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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한국 사회 남성 중심주의의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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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478

한국 사회 남성 중심주의의 실제

 

 

1. 남성 중심주의는 왜 비판될 수밖에 없는가

 

한국 사회에서 남성 중심적인 가치 체계와 사회 구조를 비판한다는 것이 아직까지 쉬운 일은 아니다. 불과 20-30년 사이에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많은 부분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 변화의 양상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이미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음에도, 우리의 머리 속은 과거의 악습들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예찬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래도 고무적인 것은 가부장제 질서와 구조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데 일조하였던 종교계에서 인간의 존엄을 논할 때 여성도 끼어 주기 시작했고, 여성의 인간적 존엄성을 고려할 때 남성 중심적 가치 체계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대체 어떤 점에서 남성 중심적인 가치 체계와 사회 구조가 여성의 존엄을 훼손하는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일까. 만약 여성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인간성이 상실되는 데에 남성 중심적 체계가 주범이라면, 우리는 시대적 단절의 금단 증상을 각오하고 과감하게 구습(舊習)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글은 남성 중심주의의 문제점과 현실을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두고 기술하였다. 

 

1) 남성 중심주의의 특성과 여성의 존재적 가치

 

사전적 의미로 남성 중심주의(Androcentrism)란 ‘남성 중심성, 곧 남성적 기준에 바탕을 둔 지배적 문화가 지닌 일련의 가치 체계’를 뜻한다. 이는 곧 남성적 편견의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는데, 남성 중심적 기준으로 볼 때 남성과는 다른 여성의 생활 양상은 규준에서 벗어난 것으로 판단되고, 이는 ‘정상’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난 ‘그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문화적 정의 기준이 되는 것은 남성성의 속성들이고, 이러한 전제 속에서 여성은 ‘알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지는 것이다. 남성이 중심이 되는 가치 체계 속에서 여성은 언제나 타자로 특징지어질 뿐이다. 

 

남성적 기준은 ‘진리’를 대표하는 유일한 논리 체계로 그 동안 인정되어 왔다. 문제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남성 중심적 가치만이 ‘인정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조인된 세월은 남성적인 것 외에는 모두 ‘정상적이지 못한’, ‘열등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것으로 평가해 왔다. 이런 사고 방식의 연장선에서 여성적 특성과 가치는 남성 가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렇다면 대체 남성적 특성과 가치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보통 합리성, 지식, 이성, 객관성, 공적(公的), 문명, 권력, 강함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특성들은 그 어떤 개념보다도 우위에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런 남성적 특성과 가치의 범주에 들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생물학적 성(sex)이 유일한 관건이 된다. 

 

생물학적으로 남자라면 그 개인의 특성이 어떠하든지 ‘남성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한다. 반면에 생물학적으로 여자라면 일단은 ‘남성 중심적 기준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범주에서는 제외된다. 남성 중심적 가치 체계 속에서 생물학적 여자란 ‘덜 갖추어진 남자’로 ‘제2의 성(性)’이라는 신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여자라는 생물학적 성이 (남자와 같은) 인간으로서 존엄을 가진 존재로 인정되지 못했음은 자명하다. 

 

그 동안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존엄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수많은 혁명을 치러 왔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닌다.’는 평등의 명제마저 성별 불평등을 전제로 주장되었다. 인간이면 누구나 이성이 있고, 인간이면 누구나 자존과 자기 결정을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인간이면 누구나 자아의 독립과 성취적 욕구를 갖는다는 상식에 생물학적 여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여자를 인간이기보다 여자라는 생물체로 인식하는 역사 속에서 여성의 권리는 남자라는 인간과는 다른 기준으로 이해되는 통념을 형성하여 온 것이다. 

 

2)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비판하는가

 

남성 중심주의의 가치 체계는 기본적으로 이분법적 사고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분법적 사고는 모든 것을 획일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습성을 갖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수직적 우열의 논리로 끝난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은 대칭을 이루게 되고, 두 특성과 가치는 서로 조화될 수 없는 분리의 개념으로 나뉘어 우열의 자리에 배치된 후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 놓이게 된다. 남성적인 가치가 아닌 것은 열등한 것이고, 열등한 것이 우등한 것에 지배됨이 마땅하다는 논리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정당화시킨다. 남성 중심주의는 이분법의 구도 속에서 어떤 논리로든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사고의 틀 안에서 '다양함의 조화'라는 개념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분법적 사고 자체가 획일적 기준이 설정되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분법적 획일주의는 여성과 남성을 화해할 수 없는 이방인으로 분리시킨다. 여성과 남성을 서로 완전히 다른 생물체로 상정할 때 남성 우월성(male dominance)의 가치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녀 관계에 대한 분리주의적 관점은 남성 중심주의가 지닌 출발점이었다. 남성 중심주의는 표면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조화와 합일을 주장하지만, 이는 남성의 부분 집합이 되는 여성의 모습일 뿐 결국 여성은 남자라는 대푯값으로 드러나게 된다. 남성 중심주의에서는 생물학적 차이를 운명으로 결론짓고, 이분화된 성별 분업을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구분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에 앞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인간적 유사성이라는 부분은 가려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가치 체계는 사회의 건전하고 바람직한 성숙과 발전을 위하여 주장되는 여성과 남성의 조화와 동반자적 관계를 공허한 울림으로 남게 한다. 

 

다음으로 지적할 수 있는 문제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굳건한 믿음을 두고 있는 남성 중심주의가 해부학적 생식 구조에 근거한 생물학적 결정론을 바탕으로 인간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생물학적 준거를 들이댄다는 것은 참으로 천박한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차별들, 예를 들어 인종 차별, 민족 차별, 장애인에 대한 차별 등이 더 이상 역사에서 승인되지 못하는 비도덕적 행위라는 것이 확인되었음에도, 남성 우월에 바탕을 둔 남성 중심주의가 유지될 수 있는 기본적인 힘은 생물학적 다름(차이)을 차별의 근거로 하는 데서 나온다. 이는 생물학적 차이가 인간의 의지로 극복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여성의 열악한 현실을 운명 또는 본질적인 것으로 수용하고 이에 순응하게 하는 결론을 유도한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가지고 본다면 남성 중심주의는 여성의 인권 유린뿐 아니라 사회 제반의 인간 차별, 억압, 불평등의 논리를 종식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남성 중심주의의 현실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남성 중심주의가 유지되고 강조되는 현실은 일상의 어느 한 부분에 국한되지 않는다. 현실의 모든 틀이 남성 중심적인 것을 질서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 중심주의는 여성만을 피해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위치를 갖고 있는 남성을 소외시킴으로써 인간 전체의 문제로 확산된다. 한국 사회에서 고질적으로 드러나는 남성 중심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가지로 정리하고자 한다. 

 

1) 가족 내 남성 중심주의

 

(1) 집안에 남자가 있어야만 대가 이어진다:살인을 묵인하는 남계의 전통

 

한국 사회에서 남성 중심주의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가족 제도이다. 한국의 가족 제도는 철저한 남계 전통으로, 이는 부계를 통한 부권을 유지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호적 제도이다. 남자만이 성(姓)을 물려줄 수 있는 현행 호적 제도는 아들이 없으면 대가 끊긴다는 위기감으로 곧바로 연결된다. 문제는 현행 가족이 소자녀 핵가족 형태를 띠면서도,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아들을 두어야 한다는 남아 선호의 강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두 명의 자녀를 두면서 아들은 꼭 있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은 태아의 성별을 인공적으로 추려 내는 일까지 서슴지 않게 한다. 다행스럽게도 통계청에서 발표한 “99년 통계로 본 여성의 삶”이라는 자료에서는, 1997년 여아 100명당 남아의 출생 비율은 108.4로 84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세 번째 이후 아이의 성비는 남아 출생이 136.1로 여전히 남아 선호를 보이고 있다. 이 수치가 한국적 유교 전통이 강한 특정 지역으로 가면 더 심하게 벌어진다. 미국 인구 학회지 Demography는 지난해 발표한 문건에서, 선별 임신 기술이 발전하면 한국의 성비는 남아 출생이 169까지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성비 불균형의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주된 원인은 남성 중심축을 유지하기 위한 남아 선호 의식이고, 현실적 방법은 여아 살해이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성비가 거의 1:1의 비율로 나타난다고 보면, 한국 사회의 이러한 성비는 인위적인 통제가 다분히 개입되었음을 드러낸다. 그 통제란 생물학적으로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태아 상태에서 지우는 것을 의미한다. 참으로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여성의 인권 유린이다. 결국 남성 중심적 의식에 사로잡힌 남계 중심의 가족 제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살인이 방조되는 것이다. 한 해 평균 전체 여자 태아의 9%에 해당하는 3만 명이 모태에서 사망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올 4월 한 중앙 일간지에 광적인 남아 선호로 희생되는 여아 낙태의 문제를 다룬 기사는 한국 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부계 유지를 위한 여성 인권 유린의 현주소를 잘 나타내고 있다. 

 

주부 이모씨(35, 경기 고양시 주엽동)는 올해 초 아들을 낳았다. 한 딸의 어머니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씨는 지난 3년 동안 서울 강남 oo산부인과에 다녔다. 병원장은 “아들을 낳을 확률은 90%”라면서 먼저 위험 수당 8백만 원을 요구했다. 시술 방법은 간단했다. 배란기 측정으로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시간에 부부 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하루는 “오늘 오전 10시에서 낮 12시까지가 좋은 시간”이라는 병원장의 말에 남편 유모씨(37, 회사원)를 불러내 청소도 끝나지 않은 여관방에서 부부 관계를 가졌다. 그러고도 두 번이나 여아를 임신했고 그때마다 어린 생명을 지웠다. 세 번째 시도 끝에 아들을 낳기까지 병원비로 2천여 만 원이 들었다. 아들에게는 ‘이천만’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씨는 “내 신앙조차도 남아 선호라는 거대한 관습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했다.” 라고 털어놓았다.

 

(2) 부권 유지를 위해 묵인되는 가족 내 폭력 

 

권력을 유지하고 구성원의 합의를 끌어내기 위한 손쉬운 방법은 폭력의 사용이다. 가족 내에서 폭력 사용이 가능한 것은 사용 명목이 수단과 방법에서 발생되는 문제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남성 중심적 가족 제도가 용인하는 부권은 가족 성원에 대한 통제권, 더 나아가 아내의 신체적 소유권까지 포함한다. 남성 중심주의적 가치 체계는 여성이 남성의 권위에 종속되는 것을 정상적 질서로 상정하고, 이런 문화 속에서 남성이 여성을 통제하기 위해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곤 한다. 따라서 아내 구타가 폭행으로 이해되기보다는 훈육의 한 방법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사실상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들은 ‘아내가 맞을 짓을 했다.’ ‘때리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집밖의 사회 생활을 하면서 정작 맞을 짓을 한 사람에게, 때리지 않고는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도 폭력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에서 폭력을 사용했다가는 그 결과가 당장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정 내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쉽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이유는 때려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다는 안도감이 마음 깊은 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 짚을 수 있는 큰 이유는 피해자가 아무 힘을 발휘할 수 없는 무력자이고, 인간 권리와 가치가 보호되지 않는 사각 지대에 놓여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집 안에서 남편이 아내를 폭행하는 경우 어째서 아무 불이익이 없는 것일까. 이 또한 주된 요인이 남성 중심주의에 있는 것이다. 여자의 주인인 남자가 자신의 소유물인 여자에게 무엇을 한들 죄가 되겠는가. 여성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의 부속물쯤으로 여기는 남성 중심주의 속에서 아내에 대한 폭력은 소유물 처분의 한 방법으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가정 폭력, 특히 아내에 대한 구타가 남기는 결과는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다. 가해 남편의 과도한 폭력에 따른 여성 피해자의 죽음, 구타 피해 여성 또는 그 주변인에 의한 가해 남편 살해, 구타 피해의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여성의 자살 등 가정 폭력의 끝은 다른 사회적 폭력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또한 사회적 폭력이 근절되기는커녕 점점 흉포화하는 것도 분명 가정 폭력을 허용하는 현실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가정 폭력 문제 해결을 돕는 현장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은, 가정 폭력 문제를 방지할 수 있는 대책으로, 부부가 동등한 힘을 갖도록 균형을 유지하는 것과 아내 구타에 대한 사회적 통념의 근본적 변화를 꼽는다. 결국 남성 중심주의가 아무런 반성 없이 그 위세만을 드러내는 한,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가정 폭력의 문제는 끝이 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다음은 올해 일어난 가정 폭력의 두 사례이다.

 

ㅇ씨(45)는 친정에 갔다 왔다는 이유만으로도 남편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 주먹다짐과 발길질로 온 몸에 피멍이 들었고 흉기로 변해 날아오는 가재 도구에도 얻어맞았다. 그녀는 지난 1월 만취 상태에서 한바탕 행패를 부린 뒤 잠든 남편을 목졸라 숨지게 했다. 그는 ‘살부(殺夫)의 죄’에 따른 법적 사회적 속박과 생지옥과도 같은 남편의 폭력에서 해방된 영혼의 자유를 동시에 얻었다.

 

명문대 대학원에 다니던 ㄱ씨(24)에게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폭군이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성한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에게 맞아 어머니의 고막이 터지고 머리가 찢겨지던 날 ㄱ씨는 엉겁결에 아버지에게 ‘극단적인 응징’을 가했다. 가정 폭력의 처참한 끝맺음이었다.

 

2) 여성에 대한 끊임없는 편견과 고정 관념:공적 장소에서 여성 배제

 

남성 중심적인 가치 체계를 전제로 유지되어 온 지식의 전통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고정 관념을 정당화시키는 데 큰 몫을 해 왔다. 그 동안 남성 중심적 지식은 여성을 죄의 근원 또는 부정적인 존재로 여기거나, 생물학적 특성으로 여성의 가치를 제한하고, 비합리적 비이성적 존재로 생각함으로써 여성을 남성과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존재라고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과학이라는 허울 속에서 참으로 많은 성 편견들이 부추겨져 온 것이다. 

 

이런 통념은 여성을 나름의 사회적 능력을 지닌 하나의 개체로 보기 이전에, 여자라는 편견과 고정 관념에서 그 능력을 재단하고 평가 절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예를 잘 드러내는 것이 여성 노동의 현실과 우리 정치의 현주소이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취업은 물론 승진 등 기회가 제한되고 있으며 사회를 움직이는 제도와 관행은 온통 남자 중심으로 되어 있다. 

 

정치의 경우, 15대 총선이 치러진 1996년을 기준으로 우리 나라 여성의 국회 진출도는 3%에 불과했다. 스웨덴(40.4%), 노르웨이(39.4%) 등 선진 유럽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필리핀(11.5%), 인도네시아(12.6%) 등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 유엔 개발 계획(UNDP)이 계량화한 여성 세계화 지수를 보면 우리 나라는 73위에 머무르고 있다. 

 

여성과 남성의 학력 차이는 점점 좁혀지고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계속 늘고 있지만, 직장 내에서 하위 관리직인 대리급 이상의 남녀 비율이 9:1로 드러나고 있다. 관리직 진출에 여성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현실은 교육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여자 선생님들의 비율이 월등히 높다고 지적되어 온 초등학교의 경우, 여자 선생님의 비율이 이미 55%를 넘었는데도 여성 교장은 7%에 불과하다. 

 

이런 노동 현실에 대해 사회에서는 여성의 직업 의식과 직장 생활에 대한 문제를 짚어낸다. 남성에 비해 근무 기간이 짧고 결혼이나 출산과 함께 사표를 내는 경우가 많으며, 전문 인력으로서 자기 투자 정도가 낮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 원인이 어디에서 발생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여성 노동의 조건에 조금만 눈을 돌린다면 답은 간단하다. 완고하게 버티고 있는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가 그 원인인 것이다. 여성이 사회 노동을 하더라도 가사 노동이 필수적 역할로 간주되는 현사회에서 여성의 직장 생활은 이중의 노동을 감내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 양육을 뒷받침할 인적, 물적 자원을 갖추지 못했다면, 직장 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여성 노동의 현실이다. 

 

가사 노동과 사회 노동을 구분하는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가 나오는 뿌리도 바로 남성 중심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전제가 되고 있는 이분화한 성 역할 개념에서다. 생물학적 결정론에 근거하여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역할마저 근본적인 것처럼 구분 짓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노동의 조건에서 여성의 직장 생활은 가족 생활 주기나 가사 노동 요구 비중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다. 단순, 하위, 저임금의 특성을 지닌 여성의 사회 노동 문제의 근본적 해결 역시 남성 중심적 가치 체계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결혼과 사회 생활을 별개로 생각하여, 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결혼을 늦추거나 포기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여성의 수가 계속 늘어나는 현실은 단순히 여성 개인의 선택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아직까지 결혼은 가족 제도를 유지하는 출발점이다. 결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는 여성의 수가 50%를 육박해 가고, 자기 성취를 위해 사회 생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90%를 넘어가는 현실을 우리 사회는 심각한 변화와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3) 성 문화의 현실

 

현재 한국 사회의 성 문화는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를 헤매고 있다. 성이 폭력의 대상으로 또한 상품으로 이용되는 현실 문제를 짚어 본다는 것이 이미 진부할 정도이다. 30-40대 남성들이 초등학교 6학년 아이와 원조 교제를 하고, 50대 남자가 초등학교 5학년 아이를 임신시키고, 아버지의 친구들이 한 여고생을 윤간하여 임신시킨 후 서로 발뺌을 하고,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수업 시간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운동장 한복판에서 버젓하게 두 여중생을 성 추행하고, 15살의 나이에 낙태 수술을 5번이나 받고도 이렇게 살다 죽겠다는 말을 아무 거리낌없이 내뱉는 우리의 현실. 대체 무엇으로 답할 수 있을 것인가. 

 

성이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이고, 성은 인격의 한 부분이며, 성은 전인적 특성을 지닌다는 이야기를 아마 우리 사회에서는 꺼내기가 민망할지도 모르겠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인식되고 있는 성은, 목마르고 답답하면 언제든지 가게에서 사 먹거나 꺼내 먹을 수 있는, 아니면 훔쳐서라도 먹을 수 있는 음료수쯤으로 이해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의 97%가 여성―남성 피해자의 3%는 13세 미만의 어린이이고, 가해자는 성인 남자인 경우로 나타난다―이라는 것은 성폭력의 문제가 남성 중심주의적 사회에서 여성을 통제하는 한 방식이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 또한 한국 사회의 여성에 대한 성적 존중 수위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 주는 것은 현사회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특히 강간 비율이다. 성폭력 피해 여성 중 2.2%만이 신고하는 여건을 감안할 때, 실제 성폭력 발생 건수는 한해 평균 25만 건 이상이 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 가운데 성기 삽입으로 이루어지는 강간이 절반을 넘고 있다. 이런 수치는 성폭력 특히 강간 발생률 세계 1,2위를 기록한다. 

 

성폭력 특히 강간 발생률은 해당 사회 성 문화의 특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여성에 대한 성적 통제가 심할수록, 다시 말해 여성에게 순결과 정조의 강요 정도가 심한 사회일수록 높다. 또한 남성의 성을 본능으로 이해하고 남성의 성적 행위에 대해 허용적인 사회, 예를 들어 매매춘이 공공연하게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사회일수록 높다. 남근 선망 의식이 강한 사회일수록, 여성에 대한 비하 정도가 심한 사회일수록 강간 발생률이 높다. 

 

이러한 특성은 그 사회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 성 문화에 기울어져 있는지를 보여 주는 변수들이다. 남성 중심적 성 문화는 여성을 성적 대상자로 설정하고, 여성의 성을 남성의 소유물 또는 통제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남성 중심적 사회가 지니고 있는 이중의 성 규범은, 남성들은 성적으로 공격적이고 주도적이어야 남자답다고 평가하고 여성들은 결혼 전에는 순결해야 하고 결혼 후에는 수동적이어야 좋은 여자라는 평가 기준을 갖는다. 성행위에서 수동성뿐만 아니라 피임, 낙태, 성적 욕구 표현 등 성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여성의 자율성 결여를 미덕으로 여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성적, 신체적 자기 결정권이 인정될 리 만무하다. 

 

성폭력 피해자를 사회가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피해의 아픔을 안기고 있는 남성 중심적 성문화는 여성의 성권 유린을 방조함으로써 인간적 삶을 살 권리를 앗아 가고 있다. 

 

지난해 경기도에서 한 유치원 원장에게 성폭행을 당한 아이는 인근 다른 유치원의 학부모들이 받지 못하겠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끝내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가해자도 아니고 성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어린이가 당한 아픔을 어루만져 주지는 못할망정 자신의 아이가 더럽혀진다며 또 한 번의 상처를 남겨 주는 것이 ‘개방적인’ 우리 성 문화의 또 다른 얼굴인 것이다. 

 

또 최근에는 여고생을 성폭행한 20대 남자를 강간 혐의로 구속했으나 재판부는 양측의 부모가 여학생이 고교를 졸업한 뒤 서로 결혼시키고 고소를 취하키로 했다는 등의 이유로 ‘강간범’을 풀어 주기도 했다(「경향신문」, 1999년 7월 13일). 

 

 

3. 인간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세기를 희망하며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우리는 참으로 많은 말들을 하고 기대를 갖는다. 21세기에 접어들면 20세기의 모든 암흑이 거두어질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 특히 여성의 인간적 권리가 난도질당하는 현실은 21세기가 바로 눈앞에 닥친 오늘에도 여전한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올 7월 1일자로 시행되고 있는 남녀 차별 금지법이 앞으로 얼마나 지켜질 것이며, 사회 일반의 남성 중심주의적 모순과 통념을 얼마만큼 변화시켜 나갈지는 지켜 볼 일이다. 성 차별의 ‘가해자’로 지목되는 남성의 입장에서 남녀 차별 금지법에 대해 ‘어디가 숲이고 어디가 늪인지’ 알기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소리가 높다. 남성주의적 가치 체계에 푹 절어 있는 ‘나’의 관점과 입장을 변경하지 않고 차별의 숲과 늪이 머리 속에서 구분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교사를 채용하면서도 외모와 기혼, 미혼 여부를 절대 기준으로 설정하는 현실, 여자의 ‘아니오’는 ‘예’라고 말하면서 직장과 교육 현장에서마저 성폭력을 공공연히 자행하는 현실, 여자가 끼면 재수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남자들 하는 일에 여성이 참여하는 것을 사납게 보는 현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이 숱한 차별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출발점은 남성 중심주의의 해체이다. 

 

20세기를 보내면서 남성 중심주의가 그 동안 역사에 자행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처절하게 반성하지 않는 한, 우리는 21세기에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다. 인간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 존엄의 기본 방법으로 배려와 조화를 기본 윤리로 하는 새로운 가치 체계를 정립해야 한다. 사회 정의에 대한 개념의 수정도 필요하다. 성적 고정 관념이 굳건히 존재하는 선상에서 사회 정의의 마지막 모양새가 어떤 것인지는 이미 역사가 보여 주었다.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강조하고 사랑의 실천을 외치는 교회가 남성 중심주의의 온상지가 된다면, 그리고 변화의 의지를 외면한다면, 이 사회 어디에서 인간 존엄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신 앞에서 인간의 평등과 존엄, 인간에 대한 사랑, 높고 낮음의 수직적 계급 논리에 대한 저항, 소외된 사람에 대한 배려, 정의의 실현을 소리 높여 강조하는 교회가 남성 중심주의의 해체를 위한 순교자적 역할을 과감하게 선택하기를 기대한다. 남성 중심주의 해체 작업의 첫 출발점은 성적 고정 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 생물학적, 해부학적 특성에서 부분적 차이를 가질 뿐 여자도 남자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인격체이며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사목, 1999년 9월호, 이상화(가톨릭 대학교 강사, 여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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