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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진정한 자유: 악에서 해방되어 타인을 위하는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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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482

진정한 자유 - 악에서 해방되어 타인을 위하는 자유

 

 

1. 21세기를 맞이하여

 

21세기를 여성의 시대라고 말한다. 지난 20세기를 돌아보면 1, 2차 세계대전을 치루고 냉전과 대립으로 치달은 불행한 시간들이 떠오른다. 그래서 21세기는 화해와 평화의 세기가 되어야 한다는 소망들이 생겨났다. 20세기가 냉전과 대립,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을 이원화하는 사회였다면, 21세기는 화해와 상생의 시대이며 여성적, 모성적 감성과 도덕적 가치가 존중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작년 9월 11일 미국에 가해진 테러 참사와 그에 따른 미국의 보복 공격으로 21세기가 시작되는 첫 해부터 전 세계에 이미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폭력과 전쟁의 역사 속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과 어린이들이다. 수많은 전쟁들은 타당한 동기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엄청난 파괴와 수많은 불행을 낳는다. 지난 수천 년간 남성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 온 역사가 얼마나 많은 폭력과 전쟁을 양산해 왔는가 생각해 보면, 평화를 만들기 위해 여성들이 이제 적극적으로 역사에 동참해야 한다는 말이 설득력을 지닌다 할 수 있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넘어가던 18-19세기에 큰 사회 변동이 있었다. 산업의 발달로 말미암아 신분제가 폐지되고 시민 사회로 변화되었다. 여성의 자유와 해방은 이즈음 서구에서 탄생된 페미니즘 사상을 근간으로 한다. 이 때부터 ‘페미니즘’(feminism)이라는 상징적 용어와 더불어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된 이차적 존재가 아니라, 주체성을 지닌 독립된 시민으로서 정립된다. 1830년대를 기점으로 하는 제1차 여성 운동에서는 권리(right)와 평등(equality)이라는 개념이 주로 등장하면서 교육의 균등한 기회와 정치적 참여의 보장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이후 서구의 제2차 여성 운동에 오면, 페미니즘은 주로 ‘억압’(oppression)과 ‘해방’(liberation)이라는 용어와 연결되어 사용된다.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의 문제만을 다루는 이론이 아니라, 사회의 약자와 억압받는 자, 어린이와 노인에 대한 관심, 자연 환경에 대한 생태학적 노력 등, 다양한 차원에서의 억압과 종속의 구조를 이론적으로 비판하고 분석한다. 따라서 오늘날 페미니즘은 단순히 남녀 평등 사상이나 여권을 신장하기 위한 운동으로 그 뜻을 국한시킬 수 없고, 억압과 지배 체제에 항거하면서 대안적 사회의 패러다임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보적인 혁신 운동으로 일컬어진다.

 

20세기를 넘기고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우리 사회는 다시 산업 사회에서 지식 정보 사회로 급변하고 있다. 21세기 정보 사회는 남녀의 차이보다는 감성과 이성을 두루 갖춘 새로운 인간상을 요구하고 있다. 여성의 사회 참여도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으며, 남녀의 역할 구분이 무너지고 있다. 이처럼 현대 사회는 급격하게 변화되지만, 우리의 의식 수준은 그 변화에 따르지 못해 많은 갈등을 겪고 있다. 남녀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그 역할도 당연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보수주의 입장과, 남녀의 차별은 사회가 교육시킨 결과이지 결코 천부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라는 자유주의 입장이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여성들 자신도 종래의 현모양처로서의 역할과 새로운 사회 안에서 새롭게 주어진 역할들을 서로 조화시키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변화된 사회는 여성들의 사회 활동을 요청하지만, 결혼한 여성이 사회 생활을 병행하기란 현실적으로 여전히 어렵다. 오늘날 여성의 ‘자유’나 ‘해방’이라는 말은 여성의 사회적 참여와 역할, 지위 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거론되고 있다.

 

 

2. 그리스도교 사상

 

그리스도교 사상은 원천적으로 하느님의 모습대로 남녀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창조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라는 구별은 있으되 차별은 없다. 그리스도교는 여성이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의 모상인,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또한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이 실현되었음을 선포한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갈라 3,28)라고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 차별은 원천적으로 무너져 버린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다인과 이방인의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은 이방 선교를 통해 1세기에 이루어졌지만, 노예 제도는 18세기까지 존속하였고, 남녀의 차별은 교회 안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세례를 통한 남녀 평등 사상은 앞으로 이루어야 할 복음화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그리스도교 사상이 인류 역사 안에서 왜곡되거나 잘못 이해되는 경우도 많았다. 하와 때문에 이 세상에 죄와 죽음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창조와 타락 설화를 근거로 하여 교회 안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정당화되기도 하였다. 여자는 남자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산고의 고통을 겪어야 함(창세 3,16 참조)은 하느님께 불복종한 죄에 내려진 벌이라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교부 신학자들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육체보다는 영혼이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러한 이원론은 남성-`여성의 이원론을 정당화시켰다. 인간 안에 내재하는 신적 로고스는 본질적으로 남성적이며, 여성적인 것은 열등한 육체적 본성과 동일시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여성을 향해 “너는 악의 통로이다. 너로 인해 금지된 나무가 세상에 열려지게 되었다. 그러니 너는 신적인 계율을 최초로 어긴 것이다. 그대 여성은 악이 감히 침범해 들어갈 수 없었던 남성을 꾄 자이다. 너로 인해 하느님의 모상이 그렇게 쉽사리 파괴되었구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스도교 역사가 지닌 여성 억압의 전통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으며, 이에 대한 비판 역시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지난 대희년 3월 2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용서의 날’ 미사에서 가톨릭 교회가 지난 날 저지른 과오에 대해 전세계를 향해 용서를 구한 바 있다. 이날 참회 예식에서 추기경과 대주교들은 “다른 문화와 종교 전통을 업신여겼으며 너무나 자주 여성을 모욕하고 소외시켰다.”라고 고백하였고, 그들이 고백을 마칠 때마다 교황은 참회하는 뜻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상에 입을 맞췄다.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고백하면서도 교회 역사 안에서 여성들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 받아 왔던 것이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의 과오를 범하고 있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서 보지 않고 보조자로만 바라보는 경향이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 여전히 남아 있다.

 

현대 여성 운동에 자극 받은 교회 여성들은 그동안 남성의 눈으로만 해석된 신학을 여성의 눈으로, 그리고 여성의 경험에 바탕하여 재해석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따른 실천적 삶을 새롭게 추구한다. “여성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라는 자각과 더불어 한 인간으로서의 온전성을 되찾고 역사와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실천하는 삶을 지향하고 있다.

 

 

3. 부활을 경험한 최초의 여성 막달라 마리아(마르 16,1-8; 마태 28,1-8; 루가 24,1-12; 요한 20,1-13)

 

부활 사건을 보도하는 네 복음서에는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으로 막달라 여자 마리아를 말하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인데, 고향이 겐네사렛 호숫가의 상업 도시인 막달라였기에 막달라 마리아라고 불리었다. 우리는 흔히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다음 향유를 발랐다는 죄녀와 동일시하거나(루가 7,36-50), 아니면 창녀였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예수님만을 사랑했던 여인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성서 어디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일곱 악령에게 시달리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치유되었다고 전해 준다. 일곱 악령이 들렸기 때문에 창녀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추측이라고 할 수 있다. 악령을 현대적 의미에서 풀이하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악한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불행한 삶을 살았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 온전히 치유되었다고 하겠다. 그 후 막달라 마리아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시작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악령에 갇혀 지냈던 과거 생활로부터 벗어나 예수님을 통해 이미 하느님 나라 안에서 살기 시작한 모습을 보여 준다. 그녀는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섬기는 삶을 살았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곁에서 지켜보았다. 사실 따름의 행위는 자신의 전 실존을 걸고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자 제자들은 달아났고(마르 14,50 참조),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지만(마르 14,66-72 참조),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사건을 현장에서 지켜보았으며 무덤에 시체가 안장되는 것도 바라보았다(마르 15,47). 그리고 향료와 향유를 준비해 가지고 있다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주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나섰다. 예수님의 수난에 가장 깊이 동참했던 사람일수록 부활의 기쁨은 아마 그만큼 더 컸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요한은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돌아서서 ‘라뽀니!’하고 불렀다”(요한 20,16 참조). 부활은 눈으로 확인되는 사건이 아니라, 서로를 찾고 부르는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성의 자유에 대해 두 가지 관점을 포착할 수 있다. 첫째 관점은 일곱 악령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이며, 둘째 관점은 자유롭게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이다. 다시 말해, ‘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타인을 위한 자유’가 그것이다. 흔히 여성의 자유 또는 해방을 이야기할 때 그 동안 받아온 억압과 소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서는 대단히 짤막하게 일곱 악령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이야기한다. 일곱 악령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그동안 자신을 억압하고 괴롭혔던 악의 실체들로부터 벗어났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성들은 어떤 악의 세력들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는가? 그 악으로부터의 자유가 먼저 거론되어야 하겠다. 그런 다음 일생 예수님을 따르면서 섬김을 실천하였던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 여성들은 어떻게 자유롭게 신앙의 결단과 행위를 할 수 있을지 살펴볼 수 있겠다.

 

 

4. ‘악으로부터의 자유’

 

인간 기본권에 대한 차별 대우는 그것이 사회적 차별이든지 문화적 차별이든지 또는 성별, 인종, 피부색, 지위, 언어, 종교 등에 기인한 차별이든지 모두 다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극복되어야 하고 제거되어야 한다. 세계 곳곳에서는 여성의 권리 증진을 위한 노력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여성들이 처한 빈곤과 폭력의 문제에 대해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함께 대처하고 있으며 “여성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라는 의식이 크게 확산되고 있다.

 

1986년 도쿄에서 열린 제4차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FABC) 정기 총회에서 아시아 주교들은 “세계 인구의 절반이 여성임을 인식하고 그들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며, 여성들이 세계와 교회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정당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복음적 요구이다.”라고 천명한 바 있다. 그리고 그 후속 작업으로 1993년, 말레이시아 페탈링 자야에서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 평신도위원회와 사회위원회, 여성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여성들과 아시아의 고통 받는 여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남녀들이 참석하여 여성에 관한 회의를 개최하였다. 참석자들은 아시아 여성들의 현실과 체험을 나누었으며 남녀간의 차별 현상이 다양한 영역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확인하였다.

 

1) 가정에서:장시간 가사 일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여성들은 전문 직업인으로 성장하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집안일과 자녀 돌보기를 분담하려고 들지 않기 때문에 직장 여성들은 이중의 짐을 지게 된다.

 

2) 경제 활동에서:대부분의 여성들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도 차별을 받거나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일하고 있다.

 

3) 정치에서:여성들이 정치 제도권에 진입하긴 했어도 그 정치적 영향력은 아직 미미한 상태이다. 법 체계에서도 여성을 보호하기보다는 차별하는 경우가 많다.

 

4) 문화와 종교에서:여성의 종속적인 위치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마리아를 온유하고 겸손한 어머니요 동정녀로 강조하는 반면, 제자로서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은 상대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대부분의 본당 사목 평의회들은 남성이 주도하며 여성들은 교회 정책 결정에서 극히 작은 역할을 할 뿐이다.

 

5) 매스미디어에서:광고계는 육체와 성을 상품 판매와 관광 증진에 이용하고 있다.

 

6) 여성에 대한 폭력:여성들은 구타나 강간, 성적인 학대, 매춘에 희생되기 쉬우며 어린 소녀들조차 예외가 아니다.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에서 여성들이 겪는 현실은 서로 비슷한 듯하다. 주변을 돌아보면, 많은 여성들이 결혼과 더불어 가사 노동과 육아를 떠맡음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가 하면, ‘여자라는 이유’로 직장 내에서 승진의 기회를 박탈당하거나 심지어 성희롱에 시달리기도 한다. 「2000년 세계 여성 발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여권 지수는 세계 78위이고 여성 의석 점유율은 3.7%로서 아시아에서도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성폭력과 가정 폭력도 위험 수위에 달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남성과 여성은 서로 같은 본성과 같은 원천을 가졌으며, 그리스도께 구원되어 같은 목적으로 함께 불리움을 받았다(사목헌장, 29항 참조). 여성들은 스스로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님으로써 이 세상의 악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겠다. 그리스도교는 ‘고통으로부터 탈출하거나 해탈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또는 해방’이라는 표현이 구원에 대한 더 적절한 표현이다.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악과 고통으로부터 지배받던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유를 얻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부활 신앙을 통해 여성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악의 세력에 종속되지 않고 하느님의 선하심에 바탕을 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치유된 이후 막달라 마리아는 삶의 태도가 완전히 변한다. 스스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를 실천하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타인을 위해 어떤 자유를 실천할 수 있을까?

 

 

5. ‘타인을 위한 자유’

 

9·11 사태에 직면하여 미국 정부가 테러를 뿌리뽑겠다면서 전쟁을 선포했을 때, 국회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사람은 바바라 리라는 여성 의원 한 사람뿐이었다. 그 여성은 전쟁이 불의와 폭력을 종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과 어린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과거의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특이한 현상은 오늘날 전세계 여성들이 연대하여 미국의 전쟁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바라 리가 던진 이 한 표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세계를 향해 평화를 갈구하는 여성들의 염원이 담긴 것이다.

 

지난 2000년 여름 일본 히로시마에서는 “아시아 여성 종교인 모임”(AMOR)이 열렸다. 그때 그 자리에서 한국 수녀들이 베트남 수녀들에게 용서를 청한 바 있다. 과거 베트남전쟁에서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 양민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던 일에 대해 한국 수녀들이 깊이 사죄의 뜻을 표하면서 용서를 청하였다. 그러자 베트남 수녀들의 반응은 참으로 의외였다. “과거 잘못은 이미 흘러간 일들이다. 이제 와서 용서하고 화해를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오히려 현재 저질러지는 잘못들을 막아 주길 바란다. 베트남에 들어온 한국 기업인들이 베트남 사람들을 마구 부려먹고 떠날 때 현지처와 자녀들을 버리고 간다. 가톨릭 교회가 나서서 한국 기업인들에게 인권에 대한 교육을 시켜서 보냈으면 좋겠다.”

 

폭력적인 세상 한가운데에서 여성들은 오늘날 화해를 이야기한다. 화해는 피해자가 가해자와 새롭고 올바른 관계를 창조해 내는 영성이다. 피해자가 폭력의 두려움과 희생의 아픔 속에 머물러 있는 한 진정한 화해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피해자에게 새로운 전망이 열려야 한다. 불의와 폭력으로 희생되었다는 피해 의식을 넘어서서 다시는 그러한 불의와 폭력이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부터 화해의 전망이 열린다. 그동안 역사의 피해자로 살아왔던 여성들이 마침내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고 더 이상의 억압과 불행과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를 향한 외침이라 하겠다. 진정한 화해는 피해자가 자신에게 가해진 죄악으로부터 자유로와진 다음에 말할 수 있다. 이는 증오와 적개심, 폭력과 이에 대한 대항 폭력의 고리를 끊는 새로운 관계 안에서 가능하다.

 

지난 수천 년간 인류 역사는 가부장제 문화로 이루어져 왔다. 오늘날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기로 전환하면서 가부장제 문화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21세기는 수직적 가부장적 위계 질서가 해체되고 수평적 그물망 조직으로 새롭게 재편되어야 하고, 억압과 폭력과 불의가 종식되고 정의와 평화의 시대가 와야 한다고 사람들은 소망하고 있다. 1963년, 교황 요한 23세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존엄성을 날이 갈수록 더욱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다. 그들은 도구로서 취급받거나 무시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한 인간으로서 가정 생활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생활에서 대접받기를 요구하고 있다”(「지상의 평화」, 41항).

 

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여성의 존엄」이라는 회칙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 특히 “사목헌장”(8. 9. 60항 참조)과 “평신도 교령”(9항 참조)에 선포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여성들의 소명이 완전히 인정되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고 또 실제로 도래하였다. 이제 여성들은 세상에서 자신들이 여태까지 획득한 적이 없었던 지대한 세력과 영향력과 능력을 행사하고 있다. 따라서 인류가 매우 심각한 변화를 겪고 있는 이 시기에 복음의 정신으로 무장된 여성들이 인간성의 상실을 막는 데에 대단한 공헌을 할 수 있다고 본다”(「여성의 존엄」, 1항).

 

현대 세계 안에서 복음화의 과제가 여성의 역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류란 남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온전성을 보여 줄 때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참다운 종교적 진리는 남성과 여성이 온전한 인간으로서 구원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그리스도교가 전수하는 부활 신앙이란 악과 억압, 불행과 폭력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하느님의 선하심에 바탕을 둔 새로운 질서를 세우라는 요청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시선을 돌릴 줄 아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거듭나길 일깨우고 있다.

 

[사목, 2002년 4월호, 강영옥(서울대교구 2000년 복음화사무국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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