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일본 나가사키현 고토 탐방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2-06 ㅣ No.2211

일본 나가사키현 고토 탐방


250여 년 박해 속에서도 신앙 지켜낸 키리시탄(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섬’

 

 

- 후쿠에섬에 있는 미즈노우라성당. 1873년 금교령이 철폐되고 7년 뒤인 1880년 미즈노우라 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졌다. 

 

 

강한 바람이 몰아쳐 비록 흔들릴지언정 갈대는 꺾이지 않는다. 언젠가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갈대는 다시 몸을 일으킨다. 물도 한 방울은 힘이 없다. 하지만 방울방울 계속해서 떨어지면 결국에는 바위를 깎아낸다.

 

일본 교회가 그렇다. 오랜 박해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신앙을 지켰으며, 그 믿음을 지켜낸 키리시탄(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이겨내고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되찾았다. 일본 교회는 고난의 역사를 극복한 그리스도 신앙의 증거이다. 또 키리시탄의 역사와 숭고한 정신을 입증하는 신앙 공동체다. 일본 나가사키현 관광연맹 초청으로 1월 17~19일 ‘기도의 섬’ 고토열도를 찾았다.

 

 

- 불상의 모양을 한 성모 마리아상인 ‘마리아 관음상’(위 사진)과 십자가가 새겨진 도자기(아래 사진). 카쿠레 키리시탄(잠복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불교 신자인 척 행세를 하며 ‘마리아 관음상’을 만들었고, 도자기 등에 십자가를 새겨 기도하며 신앙을 지켰다. 

 

 

 

신앙의 향기 가득한 고토열도

 

17일 아침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1시간 30분여를 날아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고토열도로 가기 위해서는 후쿠오카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타고 약 1시간을 더 가야 했다. 양쪽 날개에 프로펠러가 달린, 70여 명이 겨우 탈 수 있는 작은 비행기는 유난히 엔진 소리가 컸고, 작은 바람에도 요동쳤다. 긴장감 속에 그렇게 얼마쯤 날았을까. 구름이 걷히고, 푸른 바다를 품은 고토열도가 모습을 나타냈다.

 

고토열도(오도열도, 五島列島)는 나카도리섬(中通島), 와카마쓰섬(若松島), 나루섬(奈留島), 히사카섬(久賀島), 후쿠에섬(福江島) 등 다섯 개의 큰 섬으로 이뤄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크기는 제주도의 3분의 1로, 다섯 개의 큰 섬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섬 140개가 모여 있다. 인구는 3만 6000여 명. 이 중 65세 이상 인구가 40%에 달한다. 고토열도에 병원과 약국이 많은 이유다. 그런데 이곳에는 병원과 약국만큼 성당이 많다. 약 50곳에 이른다. 이곳에선 박해 속에서 피어난 신앙의 향기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 후쿠에섬에 있는 이모치우라성당은 1897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페루 신부에 의해 세워졌다. 페루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고토 각지에서 형태가 좋은 돌과 진귀한 암석을 모아 성당 옆에 프랑스의 루르드를 모방한 동굴을 만들고, 루르드의 기적의 샘물을 부은 뒤 프랑스에서 들여온 성모상을 동굴에 안치했다. 

 

 

박해가 시작되다

 

일본에 가톨릭 신앙이 뿌리내린 것은 1549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가 복음을 전하면서부터다. 고토열도는 1566년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데 알메이다 신부가 복음을 전하면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고토는 2000여 명이 세례를 받는 등 교세가 번창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7년 선교사 추방령을 선포하면서 박해가 시작됐다. 본격적인 박해가 가해진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14년 일본 전역에 금교령을 내리면서부터다. 신자들에 대한 강제 개종이 이뤄졌고, 개종하지 않는 신자들에게는 박해가 가해졌다. 또 선교사와 키리시탄을 고발하면 현상금이 지급됐고, ‘후미에(예수님, 성모 마리아 등을 새긴 목판·동판)’를 밟는 날을 만들어 키리시탄을 색출해 고문했다.

 

고토열도에서는 1868년 ‘고토 쿠즈레(고토 박해)’라고 하는 키리시탄 박해의 계기가 된 사건이 일어난다. 히사카지마 섬의 신자들이 붙잡혀 잔혹하게 고문받은 것이다. 신자 200여 명은 다다미 12장 정도인 약 20㎡ 감옥에 갇혔다. 약 1.65㎡당 17명이 들어가야 하는 좁은 공간은 누울 수도 없었고, 대소변도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하는 참혹한 박해의 현장이었다. 이런 상황은 8개월 동안이나 이어졌고, 결국 굶주림과 병, 고문 등으로 42명이 순교했다. 순교한 키리시탄 목을 잘라 내걸어 공포감을 조성하기도 했다.

 

 

- 201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 고린성당. 1881년 히사카지마섬의 하마와키 성당을 이축해 1931년에 세워졌다. 구 고린성당은 그 후 50년 동안 고린 지구와 와라비코지마 섬 신자들의 신앙 못자리가 됐지만, 현재는 노후화로 보존만 하고 있다. 

 

 

신앙을 지키다

 

박해가 계속되자 신자들은 산이나 섬 등으로 숨어들었다. 은둔하며 신앙을 지키는 ‘카쿠레 키리시탄(잠복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했다. 고토열도에도 1797년 이주정책으로 인해 오무라 한 소토메지역(현 나가사키 소토메지구)에서 3000여 명이 이주해왔다. 상당수가 박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카쿠레 키리시탄이었다. 이들은 ‘미비키(생활고로 신생아를 죽이던 일)’와 ‘후미에’를 피해 신앙을 지키고자 고토로 이주해왔다. 키리시탄들은 박해 속에서도 결코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불교 신자인 척 행세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불상의 모양을 한 성모 마리아상인 ‘마리아 관음상’을 만들었고, 도자기와 조개껍데기 등에 십자가를 새겨 기도했다. 대축일과 축일을 알아볼 수 있도록 전례력을 만들기도 했다.

 

또 ‘조카타(교회 전례력에 따라 의식을 행하는 역할)’와 ‘미즈카타(세례를 주는 역할)’, ‘도리쓰기야쿠(행사 보조와 연락 등을 하는 역할)’라고 하는 3명의 신자 대표를 중심으로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고토열도에는 동백나무가 많다. 키리시탄들은 겉으로는 불교 신자 행세를 했지만, 순교 후 장례를 치를 때 가톨릭 신자임을 나타내기 위해 동백꽃잎 4장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장식했다. 동백꽃잎이 없을 때는 동백나무 가지로 십자가를 만들었다. 그들은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순교 후에도 신앙인임을 나타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

 

 

- 201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에가미성당. 1881년 3월 ‘카쿠레 키리시탄’ 4가족이 세례를 받은 것에서 시작된 에가미성당은 신자들이 어업으로 얻은 수입을 모아 1918년에 세웠다. 

 

 

 

- 도자키성당 모습. 1880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마르만 신부가 임시성당을 세운 뒤 후임인 페루 신부에 의해 1907년 현재의 성당 모습을 갖췄고, 1908년 축성됐다. 1977년에는 성당 내부에 자료관이 개설됐다.

 


신앙의 자유, 그리고 교회의 재건

 

끝날 것 같지 않던 박해. 하지만 1873년 키리시탄 금교령이 적힌 고찰이 철거되면서 일본에도, 그리고 고토열도에도 259년에 걸친 박해의 역사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찾아왔다. 신자들은 신앙과 자유를 찾은 기쁨에 넘쳐 고토열도 곳곳에 성당을 세웠다. 신자들은 끼니를 걸러가며 돈을 모았고, 직접 돌을 잘라 나르며 성당을 지었다. 아이들도 성당을 짓는 데 힘을 보탰다. 성당이 많았을 때는 고토열도에만 70개가 넘었지만, 지금은 조금 줄어 약 50개의 성당이 남았다.

 

고토열도의 성당은 대부분 바다를 향해 있다. 신자들이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이다. 후쿠에섬의 도자키성당도 마찬가지다. 1873년 금교령이 철폐된 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프레노 신부는 고토열도 도자키 해변에서 최초의 성탄 미사를 신자들과 함께 봉헌했다. 1877년부터는 사제가 상주하게 되면서 고토열도에서 본격적인 사목활동이 시작됐다. 그 후 고토열도 각지에 소교구 제도가 정비될 때까지 도자키성당은 고토 키리시탄 부활의 거점이 됐다. 1880년에는 마르만 신부에 의해 도자키에 임시성당이 건립됐고, 후임인 페루 신부에 의해 개축 공사가 이뤄져 1907년에 성당이 완공, 1908년에 축성됐다. 바로 고토열도의 첫 성당인 도자키성당이다. 도자키성당은 당시 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증거로서, 1974년 4월 9일 ‘나가사키현 문화재’로 지정됐고, 1977년 성당 내부에 자료관이 개설돼 일본과 고토열도 신앙의 역사를 신앙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다.

 

미즈노우라본당 주임 쿠마가이 유지 신부. 쿠마가이 신부가 미즈노우라성당과 고토열도의 신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 세계에 전해진 고토열도의 신앙

 

2018년 6월 ‘나가시카와 아마쿠사 지방의 카쿠레 키리시탄(숨은 그리스도인) 관련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1495호)으로 등재됐다. 그중 4곳이 고토열도에 있다. 대표적인 곳이 히사카지마섬의 ‘구 고린성당과 마을 터’, 나루시마섬의 ‘에가미성당과 마을 터’다.

 

구 고린성당은 1881년 히사카지마섬의 하마와키 성당을 이축해 1931년에 세워졌다. 구 고린성당은 그 후 50년 동안 고린 지구와 와라비코지마 섬 신자들의 신앙 못자리가 됐지만, 노후화로 1985년 바로 옆에 새 고린성당이 신축됐다. 이에 구 고린성당 해체 이야기가 나왔지만,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는 성당을 지키자”는 신자들의 마음이 모여 지금까지 예전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에가미성당은 1881년 3월 ‘카쿠레 키리시탄’ 4가족이 세례를 받은 것에서 시작됐다. 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사제는 신자 집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그러다 1906년 현재 위치에 임시성당이 세워진 후, 신자들이 후박나무를 잘라 부지를 조성하고, 어업으로 얻은 수입을 모아 1918년 3월 성당을 세웠다. 에가미성당은 푸른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얀색 외관과 파란색 창문으로 인해 동화 속 집과 같은 인상을 준다. 건축 구조는 습기를 피하기 위해 바닥을 높게 하고, 성당 안 기둥에는 손으로 그린 나뭇결무늬, 창문에는 꽃을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 이모치우라 성당에서 만난 이소와 히사코씨. 이소와씨는 성당 근처에 살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당을 찾아 기도하고 있다. 이소와씨가 순례를 위해 고토열도를 찾은 한국인 사제에게 받은 묵주를 손에 꼭 쥐고 있다. 

 

 

신앙의 후손들

 

“고토열도의 신앙은 순교자들의 정신입니다.”

 

미즈노우라성당 주임 쿠마가이 유지 신부는 ‘고토열도의 신앙은 어떤 것인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답했다. 쿠마가이 신부는 “고토열도는 옛날부터 가난하고 척박한 땅이었고, 나가사키에서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 살던 신자들이 대부분이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자손들이 지금까지 교회를 지탱하고 있으며, 가난한 가운데서도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지금도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쿠마가이 신부는 “모두가 각자 자신의 신앙을 삶의 자리에서 더욱 깊어지도록 노력하면 좋겠다”며 한국의 신자들에게도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기점으로 아시아가 신앙을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모치우라 성당에서 만난 고토열도 신앙의 후손인 이소와 히사코(마리아, 78)씨는 성당 근처에 살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당을 청소하고 가꾸고 있다. 이소와씨는 “선조들은 박해를 피해 나가사키에서 고토로 이주해 잠복 키리시탄으로 사셨다”며 “박해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지켜주셔서 후손으로서 감사한 마음뿐”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부족한 것이 많아도 항상 성당을 찾아 주님과 성모님께 기도를 바치는 삶을 이어갈 것”이라며 “신앙 후손으로서 앞으로도 믿음을 굳건히 지켜나가겠다”고 했다.

 

고토열도 방문에 안내자로 함께한 우메키 시호(56, 베르나뎃다)씨는 “박해 때 신자들은 기도의 힘으로 견딜 수 있었다”며 “주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고토열도의 신앙이 지금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고토열도의 신앙을 더욱 알리면서 신앙을 지켜나가겠다”고 약속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2월 4일, 일본 고토=도재진 기자]



3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