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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교회사 공개대학1: 103위 성인의 현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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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3-31 ㅣ No.604

한국교회사연구소 상반기 공개대학 특강 지상중계 (1) 103위 성인의 현재적 의미

 

 

올해는 103위 순교자 시성 25주년을 맞는 해다.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김성태 신부)는 이를 기념해 '103위 성인의 생애와 활동'을 주제로 공개대학을 마련하며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신심과 성인 현양 열기에 다시 한 번 불을 지핀다. 본지는 12일 개강을 시작으로 총 12주간 진행되는 강의를 지상중계한다.

 

변우찬 신부가 103위 성인의 현제적 의미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한국의 103위 성인은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즈음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돼 성인품에 올랐다. 이 시성식은 교황이 로마 베드로 대성전이 아닌 한국을 직접 방문해 거행함으로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현지에서 거행된 최초 시성식이었기 때문이다.

 

 

I. 시복시성의 추진 이유

 

시복시성의 대상자 중에는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도 있고,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증거자도 있다.

 

그런데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있으면 됐지 굳이 시복시성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의 권좌(權座) 앞에서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전구해 주기를 청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더 본래적 이유는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완덕의 모범을 제시해 주기 위해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그 이유에 대해 "교회는 어떤 신자들을 시성함으로써, 곧 그 신자들이 영웅적으로 덕행의 길을 닦고 하느님 은총에 충실한 삶을 살았음을 장엄하게 선언함으로써, 교회 안에 힘있게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을 인정하고, 그들을 다른 신자들에게 모범과 전구자로 세워 줌으로써 희망을 북돋아 준다"(828항)고 명시하고 있다.

 

결국 교회는 시성을 통해 신자들이 누구에게 전구를 청하며 기도해야 하는지 또 누구를 성덕의 모범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말보다는 삶과 행동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증거자'보다는 '순교자'들이 시성된 탓인지 '성인'이라고 하면 순교자들을 먼저 생각한다. 사실 순교했다는 이유만으로 성인이 되지는 않는다. 순교는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는 마지막 단계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순교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고 증언하는 삶이다.

 

 

II. 순교의 의미

 

"순교는 신앙의 진리에 대한 최상의 증거다. 순교란 죽음에까지 이르는 증거를 가리킨다. 순교자는 자신과 사랑으로 결합된 그리스도,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한다. 순교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와 그리스도교 교리의 진리를 증언한다. 순교자는 용기 있는 행동으로 죽음을 참아 받는다"(「가톨릭교회교리서」 2473항).

 

그런 탓에 순교라는 말보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의 위주치명(爲主致命), 줄여서 '치명(致命)'이라는 용어가 본래의 의미를 더 잘 전달해 준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순교자 조건은 세 가지로 규정된다.

 

첫째, 육체적 생명이 희생돼 참으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간절히 죽기를 바라거나 죽음에 상응하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거나 또는 죽을 뻔했거나 죽음에 이르는 원인이 직접적이 아닌 간접적 원인으로 작용한 경우에는 엄밀히 말해 순교가 아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진리에 대한 증오 때문에 죽음이 부과된 경우여야 한다. 질병이나 그리스도를 위해 선택한 생활방식에서 비롯된 위험, 또는 과학적 탐구나 어떤 사상을 위한 투신과 같이 다른 동기로 죽는 경우도 순교는 아니다.

 

셋째,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지키려고 기꺼이 죽은 경우여야 한다. 그래서 나이나 정신 이상 등으로 이성을 사용할 수 없었거나 선택의 여지없이 살해된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만이 꼭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경우도 순교자로 여기고 있다. 마리아 고레티 성녀처럼 정결을 지키다가 죽임을 당한 경우도 있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하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피의 순교, 즉 홍색순교(紅色殉敎)라고 한다.

 

- 교회는 시성을 통해 신자들이 누구에게 전구를 청하며 기도해야하는지 또 누구를 성덕의 모범으로 삼아야하는지를 제시한다. 사진은 1984년 103위 성인 시성식 때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성인화를 축복하고 있는 모습이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순교의 의미는 계속 새롭게 해석되면서 확대됐다. △ 양심의 순교 △ 정결의 순교 △ 백색순교 △ 녹색순교 △ 땀의 순교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런 구분이 나타난 것은 초대 교회 순교시대가 지난 후 영적 순교로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강조했고 복음적 덕행인 청빈ㆍ순명ㆍ정결이 순교의 가치와 동등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 박해 시대가 끝나고 피 흘림의 증거가 공식적으로 불가능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구분에도 우리나라는 피의 순교만 강조해 왔다.

 

 

III. 한국 성인에 대한 공경이나 현양을 위한 노력이 있었는가?

 

실상 우리 신자들이 우리나라 순교성인에 대해 비중있게 생각하지 않은 이유에는 성직자들의 책임이 크다.

 

우선 '시성'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앞서 언급했듯 시성은 교회 안에 힘있게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을 인정하고, 그들을 다른 신자들에게 모범과 전구자로 세워준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28항). 그렇기에 왜 그들이 우리의 모범인지 더 알렸어야 한다.

 

순교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들이 지녔던 신심과 그로 인한 삶을 보여줬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현대의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어떻게 해야 그들이 지녔던 믿음과 용기를 우리가 보일 수 있는지 가르쳤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성인들을 기리는 행사에만 치중했다. 신앙대회나 현양대회 때로는 도보 성지순례 등 어떤 행사를 준비하고 거행했고 그것이 끝나면 역시 끝이었다.

 

둘째, 순교와 순교 신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순교란 물리적 죽음이 아니고 그것을 가능케 한 정신이다. 영원한 구원을 최고의 가치로 인식하고 이를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아깝지 않게 바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다. 그렇기에 순교는 죽음을 무릅쓴 신념의 행위이지 죽음 자체는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순교를 죽음과 연결시키려고만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에서 순교는 무엇인가?

 

현대에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순교가 불가능하게 하는 유혹-안일주의, 이기주의, 상대주의, 결과주의, 실리주의-이 더 많다. 이 유혹의 극복만이 순교신심의 현재화를 가능케 하고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이룰 수 있는 순교다.

 

셋째, 교육과 다양한 현양 방법이 진행되지 않았다. 지속적 교육의 부재는 순교의 의미를 곡해하게 만들었다. 순교의 의미와 현대에서의 순교도 가르치지 않았다.

 

현양방법에도 문제가 있다. 새 영세자들이 순교성인들 이름으로 세례명을 갖게 배려했어야 하고, 신설되는 본당의 수호자를 한국 성인들로 했어야 한다.

 

순교자들과 관련된 행사를 할 때 사전 준비와 사후 실천 방향을 고려해야 하는데 행사 자체에만 집중해 온 것도 문제다. 그러다보니 그저 사람들을 모아놓고 대회를 치룬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001년에 개최됐던 '신유박해 200주년'도 결국 신앙대회로만 마무리됐다.

 

올해도 역시 그렇지 않을까 걱정된다. 우리 103위 성인은 지금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평화신문, 2009년 3월 22일, 변우찬 신부, 정리=박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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