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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교회 내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한 조건과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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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481

교회 내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조건과 실천

 

 

1. 들어가는 말

 

2000년이 바로 목전에 있다. 온 교회에는 2000년대를 뜻깊고 장엄하게 맞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더욱이 2000년 대희년은 주님께 커다란 축복을 나누어 받는 특별한 은총의 해이기에 설레는 마음을 가눌 길 없다. 회개와 화해를 통하여 넘치는 기쁨으로 제삼 천년기를 맞는 하느님 백성의 모습은 온 교회에 생기가 넘쳐흐르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 여성에 대한 처우와 관심이 매우 미흡한 현실을 직시하게 되어 매우 유감스럽다. 본당 내 여성들의 역할과 위상, 그리고 그 현주소를 사려 깊게 점검하고, 새 천년기를 향한 본당 여성들의 활동 방향을 모색하는 일은 이 시점에서 매우 값지다고 생각한다. 

 

 

2. 교회 내 여성의 지위, 무엇이 문제인가

 

교회는 여성들에게 성모님을 닮아야 한다고 늘 가르쳐 왔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본당 여성들에게 얌전하고 착하며, 순종적이기를 바란다. 대담하고 활달하며, 적극적인 면은 드러내지 않기를 바란다. 순종이 신심의 잣대가 되어 버린 이런 분위기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는 작아질 수밖에 없고, 불만도 입 속에서 맴돌 뿐 마음에서 삭혀 버리기 일쑤다. 소신 있는 의견이라도 내려면 늘 “무슨 여자가 …” 하는 눈초리가 쏠린다. 그러기에 차라리 눈총 받지 않으려 이리 피하고 저리 도망치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렇듯 여성의 위치가 매우 취약한 것이 현실이다. 

 

여성에 대해 교회는 관대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멀었다는 것이 오늘의 인식이다. 여성 신자가 약 70%에 이르는데도 본당 사목 협의회에서 여성 사목 위원을 찾아보기 어렵다. 더구나 사목 회장이 여성인 본당은 거의 없다. 어쩌다 여성 사목 회장이 있어도 대부분의 신자가 말도 안 된다는 지탄의 소리를 높인다.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이토록 불리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봉사하고 있다. 또한 교회 대부분의 장상들은 본당 내 여성들의 대외 활동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하거나 규제한다. 여기에 여성들은 불만을 품으면서도 이유 불문하고 순명하라는 가르침 앞에 복종한다. 이렇게 여성들은 자율성을 잃고 성직자와 수도자가 시키는 일만 하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다. 여기서 바로 문제가 발생한다. 속박에는 기쁨이 없다. 지나친 속박은 인간의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 한계를 느낀 단체의 여성들은 ‘계획을 세워 봤자 뭘 해.’라는 생각으로 진취적인 활동 목표와 발전적인 지향을 갖지 않으며, 매번 똑같은 방법과 역할에만 매달리게 되고, 새로운 것에 두려움을 갖기 마련이다. 훌륭한 지도자가 있을 때는 여성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졌다가도 그 지도자가 바뀌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그 자리에 안주하고 만다. 

 

교회 내 여성들의 활동은 극히 국한된 특정인에 한해 제대 꽃꽂이와 성가대 활동을 하고, 나머지는 국수 잔치 등 부엌일을 하며, 성당을 신축하는 본당에서는 물건 파는 데 온 힘을 쏟는다. 그 가운데서 젊은 여성들은 무엇인가 세속에서 얻지 못하는 영적인 힘을 얻고 싶어하지만, 교회도 역시 세속과 다름없이 돈을 좇으며 돈의 힘이 교회에서도 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다가 더 못 견디면 슬며시 그 단체를 떠나고 만다. 교회에서 소외감을 느낀 젊은 여성들은 직장을 얻으려 하거나 취미 생활을 찾는다. 그런데 교회는 왜 젊은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흥미와 재미를 못 느끼는지, 왜 신앙에 심취하지 못하는지 연구도 하지 않고, 우리 한국 교회도 서구화되어 간다느니 정신 상태가 옳지 않다느니 신앙의 부재라느니 하면서 그들만 탓한다. 그러나 먼저 여성 신자들이 교회 내 자신의 역할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단체장도 그릇된 점을 고치도록 하고 싶어도 말많은 사람으로 인식될까 두려워 입을 다물고, 단체의 활성화를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임기만 끝나기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임기를 마치면 그 단체에 속해 있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이렇듯 젊은 여성들이 떠나고 나면 교회 내 여성 단체들은 자연히 단체 회원들의 고령화로 이어져 간부 구성도 어렵고 진취적인 활동 방안을 착안해 내기는 더욱더 어렵게 된다. 

 

여기서 참고로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수원교구 여성 연합회를 소개하고자 한다. 수원교구 여성 연합회는 12개의 지구로 편성(교구 편재상 13지구이나 용인 지구와 수원 제2지구 병합 운영)되어 있으며, 3개월에 한 번씩 각 본당으로 돌아가면서 지구별 본당 단체장들이 모이는 지구 모임을 한다. 지구 모임에서는 그 동안 각 본당에서 이루어진 활동을 보고하고 이어 서로 질의 응답함으로써 관심 사항이나 의문점을 풀고, 협력해야 할 사업들을 토론하면서 본당간의 친목도 도모한다. 그러나, 지구 모임을 마친 후 가끔은 답답한 가슴을 쓸어안고 하늘을 바라볼 때가 있다. 교회 안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도맡아 몸살이 나도록 하면서도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지구 회의 장소조차도 주임 신부님의 승낙을 못 받아 다른 본당으로 바뀌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본당 여성 단체장의 소극적인 자세도 문제지만 존경받고 인정받아야 할 여성들이 그 위상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 교서 「여성의 존엄」을 반포하였다. 교황은 이 서한에서, 남자와 여자는 모두 인간 됨에서 동등하며 둘 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였다(창세 1,27). 인간 됨에서 본질적인 이 하느님의 모습과 닮은꼴로 처음부터 공통된 존엄과 소명을 갖게 된 것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성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성에 대한 태도가 특별함을 볼 수 있다(마르 10,2-12). 헬레니즘 시대의 로마 사회나 유다교 사회의 사고 방식과는 달리 여성을 크게 존중하셨다(마르 7,26-29).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여성들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여성 신자들을 위한 실제적 배려에는 매우 인색하다. 우리 여성들은 여성을 내세워 달라는 것이 아니라 평등하다는 것을 인식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발전을 거듭해 온 나머지 남성과 여성이 그 관계에서 동등하다는 오래된 원리를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있다. 그리고 여성들은 오늘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얻기 위해 매우 광범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앞으로의 세계에서는 컴퓨터와 환경과 여성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교회는 젊은 여성들이 왜 교회를 떠나며 교회에 머물지 못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여성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이 시급하며, 지금까지 무시되었던 여성 문제를 크게 부각시켜 문제점을 찾아내고 풀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각 본당에서는 여성들의 신앙 생활을 돕기 위한 실질적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예를 들면 독서실 운영으로 좋은 책들을 준비해 두고 성모님 심성에 가까워지도록 정서적 안정을 찾게 해 주며, 여성들의 특성에 맞는 문화적인 혜택도 베풀어야 한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공동의 관심사가 되는 활동 사항들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여성 단체장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 관계자들의 권위 의식이다. 교회에서 맡겨진 일을 힘들게 했어도 어쩌다 한 가지가 잘못되면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잘못된 것처럼 추궁당하게 되고, ‘여자들이 별 수 있어?’라며 여성 전체가 매도되면서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또한 교회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아주머니 정도로 여성 신자를 취급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가. 교회의 중요한 자리에는 참석시키지 않는 일도 소외감을 일으킨다. 어느 본당에서 주님 만찬 성 목요일 미사의 세족례에서 주임 신부가 절대로 여자 발은 못 씻겠다고 해서 그 예식에 여성 단체장은 참석시키지 않은 예가 있다. 이런 차별적인 대우는 예수님의 사랑을 평등하게 전하는 교회라는 말에 의문을 품게 한다.

 

성직자 수도자 사목 위원들이 여러 단체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보는 시각은 매우 편협하다. 여성들에게 어떤 일을 맡기면 과연 해 낼 수 있겠느냐는 부정적인 생각부터 한다. 그래서 중요한 일은 맡길 생각도 하지 않으며, 본당 사목의 논의 대상에서 제외시킨다. 물론 우리 여성 신자들이 노력은 하지 않고 무지한 생각으로 상황을 전개해 스스로 무시당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함께 논의하지 않은 일을 지시 받을 때는 그 일의 중요성이 피부에 와 닿지도 않으며 진정한 사명감을 느끼지도 못한다. 여성 자신이 자기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고, 여자가 남자보다 힘이 없다는 전근대적인 생각과 의존하려 하고 자포자기하는 데도 문제는 있다. 또 한편으로는 각종 주방 일이 너무 많아 여성 단체에 소속되기를 두려워하여 거부하는 사례가 많다.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자율권이 상실된 것에 대해 젊은 여성들은 못 견디어하며 성직자와 수도자의 간섭이 지나치게 많고, 사무장과 사목 회장의 간섭도 여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서론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평신도들의 사도직 활동이 초세기 교회에서 얼마나 자발적이었으며 얼마나 풍부한 효과를 내었는지는 성서가 명백히 증명해 주고 있다(사도 11,19-21; 18,26; 로마 16,1-16; 필립 4,3 참조). 또한 무관심에서가 아닌 자율성 부여는 엄청난 효율성을 발휘한다고 서술되어 있다. 

 

몇몇 본당은 여성 단체들이 열심히 운영비를 모아 놓으면 통장은 사무장이 갖고 있으면서, 지출하려 할 때는 신부님과 수녀님의 서명이 있어야 찾아 쓸 수 있게 하고 있다. 또 어느 본당은 사목 회장이 본인 서명을 안 받고 지출하였다고 호통을 치다가 여성 단체 간부들과 불미스러운 관계가 되기도 하였다. 지나친 간섭은 단체에 나쁜 영향을 미치며, 심하면 그 단체를 와해시킬 수도 있다. 더 큰 문제점은 주임 신부의 손에 여성 단체의 사활이 달려 있다는 점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으나 신부들의 마음에 안 들면 몇 십 년에 걸쳐 일구어 놓은 역사도 무시하고 해체시켜 버린 예가 있다. 이런 심한 일들은 사제나 소속 단체 일원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다소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극단적인 처방은 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교회 단체는 교회가 필요로 해서 존립하는 단체이니 교회 발전과 선교에 앞장서는 단체로서 정체성을 올바로 파악하고 잘해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으면 한다. 교회는 사랑과 신뢰로 단체에 속해 있는 여성들의 활동 방향들을 제시해 주며 함께하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지나친 규제에 자율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여성 단체의 실존 여부가 불투명하다. 교회가 무조건 요구하는 순명은 회원들을 단체에서 떠나게 한다. 인격적인 상호 관계 안에서 교회의 일이 맡겨져야 할 것이다. 요즈음은 계속되는 분당으로 신설 본당이 많아져서 돈 버는 일에 모든 관심이 쏠려 여성들의 영성 생활이나 복지에 대한 관심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3. 여성의 문제,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여성들의 소명이 완전히 인정되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고 또 실제로 도래하였다. 이제 여성들은 세상에서 자신들이 여태까지 획득한 적이 없었던 지대한 세력과 영향력과 능력을 행사하고 있다. 따라서 인류가 매우 심각한 변화를 겪고 있는 이 시기에 복음의 정신으로 무장된 여성들이 인간성의 상실을 막는 데에 대단한 공헌을 할 수 있다고 본다”(「여성의 존엄」, 1항). 

 

교황 바오로 6세는 1971년 주교 대의원 회의에서 요청한 바에 따라 “여성들의 존엄과 책임의 효과적인 증진”에 관한 당대의 문제들을 연구하기 위하여 ‘특별 위원회’를 구성했다. 

 

바오로 6세는 한 담화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른 어떤 종교들 안에서보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여성들은 처음부터 특별한 존엄성을 가졌다. … 실제적인 제도 안에서 매우 중대한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지만 그들의 온갖 잠재적 역량이 아직 선명하게 부각되지 못했다”(위의 문헌, 1항). 

 

이런 문헌들을 보면 이미 가톨릭 교회는 오래 전부터 여성들의 활동과 능력과 활약상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동시에 역량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한 마음을 엿볼 수가 있다. 희망의 새 천년기를 향한 교회는 여성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활짝 열어 주어야 한다. 교회의 일꾼으로 많은 여성을 확보하여 비중 있는 자리도 감당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개발시켜 주어야 한다. 우리 교회는 여성들에게 결정권이 있는 자리도 주어야 한다. 교구에는 여성 분과가 설립되어 새 천년기에 여성의 복지를 위한 연구가 교구적인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각 본당 내에서도 여성 복지를 연구하는 기구가 설치되어야 하고, 여성 기금을 확보해 놓고 실질적이며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계속적인 연구와 지원이 있어야겠다. 한편, 밖으로 흩어져 있던 많은 여성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와 단체에 속한 것이 자랑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 

 

교구와 본당 내에 여성 기금이 책정되어 여성 복지 조건이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 안에 여성이 70%라면 교회의 운영비도 여성이 70%를 봉헌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톡히 우리 여성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함부로 할 수 있는 여성들도 아니며, 돈벌이하는 수단도 아니고, 국수 장사나 파출부도 아니다. 다만, 교회가 여성의 전문적인 힘을 필요로 할 때 주방이든 어디든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다 보니 여성 단체는 늘 그 곳이 맞는 자리로 인식되었는데, 성모님을 닮은 능력 있고 소중한 인격체로 인정되어야 한다. 여성들의 교회 밖의 활동도 존중하여 교구, 지구, 기타 교육에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주어야 한다. 또한 여성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나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교회는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영성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4. 본당의 여성들,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훌륭하고 거룩한 방법으로 세상에 오실 수 있었는 데도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여성의 몸을 빌려 구원자로 오신 것은(마태 1,18.25; 루가 2,7) 상대적으로 여인의 위치를 상승시키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망설임 없이 대답한 어머니의 용기에서(루가 1,28) 세상에 구원 사업이 이루어진 것같이 여성 스스로 자신감을 가지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성 스스로 자기가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면 사회나 교회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후한 점수를 주며 우리 여성들이 귀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자기 장점과 뛰어난 소질을 찾아내서 계발하고 부당한 일(대우)에 대해서는 주저 없이 정당성을 주장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에 바른 판단력과 통찰력이 있어 세상도 올바르게 직시하고 바른 진단을 해내야 한다. 성모님을 닮은 겸손한 행동으로 교회 안의 모든 일을 사랑의 마음으로 실천해야 한다. 지나친 겸손은 비겁해 보이고 주관이 없어 보이므로 조심해야 하고, 주관이 없는 것과 착한 것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여성들이 오늘을 개선하고 진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순교 성인들과 성모님의 공통점은 주저함 없이 뜻을 따르는 대담함이다.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께서는 무모하리만큼 예수님의 말씀과는 다른 행동을 하셨다. 그러나 성모님의 마음에는 아드님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원을 들어주시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우리 여성들도 대담함과 확실한 믿음으로 교회의 활동에 참여하고, 신뢰받을 수 있도록 주어진 일에 충실히 자기 책임을 다해야 한다. 여성 단체에 대한 확고한 의식이 있어야 하며 깊은 애정을 느껴야 하고 늘 공부하여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상대방의 역할에 대해 인정하는 풍토를 만들어 나가야 하고 상대방에 대해 선입견은 갖지 말아야 한다. 

 

노력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100배의 지혜를 주실 것임을 믿고 의탁하며 슬기롭게 봉사해야 한다. 올바른 봉사는 하느님 나라의 기초가 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일에는 진실한 사랑을 담아서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성은 앞으로 모든 면에서 희망이 될 것이다. 여성 자신이 교회나 사회, 가정에서의 주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겠다. 따뜻한 마음에서 한없는 사랑과 희망이 늘 솟아나서 교회 구석구석에, 사회 저변에, 가정 공동체에 희망의 모체가 되어야겠다. 

 

교회 밖에 흩어져 있는 많은 여성들이 아버지의 집인 교회로 돌아와 그리스도의 사랑의 향기를 풍기며 교회가 풍성해지도록 노력해야겠다.

 

 

5. 맺는 말

 

“너 어디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현재의 내 위치를 묻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분께서 만족할 만한 위치에 있는가?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든지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하느님의 뜻은 반드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에게 끝없이 내려진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힘있는 교회 활동은 건강한 가정에서 시작된다. 지금처럼 국가 전체가 어려울수록 한 가정이라도 무너지는 가정이 생기지 않도록 기지를 발휘해 지혜롭게 극복해야겠다. 여성은 어려울 때 더욱 슬기로운 지혜와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인정하며 용기 있게 도전할 때 축복 받은 내일이 보장될 것임을 거듭거듭 강조하는 바이다. 

 

[사목, 1999년 9월호, 정순자(수원교구 가톨릭 여성 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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