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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여성의 권리 증진을 위한 교회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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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480

여성의 권리 증진을 위한 교회의 역할

 

 

1. 들어가면서

 

1999년 7월 3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20세기 차별 버리기, 21세기 평등 세우기”라는 여성 축제가 열렸다. 한국 여성 민우회는 여성들의 차별 체험 기록들을 수집하여 가정과 사회 안에서 버려야 할 성 차별들을 선정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명절에 제사상에서의 성 차별, 아들 선호 사상에 뿌리박은 양육상 성 차별, 성 희롱, “집에서 애나 보지 웬 운전?”, “시집만 잘 가면 되지”라는 식의 여성을 비하하는 말투, 직장에서 커피나 복사 심부름, 채용상의 성 차별, 선정적인 광고, 생활 관습상 여성을 금기시하는 경향, 남자의 보증을 앞세우는 신용상의 성 차별, 민원 태도에서의 성 차별 등 우리 가정과 사회 곳곳에 뿌리 박힌 남녀 차별의 예들이 지적되고 있다. 남존여비 사상이 강한 한국 사회는 구조적으로 여성을 억압해 오면서, 모성이라는 허울로 여성을 신비화해 왔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로 전환하면서 이제 그 차별의 허울이 하나씩 하나씩 벗겨지고 있다. 여성 민우회는 여성 차별의 사례들 가운데 ‘20세기, 버려야 할 여성 차별 열 한 가지’를 선정하여 지점토 인형으로 제작해서 캡슐에 넣은 다음, 땅 속에 묻고 그 위에 ‘21세기 평등 나무’를 심었다. 

 

 

2. 남녀 평등 사상

 

그러나 21세기 평등 나무는 그리스도교 사상 안에 아주 오래 전부터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인간 됨에서 동등하며, 둘 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는 창조 사상은 여성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구약성서는 인간의 죄스러운 상황을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창세 3,16) 하는 말로써 표현한다. 곧 남녀의 인격적 관계가 파괴되고 상대방을 소유하고 지배함으로써 남녀 모두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뜻이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거나 소유물로 여길 때, 지배하는 편이나 지배당하는 편 모두 하느님의 모습을 망가뜨리게 되므로 남녀 차별의 상황은 원천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남성과 여성은 서로 같은 본성과 같은 원천을 가졌으며, 그리스도께 구원되어 같은 목적에 함께 부름 받는다(사목헌장, 29항). 바오로 사도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선포한다. “그리스도로 세례 받은 이들은 유다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으며, 노예도 없고 자유인도 없으며, 남성이랄 것도 여성이랄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세례 정식을 통하여 가톨릭 교회는 남녀 평등 사상을 맨 처음부터 가르쳐 왔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교회 여성들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경험하는 차별의 벽을 넘어서서,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스스로 동등한 자라고 느끼고 있는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존엄이 인정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남녀 차별의 벽은 이미 철폐되었는가? 

 

불행하게도 교회 활동을 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해 본 여성 신자들일수록 한결같이 교회 안에서의 차별이 가정이나 사회보다 더 심하다고 말한다. 여성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겸손과 순종만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의사 결정 과정에서 참여가 배제된다고 말한다. 여성의 존엄성에 대한 가르침보다 어머니로서 희생이 더 강조된다고 말한다. 남녀 차별의 모순된 구조 안에서 ‘성모님을 본받아 인내하고 순종하라!’고 선포되는 가르침은 여성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라, 차별의 현실을 지속시키는 이데올로기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시대가 급변하면서 사회에서는 20세기에 청산되어야 할 과제로서 남녀 차별의 문제가 적나라하게 지적되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거론조차 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남녀 평등이라는 훌륭한 사상의 뿌리가 튼튼한 줄기와 싱싱한 잎으로 자라지 못하고 밑동부터 썩어 가고 있다. 

 

 

3. 초대 교회의 여성들

 

여성의 눈으로 신약성서를 다시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듣고 전하는 일에서 여성을 배제하거나 소외시키지 않으셨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졌음을 알 수 있다. 여성들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는 많은 여성 신자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서로 친교를 맺고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공적으로 기도드리는 일이 당시 유다 사회에서 남자에게만 허용되어 있었지만,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도 감사와 청원의 기도를 함께 드렸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곤궁한 사람들을 도와 주었는데, 여성들도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였다. 사도행전은 다비타를 “선행과 자선을 허다하게 실천한 여제자”라고 9장 36절에서 밝힌다. 다비타는 도움이 필요한 과부들에게 겉옷과 속옷을 지어 주었으며, 여제자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예수님의 제자는 열두 남성 제자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셋째, 여성들은 자신의 재물로 정성스럽게 예수님을 섬겼는데, 마찬가지로 초기 그리스도교 선교사들도 섬겼다. 리디아는 바오로와 그 일행을 자기 집에 모셔 가서 섬겼기에(사도 16,15), 바오로는 로마 공동체에 페베를 추천하면서 그녀가 많은 사람들의 보호자라고 말한다(로마 16,1-2). 리디아와 페베는 사도들의 동역자로서 선교사들을 도와 준 여성들이다. 

 

넷째, 초기 그리스도교 선교는 가정 교회 형태의 공동체들로 기본을 이루었는데, 여성들은 이 가정 교회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또 잘 이끌어 나갔다. 예루살렘에서는 마르코라는 별명을 가진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였다(사도 12,12-13). 필립비에서는 리디아가 자신의 집에서 가정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곳 선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가정 교회에서는 남녀 역할의 구분 없이 남성도 여성도 모두 함께 기도와 선포와 예언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녀들은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다섯째, 여성들은 자선이나 봉사에 국한된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선교 지도자 역할도 담당하였다. 페베는 ‘봉사자’라고 지칭되는데, 필립비 12장 1절에서 알 수 있듯이, 봉사란 사도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을 말한다. ‘봉사’라는 단어가 당시 사회에서는 종이 주인을 섬긴다는 부정적인 뜻으로 통용되었지만, 그것이 교회의 용어로 되면서 복음의 정신을 실천하는 핵심적인 단어로 자리잡았다. 신약성서에서 ‘봉사’(diakonia)라는 단어는 자선 행위뿐만 아니라, 선포 행위도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섬기셨듯이 제자들은 서로를 섬기고 봉사하며 살았다. 초대 교회 여성들은 바오로의 선교 동역자로서 복음을 위하여 함께 ‘수고’하고 ‘투쟁’하였으며, 섬기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이처럼 초기 교회 여성들의 활동은 복음의 정신 아래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봉사’라는 단어는 본래의 복음 정신에서 변색되어 버린 듯하다. 봉사의 의미가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섬기는 삶으로 이해되기보다 일방적인 순종의 의미로 통용되거나, 여성 신자들이 맡아서 해야 할 음식 장만, 자선, 교회 청소 등의 일로 국한되는 경향이 있다. 주님을 위한 일이라는 미명 아래 온갖 허드렛일들을 여성에게 떠맡겨 놓고 순종을 강요하면서 정작 중요한 정책 결정이나 예산, 교회 운영에서는 여성들을 소외시키는 현실은 그러한 모습을 잘 반영한다. 그것은 상호 섬김의 관계가 아니라, 지배 복종의 관계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파생되어 나온다. 외형상 가톨릭 교회는 수직적 위계 질서가 매우 강한 곳으로 보인다. 로마 바티칸의 교황을 수장으로 하고 교구별로 주교를 정점으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다. 각 본당에서는 주임 신부의 지도 아래 모든 일이 운영되는 지배 구조를 보여 준다. 주임 신부가 바뀌면 그 본당의 일은 새로 오는 신부의 성향에 따라 재편성되기도 한다. 최근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가 대형화하면서 한 신부가 몇 천 명의 신자를 돌보아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들은 교회의 수직 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로 재편하지 않는 한 풀기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4. 시대의 징표

 

다가오는 제삼 천년기에 대해 미래 학자들은 인간 관계의 수직 구조가 해체되고 대신 수평 구조가 형성될 것으로 내다본다.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 체제가 원형의 그물망 조직으로 변하고 있다고 그들은 진단한다. 우리가 사는 정보화 시대는 수직적 구조보다 수평적 구조가 훨씬 효율적이라고 한다. 수직 구조 속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앞서기 위한 경쟁의 논리가 지배적이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순종함으로써 그 체제가 유지되지만, 수평 구조는 경쟁의 관계보다 협력의 관계를 중시한다. 개인의 능력과 창의성이 중시되고 개인의 기능들이 얽혀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해 나갈 것이다. 그리하여 정보화 사회를 ‘3F의 시대’라고도 명명하는데, 곧 Fiction(가상), Female(여성), Feeling(감성)의 시대라는 뜻이다. 그물망으로 짜인 수평 구조에서는 여성(Female)의 능력이 잘 발휘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 대하여 배려할 줄 알고 협력할 수 있는 감성(Feeling)이 중요하다고 한다. 흔히 여성과 남성이라는 도식적 구조 속에 고정 관념으로 담아 두었던 특성들이 있다. 여성은 부드럽고 섬세하며 감성적이고, 남성은 강하고 이성적이며 용감하다고 말해져 왔다. 그러나 다가오는 21세기에는 그런 고정 관념들이 더 이상 통용되지 못하고, 남을 잘 돌보아주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자애로운 성격을 갖춘 사람이 이 사회를 이끌고 나갈 지도자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떠나서 인간이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서 그러한 특성들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가톨릭 교회가 2000년을 대희년으로 선포하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러한 현시대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그 동안 가톨릭 교회 안에서 여성들은 성직자-평신도라는 구별과 남성-여성이라는 구별을 당연시해 왔다. 아니, 구별의 차원을 넘어서서 차별의 상황을 묵과해 왔다. 교회 안에서 여성들은 신자 수의 70%를 차지하면서도 본당 사목 위원회의 결정에서 소외되어 왔으며, 봉사와 기도와 헌금만을 담당해 왔다. 여성 신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순종과 인내와 겸손이었다. 이제 천년기를 넘기면서 수직적 사회 구조에서 당연시되던 원리들이 물음에 부쳐지고 교회 안에서도 그러한 물음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한편에서는 여성 사제직 문제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러므로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면서 교회 여성들의 위치와 역할을 점검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가늠하는 일은 이 시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5. 교회의 모습

 

교회의 본래 모습은 섬기는 구조이다. “제일 높은 사람은 가장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루가 22,24-27 참조).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르지만”, 참된 교회의 모습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는” 곳이어야 한다(마태 20,25-27). 예수님처럼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교회 내의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으며, 제자들을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서로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그러한 섬김에 기초하고 있다.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가 아니라, 여성을 억압하고 순종을 강요하는 교회의 모습은 예수님의 복음과도 어긋나는 일이며,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 드러나는 교회의 모습과도 동떨어진 일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하느님을 신뢰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시면서 자신을 내어 주시는 모습 안에 들어 있다. 지배와 억압이라는 인간 세상의 악순환의 고리를 부수고 섬김과 나눔이라는 새로운 삶의 지평을 그분께서 열어 보이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삼는 이기적 모습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 줄 줄 아는 이타적 모습으로 변할 때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사랑, 자비심 등은 이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떠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요청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우리는 이천 년 전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활약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6. 교회의 역할과 전망

 

새로운 천년기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복음의 정신에 뿌리를 둔 전망들을 그려 보아야 한다. 

 

첫째, 너무나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할 점은 교회와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형태의 남녀 차별이 철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 수렴 과정이나 결정 과정에서 여성 신자들을 배제해서는 안 되고 민주적 절차에 따른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여성 신자를 교계의 하부 구조로 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세례 안에서 모두 하나라는 복음의 말씀에 어긋난다. 그 동안 소외되었던 여성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여성 신자들의 목소리를 담아 낼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어야겠다. 만일 여성 연합회가 그러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면, 여성 신자들을 대표할 수 있는 임원으로 구성되어야겠고 임원 선출 과정도 민주적 절차에 따라야 하며 임기도 제한되어야 한다. 제도 교회의 들러리와도 같은 역할에서 벗어나 ‘지배-순종’의 도식을 깨뜨리고 ‘우리가 교회이다’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자의식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라는 수직 구조를 깨뜨리고, 상호 협력할 수 있는 수평 구조로 전환하여야겠다. 교회가 새로운 시대의 대안 사회로서 모범을 보일 때이다. 

 

둘째, 여성의 존엄성을 일깨우기 위한 교육 과정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여성 사목에 관한 글이나 가르침들을 살펴보면, 주로 가정 안에서 여성 신자의 구실을 강조해 왔다. 가정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여성 신자는 신앙 안에서 어머니, 아내로서 더욱 충실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화와 더불어 대가족 제도가 점차 붕괴하고, 핵가족 시대로 이미 접어들었으며, 여성의 사회 활동 참여가 두드러지게 늘고 있다. 오늘날 여성의 역할과 의미는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사회와 역사 안에서 책임 있는 존재가 될 것을 요청 받고 있다. 현대 여성들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물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기에 결혼을 하더라도 직업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면서 부딪치는 어려움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해결해 나가고자 노력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성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어머니, 아내로서의 역할을 강화시키기 이전에 그리스도교 신앙에 기반을 두고 여성의 존엄성을 되찾아주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함을 알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성들의 소명이 완전히 인정되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고 또 실제로 도래하였다. 이제 여성들은 세상에서 자신들이 여태까지 획득한 적이 없었던 지대한 세력과 영향력과 능력을 행사하고 있다. 따라서 인류가 매우 심각한 변화를 겪고 있는 이 시기에 복음의 정신으로 무장된 여성들이 인간성의 상실을 막는 데에 대단한 공헌을 할 수 있다고 본다”(「여성의 존엄」, 1항).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여성의 존엄성을 되찾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살려냄으로써 현대 사회의 위기 안에서 여성 신자들이 가정의 성화만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 속에서 책임 있는 존재로 설 수 있어야 하겠다.

 

셋째, 교회 내 여성 지도자들을 배출할 수 있는 양성 프로그램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다가오는 시대에는 개인의 능력과 창의성이 중시되고 개인의 기능들이 얽혀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교회도 이제는 한 사람의 지도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 교회가 대형화함에 따라 젊은이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고 냉담자 수가 늘어난다는 사실은 성당 수가 모자라서가 아니다. 한 사람의 지도력으로 대중을 움직이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참여하고 체험함으로써 의미를 찾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은 평신도에 대하여 “성세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 되고, 하느님 백성 중에 들고, 그들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에 참여하며, 교회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백성 전체의 사명을 각기 분수대로 수행하는 신도들”(31항)이라고 정의한다. 여성 신자들은 세례를 통한 존엄성으로 사제 수품자들, 수도자들과 함께 교회의 사명을 공동으로 책임진다. 세례와 견진 성사에 힘입어 여성도, 사제며 예언자이고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 사명에 참여자가 되고 그리하여 교회의 근본 사도직 곧 복음화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아 복음화에 투신하게 된다. 21세기의 교회는 소공동체가 활성화하는 생동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여기서 여성 지도자들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하게 될 것이다. 복음의 정신에 투철한 여성 신자들은 우리 사회를 하느님 나라로 변모시켜 나가는 역동적 일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여성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은 앞으로의 세기를 준비하는 일이다. 

 

넷째, 시대의 징표를 읽어 내고 복음의 정신을 사회와 역사 안에 육화시키기 위하여 그러한 일들을 담당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다. 각 교구와 본당에는 여성 사목 분과가 설치되어야 하며, 복음의 정신을 구체적인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 여성 인력을 활용하여 본당 내에 상담소를 설치할 수 있을 것이다. 성 폭력 상담소, 여성의 전화, 가정 법률 상담소, 쉼터 등 교회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너무나 많다. 또한 여성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육아와 교육 문제도 교회를 중심으로 풀어 나갈 수 있겠다. 놀이방, 탁아방의 시설이나, 방과후 공부방, 도서관 등을 운영하면서 지역 사회 안에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다. 본당이 속해 있는 지역 주민들에게 복음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이야말로 사회의 복음화가 아니겠는가? 우리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여성 문제들에 대해서도 여성 신자들은 함께 연대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악과 불의로 희생당하는 여성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처지를 그리스도교 복음의 빛으로 개선시켜 나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새 천년의 거대한 물결을 넘기면서 이 시대가 요청하는 일에 교회는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천주교회가 세상에 뒤떨어진 교회가 아니라, 세상 안에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활짝 꽃피우면서 시대에 앞서가는 교회라야겠다. 

 

[사목, 1999년 9월호, 강영옥(가톨릭 여성 연구원,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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