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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와 정신의 두 기둥: 유교와 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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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5-17 ㅣ No.253

[전하라! 땅끝까지] 중국 문화와 정신의 두 기둥 : 유교와 도교



1840년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영국에게 패한 후에 맺은 남경조약은 과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란 환상을 송두리째 앗아간 사건이었다. 중국의 가치가 부정되면서 정치체제마저 도전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1911년 10월 10일 우창(武昌)봉기를 시작으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각 성들이 차례로 청 황실에 반기를 들어 독립을 표시하였고 쑨원(孫文)은 전국적인 호응을 얻어 중화민국을 창설하게 된다. 그는 1912년 설날 남경에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으로 취임하는데 이로써 과거 2천 년에 걸친 중국의 왕정은 끝이 나고 공화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1919년 ‘5.4 신문화 운동’이 발생하면서 중국인들은 과거의 문화유산과 정신체계를 부정하며 완전히 청산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 유교와 도교는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 도교는 주술과 미신적 관습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유교는 노예근성을 조장하여 사람들을, 특히 여자들을 복종하게 만드는 봉건사상으로 낙인찍혔다.

이 신문화운동(좌측 그림)은 나중에 공산당 정부에까지 영향을 주어 문화혁명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기간에는 그 강도가 더 심화되고 노골화되어 유교와 도교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문화혁명 기간에 ‘린뱌오(林彪)와 공자를 타도하자’는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은 점차 확대되었다. 공자 타도를 외치고 중국의 근대화를 위해 유교적 전통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며 ‘공자의 상점을 타도하자(打孔家店)’고 외쳤다.

그러나 문혁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시작되자 중국의 정신적, 문화적 두 기둥은 보란 듯이 건재하였고 이 두 종교의 기본 개념은 아직까지도 중국인의 정신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정신과 문화를 이해하는 최대 관건은 바로 유교와 도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유교는 과거 2천5백 년 동안 역사 속에서 부동의 ‘형님’ 위치를 고수해 왔다. 불교가 성행하던 당(唐)대에도 유교는 역시 변함없는 중국 문화의 어른으로서 그 위치와 역할을 수행해 내었다. 그 변함없는 유교적 가르침의 장구한 흐름을 도통(道統)이라 부른다.

유교와 도교는 중국사회의 큰 기둥으로 양분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둘은 구분되고 차별된다. 둘은 다르지만 둘이 있어 중국 문화는 풍요로워지고 균형을 이루게 된다. 전자가 공동체 지향의 가치관이라면 후자는 개인적 성향 위주의 가치관에 중점을 둔다. 유교가 입세적(人世的)이고 남성적이며 형이하학적 특성이 강한 반면 도교는 출세적(出世的)이고 여성적이며 형이상학적으로 균형을 맞춘다.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원이둬(聞一多)는 “중국인의 마음에는 유교와 도교가 함께 있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중국인 심성 속의 유교는 예의와 염치(廉恥), 어짊과 덕으로 설명되는 공동체적인 덕목이다. 반면 도교는 초탈을 꿈꾸는, 즉 개인적 취향의 자유로운 질서 추구를 뜻한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 뒤로 유교는 가부장적이거나 권위주의적인 종법(宗法)의 질서, 형식과 예절에 속박되는 측면이 있고 도교는 개인의 실리, 곧 정신적 평화와 심미만을 추구한다는 부정적 측면이 있다. 유교가 지나치게 숭양(崇陽)적이라면 유교는 극단적으로 숭음(崇陰)적이다.

괴테가 “나는 눈을 감으면 꿈을 꾸고 눈을 뜨면 책임을 본다”라고 말하였다. 그가 중국의 유, 도교를 직접 일컬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두 가치 체계를 지적하였고 이는 유, 도교에 정확히 부합된다. 도교는 언제나 꿈을 꾸지만 유교는 책임을 묻는다. 도교가 자연주의적이라면 유교는 철저히 인본주의적이다. 또 유교가 경건주의자라면 도교는 신비주의자인 셈이다. 유교가 격식과 형식, 질서와 위계를 뜻한다는 점에서 ‘네모의 문화’와 연결된다면 도교는 자유로움과 융통성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동그라미 문화’에 가깝다. 북경이 유교적이라면 상해는 도교적이다. 도시의 외곽 순환 고속도로가 북경은 사각형이지만 상해는 원형이다.

음악 용어로 주제곡을 테마(Thema)라 하고 변주곡을 에피소드(Episode)라 한다. 테마와 에피소드를 잘 배합해야 음악이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힘이 있다. 테마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음악이 무거워지고 에피소드에 치우치면 가벼워진다. 우리 인생살이에도 테마와 에피소드가 있다. 진지함이나 경건함이 테마라면 웃음과 해학은 에피소드이다. 이 둘의 조화는 인격의 성숙도와 비례한다. 지나치게 테마 쪽으로 가면 사람이 좁아지고 에피소드에 치우치면 헤퍼진다. 경건이라는 날줄 위에 해학이라는 씨줄이 좌우로 왔다 갔다 춤을 출 때 인생이라는 한 필의 아름다운 비단을 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Homo Sapiens)”는 테마에 속하고 “인간은 유희적 동물이다(Homo Ludens)”는 에피소드에 속한다.

중국의 정신적 세계, 문화적 표현은 이 둘의 조화에 있다. 유교적 가르침과 삶이 테마 쪽에 가깝다면 도교적 삶은 에피소드에 가깝다. 유교적 인생은 규범과 명분으로 이루어진 명교(名敎)이다.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대의명분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있으니 유교는 윤리 교과서적이다. 반면 도교적 인생은 규범에 예속되지 않는 자유로움을 노래하고 소유유(逍逾遊)를 추구하니 가히 예술 참고서라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2천5백 년 역사 안에서 유교와 도교의 관계가 그리 원만하고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적은 많지 않다. 통치자의 사욕이 때로는 편파적으로 때로는 폄하와 박해를 가해옴으로서 중국의 정신 문화사 안에서 이 둘의 관계는 언제나 긴장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마테오리치가 처음 중국 선교를 시작할 때는 승복을 입고 다가갔다가 곧이어 방향을 수정하고 유교의 사대부를 상징하는 유학자의 옷을 입게 된다. 처음에는 백성, 민중에게 다가가는 하층 선교를 지향하고자 한 의도였고, 두 번째는 통치자와 관리 계급인 상층 선교를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어느 나라나 문화마다 통치 계급이 사용하는 문화 코드가 있고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는 문화 코드가 달리 존재하는데 전자를 대전통(大傳?, Great tradition)이라 하고, 후자를 소전통(小傳?, Little tradition)이라 한다. 모든 민족문화 안에서 발견되는 현상이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그 구분이 다른 어떤 문화보다 확연히 드러난다. 소위 대전통은 충과 효, 명분대의(名分大?)를 추구하는 명교(名敎)적인 유교의 문화를 말하고, 소전통은 복과 부를 추구하는 민중의 생활의 원리로서 도교 문화를 말한다.

중국 문화의 두 기둥이 이렇게 구분되는 것은 유교가 지니는 독특한 위치 때문이다. 유교가 통치자의 정통성을 제공하는 통치 원리가 된 뒤에는 중국문화의 위치에서 한 번도 대전통적 위치를 잃어버린 적이 없다. 유교는 중국문화의 진정한 ‘따거(大哥)’ 곧 큰형님이었다. 그런데 이 대전통과 소전통의 관계가 불편해지면 여기에서 정(正)과 사(邪)의 구분이 생기게 된다. 대전통은 언제나 정(正)의 위치에서 통치자의 보호를 받는 반면 소전통은 통치자의 눈에 벗어나면 언제든지 사(邪)로 폄하되어 박해를 받고 통제되었다. 중국문화 속에서 정사(正邪)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공자가 인본주의를 이상으로 삼았던 복고주의자라면, 노자와 장자는 공자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혁신주의자들이었다. 공자의 사상은 발전을 거듭하며 종교화되어 유교가 되었으며, 노장 사상은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도교를 낳았다. ‘남노북공’(南老北孔)이라는 말은 선진 철학의 지역 차이를 결정적으로 대변하는 말인데 곧 ‘남방은 노자, 북방은 공자’를 의미한다. 북방의 통치자가 유교의 논리인 대전통을 중시하고 일반 민중은 도교적 삶인 소전통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방은 언제나 반골의 기질이 있다. 모든 혁명은 남방에서 시작되는 데 바로 종교적인 배경(민간신앙, 도교 등)에 기인한다. 지배자는 언제나 자신들의 주도권을 유지하고자 하는데 이 사회의 주도권에 위협이 되는 그 어떤 세력이 등장하면 사(邪)의 세력으로 간주하면서 제거하려 들었다. 불교가 먼저 벽사론(闢邪論)에 휘말렸었고, 천주교 역시 사학(邪學)으로 몰려 박해를 받았다. 공산당이 화룬궁(法輪功)에 그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 역시 사교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중국의 통치 개념 속에서 주도권은 언제나 통치자에게 유보되어 있는, 백성은 접촉 불가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백성은 언제나 졸이었다. 통치자와 백성은 항상 긴장 관계 속에 있다. 통치자가 보기에 백성은 통제하지 않으면 언제나 사(邪)의 세력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통치자는 유교를 자신들의 통치 이념(忠孝)으로 무기 삼고 백성은 이를 피해 도교 속으로(無爲) 숨어든다. 왜 통치자들은 유교를 자신들의 통치 이념으로 숭상했을까? 유교는 분명 중국 사회 속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사대부들의 정치적 논리였고 통치자의 위치를 확립시켜주는 사상이었다. 이는 동중서(董仲舒)가 주도한 유학의 정치화에서 시작된다. 정치, 경제가 강성해진 이후 한무제는 장기적인 안정을 위해서 동중서가 제창한 “백가를 내치고 유교만을 숭상하자(罷黜百家 獨尊儒術)”라는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후 유가사상은 점차 정치화, 교조화, 경직화되어 민초에게서 멀어져 갔다.

통치자들은 필요에 의해서 문화혁명 기간에 유교를 배척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다시 필요에 의해 유교를 이용하려 든다. 최근 중국 정부는 공자를 다시 선전하기 시작했다. 신중국의 공산당이 공자를 다시 등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공산당이 주도하는 유학은 본질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과거 문화혁명 기간 중에 공자를 타도하고 공자의 석상에서 코를 베어내던 공산당이 다시 공자를 화두로 삼고 있다. 영화 <공자>까지 만들었지만 그 내용은 공자의 인본사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국가와 통치자에게 봉사하는 제갈공명 같은 책사의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그리고 전 세계에 공자학당을 건립하여 전략적으로 중국의 세계화 전선에 이용하고 있다. 중국의 중심부인 천안문광장에 2011년 1월 11일 ‘공자상’이 세워지고, 4월 21일 국가박물관에 ‘공자상’이 자리잡았다(좌상단 그림).

중국 공산당은 왜 ‘공자’를 부활시키고 있는가? 신중국은 중국어와 중국 문화의 확산을 넘어 공자를 통해 중국의 세계화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공자가 중국 문화의 첨병이 됨을 뜻하고 그래서 공산당은 지금 공자의 부활을 세계에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중국의 통치자들이 유교를 통해 세계화를 꾀하고 중국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지만 백성들은 아직도 도교 속에서 안식처를 구하고 있으니 둘의 관계는 영원한 평행선이다.

[땅끝까지 제81호, 2014년 5+6월호, 김병수 대건 안드레아 신부(한국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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