고 소외 받는 모든 사람들, 특별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온갖 종류의 우월감을 내어 던짐으로써, 자비의 실천은 구체화되고 이 사회에 새로운 빛을 던져줄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서 무한히 열려 있는 인간 실존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내면적인 측면을 제외한다면 인간은 결국 결핍 투성이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는 절대자, 신, 곧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자비는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이 될 것이다. 

 

[가톨릭 신학과 사상, 제11호(1994년 6월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이동익(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윤리신학)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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