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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16: 마텔다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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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8-17 ㅣ No.424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16) 마텔다는 누구인가?


천국의 기쁨 간직한 지상 낙원의 안내자

 

 

단테는 자신의 기쁨을 안내자로 삼아 열의에 넘쳐 앞으로 나아간다. 사부를 돌아보는 일도 없이 처음으로 혼자 전진하는 것이다. ‘사방으로 향기를 내뿜는 흙을 밟으며’, ‘인류의 첫 보금자리로 선택된’ 에덴동산의 ‘신선하고 우거진 성스러운 숲속’으로 들어갔다.(연옥 28,1-6) 이 묘사를 위해 단테는 실제의 장소 즉 산타폴리나레 인 클라세 성당이 있는 라벤나 근교 아름다운 ‘키아시 해변의 유명한 소나무 숲’을 떠올린다.

 

맑게 흐르는 물 건너편에서 마치 양치기 소녀(pastorella)처럼 꽃을 따면서 한 여인이 노래하며 다가온다. 말을 걸자 여인은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단테의 의문을 풀어준다. 그녀의 이름은 마텔다(Matelda)이다.(동 33,119) 그녀는 독자들에게 단테가 앞서 꿈에서 본 레아를 떠올리게 한다.(동 27,100-108) 그러나 여기서는 들에서 꽃을 따다가 저승 세계의 왕 플루토에게 납치된 페르세포네를 상기시킨다. 페르세포네는 겨울에는 저승에 붙잡혀 있다가 봄에만 어머니인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마텔다는 ‘처음 오는 자’(prima-verrà) 즉 ‘봄’을 나타낸다. 이는 우의적으로는 인류의 재생을 의미한다.

 

단테와 마텔다의 만남에는 귀도 카발칸티(Guido Cavalcanti, c.1255-1300)의 시 ‘어떤 숲에서 나는 양치기 소녀를 만났네’에서의 인용이 많다. 또 단테는 「새로운 인생」(제24장)에서, “귀도 카발칸티가 사랑한 조반나는 사람들이 ‘봄’(primavera)이라고 불렀으며, 베아트리체가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고 말한다. 조반나라는 이름은 그리스도 예수보다 앞서 온 세례자 요한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단테가 자신이 속했던 청신체(Dolce stil novo) 파의 제1인자 귀도 카발칸티의 시와 결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나왔다.

 

마텔다가 미소 지으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시인들은 놀라지만, 마텔다는 “주님, 당신께서 하신 일로 저를 기쁘게 하셨으니, 당신 손의 업적에 제가 환호합니다”라는 ‘시편’(92,5)의 빛이 그 의혹의 안개를 걷어줄 것이라고 말한다. 아벨라르두스(Pierre Abélard, 1079-1142)는 「6일 창조 해설」에서, 이 ‘시편’ 구절은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의 원초적 상태에 관한 일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을 위해 창조된 우주와 모든 피조물 안에서 인간이 체험하는 기쁨을 말한다. 아벨라르두스는 특히 우리 눈이 만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새들의 노래와 꽃들의 향기를 언급한다. 그러므로 노래는 창조주의 사랑을 찬미한다. 즉 마텔다가 체험하는 기쁨은 사랑의 기쁨이며, 그녀의 노래는 만물을 지어내신 주님을 찬미하는 사랑의 노래이다.

 

자기를 꽃으로 장식하고 춤을 추는 마텔다는 앞서 나온 레아처럼 영혼의 활동적인 삶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지복(至福)의 상태를 상징한다.

 

옛날에 황금시대와 그 행복한 상태를

시로 노래하였던 사람들은 아마도

파르나소스에서 이곳을 꿈꾸었으리.

(연옥 28, 139-141)

 

이는 베르길리우스가 모범적으로 ‘목가’(牧歌)와 ‘농경시’(農耕詩)를 쓸 때 시적 꿈의 형태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도달한 지상 낙원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올곧게 만드셨다(코헬 7,29). 인간은 본래 올곧음(rectitude) 혹은 올바름(justice) 안에 있었다. 이곳 지상 낙원의 평화는 천국의 영원한 평화의 선취(先取)이자 징표이다. 그런데 인간은 원죄의 탓으로 불과 6시간만 에덴동산에 머물 수 있었다.(천국 26,139-142) 마텔다가 보여주고 있는 순수한 웃음과 즐거운 놀이가 눈물과 괴로움으로 바뀐 것이다.

 

마텔다는 지상 낙원으로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그곳을 흐르는 악을 잊게 하는 레테 강과 선을 상기시키는 에우노에 강에 관하여 설명한다.

 

이쪽으로는 사람에게 죄의 기억을

없애주는 힘과 함께 흘러내리고, 저쪽은

온갖 선행의 기억을 되살려 준답니다.

이쪽은 레테, 저쪽은 에우노에라

일컫는데, 이쪽저쪽을 모두 먼저

맛보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지요.

(연옥 28, 127-132)

 

레테(Letè)는 그리스어로 망각(lēthē)이란 뜻이다. 에우노에(Eunoè) 역시 그리스어 선을 상기함(eu-nous)에서 온 말로, ‘그리스 사람들이 프로토노에(proto-noe)라고 불렀던 최초의 마음’(「향연」 2,3,11)을 모델로 하여 단테가 만든 말이다.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이라 함은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시리라는 약속에 근거하고 있다. 레테 강과 에우노에 강에 관하여 우리가 생각해볼 점은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대전에 서게 될 때 과연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기쁘게 기억해 주실 만한 것이 남아있을까 하는 점이다. 하느님은 기쁨 자체이시기에 그분께서는 우리에 대한 슬픈 기억을 이미 잊으셨을 것이다. 문제는 그분의 기억 속에 우리의 지난 삶의 어느 부분이 기쁨으로 남아있을까 하는 점이다.

 

[가톨릭신문, 2021년 8월 15일, 김산춘 신부(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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