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수)
(백)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그리스도인의 선거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20 ㅣ No.1309

[경향 돋보기 - 다시 총선에] 그리스도인의 선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세상을 살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성경의 정신이다(마태 22,37-40 참조).

 

사실 성실한 그리스도인은 조금이라도 더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가난한 이를 위해 본당이나 교회 기관에서 봉사활동도 하고, 이런저런 단체에 후원금을 보내는 방식으로 자선도 한다. 하지만 이런 봉사와 자선으로 더 나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이런 봉사와 자선이 쌓이면 가난한 사람이 사라지리라 생각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따른다는 것은

 

좀 더 근본적인 치유책을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사회’는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따른다는 것은, 그래서 사랑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언제나 이웃과 사회의 여러 도전에 직면하기 마련이고, 그러한 도전 앞에서 자신의 태도와 결단으로 응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응답은 때로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뿐 아니라 이미 예수님도 이런 식의 도전에 직면하셔야 했고, 당신의 결단을 통해서 응답하셔야만 했던 문제였다.

 

복음서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여러 차례 충돌하셨다. 그러한 갈등과 충돌 가운데서도 안식일을 둘러싼 충돌은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결정적 사건 중의 하나였고, 이 사건은 사회적이고도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안식일에 노동을 금지하는 것은 예수님 시대에 중요한 율법 규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노동을 하면 안 되는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다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이 일은 곧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흠으로 잡혔다. 더욱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노동’을 감행하셨다는 사실이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지키고 회복하고자 하신 일이었지만 외적으로 안식일의 법 규정을 보라는 듯이 공개적으로 위반해 버리셨다. 바로 이 때문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뿐 아니라 헤로데 당원까지 한통속이 되었고(마르 3,6 참조), 결국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이렇게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회적 맥락에서 정치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웃을 사랑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율법을 뒤집으셨듯이 법과 제도, 문화와 구조에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정치적인 행동을 요청받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가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회구조 안에서 영향을 받고 그 안에 갇혀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살겠다고, 사랑하며 정의롭게 살겠다고 다짐해도 우리 사회가 선하고 정의롭게 변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와 법률이라는 사회구조를 개선하고 쇄신시키는 것 또한 사랑의 실천이요 정의를 위한 투신이 된다.

 

가톨릭의 사회교리는 “애덕의 실천은 자선행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빈곤문제의 사회적 정치적 차원들에 대처하는 것도 포함”(「간추린 사회교리」, 184항)한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친구나 가족, 소집단에서 맺는 미시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의 원칙”(「진리 안의 사랑」, 2항)이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내 곁에 있는 이웃에 대한 연민에서 출발하지만,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진력하는 것으로 확장되지 않을 수 없다.

 

 

정치는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

 

이렇듯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하는데 진력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정치, 경제, 사회의 구조를 외면하거나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사회구조라는 담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은 세계는 각 개인의 회심에서 시작하지만, 사회구조를 설계하고 만들며 바꾸는 일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일, 곧 공동체 전체를 위하여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주는 법과 제도를 설계하고 만들며 바꾸고 집행하는 일을 넓은 의미에서 정치라고 한다. 국가라는 가장 큰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 또한 정치라고 볼 수 있다.

 

정치 공동체로서 국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가장 큰 공동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국가는 우리가 ‘시민사회’라고 부르는 시민들의 모임, 단체, 공동체의 복합체에서 태어난 것이다. 시민사회가 국가의 뿌리이고, 그런 뜻에서 국가보다 시민사회가 먼저이고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곧 정치 공동체는 시민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공동선을 위해서 존재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표현하듯이, “정치 공동체는 공동선을 위해서 존재하고, 공동선 안에서 정당화되고 그 의의를 발견하며, 공동선에서 비로소 고유의 권리를 얻게 된다”(사목헌장, 74항). 그리고 정치 공동체가 온전히 공동선을 달성하는 길은 인간의 존엄성을 표명하고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389항 참조).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치는 흔히 폄하되기는 하지만,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매우 숭고한 소명이고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복음의 기쁨」, 205항)이다. 결국 좋은 정치는 인간의 좋은 삶과 좋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정치 공동체가 공동선을 추구하며 건강하게 운영되는 것은 쉽지 않다. 시민사회 안에는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각각의 세력이 있기 마련이고, 더욱이 오늘날에는 시장을 매개로 하는 경제적 권력이 사회의 공공 영역에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적 권력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기득권을 유지하고 더욱 크게 하려고 국가 기구에 인적 연계망을 구성하고 자금을 뿌리는 등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이의 선익 곧 공동선을 증진시켜야 하는 국가의 공적 행위와 소수 경제적 권력의 사적 이익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사적 영역의 경제적 권력이 공적 영역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게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바로 이 지점에서 경제적 권력이 “공동선을 지키는 역할을 맡은 국가의 통제권을 배척”하여 “새로운 독재로 출현”(「복음의 기쁨」, 56항)한다고 경고하셨다. 실제로 이런 현상은 1980년 이후의 미국이나 영국에서, 그리고 지난 10년간 우리나라가 경험해 온 사실이다.

 

사실 이러한 사적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을 제어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서양 말의 ‘민주주의(democracy)’는 그리스 말 ‘민중(demos)’과 ‘지배’ 또는 ‘권력(cratos)’이 합쳐진 말이다. 그러니 옛 아테네 언덕의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배를 위하여 귀족과 부호의 권력을 제한하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민주주의의 밑그림을 그린 사상가인 로크나 몽테스키외 같은 이들도 그러했고, 미국 헌법의 기초를 다진 매디슨(James Madison) 또한 시민의 권리와 공동체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파벌을 통제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역할이라고 보았다.

 

가톨릭교회도 오늘날의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하며, 이러한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교회는 사적 이익이나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하여 국가체제를 점령하고 폐쇄된 지배자들의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도와주면 안 된다.”(「백주년」, 46항)고 가르친다. 이렇게 보면, 좋은 정치는 공동선의 원리와 민주주의의 원리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부자들 중심의 경제 모델은 공동선을 침해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시민들의 삶이 어려운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공적 영역에서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강화하지 못하고, 반대로 사적 영역에서 소수의 이해관계가 지나치게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정치인들이 더 많아야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하고자 진력하는 그리스도인은 정치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숭고한 사명인지 깨닫는다. 그리고 정치 과정의 하나로서 정치인을 선출하는 선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깨닫는다. 그러나 정당 정치가 성숙하지 못하고, 소수 정당이 존재하기 힘든 우리나라와 같은 소선거구 선거 제도 아래에서는 시민들의 다양한 정치적 의사가 제대로 표현되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가 행사하는 투표가 보잘것없게 여겨지기도 하고, 또 투표를 꼭 해야하는지 그 필요를 잘 느끼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사실은 우리의 투표가 결정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각자의 한 표 한 표는 미약한 것이나 그것이 모여서 할 수 있는 일이 적지 않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시민들의 참여가 부족할 때, 공동선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후퇴하거나 붕괴한다.

 

또 한편, 그리스도인의 참여는 시대의 징표에 대한 식별을 요청한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성령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지 식별해야 한다. “하느님 나라의 열매가 될 수 있는 것과 하느님의 계획에 어긋나는 것을 분명히 구분할 필요”(「복음의 기쁨」, 51항)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격차가 공동선을 침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은 모든 경제정책에 반영”(「복음의 기쁨」, 203항)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이가 경제적 자유의 참다운 혜택을 누리게 하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더 많은 자원과 경제력을 가진 이들에게 제한이 가해져야 한다. 현실은 많은 사람이 실제로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으며 고용 기회가 계속 축소되고 있는데, 단지 경제적 자유만을 요구하는 것은 정치에 명예롭지 못한 모순된 주장”(「찬미받으소서」, 129항)일 뿐이다. 이런 면에서 정치도 민주주의가 필요하지만, 우리 시대에는 경제적 민주주의(「간추린 사회교리」, 356항)도 긴박하게 요청된다. 이런 식별 아래 우리의 참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도가 필요하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함께 “가장 깊은 악의 뿌리를 치유할 수 있는 정치인들을 더 많이 보내주시도록 하느님께 간청하고, 사회 상황과 국민과 가난한 이들의 삶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정치인을 더 많이 보내주시도록 기도”(「복음의 기쁨」, 205항)하자.

 

* 이동화 타라쿠스 - 부산교구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를 맡고 있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6년 4월호, 이동화 타라쿠스]



2,48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