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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함께 알아봐요, 몸 신학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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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6-20 ㅣ No.1837

[함께 알아봐요, 몸 신학] (1) 하느님이 왜 몸을?


가톨릭 세계복음화 ICPE 선교회 한국지부 최봉근 선교사 ‘청년 몸 신학 강의’ 지상 중계

‘내 몸’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

 

 

가톨릭세계복음화 ICPE 선교회 한국지부장 최봉근(티토) 선교사가 6월 11일 오후 8시 온라인으로 진행된 ‘2021 온라인 청년 몸 신학 강의’ 1강에서 몸 신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영상 갈무리.

 

 

‘신학이면 신학이지 몸 신학은 뭐람?’ 이러한 궁금증을 안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가톨릭세계복음화 ICPE 선교회 한국지부(지부장 최봉근 선교사, 지도 로렌스 캐틀 신부)는 6월 11일 ‘2021 온라인 청년 몸 신학 강의’를 시작했다. 매주 금요일 5회에 걸쳐 진행되는 강의 내용을 지상 중계한다.

 

(1) 하느님이 왜 몸을?

(2) 하느님이 왜 남자와 여자로?

(3) 사랑의 참된 의미와 인격

(4) 혼인 생활과 독신 생활

(5) 부르심과 생명

 

 

‘몸 신학’(Theology of the Body)이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79년 9월 5일부터 1984년 11월 28일까지 수요일 일반알현 때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교리를 모은 것이다. ‘몸이 드러내는 하느님에 대한 학문’을 의미하는 몸 신학을 배우면,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신 이유와 목적, 계획 등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몸 신학은 크게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사’ 부분으로 구성된다. 교황은 전반부에서 성경을 토대로 몸과 성에 관해 해석하고, 후반부에는 혼인 성사와 봉헌된 독신, 생명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몸 신학은 인간의 몸과 성에 담긴 하느님 진리에 관한 교황의 통찰이다.

 

몸 신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오늘날 죽음의 문화가 사회를 붕괴, 분열시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세상과 사탄은 사회를 무너뜨리려고 그 기본 단위인 가정을, 가정을 구성하는 혼인을, 나아가 남녀가 결합하게 하는 성(性) 자체를 부숴 버리려고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도록 우리는 세상과 사탄의 전략에 맞서 반대로 인간 몸과 성의 의미부터 제대로 알고, 혼인과 가정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는 생명의 문화를 건설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몸 신학에서 말하는 ‘몸’은 어떤 의미일까. 인간의 몸은 실존의 장이자 인격의 장, 언어의 장, 상징의 장이다. 몸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나와 지금 여기 존재하는지 알 수 있고, 어떤 인격인지 드러낼 수 있으며, 타인과 소통할 수 있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

 

특히 인간의 몸에는 하느님의 세 가지 진리가 담겨 있다. ‘성의 상이성’과 ‘자기 증여’, ‘생명 전달’이다. ‘하느님이 남녀의 몸을 다르게 만드셨다는 진리’와 그 사실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부가 서로에게 서로를 온전히 선물로 내어 주며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진리’, 이를 통해 ‘인간은 생명을 전달하도록 태어난 존재라는 진리’다.

 

무엇보다 이러한 몸 신학을 통해 우리는 ▲ 자신의 정체성과 ▲ 삶의 목적 ▲ 삶의 의미 ▲ 삶의 행동 원리를 깨달을 수 있다. 몸 신학을 잘 배워 삶에 적용하면 우리는 ▲ 하느님의 자녀이자 남자 또는 여자로서 ▲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 사랑하고 ▲ 정결 · 절제하며 살아갈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21년 6월 20일, 이소영 기자]

 

 

[함께 알아봐요, 몸 신학] (2) 하느님이 왜 남자와 여자로?

 

 

하느님은 왜 성(性)을 주셨을까?

 

몸에 부여된 성은 ‘인격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한계성 초월의 열망’을 표현한다. 인간은 성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으며, 남녀는 각각 하느님 모상성을 완성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 즉 인간 몸에 주어진 남성성과 여성성은 존재를 드러내는 양식이자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 존재하는 양식으로, 성을 통해 인간은 친교하며 또한 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다르게 창조하셨을까. 성의 차이는 보조성을 나타낸다. 남녀는 불완전한 존재로, 둘이 함께 있어야 협력자로서 상호 보완하며 살아갈 수 있다. 남녀는 서로의 차이에 매력을 느낀다. 특히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데, 이렇게 서로 다른 시각이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남녀의 차이성은 서로가 필요하다는 점을 계속 자각하게 하고 혼자만으로는 불완전하며, 서로 보완하며 함께 살아갈 때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 같은 보조성은 남녀의 동등성에 기반한다. 하느님 피조물인 남녀는 모두 존엄한 존재로, 둘은 동등하기에 하나돼 협력할 수 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려면 남녀는 서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이 같은 남자됨과 여자됨은 곧 인격에서는 완전히 동등하지만, 존재의 특성에서는 서로 다르길 바라신 창조주의 지혜와 선이 담겨 있다. 남자는 남자됨으로써 여자는 여자됨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고, 남녀를 통해 온 세상은 하느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하느님 사랑은 가정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성은 부부애를 위해 존재한다. 부부가 아닌 사람이 부부 행위를 해선 안 되고, 부부도 남녀가 서로에게 ▲ 자유 의지로 ▲ 온전히 자신을 ▲ 오직 한 사람에게만 충실히 내어 주고 ▲ 생명 출산에 언제든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혼인 약속을 한 다음에만 비로소 한 몸을 이룰 조건이 충족된다. 혼인 생활에서 부부의 육체관계는 정신적 일치의 표징과 보증이 된다. 세례받은 남녀는 혼인 성사를 받음으로써 참되고 거룩하고 완전한 부부 유대를 맺을 수 있다.

 

거룩하고 존귀한 성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 부부 행위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며 인격을 발전·성장시키고 하느님과 하나되기 위해 준비하는 결합으로, 성은 남녀가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사랑의 일부일 경우에만 진정으로 인간적이다. 존엄한 자신이 다른 이의 도구가 되지 않게 사는 것이 하느님 뜻에 맞는 삶이고, 부부가 그 뜻에 맞게 살아가면 좋겠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이들도 성에 대한 이해가 있는 이를 만나 풍요로운 삶을 살면 좋겠다. 그렇게 되기 위해 무엇보다 하느님께 기도해야 한다. [가톨릭신문, 2021년 6월 27일, 이소영 기자]

 


[함께 알아봐요, 몸 신학] (3) 사랑의 참된 의미와 인격

 

 

사랑을 이해하는 시작점은 ‘하느님’에 대한 이해다. 사랑을 이해하려면 하느님을 알아야 하고 하느님을 올바르게 알아야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1요한 4,7-8 참조)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 없이 온전히 내어 주는 사랑이다. 인간의 참된 사랑도 상호적인 관계에서 남녀가 서로를 온전히 내어 주는 사랑이다. 이렇게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지 않으면 인간은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없다.”(「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 기쁨과 희망」 24항)

 

참된 사랑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완전히 받아들인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이 서로 다르지만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이신 것처럼,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도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거나 변화를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이러한 사랑의 기초는 ‘상대의 선(善)을 바라는 것’이다. 자신의 선만 추구하며 이 사람이 나에게 사랑을 얼마나 줄까 재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에게 내가 필요하니 그 사람 곁에 있겠다며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좋음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렇게 상대에게 좋은 사랑은 나에게도 좋은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을 하려면 네 가지 요소가 갖춰져야 한다. 진실함과 충실함, 감성, 이성이다. 진실해야 신뢰가 생겨 관계를 형성할 수 있고 관계가 형성돼야 사랑이 생길 수 있다. 사랑은 충실함 속에서 성숙해지고, 인간은 오감으로 깨닫고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에 상대와 친밀하게 교류하고 감정을 나누는 감성이 있어야 사랑이 깊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 감정이 사그라져 갈 때 끊임없이 의지적으로 사랑을 택하며 그 사랑이 헌신적인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성이 필요하다. 진정한 사랑이란 누군가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잘해 주고 못하면 잘해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너이기 때문에”, “너라는 존재여서”, “가끔 화나게도 하고 내 말을 안 들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당신이라서 좋아”하는 ‘존재론적인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인간 삶에 어떤 역할을 할까. 참된 사랑은 인간을 자신에게서 벗어나 타인의 삶에 참여하는 더욱 충만한 삶을 살게 한다. 많은 갈등과 분열 속에서도 사랑은 사람들이 하나되게 하고, 사랑을 하는 그 사람의 존재를 성장시킨다.

 

어떤 사랑이 참된 사랑인지는 그 사랑을 하는 사람이 인격적인가, 정결한 태도를 지녔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인격적인 사람은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며,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고 동등하게 대하며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상대와의 일치를 추구한다. 정결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가 인격임을 인정하고 그를 자신의 욕구 충족 수단이나 이익 획득 도구로 생각하지 않으며 오로지 한 사람만을 평생 사랑한다. [가톨릭신문, 2021년 7월 4일, 이소영 기자]

 

 

[함께 알아봐요, 몸 신학] (4) 혼인 생활과 독신 생활

 

 

인간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상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셨고, 남녀의 인간성 안에 사랑과 일치의 소명, 능력, 책임을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인간의 기본 소명이고 타고난 소명이다.(「가정 공동체」 11항)

 

인간이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있다. 하나는 혼인 생활, 하나는 독신 생활이다. 부부들은 배우자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줌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히며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 사랑을 체험한다. 부부는 서로에게 하느님이 돼 줌으로써 사랑을 배우고 성장하며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준비를 한다. 생명 출산과 자녀 교육으로 부부는 하느님 사랑을 자녀들에게 전한다. 부성과 모성은 그 자체로 구체적인 사랑의 증거다.

 

독신 생활을 하는 이들은 자신을 하느님과 이웃에게 내어 주며 사랑한다. 하느님과의 일치,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자신의 몸에 새겨진 사랑과 일치의 욕구, 모든 에너지를 하느님께 봉헌한다. 이들은 부부와 방식은 다르지만, 의미는 같은 ‘몸의 성소’를 살아간다. 이성과 친교할 수 있도록 창조됐고, 자기 증여해야 하며, 일치·출산을 위해 존재한다는 몸의 ‘혼인적 의미’를 산다. 이성과 부부가 되고 육체적 관계를 하진 않지만 서로 인격적으로 알고 지내며 살고, 시간과 에너지를 복음 전파에 사용하며, 하느님·공동체 구성원들과 영적으로 일치한다.

 

특히 이들은 생물학적인 자녀를 출산하진 않지만 자신이 돌본 아이들에게 ‘아버지’ 또는 ‘어머니’라고 불리는 등 영적인 자녀 출산을 한다. 이렇게 몸의 혼인적 의미를 살 때만 진정으로 독신 생활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독신 생활에 대해 “자신이 선택한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기 위해서는 자신이 포기한 것이 무엇인지를 또한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도피처로 독신 생활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혼인과 같은 좋은 것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겐 독신 생활이 더욱 좋다는 점을 알기에 그것을 택하고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부들과 독신 생활을 하는 이들은 서로를 보며 배울 수 있다. 독신 생활을 하는 이들은 부부가 정결을 지키고 완전한 자기 증여를 실현하는 것을 보면서 정결과 자기 증여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고, 자녀 출산과 양육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복음 전파로 더 많은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켜야 한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부부는 독신 생활을 하는 이들을 보며 부부 사랑도 하느님과의 일치로 향해 있어야 함을 자각할 수 있고, 혼인 생활이 어려울 때는 삶의 목표가 혼인이 아닌 하느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고난과 고통을 견딜 수 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혼인과 독신은 서로를 설명하고 완성시킨다”며 “일생에 걸쳐 혼인을 통해 사랑을 이룰 수도 있고 하늘나라를 위한 절제의 삶을 통해 사랑을 이룰 수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이 몸의 혼인적 의미라는 하나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가톨릭신문, 2021년 7월 11일, 이소영 기자]

 

 

[함께 알아봐요, 몸 신학] (5 · 끝) 가정과 생명

 

 

생명 존중은 부부 관계 안에서 또한 이를 바탕으로 한 가정 안에서 먼저 시작된다. 부부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정결의 삶을 살 때, 그 가정에서는 인격을 수단화하지 않고 존중하며 사랑을 한다. 정결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절제가 필요하고, 절제는 성사생활을 통해 도움받을 수 있다.

 

왜 생명을 존중해야 할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생명의 의미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인간 생명은 혼인적 의미를 지닌 몸을 갖고 태어난 존재다. ‘혼인적 의미’란 이성과 친교할 수 있도록 창조됐고, 자기 증여해야 하며, 일치·출산할 수 있도록 생겨났다는 뜻이다. 하느님께 생명을 받은 인간은 이 의미를 살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인간 생명은 신적인 생명이다. 그 본성상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돼 육체적이고 현세적인 삶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 생명을 존중한다는 사실은 몸을 존중하며 인격적 사랑을 한다는 것이고,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을 존중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소중한 선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계획을 존중하고, 생명과 사랑, 인격적 문화가 주는 참 행복을 누리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생명에 대한 거부는 하느님에 대한 거부다. 하느님 모상으로서 이 세상에 하느님의 선하심과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사명을 차단하는 행위이며, 이렇게 하느님 모습이 사라진 곳에는 악이 스며든다. 그것이 죽음의 문화의 시작이다.

 

죽음의 문화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인간이 사랑과 출산을 성에서 떼어 낸다. 인격적 사랑을 하며 부부가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출산을 성에서 분리함으로써 쾌락만 맛보려 한다. 이러한 죽음의 문화에서 인간은 상대를 인격적 대상이 아닌 자기만족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죽음의 문화는 피임에서 시작된다. 피임한다는 것은 자신의 욕구 충족과 쾌락을 위해 생명을 없애겠다는 낙태를 전제로 한다. 이는 부부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인 부성과 모성을 주지 않는 행위이고, 생명을 거부하는 태도다. 이렇게 될 때 둘은 더 이상 하느님· 배우자와 일치할 수 없으며, 자녀는 선물이 아닌 부모의 욕심·욕구 충족 수단이 돼 버린다.

 

그렇다면 계속 임신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아니다. 교회는 자연주기법을 강조한다. 자연주기법은 자연 질서를 어기고 몸과 성의 의미를 거스르며 인격을 수단화하는 피임과는 다르다. 자연 질서에 순응하며 몸과 성의 의미를 존중하고 참된 사랑의 관계 속에서 부부가 책임감을 더 갖게 한다.

 

우리가 생명을 존중하고 몸과 성의 의미대로 인격적 사랑을 하며 살아갈 때 생명의 문화는 형성된다. 그렇게 살아야 우리도 참 행복에 이를 수 있다.

 

그동안 ‘몸 신학’을 통해 몸, 성, 참된 사랑과 인격·정결, 혼인·독신 생활, 가정과 생명에 대해 깨달았다. 이 깨달음을 삶 속에서 잘 살고, 주위에도 알려 생명의 문화를 확산하는 분들이 되면 좋겠다. [가톨릭신문, 2021년 7월 18일, 이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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