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교육ㅣ심리ㅣ상담

[심리] 유익한 심리학: 성격과 신앙생활 (9-10) 성격은 바꿀 수 있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0-18 ㅣ No.1054

[유익한 심리학] 성격과 신앙생활 (9) 성격은 바꿀 수 있다 (1)

 

 

성격에 대하여 여러 정의가 있고 설명이 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사람이 외부 자극에 대하여 반응하는 일정한 패턴을 말한다. 사람이 외부 자극에 대하여 반응할 때 주요 요인은 타고난 기질과 양육환경에서 형성된 특정한 심리구조, 곧 성격이다. 양육환경이 따뜻하고 허용적이며 수용적인 분위기라면 ‘타고난 기질’은 그대로 자기 경험과 함께 비교적 ‘자기’와 내적으로 일치하는 성격을 형성한다. 반면, 양육환경이 거칠거나 방임 또는 학대의 정도에 따라 ‘타고난 기질’은 수면 아래로 억압되어 숨어버리고, 환경이 요구하는 그 조건에 맞추어 방어적으로 생존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심리구조’, 곧 성격이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쉽게 “내 성격이 원래 그래!”라고 말하지만 원래 급하거나 충동적으로 감정조절이 안 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사람은 타인에게 ‘원래 내 성격이 그러니 어쩔 수 없잖아? 네가 이해해라!’라고 말하기 쉬우나 그것은 틀린 생각이요, 잘못된 요구다. 우리가 잘못하여 지금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 탓하며 자기 성격을 고치려 하지 않는 것도 무책임한 처사다. 어렸을 때는 양육자의 책임이지만 성인이 된 지금은 자신의 책임이다. 자신에게 책임 있는 자세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

 

참된 ‘자기 성찰’은 윤리 도덕적 반성의 의미가 아니다. 양육환경 안에서 덧씌워진 성격, 조건화된 반응, 가면을 찾아내는 내적 작업이요,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한 위대한 여정이다. 세상을 얻고도 자신을 잃는다면(루카 9,25 참조)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여정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자기 내면에서 ‘무엇이’, ‘어떻게’ 나의 마음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 살필 수 있다. 처음에는 어려워도 조금만 도움을 받으면 ‘마음 챙김-알아차리기’를 할 수 있다.

 

내향이든 외향이든, 감각형이든 직관형이든, 사고형이든 감정형이든(MBTI 성격유형 참고) 누구나 사람과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그 살아가는 유형이 조금 다를 뿐이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과 어울리는 데 자신이 어려움을 느끼거나, 타인이 불편함을 느낀다면, 자신의 성격을 살펴볼 일이다. 완벽한 성격을 갖춘 사람은 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기준은 ‘현실성’이다. 대인관계에서 다소 마찰과 불편함이 생긴다 해서 무조건 ‘성격상의 문제’로 여기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다. 대표적인 경우가 ‘성격 차이’라며 헤어지는 부부다. 정확하게 말하면, 성격의 차이가 아니라 성숙의 문제다.

 

우리 인간은 ‘감각과 정서 그리고 사고’라는 세 가지 기능으로 환경에 대응하며 생존해 가는 동물이다. 성숙한 성격의 중요한 기준인 ‘현실성’이란, 그 사람의 감각과 정서 그리고 사고 기능이 ‘현실(지금-여기)’에 일치한다는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지게 느낀다든지, 과도하게 감정을 드러낸다든지, 엉뚱한 논리를 펴며 왜곡된 사고를 하는 등의 행동(반응)은 ‘현실성’을 상실한 성격에서 나오는 태도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행동(반응)을 성찰할 내적 힘이 부족하나, 성인은 성찰의 힘을 가지고 있기에 자기 성찰은 각자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물론 부상이 심한 환자에게 치료와 간호가 필요하듯, 그러한 조력이 필요한 사람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변하려는 의지’를 갖는 것이다. 이 의지마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거나 남 탓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2021년 10월 17일 연중 제29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김정민 라자로 신부(아중성당)]

 

 

[유익한 심리학] 성격과 신앙생활 (10) 성격은 바꿀 수 있다 (2)

 

 

보통 인간의 위대함을 ‘사유의 능력’에서 찾는다. 그러나 뇌과학은 더 구체적으로 새로운 측면에서 인간의 놀라운 능력을 말해준다. 인간은 ‘성찰’을 통하여 ‘과거로부터’ 탈출하여 ‘자기를 창조’해낸다. 뉴런들의 연결로 이루어진 시냅스. 시냅스들의 총화로 구성된 ‘신경회로망’은 ‘성찰’을 통해 폐기되고 새로 구성될 수 있다. 생존을 위해 위험하고 공포스러운 상황에 대한 정보를 중요하게 처리한 몸의 기억은 또다시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한다. 이러한 뇌의 원리는 생존을 위해 매우 유리한 측면이 있지만, 위험과 공포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는 점에서 불편함을 초래한다. 강력한 위험과 공포에 노출될수록 그 민감도는 증가하는데, 매우 충동적이고 폭발적인 반응으로 나타나기에 우리의 의식이 통제하기 어려워한다. 대표적으로 감정조절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감정 폭발은 스스로 자기에게 환멸을 느낄 정도로 내적 분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매우 거칠고 위험한 성격의 소유자들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사회성을 기를 수 있다. 그 과정이 금연이나 금주 등 중독에서 벗어나기만큼이나 어렵고 고통스러울지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 뇌의 원리는 어떤 성격도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거의 어떤 경험으로 형성된 ‘신경회로망’일지라도 폐기할 수 있고, 새로운 ‘신경회로망’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뇌과학에서는 이를 ‘상향식-하향식’으로 설명하는데 몸과 마음이 상호작용하듯이 정신과 신체가 쌍방향으로 신호를 주고받는다. 신경과학자인 다니엘 월퍼트는 ‘뇌는 생각하거나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움직임을 조종하기 위해 진화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몸을 통해서 뇌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생각을 통해서 몸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유산소 운동은 뇌세포의 활성화와 재생에 도움을 주며, 묵상과 영적 피정은 우리 신체를 이완시켜 쾌적한 상태로 면역력을 높여준다.

 

나의 뇌가 과거의 학대나 공포 경험을, 생존을 위한 유용한 자원으로 여기고 있는 한, 나의 성찰은 ‘그때-그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뇌는 과거의 학대나 공포 경험을 잘 간직하여 또다시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고자 하나, 그것은 과거의 일이고 ‘지금-여기’는 과거처럼 학대나 공포가 일어나는 ‘현실’이 아니다. 설사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나’는 그것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성인’이 되었다. 당시에는 혼자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혼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뇌는 여전히 ‘학대나 공포’에 대비하여 반응하려고 준비하고 있으니, 조금만이라도 그와 ‘유사한’ 상황으로 느껴지기만 해도 ‘학대와 공포’에 대한 ‘과거 반응-몸의 기억’이 부지불식간에 나오게 된다. 바로 거기에서 ‘나’를 다시 만나야 한다. 그 방어적인 모습은 ‘참된 나’가 아니다. 학대와 공포라는 환경에서 ‘조건화된’ 반응일뿐, 나를 방어하기 위하여 쓰게 된 ‘가면(persona)’일 뿐이다. 이 가면으로 평생을 살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뇌는 죽는 순간까지 변화할 능력이 있다. ‘신경 가소성’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고,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음을 알려준다. 동시에 어떤 이유로도 변명할 수 없기도 하다. 나는 나에 대한 책임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뇌는 그 책임을 질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고 속삭인다. 어디로 갈 것인가? 지금 나에게는 어린 시절 그때보다 더 성숙한 인격과 많은 정보와 지식 그리고 주변에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2021년 12월 19일 대림 제4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김정민 라자로 신부(아중성당)]



1,596 1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